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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풍차돌리는' 남자들 |
홈주루 불러들이느냐 세우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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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는 3루 코치는 류중일 삼성 코치와 최태원 SK 코치다. 각각 경험과 스타일이 다른 두 사람이지만 상대적으로 그늘에 가려져 있던 3루 코치의 역할을 팬들의 관심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데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영광은 옛일이다.
▶돌려? 말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2-2로 팽팽한 8회말 1사 2루. 타석에는 박한이가 서 있다. 가만, 2루 주자는 팀에서 가장 느린 진갑용이다. 상황이 안 좋구만. 이때 박한이가 중견수 앞 안타를 쳤다. 류 코치는 찰나의 순간 갑자기 늙을 만큼 고민에 빠진다. 진갑용의 스타트는 빨랐다. 돌렸다가 홈에서 횡사하면 어쩌지? 이 순간, 상대팀 KIA의 어깨 강한 중견수 이종범이 타구를 한 번 더듬는다. 류 코치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찬~스! 류 코치의 팔이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빙글빙글 돈다. 진갑용이 홈까지 돌진한다. 다이렉트 송구가 날아왔지만 세이프. 류 코치는 뒤돌아서서 박수를 한 차례 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모든 시선은 진갑용과 박한이에게만 쏠린다. 류 코치의 한숨을 눈치 챈 관중은 없다.
잘하면 본전, 실수하면 역적이 되는 역할이다. 류 코치는 "가끔씩 정말 왜 이 짓을 하고 있어야 하나 생각이 들다가도 짜릿한 승부 타이밍 때 얻는 쾌감 덕분에 산다"며 웃는다.
▶10번째 선수
류 코치는 "3루 코치는 경기 중 지켜보는 일밖에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대신 선수와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공격 때 거의 모든 사인이 3루 코치를 거쳐 전달된다. 그러니 실수도 많다. 평소 3~5가지 사인 체계를 준비해 두고 끊임없이 연습한다. 자연스러움이 생명이다. 류 코치는 "우리 공격 때 상대팀 벤치의 수많은 눈이 나를 뜯어먹을 것처럼 쳐다보게 마련이다. 어색한 동작을 하면 바로 간파당한다"고 말했다.
류 코치는 돌리느냐, 마느냐를 판단할 때 살 확률이 50대50이면 세운다. 대표적으로 '싫어하는' 외야수는 LG 이병규, KIA 이종범.
▶역시 공이 사람 보다 빠르더라
주자를 돌렸다가 홈에서 죽을 때 기분은 어떨까. 류 코치는 "일단 덥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잠시 구부정하게 있으면서 양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지탱한다"고 말했다. 잠시 후에 슬그머니 고개 들고 다음 플레이를 준비한다. 물론 덕아웃 쪽은 쳐다보기도 싫은 순간이다. 번트 사인 났는데 타자가 알아듣지 못하고 홈런을 쳤다. 류 코치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그 타자는 역적"이라고 단언했다. 진짜 중요한 순간에도 실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류 코치는 "초보 시절에는 모든 타이밍을 내가 잘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사람보다 볼이 빠르더라"고 말했다. "SK 최태원 3루 코치와는 경기 전에 가끔 만나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태원이가 '코치님 죽겠습니다'라고 자주 말한다. 아직 몇 년 안 됐으니까 힘든 게 당연하다." 동병상련이다. |
최 코치가 은퇴 후 SK의 작전 및 주루코치(3루)로 부임한 것은 지난 2005년. 많은 야구인들은 3루 코치라는 자리와 그와의 궁합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나 땡볕 아래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 파이팅과 승리를 위해서는 온몸이 도구가 돼야 한다는 점 등이 '철인' 이미지와 닮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최고가 아닌 최선
지난해가 20점이라면 올해는 40점이라는 게 스스로에 대한 평가. 한 경기씩 경험이 쌓일 때마다 각종 상황과 순간들이 머릿속에 정리되는 것을 느낀다. 경기가 끝난 뒤 숙소로 돌아와 갖는 휴식 시간은 최 코치에겐 또 다른 일과다. 경기 자료로 다시 한번 상황을 읽어 보고, 아니다 싶으면 밤늦게 TV 재방송을 돌려본다.
"기억력이 좋아야 합니다. 머리가 좋아야 하지요." 그는 여기에 X월 X일 있었던 상황까지 기억 속에서 끄집어 잘못된 점을 되짚어 본다. TV중계에 자주 잡히기 때문에 항상 말쑥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애를 쓰고 있다. 아직 '짬밥'이 안 되는 이상 작전 지시 때도 흐느적거리기보다는 절도있는 동작을 하고 있다.
▶웃기는 남자
'철인'에 가려 있지만 본래 그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는 '웃기는 남자'다. 선수들은 8개 구단 코치 중 최 코치가 득점권 주자의 홈베이스 돌진을 위해 팔을 붕붕 휘젓는 '풍차돌리기'가 가장 빠르다며 웃는다. 이에 최 코치는 2년차에 접어들며 "속도 조절 방법을 익혔다"며 대꾸한다.
지난 5일 호세(롯데)-신승현(SK)의 난투극 사건. 성난 황소같이 신승현을 향해 돌진하는 호세를 넘어뜨리는 최 코치의 모습이 인터넷 동영상으로 인기를 끌었다. 거구의 호세를 '허리 감아 돌리기'로 제압한 것에 대해 최 코치는 "아직도 황소 한 마리는 잡을 힘이 남아 있다"며 기세등등이다. 지난달 21일 SK가 마련한 수재민 돕기 야구이벤트에서는 캐릭터 인형 머리를 뒤집어쓰고 나오는 깜짝 쇼를 펼치기도 했다.
▶따뜻한 마음과 차가운 머리
그가 바라는 3루 코치의 바람직한 모습은 "어느 순간에서도 흔들림없이 냉철함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중함과 차분함을 유지하려는 것은 그의 또 다른 모습이다. 때론 실수가 있더라도 "펄펄 살아있는 생동감 있는 경기를 관중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선수들에게 잘못된 점을 말할 때 위축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것은 관중들을 위해서다. 따라서 그가 바라는 선수의 모습도 최후의 땀방울까지 흘리며 열심히 뛰는 선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