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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왜구의 침입로는 크게 3방향으로 침입해왔다. 그 하나는 울산의 방어진에 상륙하여 모화 입실을 거쳐 들어오는 코스로서 이들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바로 관문성(關門城)이다.
두 번째 코스는 감포의 대왕암을 통해서 들러와 추령고개를 넘는 코스로 이른바 동해구(東海口) 코스인 셈이다. 이를 방어하기 위한 시설은 명활산성(明活山城)이다. 마지막으로 영일만(迎日灣)을 통하는 코스로서 삼국사기에 의하면 영일만을 당시에는 북해구(北海口)라고 불렀다. 왜구들은 북해구에 배를 정박시켜두고 동해구로 들어와 약탈행위를 한 후 북해구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북해구의 왜구들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바로 북형산성(北兄山城)이다.
북형산성에서는 영일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옥련사라는 절이 있고 거기에는 경순왕의 영정도 있다. 오늘날의 형산강이라는 이름도 서형산이라 불리는 선도산에서 북형산을 거쳐 동해로 흐르는 강이란 뜻에서 형산강이라고 한다.
<운제산>
형산강을 끼고 영일만을 감싸안은 포항시의 남쪽에 자리잡은 운제산(雲梯山)은 신라 제2대 남해왕의 부인인 운제부인(雲梯婦人)의 이름에서 따온 산명이다. 『삼국유사』의 남해왕조에 의하면 "남해왕(南解王)의 비(妃)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인데 혹은 운제(雲梯)라고도 한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 성모(雲梯山 聖母)가 있는데 가뭄에 빌면 감응이 있다" 고 나와 있다.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인 초기 신라시대에는 운제산 성모와 왕비가 일치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을 신격화(神格化)하여 모화의 치술신모, 선도산의 선도성모 등의 여성과 관련된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어쨌든 운제산은 일찍부터 중요한 자리를 점유하고 있었다.
<운제산 대왕바위>
운제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오어사(吾魚寺)는 범패와 관련이 있는 절이다. 고기 어(魚)자가 들어가는 절로는 금정산 범어사, 그리고 삼국유사 어산불영조에 나오는 만어사 등이 있는데 이때의 어(魚)는 범패(梵唄)와 관련이 있다. 범패의 운율이 물고기가 오르내리며 헤엄칠 때의 운율과 같게 한다는 범패와 관련된 절 이름이다.
범패란 재(齋)를 올릴 때 쓰는 의식음악을 가리키는 말인데 흔히 말하는 염불은 재를 올리는 스님이 요령을 흔들며 축원문을 낭송하는 "안채비소리"를 말하며 이 또한 범패의 한 형식이다. 글을 가락에 얹어 읽어 나가는 소리인 염불 외에도 범패에는 홋소리나 짓소리, 화청(和請)과 같은 단성선율(單聲旋律)의 완연한 노래가 있는데, 이들을 들으면 심산유곡에서 들려오는 범종 소리처럼 의젓하고 그윽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곡, 판소리와 더불어 범패를 3대 성악의 하나로 꼽고 있다.
하동 쌍계사의 팔영루는 진감선사가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민족에 맞는 범패를 만들어, 많은 범패 명인들을 배출한 교육장이었다고 한다. 진감국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써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불교 노래인 어산(魚山) 범패를 작곡했다고 하여 팔영루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오어사 일주문>
석가모니는 생전에 노래부르기를 허용하셨다. 노래는 기억을 맑게 해준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신도들은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중국 조위 때의 진사왕이 어산(魚山)에서 범천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후로부터 범패를 잘하는 사람을 어장(魚長)이라고 한다. 하동 쌍계사의 팔영루는 진감국사가 범패를 가르치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인물을 중심으로 신라불교를 나누면 중국유학파와 국내잔류파로 나누어지는데 중국유학파는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육성되고 있으나 국내잔류파는 개인의 의지에 의해서 학문과 원력을 쌓아갔다.
오어사 전경
그런데 원효, 대안, 혜숙, 혜공등 국내파들의 학문의 경지가 해외파들 보다 한 수위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원효대사가 공부를 하다 막힘이 있을 때 오어사의 혜공스님께 찾아와 배우곤 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보인다. 조선후기의 사적기에는 오어사와 관련하여 의상, 자장, 원효, 혜공스님의 기록이 보이지만 당시에는 사격을 높이기 위하여 유명스님의 명성을 차용한 경우가 허다하여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오어사에는 일연스님도 1년 정도 머물다 현풍 인흥사로 떠난 일이 있다.
오어사 대웅전
중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 품팔이 노파의 아들로서 아명은 우조(憂助)였다. 천진공은 일찍이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매 문병하는 이들이 골목에 꽉 들어찼다. 이때 우조는 나이가 일곱 살이었는데 그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집안에 무슨 일로 손님이 이다지 많다지요?" 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주인 어른이 나쁜 병에 걸려 돌아가시려 하는데 너는 어째서 모르느냐"고 하였더니 우조가 하는 말이 "제가 낫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 어머니가 그의 말을 이상하게 여겨 공에게 고하였더니 공이 불러오라고 시켜 침상 앞에 와서 앉았으나 아무 말이 없었는데 잠시 후에 종기가 터졌다. 공은 이것을 우연으로 생각할 뿐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장성하매 공의 매 기르는 일을 맡아서 매우 공의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 공의 아우로서 벼슬을 얻어 외지로 가는 자가 있어서 공에게 좋은 매를 뽑아 얻어서 임지로 갔다. 하루 저녁은 공이 갑자기 그 매 생각이 나서 이튿날 아침에 우조를 시켜 매를 찾아오려고 하였더니 우조가 이것을 먼저 알고 잠깐 사이에 매를 찾아서 날 밝을녘에 가져다 바쳤다.
<삼성각>
공이 크게 놀라 깨쳐 그제야 예전에 종기를 치료한 일이 모두 풀기 어려운 일임을 알고 말하기를, "제가 대단한 성인이 우리 집에 의탁하신 것을 모르고 종작없는 말과 무례한 짓으로 욕되게 하였으니 이 죄를 어떻게 씻겠사오리까. 지금부터 원컨데 지도하는 스승이 되시어 저를 인도해주소서"라고 하면서 드디어 내려와 절을 하였다.
신령스러운 이적이 이미 나타났으므로 우조는 드디어 출가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혜공으로 고치고 어느 작은 절에 살았다. 그는 매양 미치광이 행세를 하고 술이 억병 취하여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호를 부궤화상(負 和尙)이라고 하고, 살던 절을 부개사(夫蓋寺)라고 하였으니 "궤"의 우리말이 "부개"이다.
<응진전>
또 매양 절 우물 속에 들어가면 몇 달씩 나오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법사의 이름으로써 우물 이름을 지었다. 우물에서 나올 때마다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먼저 솟아 나왔으므로 절의 중들이 이것을 보고 기다렸더니 막상 나오고 보매 옷이 물에 젖지 않았다.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항사는 갠지즈강의 모래알을 의미하는데, 갠지즈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세속을 등지고 출가했다고 해서 이곳을 항사동이라고 불렀다)로 옮겨 살았는데 이때에 원효가 여러 불경들의 주해를 지으면서 매양 법사에게 와서 의심나는 것도 묻고 가끔 농담도 하였다. 하루는 두 분이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똥을 누었는데 혜공이 이것을 가리키면서 장난말로, "네똥은 내 고기로구나!"라고 하였으므로 절 이름을 오어사(吾魚寺)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효대사의 말이라고 하는데 이는 종작없는 말이다. 세간에서는 이 시내를 잘못 불러 모의천(芼矣川)이라고 한다.
오어지
구참공이 언젠가 산에서 놀 때에 혜공이 산길 가운데 죽어 넘어져 있는데 그 시체가 부어 터져 구더기가 나므로 함참 동안 슬퍼하다가 말고삐를 돌려 성으로 들어갔을 때 혜공이 술이 몹시 취하여 거리 복판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또 어느 날 새끼줄을 가지고 영묘사에 들어가 금당과 좌우의 불경을 둔 다락과 남문 행랑채를 둘러치고 주지에게 말하기를, "이 새끼줄은 꼭 사흘 뒤에 걷어라" 하였더니 주지가 이상히 여기면서 그대로 하였다. 과연 사흘만에 선덕여왕이 절로 거동하여 오니 지귀심화(志鬼心火)가 나와 그 탑을 태웠으나 다만 새끼줄로 매었던 곳은 타지 않았다.
또 신인종(神印宗)의 조사 명랑(明朗)이 새로 금강사(金剛寺)를 세우고 낙성회를 베푸는데 이렇다는 중(龍象)들이 다 모였으되 혜공스님만은 가지 않았다. 명랑이 향불을 피우고 경건하게 기도하니 조금 후에 공이 왔는 바 때마침 큰비가 내렸으나 의복이 젖지 않았고 발에 진흙도 묻지 않았다. 그는 명랑에게 말하기를, "친절하게도 불러주었기에 여기 왔노라" 하였다. 이처럼 신령스러운 이적이 퍽 많았는데, 그가 죽을 때에는 공중에 떠서 세상을 마쳤으며 사리가 얼마나 되는지 셀 수 없었다. 그는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에 내가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중 조(肇)의 후신임을 알겠다.
<삼국유사 이혜동진(二惠同塵)조>
<원효대사 삿갓>
삼국유사에는 신라인들의 화장실문화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두군데 등장한다. 하나는 바로 원효대사가 오어사에서 바위 위에 똥을 눈 기록이며 다른 하나는 지증왕이 왕후를 얻는 기록이다.
왕(지증왕)은 생식기의 길이가 1척5촌이나 되매 좋은 배필을 얻을 수 없어 사람을 세 방면으로 보내어 배필을 구하였다. 사명을 맡은 자가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나무 아래까지 와서 보내 개 두 마리가 북만한 큰 똥덩어리 한 개를 물었는데 두 끝을 서로 다투어가면서 깨물고 있었다.
동리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웬 계집아이 하나가 나와서 말하기를, "이 마을 제상댁 따님이 여기에 와서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들어가 숨어서 눈 똥이외다"라고 하였다.
그의 집을 찾아가 알아보니 여자의 키가 7척 5촌이나 되었다. 이 사실을 자세히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수레를 보내어 궁중으로 맞아들여 왕후로 봉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치하하였다.
<삼국유사 지철로왕(智哲老王)조>
이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화장실이 따로 없었고 거름 밭에다 바로 용변을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발굴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에서도 화장실 공간이 발굴된 적은 없다. 다만 불국사에서 화장실 유구로 보이는 석재가 발견되었지만 어느 장소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현재 경주박물관에는 변기로 보이는 호자가 보관되어 있지만 그것이 비록 변기라 하더라도 궁중에서나 쓰던 물건일 것이다.
<혜공진영>
<원효진영>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화장실이 없으며 용기에다 변을 보아 창밖에 던졌다고 한다. 또 서양의 여성들이 입는 큰 치마는 어디서든지 쉽게 용변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하이힐은 옷을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찰 화장실에는 간막이는 있으나 문이 없는 경우가 많으며, 인도에서는 용변후 왼손으로, 사우디에서는 돌을 갖고 다니면서 닦고 다시 새 돌을 주워서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지금 오어사에는 원효대사가 사용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삿갓과 수저 가 보관되어 있으나 조선시대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삿갓은 마치 실오라기 같은 풀뿌리를 소재로 하여 짠 보기 드문 것이다. 뒷부분은 거의 삭아 버렸지만 겹겹이 붙인 한지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1995년 발련된 오어사 동종
동종의 명문
동종의 비천상
동종의 용뉴
1995년에는 오어지(吾魚池)를 준설하던 중에 1216년 고려 고종3년에 제작된 고려범종이 발견되었다. 범종은 신라범종의 양식을 계승하였는데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대구의 팔공산 동화사에서 제작하여 오어사로 옮겼다고 한다. 그 외에도 나무로 만든 목비(木碑)가 두기 있는데 불계비문(佛 碑文)과 운제산단월발원비문(雲梯山檀越發願碑文)이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어사에 현존하는 건물들은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대웅전은 영조 17년(1741)에 중건한 건물인데 국화와 모란을 장식한 정면의 꽃창살이 아름다운데 한번쯤 눈 여겨 볼만하다.
대웅전의 모란 꽃창살
대웅전의 국화꽃 창살
첫댓글 오어사 언제 갈 기회가 있겠지요. 아직 포항은 한번도 가 본적이 없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