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전설, 부처가 떠 들어온 빈장산 절골
저 거시기 빈제이. 거기 빈제이라고 그러고. 빈제이 모래장술 위에 절골, 절골이 폐가가 돼가지고, 지금 자리는 아직 있어요. 그 절 들어앉았던 자리가 분명하더라고요. 지금도 가보면 거기 그 뒤에 나물, 그 이름이 머위라고 그러는 나물, 그것도 심어서 지금 그냥 다만 울창하게 그냥 자라고, 그 절 지었던 자리가 아주 분명하게. 그랬는데, 그게 어떻게 돼가지고 폐가가 되었는지 내가 그걸 알아야 되는데, 그걸 모르겠드라구요. (조사자 : 그걸 왜 빈제이라고 그러는지 이유가 있을텐데요.) 빈제이, 그게 빈장산 절골, 아직까지도 절골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딸 : 빈대가 많아서 빈제이라며?) 그 절이 빈대 때문에 할 수 없어서 불을 놨는지 어쨌는지 몰라. 그렇게 폐가가 되고, 그래서 아직까지도 절골이라고 그냥 불러와요. 거 그냥 절골이야. (조사자 : 그게 빈장산입니까?) 예. 빈장산 절골. 빈대가 많았드랬다는 말이 그 실말인가 봐요.
그 바로 밑으로 그 골이 이렇게 있거든요. 그 절골이라고, 골이 이렇게. 산, 높은 산인데, 거기서 이렇게 그냥 골이 이렇게 저절로 바닷가까지 골이 졌어요. 근데 그 바닷가에 절이 들어 앉을 적에 그 바다에서 그게 떠들어왔대요, 그 절, 절 부처. 그 절 무엇이 떠들어왔대요. 그래서 이 자리가 명자리인 거다 하고 거기다 모셨드랬대요. 떠들어왔대요. 그 길로 떠들어와서, 그냥 그걸로 올려다 모셨드랬대요. 부처를 모셔다 거기다 절을 지었대요. 그 골이 아직 확실하게 있거든요. (딸 : 거 저기 기와장도 거기서 주어온 거예요.) 그 부처가 들어와 가지고 부처를 여기다 모셔야 되겠다 이래가지고, 그 절을 여기다 지었드랬대요. (조사자 : 지금도 기와장이 나옵니까?) 예, 파면 지금도 기와장도 나오고, 빈대도 나온다는 말이 있어. 저기 뭐야, 아주 현명하게 지금도 절지었던 자리예요. 나물 그런 거 다 심어놓고, 그 살림하던 데더라구요. 거기 그 빈제이, 그 동네가 험지죠. 바로 공동묘 위가 절이야요. 그 동네 위가. (교동면 동산리 머르메마을, 박정옥, 여, 70세)
연산군이 유배온 읍내리
(조사자 : 연산군께서 이곳에 오셨다는데, 그분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까?) 예, 있어요. 매실이라고 저 인화 오두포 가면 옛날에 고저 목선에 풍선으로 다니던 항구가 있어요. 그래서 거기 와서 거기서 거했다는 말도 있고. 그 다음에 교동이 그 읍이었어요. 옛날에 고읍. 고읍이라고, 저 고구리, 읍성도 아직 있습니다. 거기 윤곽이 있어요. 그래 거기가 먼저 읍이었었는데, 나중에 읍내리로 또 읍을 옮겼어요. 그래 읍내리에 나중에 옮긴데, 한 지금으로 치면은 백 세도 넘는 양반이 자기네 집 위에 거기에 연산군이 유배돼서 연산군이 먹던 우물도 있다. 그 우물 아직도 있어요. 현존해 있어요. 그래서 거기다가 인제 거 잠저지라 그래가지고 교동 사람들이 연산군 유배지라고 표석이라도 해놔야 돼지 않느냐. 그래서 중간에 교동에거 몇몇이서 저기 해서 시멘트로 해서 표석으로 하나 했었어요. 그걸해서, 지금 읍내리에 가면 있습니다. (조사자: 여기 와서의 일화 같은건 없고요?) 일화 같은거야 뭐 귀양왔으니까, 뭐 귀양왔으니까 은신하다 저기 했다는 말도 있고, 며칠 그냥 귀양살이하다 다시 저리로 복귀해서 강화 그쪽으로 나갔다는 말도 있고, 그 정도지 뭐, 전설뿐이지 확실한 뭐 책자라든가 무슨 그건 게 없어요.(교동면 동산리 금정동마을, 방형길, 남, 58세)
뱀이 승천한 테두리산
그 전에 여기가 산밑에 테두리산이라고 그 전에 비암이 그 산을 칭칭 감고 있다는 산이라서 테두리산이라고 했거든. 근데 그 아래가 굴이 이렇게 나와, 굴이 하나가 동그랗게 빠졌는데 그 안에서 용이 바다로 내려가서 그래서 용산이라고도 그러고, 테두리산이라고 그러고. 거 뭐 지금 다 메웠어요. 그 전에는 거기가 그냥 오목하게 깊이 파졌드랬는데, 거기서 용이 나와가지고선 바다로 내려가기 때문에 그 짝으로 용산이라고도 하고 테두리산이라고도 하고 그렇게 불러왔죠.(교동면 동산리 구레마을, 방인기, 남, 73세)
혈잘린 고려산 연못
고려산에 연못이 셋이 있는데, 거기 가 봤어.(중국에서 생각하기에 고려사람들이) 정기를 거기서 얻었드라 이거야. 그 연못에서 잉어가 나와서 꼬리를 친다드니마는 그래서 중국사람들이 어떻게 찾아와서는 쇠말뚝을 박아서는 결국은 그걸 그 때 기운을 못쓰게 했지. 연못에다가. (조사자 : 그러고 나선 인물이 안 났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강화읍 갑곶리 먹절마을, 안수근, 남, 88세)
철종의 박달참외와 황후물
그 전에 여기 강화에 동구 밖에만 심는 박달참외라는 게 있어요. 시방 제비모양으로 노란 줄이 열두줄이라고 해 가지고. 그 참외가 여기 철종대왕이 몽진이 아니라 여기선 뭐라고 해야지? 그 오셨다가 거리가 얼마 안되거든요, 여기 내수궁이라는 데가. 거리가 얼마 안 돼. 놀러 나오셨다고, 이 양반이, 여기를. 그 원두막에서 참외껍질 내버린 거 언덕밑에 널부런 하죠. 하도 배고프니까 이 양반이 (손으로 비비면서) 쓱쓱 이렇게 문질러서 잡쉈다는 그런 얘길 들었어요. (옆 노인 : 왕 되기 전에) 그렇죠, 되기 전이죠. 게다가 인제 등극, 이 양반이 등극하시니까 그 동구 밖 박달참외를 참 맛있게 먹었거든, 배고플 때 먹었으니 얼마나 맛있게 먹었겠어요? 그 진상 올리라고 말이야. 동구밖에 박달참외를 진상해 올리니까 아 글쎄 배부른데 그게 무슨 맛이 있어. 그 저 은어가 도루묵이 됐다는 그 유래 한가지로 그런 식으로 유래가 있어요. (조사자 : 여기 동구 밖을 뭐라고 합니까?) 동문 밖, 여기 동문, 시방 헐어냈으면 거기가 동문 위치인데, 거 인제 바뀌거든, 여기가요. 그전엔 참외를 많이 수확들 했었어요.
여기 시방 인제 여기 가까운데 웅더리가, 샘 웅더리가 있어요. 논 가운데가 저 샘에 물이 나와요. 근데 그 양반이 목욕할 데는 있나. 그니까 이 양반이 거기 내려서 가끔 목욕을 하시고 그러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름이 황후물이야, 황후물. 이름이. (옆 노인 : 여태 있어요.) 예, 여태 있어요. 워낙 샘이 잘 나니까 흙 갖다 묻어도 소용없어. 그냥 수렁 수렁. 요 아래 있어요. (조사자 : 철종 임금께서 등극하시기 전에 이쪽에 자주.) 그렇죠. 예, 거리가 가까우니까, 그러니까 인제 나오셔서 노신 거지. 그 때 어린애 적이니까 뭐. 유래나 마찬가지지 뭐.(강화읍 옥림2리 신왕마을, 최수현, 남, 77세)
율곡의 제자인 황형 장군
연미정이라고 있어요. 연미정은 제비 ‘연’자에다가 꼬리 ‘미’자로 황장군이 저기 말타고 댕겼다는 거예요. 연미정까지요. 거기가 율곡 선생이 거기 와서 공부시킨 자리예요. 거기다가 율곡 선생이 “나무를 이런 걸 심어라”. 거기다가 소나무를 심었대요. “심어서 뭐할거냐?”, “그거 다 쓸 데가 있다.” 그래 이순신 장군이 잘라다가 배를 지었대요. 그래가지요 전쟁을 했다는 유래가 있대요. 우리가 보지 못했으니까 모르죠. (조사자 : 황장군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형 장군. 황사영씨 아시겠지? 거기가 황사영씨 집안 아니에요? (조사자 : 황현 그분을 율곡 선생이 가르치셨다구요?) 네. 여기가 원래 그 양반 사태지예요. 근데 원래가 어떻게 됐냐면 황씨네가, 황장군이 이름이 없어, 정부에. 명예가 없어. 왜 없냐? 황사영씨 때문에 그렇다 이거야.6) 그 생가집에 비석 하나 세우겠다고 그래도 못 세우게 하는 거야. 황장군이 명예가 없고 떨어졌으니까. 그 뭐야 황사영씨가 옛날에 박해를 당했잖아. 거기가 충청도 제천인가. 거기 가서 그 양반이 교리 가르치다가 잽혀 갔잖아요. 그래서 후손들이 자비를 털어 가지고 사당도 짓고 죄 거시기 한 거예요. 여기 연미정도 자비 털어서 전부 복원한 거라구요. 정부에서 안 해줘요. 명예가 없으니까.(강화읍 월곶리 월호마을, 김문한, 남, 75세)
꽃뫼뿌리 화산과 일광로
꽃뫼뿌리, 꽃뫼뿌리라는 것이 있어요. 지금 거기 용혈이라는 건데. 용혈이 혈구산 낙맥이 이렇게 내려온 건데, 소위 꽃뫼뿌리 조금 올라가면 뾰죽한 봉우리가 있어요. 거기서 저 중국 일광로가 났다는 그 자리라구요. 일광로가 조선의 왕보다 지위가 높대요. 근데 그 나중에 그 전설에 의하면 꽃뫼뿌리 그 봉우리 안에 사람이 하나 사는데, 무슨 스님이 가서 “하루밤 쉬러 왔다.” 그러니까 아마 극진히 그 스님 대접을 잘했나봐. 그 주인이. 잤는데 며칠 저녁을 잤는지, 자는 손님이 풍수하는 사람이었어요. 지가사, 산자리보구. 그래서 그 집에서 신세졌다고 해서 그 주인더러 “계란을 세 개를 가져 오라.”고 그랬대. 아 그래서 “내가 신세를 졌으니 산자리를 하나 봐주고 가겠다.” 그리고선 “계란 세 개 갖다 묻고 오라.”고 그러드래요, “저 봉우리에다가”. 그래 “새벽에 닭이 홰를 치고 ‘꼬끼오’ 하고 우는 소리가 나거든 거기에다 당신 할아버지나 아버지(묘)를 쓰라” 그랬다는 전설을 얘기 들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여기 살았으니까 (여기서) 살지 말고 어디를 떠나라. 여기 살지 말고.” 그런데 거기 떠나가지고선 자손을 하나 낳았는데, 그것이 중국으로 가 가지고 일광로가 난 거야. 벼슬을 한 거야. 그러니까 왕이지 뭐, 일광로가. (조사자 : 아, 그 주인의 자손이.) 어. 주인의 자손이. 그래 일광로가 났는데, 나중에 일광로가 중국에서 한국에 나와서, 인제 언제 어디서 살고 그랬다는 말이 있었갔죠 뭐. 근데 일광로가 그 산자리를 찾아서 나온 건데, 이 강화 화산, 꽃뫼뿌리라는 데가 있는데, “그게 어디냐?”고 물으니까. 근데 그 때는 용혈인데, 고 앞에가 배가 들락날락 했어요. 근데 그 때는 여기 사람이 번창하다 보니까 농사는 적고 그래서 저 갑곶이를 막은 거야. 막으니까 여기 배가 못 들어오는 거 아냐? 그래 물이, 조수가 상통되야 일광로가 잘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일광로가 조선에 나와서 거길 찾으면 틀림없이 갑곶이 거기를 서로 터놓을테니까 거길 안 일러준 거예요. 화산은 있어도 꽃뫼뿌리는 없다 그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돌아갔지. (조사자 : 찾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찾았으면 텄겠죠. 그 혈이 조수상통돼야 발전이 계속 잘된다는 거야. 그래서 화산은 있어도 꽃뫼뿌리는 없다 해서 그냥 돌아간 거지.
(조사자 : 달걀을 묻었는데, 그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 내가 중간을 빼먹었어. 새벽에 “꼬끼오”하고 홰를 치고 울었대요. (조사자 : 아, 달걀을 묻었더니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그 자리가 산세가 세다 그런 얘기죠. (조사자 : 그만큼 명당이니까 부화했다는 말씀이죠?) 그렇지. 계란을 갖다 묻었더니 닭이 울었다니 그 소리가 곧이가 들리는 얘깁니까? (웃음) (강화읍 남산2리, 남궁복성, 남, 81세)
쪽실방죽
화도면에는 선두포 방죽이 있는데 일명 쪽실방죽이라고 부른다.
기실은 선두포에서 위쪽을 족실방죽이라고 부르는데 기실은 의병장, 이능권이 활약할때에 일군과의 교전장소로서 왜병 47명의 패잔병의 다리를 잘라 방죽물에 던져버렸다.
그리하여 사골에 사는 이건창 선생은 쪽실방죽이란 명호를 부치고 선두포방죽을 쪽실방죽이라 칭하여 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