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대학무대에서 국제적인 선수로 능력을 인정받자, 그의 시선은 해외를 바라보고 있었다. 82년 세계선수권 우승으로 병역문제도 해결된 터였다. 하지만, 해외로 가려는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그를 어떻게 하면 붙잡아 팀 전력으로 활용할 것인가가 야구계의 뜨거운 화두였다. 이게 결국 1985년 선동열 파동으로 알려진 입단 사건의 발단이 됐다.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가 펴낸 <한국야구사>는 이 문제를 ‘선동열의 양다리 작전’으로 표현하고 있다. 선 감독의 얘기다. “82년 세계선수권 우승 뒤 군 문제가 해결돼 해외로 가려고 했지만, 학교 등의 반대에 부닥쳐 무산됐어요. 결국 졸업 뒤 실업에 가면 5년 종사 뒤 해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한국화장품에 입단해 시범경기까지 뛰었어요. 당시 한국화장품 회장이 대한야구협회의 임광재 회장이었던 점도 작용했죠. 하지만, 해태 팬들의 성화가 심해져 집에서 해태 입단을 독촉하게 됐어요. 결국 한국화장품을 포기하고, 해태로 들어가게 됐어요. 이 일로 전반기를 뛸 수 없는 징계를 받게 됐죠.”
프로야구의 출범으로 인기와 재정에서 타격을 본 대한야구협회가 아마등록선수가 프로선수에 등록할 수 없다고 무효소송을 제기하면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결국 전반기를 근신한 1985년 후반기 대구 삼성과 개막전(7월2일)에 프로 데뷔전을 치르게 된 선동열은 1976년부터 요미우리에서 4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기록했던 ‘거물’ 김일융(일본이름 니우라 히사오)과 맞대결해 7회까지 무실점으로 버티다 8회 집중 5피안타로 0-5로 져 패전투수가 됐다. 선 감독은 “당시 졌던 게 오히려 약이 됐어요. 결과적으로 신인 선수가 7회까지는 잘 던지긴 했는데, 역시 프로의 벽이 높다는 것을 실감했어요”라고 말한다. 그 해 4패를 당한 선동열은 3경기 만에 세이브를 따내는 등 구원승으로만 7승에 8세이브, 평균자책 1.70의 신인성적을 냈다. 하지만 그의 진가가 드러나는 데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다음 시즌인 1986년 8차례 완봉승과 19번의 완투경기를 포함해 개인 역대최다인 24승(구원 7승) 6패 6세이브에 평균자책은 꿈의 ‘0점대’인 0.99를 기록했다. 결국 프로 입문 2년 만에 투수 3관왕(다승•평균자책•승률)에 오르며 시즌 최우수선수가 됐다. 1988년부터 3년 연속 투수 3관왕을 차지했으며, 해태의 한국시리즈 4연패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1995년 해태에서 국내 무대를 은퇴할 때까지 11시즌 동안 0점대 평균자책을 5번이나 이뤄냈고, 통산 평균자책을 1.20으로 마무리했다. 선 감독은 “80년대 중반부터는 힘으로 승부했고, 마무리로 돌아선 93년 전후로 해서는 기교로 던졌다”며 “마운드에서만큼은 내가 최고라는 생각으로 정면 승부를 했고, 역시 자신감을 갖고 던졌을 때 늘 결과가 좋았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