|
|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
* 어린 시절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한양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 야동(冶洞))에서 박사유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에 조부가 사망했다.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갔다.[5] * 젊은 시절 22세 때부터 원각사 근처에 살 때 박제가·이서구·서상수·유득공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었다. 홍대용과도 사귀면서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으며(30세 때[3]), 북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다. 29세 때 과거에 낙방한 이후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박지원은 청년 시절에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란 이름으로 편찬했다. 1777년(정조 1년) 권신(權臣) 홍국영에게 벽파(辟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김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 청나라 방문과 열하일기 저술 1780년(정조 4) 44세 때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북경을 갔다. 이때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5]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의 실학 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도덕)보다 말단(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 관직 활동 1786년 50세 때 음보로 처음 출사하여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監役)에 제수되고, 1789년 사복시 주부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 판관을 거쳤다. 이후 안의(安義) 현감 · 면천(沔川) 군수(1797년) · 양양(襄陽) 부사(1800년) 등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하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하였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 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배청의식 속에서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정조 15년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직접 응하지는 않았다.[5]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책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으며, 1801년 치사(致仕)하고 물러났다. * 죽음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 사후 영향 그의 묘는 장단군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우의정을 지냈던 그의 손자 박규수는 그의 실학 사상을 계수하여 개화 사상을 열어준 인물로 비중이 크다.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은 1900년에 비로소 초록 형태로 처음 서울에서 공간될 만큼 간행이 늦었다. 1910년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의 시호를 받았다.[6] * 평가 홍대용·박제가(朴劑家)와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써 독특한 해학(諧謔)으로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 문학 세계 “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暉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 可也, 復謂之赤烏, 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날개보다 더 검은색이 없긴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이 돌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햇볕이 비추면 자주색으로 솟구치다, 눈이 어른어른하면 비취색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리는 것이다. 어찌 그 눈에서만 판정할 따름이랴? 보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에서 미리 판정해 버린다. ” 박지원의 문학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그만의 독특한 글투를 지향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연암체’라고 불렀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일러 ‘조선풍(朝鮮風)’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래’란 뜻이다.
그는 자신의 실학 사상을 소설을 통해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자신이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 양반들이 실속 없이 허울 좋은 이름만 내세우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10편의 한문 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이들을 풍자하였다. 〈양반전〉은 조선 왕조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士) 계급의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위의식을 배격하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광문자전(廣文者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등은 양반 계층과 도학자의 도덕적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여 사회 개혁 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로운 성정(性情)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체를 수립함으로써 이덕무, 박제가 등의 한학신파의 4가를 낳게 했으며 문학을 통해 양반계급의 해체를 통찰하고 이를 비판, 새로운 현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문학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수립했다. 청나라 문학인들과 사귀며 정치·음악·천문·경의(經義) 등에도 관심을 갖고 연경에 갔다온 기행을 쓴 《열하일기》의 대문장 26권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가 한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그는 <양반전>을 통해 몰락해 가는 조선 사회를 풍자했으며, <호질>에서 유학자의 전형적인 위선을, <민옹전>에서 몰락해가는 무인들의 울분을 반영하여 당시 사회의 이면사(裏面史)가 되어준다. <허생전>에서는 전시대의 허균이 쓴 《홍길동전》과 함께 현실과 유토피아 세계를 교착시키며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은 근대적 비판의식의 소산으로, 여러 가지 인간 유형을 통해 리얼리즘의 전통을 이룩하였고,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써 양반계급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등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 위키백과에서 옮김 --------------------------------------- 작품 감상
1. 열하일기[ 熱河日記 ] 1. 정의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중국 열하견문기. 2. 서지사항 26권 10책. 필사본.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있다.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국판 286면 활자본으로,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6책 활자본으로, 1948년 김성칠(金聖七) 국역본이 정음사(正音社)에서 각각 나왔으며, 56년 타이완[臺灣]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사본(寫本)을 영인(影印) 출판하였다. 1983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된 ≪국역 열하일기≫가 있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3. 저작배경 1780년(정조 4) 삼종형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청(淸)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다녀오는 도중에 그 곳의 문인·명사들과 교유하며 중국의 문물제도를 목격하고 견문한 바를 각 분야별로 나누어 기록한 연행일기(燕行日記)이다. 4. 내용 1780년 6월 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요동(遼東)·성경(盛京)·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고, 열하로 가서, 8월 20일 다시 베이징에 돌아오기까지 약 2개월 동안 겪은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항목별로 적었다. 각 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강록(渡江錄)>은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 등 중국인의 이용후생적인 건설에 대하여 서술하였고, <성경잡지(盛京雜識)>는 5일간의 일을 필담(筆譚)을 중심으로, <일신수필>은 9일간의 일을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엮고 있다. 권4 <관내정사(關內程史)>에는 백이(伯夷)·숙제(叔齊) 이야기와 <호질(虎叱)> 등이 수록되어 있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은 열하에 대한 5일간의 기록이며,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은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당시 중국 학자들과 토론한 지동설(地動說) 등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구외이문(口外異聞)>은 구베이커우[古北口] 밖의 60여종의 기문이담(奇聞異談)을 적은 것이며,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은 교통제도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금료소초>는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이며, <옥갑야화(玉匣夜話)>는 역관들이 신용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허생(許生)의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뒷날 이 이야기가 바로 ≪허생전≫이다. <황도기략(黃圖紀略)>은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에 관한 기록이며, <알성퇴술(謁聖退述)>과 <앙엽기>는 견문과 명소(名所)를 두루 구경한 기행이며, <경개록(傾蓋錄)>은 태학(太學)에서 6일간 머물며, 그곳 학자들과 응수한 기록이다. <황교문답(黃敎問答)>은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 놓은 기록이며, <행재잡록(行在雜錄)>은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 대한 견문록으로, 특히 청나라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연유를 밝혔다. <반선시말(班禪始末)>은 청 황제의 반선(班禪)에 대한 정책을, <희본명목(戱本名目)>은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찰십륜포(札什倫布)>는 열하에서 본 반선을 기록한 것이다. <망양록(忘羊錄)>은 중국 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견해를, <심세편(審勢編)>은 당시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한 기록이다. <곡정필담(鵠汀筆譚)>은 천문학에 대한 논술이며, <동란섭필(銅蘭涉筆)>은 가악에 대하여 쓴 것이다. <산장잡기(山莊雜記)>는 열하 산장에서의 여러 가지 견문기이고, <환희기(幻戱記)>는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한 소감을 적은 이야기이다. <피서록(避暑錄)>은 열하의 피서 산장에서 지낸 기록으로 주로 시문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5. 평가 연암의 대표작인 이 문헌은 발표 당시 보수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신문물(新文物)을 망라한 서술과 실학사상의 소개에 중점을 두어 수많은 연행록(燕行錄)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손꼽힌다. 또한 이 책은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와 함께,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다"고 평한 것과 같이 주로 북학을 주장하는 내용이 잘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을 강조하였다. 연암의 독특한 문체가 당시 순정문체(醇正文體)를 지향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정책에 의해 탄압을 받았으나 후대에 내려올수록 연암의 문장은 찬사를 받는 등 많은 지식인들에게 회자되었다. 특히 <관내정사(關內程史)>에 수록된 <호질>과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수록된 <허생전>은 연암소설 뿐만 아니라 한국 소설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 연암 박지원은 원래 일자무식이었으나 16세에 장가간 이후 처삼촌의 도움으로 처음 학문을 시작하여 삼 년 후에는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희대의 천재입니다. 이 양반 글의 특징은 그 당시의 학자와 문인들이 죽어라고 떠받들던 고문(古文:중국 한문 고전)을 헌신짝 버리듯 하고서, 참다운 문학의 길은 이미 한물 가버린 옛글과 경험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충실하는 데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한데서 나타납니다. 당연히 엄숙 제일주의 학자ㆍ문인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의 임금인 정조까지도 괘씸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연암의 재주를 평소 사랑하던 차였기에 제대로 된 글을 한 편 지어 올리면 용서해 주겠노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지어 올린 글이 또한 천하 명문이어서 보는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소설적 특징은 풍자적·사실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는데 그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오정 같은 위정자, 학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연암은 그들을 혼낼 수 있는 방법으로 풍자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연암의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풍자의 똥침을 맞고 우스운 꼴을 보여주게 됩니다. 또한, 그는 서민들의 삶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현재의 비평 수준으로 보더라도 뛰어난 여러 편의 소설을 완성시켰습니다.
연암 소설 일람
연암 박지원의 문학사상 연암의 문학에 대한 생각은 작가란 자기가 속한 시대와 풍속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그려내는 것이 작가의 임무이지 당대 현실과는 동떨어진 때의 문장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훌륭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작가가 살아가고 있는 당대의 현실을 그 당대의 언어로 진실되게 표현하는 것으로 연암의 이와 같은 주장은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당대에 유행했고, 또 문학하는 사람은 그 유행을 으레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古文에 대한 비판이다. 연암이 살았던 18세기에는 한·당의 문체를 모방하고 그것과 비슷하게 되려는 풍조가 휩쓸고 있었다.
그래서 평가하는 기준은 이른바 古文이었고 이 고문을 따르지 않는 문장은 배척되기 일쑤였다. 연암이 비판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이와 같은 당시 유행하던 의고문체(擬古文體)의 비판과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로 특징 지워진 연암체(燕巖體)는 그러므로 표리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당대 현실 자체에서 참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살고 있는 세상의 사물에 나아가면 그 속에 참다운 의취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의 참이란 사물의 본질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는 것인데, 오히려 고인의 문체에 접근하고자 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비슷하기나 할 뿐, 정작 표현해야 할 참(眞)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참이란 것도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환경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하는 것인 만큼 특정 시대의 참됨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시대의 구체적인 사물에 직접 나아가서 거기서 포착된 참은 또한 그 시대의 언어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그 시대의 언어가 아니고 고문을 모방하려 하면 그것은 같아지려 하는 것이지 참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공통된 사상인 실용주의는 그의 세계관 및 휴머니즘과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문학상의 태도로는 역사적인 현장성을 존중하고 제재나 표현에 있어서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만 골라 숭엄하고 전아하게 나타내는 가식적 방법으로 현실의 진상을 호도해 버리는 데에 혐오와 저주를 보내면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표현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고문장이나 고문학을 고수하는 진부한 문장을 반대하며 비판하고, 그 시대 그 사회에 맞는 사실적이고 개성 있는 독창적인 문장을 주장했다. 연암이 고문을 비판하는 것은 고문이라는 전통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비판한 것이지 고문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님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이는 법고창신(法古創新)과 통한다.
연암의 문학은 한문학이었다. 국문문학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한문학에만 힘쓰면서, 글자는 전에 쓰던 것과 같을 수밖에 없지만 글은 독특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새로운 창작의 방법을 철저하게 추구했다. 그렇게 하자니 언어 표현의 가능성을 깊이 게 따져야만 했다. '천하의 연고와 만물의 정에 두루 통달한 것이 언어'라고 하는 기본 전제를 마련하고 , '언어는 분별하고자 하면 형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으로 방법을 삼았다. 언어가 진실과 합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한 점에서는 유가의 오랜 언어관을 따랐다 하겠으나, 진실은 표현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지 않고 분별하고 형용해야 비로소 구체화된다고 한 것은 새로운 착상이다. 분별과 형용이 장식의 수단이 아니고 탐구의 방법이라 해서 문학관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룩했다. 그리고, '천지는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된다.'는 진보적인 관점에서 전에 없던 탐구를 하고자 해서 참신한 문체를 마련했다.
연암은 옛사람의 글을 흉내낸다든가, 고법에 구애된다든가 해서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당대의 진실을 문제삼으려면 상스러운 말도 버릴 수 없다고 했다. <영처고서(瓔處稿序)>에서 방언을 문자로 옮기고, 민요를 운율에 맞추기만 하면 자연히 문장이 이루어진다 하고, 답습을 일삼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무엇이든지 표현하자면서 복고적 사고방식과 결별하자는 주장을 명확하게 나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