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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제9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안녕하십니까? 5월 24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법화경 255쪽 법화경 28품 중에서 제9품의 수학무학인기품 이라고 하는 장을 공부할 시간 입니다. 사람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사실은 가만히 연구해 보면은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그 하나의 목적 하에 움직인다 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 나가는 학생이 결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 나가는 것이 훨씬 행복 하지요. 결석하면 불안하고 여러 가지로 그럴 것입니다. 만약에 결석 할 조건이 있어서 결석하게 한다면 아마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겪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또 반대로 결석하는 것이 오히려 덜 불행하다고 할까요? 덜 불행 하다는 것을 바꾸어서 말하자면 그것이 결석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이렇게도 해석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자기 나름대로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보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법회에 왜 나오지 않았느냐?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요. 법회에 나오지 왜 나오지 않았느냐 라고 하면 바빠서 못나왔다. 법회라고 하는 것이 어디 다른 일 아무일 없을 때 그렇게 심심할 때 심심풀이로 나오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무심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무슨 우선순위 최하위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표현을 할 때가 아주 많거든요. 사실 저는 그런 소리 들으면 섭섭해요.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하고 또 몇 날 며칠을 기다리고 또 그 법회 시간을 위해서 생각을 아주 여러 번 하고 준비를 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생활하는 우선순위 최하위에다 두고 다른 것 다 선택하고 남은 것을 우리가 법회시간에 할애 한다면 그래요.
어쨌거나 그것도 하나의 사례로서 이야기 한 것이고 사실은 우리 인간은 모두가 행복을 위해서 그 나름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움직입니다. 불교도 따지고 보면 거기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 속에 다 포함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누가 더 지혜로우냐 누가 더 어리석느냐 이런 차이만 남아 있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하는 그 일을 사실은 어떻게 하든지 중생들을 행복하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의 이쯤에서 인간의 행복의 문제와 연관시켜서 다시 또 말씀 드리면 역시 앞서 여러 번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만은, 결국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가치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소중함을 제대로 우리가 파악하고 이해하고 보면은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아닐 이유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역력히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된다면 서로가 부처님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서로가 부처님으로 받들어 존경 한다면은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사 생활에 불편한 점과 부족한 점 이런 것들이 많이 있다손 치더라도, 정말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존경한다면 정말 그 이상 더 행복한 일은 없으리라고 하는 그런 소신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법화경의 흐름이 늘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라. 행복은 바로 거기에 있다. 행복의 문제의 답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는데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여기 보면은 수학무학인기 품에서 수(授)자는 “수기하다. 준다.” 라는 뜻입니다. 학(學) 무학(無學)은 공부하는 사람이나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나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無學은 공부를 다한 사람 이렇게도 해석합니다. 공부를 다해서 하지 않거나 하기 싫어서 하지 않거나 공부를 몰라서 하지 않거나 다 무학에 해당됩니다.
우리나라 조선 초에 무학대사가 있었습니다 만은 불교에서 學 無學 이렇게 하면은 學은 한참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리고 無學은 공부를 다한 사람의 뜻으로 해석 합니다. 다한 사람이든 하지 않는 사람이든 간에 모두가 수기를 준다. 이런 뜻인데, 기록(記錄), 말하자면 부처님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내 식으로 해석을 하면은 뭐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공부하든 사람이든 안 하든 사람이든 간에 모든 사람이 다 그대로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 뜻에서 도저히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어요. 다른 해석이라고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완전무결한 그런 표현이지요. 저 앞에서 오백 제자 수기품에서도 보면 오백명의 아라한이 똑 같은 이름으로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 이런 말이 있었는데, 여기도 과목을 살펴보면은 “아난과 라후라의 소원” 그 다음에 “아난은 산해혜(山海慧) 여래가 되리라.” 이렇게 구체적인 이름으로 수기를 주는 것이고요. 그 다음에는 “라후라는 도칠보화(蹈七寶華) 여래가 되리라.” 라고 이것도 이제 특별하게 아난과 라후라는 그렇게 구체적인 이름을 밝혀서 수기를 줍니다.
그런데 그 밑에 보면은 “이 천명의 아라한은 보상(寶相) 여래가 되리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은 앞에서는 오백 명이 똑 같은 이름으로 부처가 되리라. 고 했고 여기서는 얼마나 비약했습니까? 이천 명이라는 사람을 똑같이 수기를 주면서 이름도 같이 보상여래가 되리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여기서 제목부터 공부한 사람이든 하지 않은 사람이든 또 다한 사람이든 아예 하지 않은 사람이든 간에 관계없이 모두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보증한다. 이 말입니다. 불교를 비방하는 사람도 불교에 귀의해서 불교 속에 사는 사람도 똑같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보증한다. 이 말입니다. 불교를 비방하는 사람마저 부처님이라고 한다면은 더 이상 말할게 없지요.
그런 것들도 법화경에서 뒤에 넘어가면은 제바달다품이라고 하는 품이 있는데 결국은 제바달다가 어떻습니까? 미리 말씀을 좀 드리면은 불교인들 중에서 제일 원수 시 하는 사람을 우리가 제바달다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처 佛자를 한자 종이에 써놓고 그 종이를 휴지통에 함부로 못 버립니다. 그것을 불에 태우든지 어떻게 해야지 또 땅에다가 부처 佛자를 이렇게 손가락으로 써놓고는 손으로 곱게 지웁니다. 발로는 못 지워요. 부처佛자 하면 거기에는 권위와 존경과 찬탄과 경의가 저절로 우러나게 되는 것이 부처님인데, 우리가 그렇게 위하는 부처님을 제바달다는 죽이려고 했었지 않습니까?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불자로서는 정말 제바달다 는 모두 미워해야 되고 모두 원수 시 해야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인데 그런데 법화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제바달다 그도 부처님이다.” 또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나의 스승이다. 나는 제바달다를 통해서 내가 오늘날 이렇게 성불 했노라.”고 이렇게 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생각할 점도 많고 이야기할 거리도 많은 내용인데 그것은 왜 그렇게 밖에 이야기 할 수 없는가. 또 사실이 그렇고 그 다음에 또 한가지는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에, 정말 진정 행복의 바른 길은 모든 사람을 원수가 되었든 부모 죽인 원수가 되었든 친한 사람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간에 모두가 부처님인 까닭에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것이 답이다. 이거죠. 그래서 수학무학인기품도 좀 부연해서 설명하면 그렇게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수기 하는 내용들을 쭉 보아 왔듯이 똑 같습니다. 그런 형식으로 그대로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이니까 함께 우리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난과 라후라의 소원(所願)
1.이때에 아난과 라후라의 소원이라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아난은 잘 아시는 대로 다문 제일 아난존자 그러지요. 그러니까 기억력이 녹음기 이상으로 그렇게 모든 상황들을 기억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녹음기는 그대로 소리만 녹음을 하지요. 또 우리가 카메라로 영상을 찍는다손 치더라도 그 카메라가 비치는 방향만 찍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난존자의 기억력은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 모든 상황들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모든 시방에서 벌어지는 상황들과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더 말 할 나위도 없고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거기에 온 사람 일일이 다 기억하고 또 거기에서 벌어지는 상황들과 주고 받는 대화 이런 것들까지 다 기억하는 그런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문 제일 아란존자 그러지요.
그 다음에 라후라는 아시는 대로 부처님 아들이지요. 세존이 출가하기 전에 부왕이 아들 하나만 대를 잇게 만들어 놓고 가거라. 이렇게 해 가지고 하는 수 없이 부왕의 말을 들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래서 라후라는 번역하면 ‘장애’라고 이렇게 표현한답니다. 자식이 사실은 장애이지요. 남편이 장애고 아내가 장애고 참 좋을 때는 그럴 수 없이 좋은 자식이지만은 결국 또 어떤 경우에 장애의 역할을 합니다.
옛날에 무슨 영화인가요? 자기 아들을 혹이라고 이렇게 표현한 그런 영화가 있었지요. 아주 감동적인 그 모습인데 그렇습니다. 라후라는 부처님이 출가하는데 있어서는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한 4~5년만 더 아니면 5~6년은 더 빨리 출가하셨을 것이고 그랬으면 불교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주인공이 라후라입니다.
그래서 라후라는 부처님 아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나설 수 없지요.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지요. 그런데 함부로 행동하면 어떻게 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부처님 아들이니까 어린 라후라 라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출가한 승려니까 승려로서의 법도를 당연히 지켜야 되고요. 이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라후라의 특징이 무엇이지요? ‘밀행제일 라후라’지요. 밀행이란 것은 남몰래 행동한다. 이런 표현입니다. 내가 부처님 아들이 되더라도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동하고 선행을 해도 보이지 않게 하고 선행을 하든 거친 행동을 하든 간에 일단 눈에 띄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도 틀림없이 그렇게 당부 했을 것입니다. 몰래 행동을 참 잘했다고 해서 그래서 ‘밀행제일주의 라후라’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들이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도 가령 수기(授記)를 받는다면 유쾌하지 않겠는가.’하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나아가 머리를 숙여 발 밑에 예배하고 함께 부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이 일에 또한 그 몫이 있을까 합니다.
“이 일”이란 부처님이 된다는 수기! 또 그 보증, 거기에 “우리도 충분히 몫이 있을까 합니다.” 몫이 있고 말고 지요. 아난존자의 공덕이 얼마나 큽니까? 그리고 라후라가 누구입니까? 그러니까 충분히 수기 받는데 한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표현이지요.
오직 여래만이 저희들이 귀의(歸依)할 곳입니다. 또 저희들은 모든 세간의 천신사람 아수라들이 선지식으로 보고 있습니다.
선지식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난은 항상 시자(侍者)가 되어 법장(法藏)을 수호하여 지니었고
시자가 되었으니까 한시도 부처님 곁을 떠나지 않았지요. 아난존자가 부처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모든 대화와 법문을 전부 기억하고 나중에 그것이 기록으로 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런 큰 공덕이 있는 분이고 라후라는 부처님의 아들입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수기를 주신다면 저희들의 소원이 원만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소망도 또한 만족할 것입니다.
이것은 수기 받은 사람들이 앞서 이런저런 사람들이 다 받았고 또 오백 명이나 함께 받았으니까 그런데 아난존자와 라후라는 왜 수기를 주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겠지요.
여러 사람들의 소망도 또한 만족할 것입니다.
참 경전을 쓰시면서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참 그 당시 상황과 당사자들의 그 어떤 마음을 배려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들의 소원이 원만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소망도 또한 만족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러니까 아난존자의 입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다 읽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나친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가끔 화엄경이나 법화경 같은 뛰어난 경전들을 부처님보다도 더 위대한 부처님이 편찬을 했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글쎄요? 어떻게 해석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참 그런 마음이 들어요.
그 당시 석가세존 당시는 이렇게 논리적이고 조직적인 그런 경전이 필요치 않던 시대였습니다. 특히 화엄경 같은 그런 큰 화려하고 장황한 그런 경전을 설할 겨를도 없고, 또 그렇게 체계적으로 저술을 남길 그럴 개제가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상당한 세월이 5~6백 년쯤 뒤에 불교가 참 많이 발달하고 그 외에 사회 학문도 상당히 발달하면서 같이 그렇게 부처님의 사상을 멋진 그릇에다가 떡 담아서 우리에게까지 전하게 된 것 입니다.
2.그 때 배우는 이와 다 배운 이들인 성문제자 이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드러내어 진실을 표하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일심으로 합장하였습니다. 세존(世尊)을 우러러 보면서 자신들도 아난과 라후라의 소원과 같다고 하고 한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제 이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분위기를 보아 하니까 아난존자와 라후라가 수기를 받을 것 같다. 그렇다면은 우리도 뭐 그들에게 밑질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도 같이 받자. 이렇게 마음을 먹게 된 것이지요. 사찰에서 오계를 받는 일이라든지 십계를 받는 일이라든지 아니면 보살계를 받는 일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이 많이 행해지는데 계율 하면 너무 엄청난 것으로 생각을 하고 겁부터 내지요.
또 혹시 받아놓고 못 지키면 어쩌나 싶어 가지고 도저히 나는 못 받겠다. 이렇게 하는 사람을 여럿이 보았습니다. 불교에 십 년 이상 다닌 사람들도 계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요. 참 잘못 생각하는 것이 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도 계를 파한 일이 없습니다. 계를 파한 일이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 예요. 생활은 똑 같이 하는데 ‘아, 나는 계를 받았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계와 어긋나는 일을 했을 때 그때는 계를 파계하는 것입니다. 파계한 사실이 있다는 게 대단하다고 옛날 조사님들은 참 높이 칭찬했습니다.
“파계한 것도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계를 받아서 파계거리가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랬습니다. 참 의미심장한 말씀이지요. 그래서 그런 어떤 분위기가 되면은 이천 명처럼 우르르 좇아가서 겁낼 것 없이 그렇게 용기를 내서 받아야 됩니다.
불명도 그렇게 받는 기회가 있으면 받아야 되고요. 옛날부터 있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용기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을 얻는다.” 라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딱 드는데 이거 뭐 도대체가 고백하려고 하니 용기가 있어야지, 그래 용기가 없어서 이리저리 미루다 보면 다른 대로 가버리는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든다 싶을 때 용기를 딱 내면은 소득이 큽니다.
특히 불법에 있어서 처음에 다른 사람들이 절을 할 때 용기가 나지 않아서 못하지요. 하고는 싶은데 용기를 내어 가지고 실수하면 어떻습니까? 아무 상관 없거든요. 법당에 들어가서 아주 씩씩하게 그렇게 부처님 앞에 예를 탁 하고 그 다음부터는 수계라든지 수기라든지 이런 일들을 남들이 하면은 용기를 내서 얼른 따라서 하는 것이 참 바람직하다. 싶습니다.
여기 이천 명이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난존자 하고 라후라의 뒤를 따라서 우리도 같이 받자. 우리가 겁낼 것이 있느냐? 우리가 저 사람 만 못할게 뭐 있느냐? 시원한 용기를 내어서 보이고 있습니다.
2. 아난도 산해혜(山海慧) 여래가 되리라.
(1) 장항(長行)
장항인데 길게 표현 하는 것, 사회적인 표현으로는 산문 이런 뜻입니다. 장항, 게송은 산문과 시로 이렇게 대비가 될 수 있겠지요.
3 이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오는 세상에 마땅히 성불하여 이름을 산해혜자재통왕(山海慧自在通王)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이라 하리라. 마땅히 육십이 억 부처님께 공양하고 법장(法藏)을 수호하여 지닌 후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는 이십 천만 억 항하사 보살들을 교화하여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게 하리라.”
부처님께 공양하고 법장을 수호하여
이런 표현이 바로 아난존자의 특징인 다문 제일, 그러니까 부처님의 법의 창고를 잘 수호 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을 다 듣고 그야말로 녹음기처럼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다 기억하고 법의 창고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있다가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들려 드리고 또 기록으로 남기게 되니까 그러니까 아난존자의 기억의 창고에 의해서 모든 경전이 이렇게 성립되었다. 이렇게 보니까 그래서 “법장(法藏)”, 법의 창고를 수호하여 이런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나라의 이름은 상립승번(常立勝幡)이니 그 국토가 청정하여 유리로 땅이 되어 있으리라. 겁의 이름은 묘음변만(妙音변滿)이요. 그 부처님의 수명은 한량없는 천만 억 아승지겁 이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천만 억 무량 아승지겁 동안 산수로 계산하여도 다 알지 못할 것이니라.
이만치 오래오래 산다. 그랬습니다. 여기는 숨은 뜻이 있습니다. 뭔가 보여 주려고 하는 내용이 있어요. 이 얼마나 오랜 세월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석가모니부처님만 영원한 생명이 아니고 우리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 불생불멸의 존재다. 라고 하는 것을 언뜻 흘리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사실은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의 존재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형태가 변해서 그렇지 한 깊이를 들여다 보면은 정말 없어지지 않는 영원히 존재하는 그런 생명이다. 하는 그런 뜻인데, 이것을 저 뒤편에 가면은 여래수량품 거기에서 여래 수명의 양이 얼마나 되느냐? 그 이야기를 거기서 본격적으로 하는데, 미리 놀래지 말라고 슬쩍 암시를 주고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천만 억 무량아승지겁 동안 산수로 계산 하여도 다 알지 못할 것이니라.
하루만 계산 해도 얼마나 많은 세월을 계산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천만 억 무량아승지겁 동안 산수로 계산 하여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은 이것은 영원입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영원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정법(正法)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은 수명의 곱절이요, 상법(像法)은 정법의 곱절이 되느니라. 아난아, 이 산해혜자재통왕불은 시방의 한량없는 천만 억 항하사 부처님 여래들이 함께 찬탄하며 공덕을 칭찬하느니라.
부처님의 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졌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법을 공부할 수 있고 사람과 모든 존재의 실다운 모습을 그나마 들어서 이론적으로 라도 이해할 수가 있고, 또 그 이해 한대로 살려고 하다 보니까 그래도 참 좀 더 인간답게 또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수 있는 거죠. 이런 것들이 아난존자의 공덕이 아주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하는 거죠.
(2) 게송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대중들에게 말하노라. 법장(法藏)을 수호하는 아난이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고 그런 뒤에 바른 깨달음을 이루리라. 그 이름은 산해혜자재통왕불이며 그 국토는 청정하며 이름이 상립승번이리라. 교화한 보살의 수효는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고 부처님의 크신 위덕(威德)과 명성이 시방에 떨치리라.
수명은 한량이 없으며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정법이 머무는 것은 수명의 곱절이 되고 상법은 또 정법의 곱절이 되리라. 항하강의 모래와 같이 무수한 중생들이 이 부처님 법 가운데서 불도의 인연을 심으리라.
시 형식으로 아주 아름답게 정리해서 다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수기 하는 말씀의 형식은 앞서 여러분에게 있었던 그 형식대로 지요. 아난존자니까 아난 존자의 어떤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 다를 뿐입니다.
(3) 팔천(八千) 보살들이 의심하다.
이 때에 법회 중에 있던 새로 발심(發心)한 팔천 보살들이 다같이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신발(新發)이 보살님이라고 해서 새로 발심한, 절에 처음 들어 왔다든지 또 어떤 분야에 처음으로 왔을 때 불교식으로 표현할 때 “신발이 보살이다. 저기 저 사람은 새 보살이다.” 그런 표현들을 하지요.
우리들은 대보살들도 이러한 수기를 받는다는 것을 오히려 듣지 못하였는데,
왜냐하면 새로 발심한 보살들이니까,
무슨 인연으로 모든 성문들이 이렇게 훌륭한 수기를 받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보살은 형식은 없다고 방편이라고 법화경에 는 이야기 하지만은 또 편의상 성문. 연각. 보살. 불 이런 것을 차별해서 이야기 하지요.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성문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다. 또 공부를 훨씬 더 많이 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6.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보살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선남자들이여, 내가 아난과 함께 공왕불(空王佛)이 계신 데서 동시에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었느니라.”
아난존자와의 인연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제 선(禪)과 교(敎)의 우월을 이런 데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이것은 꼭 있었던 일이 라기 보다 하나의 방편으로 하신 말씀으로 봐도 좋겠습니다. 공왕불(空王佛) 이라고 하는 빌 공(空)자. 왕이라는 왕(王)자. 이름부터 좀 의미가 심상치 않지요. 공왕불이 계시는 데서 동시에 발심을 했다. 이것입니다..
아난은 항상 듣기를 좋아하였고 나는 항상 부지런히 정진(精進) 하였느니라.
그래서 부지런히 정진한 사람은 빨리 성불했고 듣기를 좋아한 사람은 듣는 능력(기억력)이 아주 뛰어나가지고 부처님 설법을 그대로 다 편찬할 수 있었다. 하는 것으로 귀결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미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었고, 아난은 나의 법장을 수호해 지니느라.
이 말은 그러니까 부처님의 법문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나중에 다 편찬해서 우리에게 남겨줬다. 이런 뜻이지요.
장차 오는 세상의 여러 부처님의 법장도 수호 하면서 많은 보살들을 성취케 하리라.
그러면 뭡니까? 아난존자는 맨날 부처님 법장만 수호해 가지고서 이 경전을 결집해서 우리들에게 남기는 일을 한다. 이런 말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이나 앞으로 수많은 세월 이후 미래나 알고 보면 지금 그대로 부처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그대로 부처고 그때도 부처고 아난존자가 없었다면 과거에도 그대로 부처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의 본래의 서원이 그러하므로 이러한 수기를 받게 되었느니라.
그런 삶이 예요. 아난존자는 그렇게 사는 것이고 그런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렇게 정진을 해서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것이고, 사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셨다. 해도 이 불교 역사상으로 보면 아난 존자가 없었다면은 석가모니가 그때 그런 위대한 인물이었는지 없었는지 전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모든 경전을 아난존자가 결집한 것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뒤에 경전이 써진 것도 석가모니가 설한 것으로 되고 아난 존자가 결집 한 것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경전이 그 형식과 원칙에서 벗어나 있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그것을 뒤에 남긴 사람의 공덕이 아니면은 그 좋은 말씀을 하신 것이 헛수고지요. 그 당시에는 이익이 됐을지 모르지만 최소한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사 백 년을 사시면서 백 년간 설법을 하셨다. 하더라도 삼천 년이란 또는 이천 육 칠백 년 세월 이 동안은 그러면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렇게 볼 수 있지요. 아난존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전해지고 또 진리의 말씀을 알게 되고 또 깨닫게 되고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아난존자의 삶이 예요. 그 삶 그대로 부처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똑같이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4) 아난이 찬탄하다.
7 아난이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수기와 그 국토의 장엄함을 친히 들었습니다. 소원도 만족하고 마음이 환희 하여 미증유함을 얻었습니다. 즉시에 과거 세상의 한량없는 천만 억 부처님의 법장을 기억하여 보니 다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것이 지금 듣는 듯하였습니다. 또 본래의 서원도 알았습니다.
지금 듣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녹음기를 그대로 다시 돌려서 들어보는 그런 일과 똑 같더라. 그런 표현이지요. 지금 만약에 법화경을 편찬 했다면 지금 여러 가지 발달된 녹음 가자재를 활용하는 그런 이야기들도 많이 등장할 것입니다. 지금쯤 누가 뛰어난 안목을 가진 분이 경전을 하나 편찬을 하면은 그것도 상당히 의미가 있을 줄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그전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때 생각이었습니다. 한 30년 전쯤이나 될까요? 내가 만약에 능력이 있다면은 이 시대에 한번 멋진 경전을 편찬해 보고 싶고, 그 다음에 또 한가지는 성경을 내가 한번 해석해 보고 싶다. 하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성경을 하나하나 다 해설해서는 멋진 해설서를 남겨보고 싶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한 30년 전에 상당히 여러 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다 잊어버린 생각이긴 합니다마는 그것도 능력이 된다면 해볼만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아난이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 세존께서는 매우 희유 하시어 저로 하여금 지난 세상의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을 오늘 들은 것처럼 생각케 하십니다.”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을 오늘 들은 것처럼 생각케 하십니다.
오늘 들었던들 우리가 다 잘 기억 합니까? 아난존자는 녹음기처럼 그렇게 빠짐없이 다 기억해 내었다. 하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제 의심 없이 부처님의 도에 머물렀습니다만 방편으로 부처님의 시자(侍者)가 되어 여러 부처님의 법을 수호합니다.
방편으로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여러 부처님의 법을 수호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각자가 다 맡은 그 역을 멋지게 표현하는 거죠. 그러니까 전부 사람들은 남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자기만의 그런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아무리 많은 사람이 등장한 연극이라 하더라도 다 각자 맡은 그런 역이 있듯이 그 역을 한껏 혼신의 마음을 불어 넣어서 표현하면은 아주 멋진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난존자는 자기가 머리가 총명해서 잘 기억하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멀리까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그런 역할을 맡았는데 한껏 잘했지요. 참 멋지게 했습니다.
우리들도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고 한바탕 인생의 연극 무대 위에서 자기 역할을 한껏 멋 떨어지게 그렇게 표현하고 간다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요 인생은 한바탕의 연극이고 이 세상은 무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입장에 있든지 간에 각자 맡은 배역이 있습니다. 그 배역을 멋지게 소화해 내고 그랬을 때 관객들도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 아닌가? 불교다 뭐다 해서 우리가 크게 불교라고 하는 것 속에 종교라고 하는 것 속에 너무 빠져 가지고 보다 인생을 널리 좀 더 폭 넓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불교가 오히려 장애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아울러 해봅니다.
방편으로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여러 부처님의 법을 수호합니다.
모두들 방편으로 각자 자기 맡은 역할을 마음껏 소화해 내고 그래서 관객으로부터 박수를 받는 그런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것이 서두에 말씀 드렸던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거기에서 말하자면 잘 맞아 떨어지는 일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법화경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진여헤님! 녹음 들으며 세밀히 읽습니다. 저도 경문을 써넣어야 할까요? 행을 이렇게 길게 써서 게시판에 올리면 토막 되어서 줄바꿈이 되는건 어찌해야 하나요? 저~기 마지막 단락 '여기 이천 명이......아난존자 하' 까지가 1행이잖아요? 저의경운 '여기 이천 명이....아난' 여기서 줄바꿈이 되어 나오더라구요.
날마다님! 진여혜님!아라빈님! 미륵골님! 가르쳐 주세요. 어떻게 해야 한 행이 온전히 나오는지를요.
인터넷창을 최대화 했을때와...작게 했을때...그리고 각자의 모니터 사이즈에 따라서도 달라지지요...제 창에는 아난존자하고 라후라의/ 여기까지가 한행입니다....꼭 행이 바뀌어야 하는 부분에서 엔터키를 사용하시고 나며지는 보여지는 창마다 다르기 때문에 신경 안쓰셔도 될 것으로 압니다.....합장.....
예~! 날마다님!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좋은밤 되십시요. 아참! 잠시만이라도 달 감상 해보세요. 전, 요즘 매일밤 달과 함께 밤을 지냅니다.
"파계한 것도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계를 받아서 파계거리가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 계를 받지않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도 계를 파한 일이 없다. 계를 파한 일이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스님! 감사드립니다._()()()_
훌륭하십니다.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진여혜님 고맙습니다...나날이 행복하셔서 부처님되세요...()()()
고맙습니다..다시 공부하니 너무 좋습니다..._()_
“ 그의 본래의 서원이 그러하므로 이러한 수기를 받게 되었느니라.” ...아난 존자의 삶 그대로 부처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똑같이 이렇게 해석이 된다...스님! 감사드립니다..._()()()_
'방편으로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여러 부처님의 법을 수호합니다'..._()()()_ 진여혜님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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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위에 맡은 배역은 제대로 소화해 내는 부처님의 시자가 되겠습니다. _()()()_
“아난은 항상 듣기를 좋아하였고 나는 항상 부지런히 정진(精進) 히였느니라.” 그래서 부지런히 정진한 사람은 빨리 성불했고...좋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_()()()_
"그 부처님의 수명은 한량없는 천만 억 아승지겁 이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천만 억 무량 아승지겁 동안 산수로 계산하여도 다 알지 못할 것이니라." ... 이것은 석가모니부처님만 영원한 생명이 아니고 우리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 불생불멸의 존재다 라고 하는 것을 언뜻 흘리고 지나갑니다. 사실은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의 존재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_()()()_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라. 행복은 바로 거기에 있다. 행복의 문제의 답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는데 있다.”...감사합니다..._()()()_
수명은 한량이 없으며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정법이 머무는 것은 수명의 곱절이 되고 상법은 또 정법의 곱절이 되리라. 항하강의 모래와 같이 무수한 중생들이 이 부처님 법 가운데서 불도의 인연을 심으리라..._()()()_
"저는 이제 의심 없이 부처님의 도에 머물렀습니다만, 방편으로 부처님의 侍者가 되어 여러 부처님의 법을 수호합니다"... 아난존자는 자기가 머리가 총명해서 잘 기억하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멀리까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그런 역할을 맡아서 한껏 잘했듯이, 우리들도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한껏 멋 떨어지게 그렇게 표현하고 간다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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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께서는 매우 희유 하시어 저로 하여금 지난 세상의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을 오늘 들은 것처럼 생각케 하십니다......._()()()_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_()()()_
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
"방편으로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여러 부처님의 법을 수호합니다." = 아난
아난은 듣기를 좋아하였고, 나는 항상 정진하였느니라. 그래서 나는 이미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었고 아난은 나의 법장을 수호해 지니는니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授學無學人記品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안하고 있느 사람이거나 다 한 사람이거나,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가 그대로 부처다
아난 부처님 -산해혜-의 수명은 천 만억 아승지겁이며 어떤 사람이 천 만억 무량 아승지겁동안 산수로 계산하여도 못한다--여래 수량품에서 여래 수명의 무한함을 설할 것을 예고함
석가모니불이나 아난 존자나 空王佛계신데서 같이 발심했지만 석가모니불은 항상 정진하셨고 아난 존자는 듣기를 좋아하였다
2000명 수기--寶相 如來
--아난,라후라와 함께 받음
-모두들 방편으로 각자 인생이란 연극 무대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해내어 관객으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는 그런 삶이...........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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