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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앞지르는 상상의 힘 / 마경덕
<계간 시와산문 원고>
신춘이란 말에는 새봄이 들어있다. 봄이 오기 전 먼저 찾아오는 신춘문예라는 말 속엔 기다림 불면 눈물과 설렘이 들어있다. 숱하게 두드린 그 문은 언제나 열리나?
심사를 마친 어느 시인은 낙선자들에게 ‘시 백 편을 쓰고 아흔아홉 편을 버릴 줄도 아시라. 나머지 한 편으로 주춧돌을 놓겠다는 각성이 있어야 하겠다“고 하였다.
수없이 쓴잔을 마신 낙선자에게 날아든 당선소식은 <이루었다>가 아닌 <시작>이다. <목적지>가 아닌 <출발선>이다. 신춘문예 당선자는 고아나 다름없다. 외롭고 먼길을 혼자 떠나는 것이다. 좁은 문을 통과한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박수를 받던 그 자랑스러운 얼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기대했던 이름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잊혀져갔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00년을 기점으로 신춘문예 당선작을 살펴본다. 좋은 작품이 많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을 우선으로 했음을 밝혀둔다.
2000년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대구매일신문 김성용의「의자」와 중앙일보 박성우의「거미」동아일보 이승수의「고래」부산일보 정진경의「알타미라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모두 개성이 뛰어난 작품들이지만 단연 김성용의「의자」가 돋보였다.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어디에 있는 의자란 의자는
모두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용맹을 지니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니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들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한 번 붙잡은 먹이는 좀체 놓아주려 하지 않는 근성을 먹이들은 잘 모른다.
이빨자국이 아무리 선명해도 살이 짓이겨져도 알 수 없다
이 짐승은 혼자 있다고 해서 절대로 외로워하는 법도 없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들지 않는다 오직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곤 편안히 마비된다 서서히 안락사 한다
제발 앉아 달라고 제발 혼자 앉아 달라고 호소하지도 않는 의자는
누구보다 안락한 죽음만을 사랑하는 네 발 달린 짐승이다
- 김성용「의자」전문
의자를 네 발 달린 짐승으로 본 시선이 낯설고 새롭다. 의자를 사나운 맹수로 몰고 가는데 무리가 없다. 다소 거칠긴 하지만 고정관념을 탈피한 패기 넘치는 작품이다.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상상력이 이 시의 힘이다. 독자를 무시한 독선적 발언은 위험하다. 보편성을 잃은 상상력은 독자와의 소통을 거부한다.
2000년도에 주목을 받았던 작품들 중 공통점은 동물을 비유해 작품이 쓰여졌다는 것이다. 김성용은「의자」를 맹수로 박성우는 목을 매달고 죽은 한 사내를「거미」에 비유하였다. 이승수는 전동차를「고래」로 정진경은 가죽 핸드백에서 소울음 소리를 듣는다. 이렇듯 상상의 힘으로 시의 폭을 넓혔다.
2001년 당선작 작품은 동아일보 김지혜의 「이층에서 본 거리」 한국일보 길상호의「그 노인이 지은 집」세계일보 장만호의「수유리에서」매일신문 조유인의「금관」을 꼽고 싶다. 그 중 김지혜의「이층에서 본 거리」는 섬세한 묘사와 즉물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1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 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
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
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 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 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 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 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
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2
난간, 볕에 앉아 졸고 있던 고양이가 가늘게 눈을 뜬다 수염을 당겨본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한다 등을 활선처럼 구부린다 앞발을 쭈욱 뻗으며 온몸의 털을 세워본다 그늘은 어디쯤인가 幻想은 어디쯤인가 졸음에 겨운 눈을 두리번거린다 난간 아래에 굴비 두름을 줄줄이 꿴 트럭 한 대가 쉬파리를 부르며 멈춰져 있다 백미러에 반사된 햇빛이 이글거리며 눈을 쏘아댄다 하품을 멈춘 고양이, 맹수의 발톱을 안으로 구부려 넣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선을 거두고 어슬렁, 난간 위의 시간으로 발을 뻗어본다 빛의 알갱이들이 권태의 발끝에 채여 후다닥 흩어진다 권태가 이동할 때마다 幻想도 한 걸음씩 비켜선다 이윽고 권태가 지나간 난간 위로 다시 우글거리며 모여드는 햇빛,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쩌억쩍 하품을 뿜기 시작한다
3
건너편의 창. 적색 커튼이 휘날리고 있다. 시간이 들고난 것처럼 휑하다. 안은 보이지 않는다. 일몰 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동굴 같다. 그러나 그 동굴에도 전등 켜지던 밤이 있었다. 불 밝힌 창 아래에서 토악질하던 사내. 목구멍에 검지를 집어넣고 속을 뒤집고 있었다. 돌아가 잠들기 위해 영혼을 뒤집던 사내는 전신주처럼 깡말랐었다. 깡마른 영혼들이 분주하게 오가던 골목은 그러나 이제 텅 비워져 있다. 깨진 유리창. 찢겨 울부짖는 적색 나일론 커튼. 절벽처럼 캄캄해지고 절벽처럼 늙어가는 창. 영영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아직 닫히지 못한 창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창도 그런 내가 끔찍할 것이다. 영원히 다물리지 않을 것만 같은 입구들이 키를 쥐고 있음을. 그 안엔 환상도 캄캄하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창의 건너편에서 나는 매일 꼼짝 않고 있으므로.
- 김지혜 「이층에서 본 거리」전문
시계추가 축 늘어져 있는 정오, 달아오른 아스팔트에 호스로 물을 뿌리는 사내의 장딴지를 더운 김이 감고 오른다. 호스를 누르고 있는 금은방 사내의 손에 호스는 괄약근처럼 투둑 투둑 물방울을 밀어낸다. 햇빛에 빛나는 물방울은 幻의 알약들이다. 이 시를 읽다보면 한바탕 대로에서 벌어지는 대낮의 정사와 정오의 숨막히는 더위에 덩달아 숨이 차오른다. 구체적인 질감이 느껴지는 즉물적인 묘사들이 이 시를 돋보이게 한다. 조유인의「금관」은 빛으로부터 소리를 읽어내는 나직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신뢰감을 갖게 한다.
2002년 당선작 중에선 동아일보 김중일의 「가문비냉장고」경향신문 송유자「조치원을 지나며」부산일보 안차애의「사냥감을 찾아서」조선일보 이윤훈의 「옹이가 있던 자리」등이다. 안차애의「사냥감을 찾아서」는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는 피어싱에 대해 다루었다.
1
배꼽에서 비스듬히 3cm 위쪽 지점을 깊이 맞뚫어
피어싱(piercing)*한다
생각보다 많은 출혈량은 있었지만
멧돼지 어금니 모양의 둥근 봉 두 개를 마주 꽂아
기쁨을 장식한다
바야흐로 성인식이다
어제는 들소 뿔 모양 장신구를
그제는 사슴의 목뼈 모양 링을
며칠 전엔 상아 모양 고깔을
미간에 귓바퀴에 귓불과 입술에 바짝 매달았다
비로소 야생 동물의 더운 피가 쿵쾅거리며 온 몸을 뛰어다니고
2
사냥감이야 늘 지천이다
혼다 4기통 오토바이로 시속 100km 남짓 달리다 보면
알타미라 동굴 근처의 바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지중해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다 느닷없이
오호츠크해산 고래 한 마리가 친구 입 속에서 튀어나오는 걸
깔깔대며 잡기도 한다
취향이야 늘 바뀌기도 하므로,
오늘밤엔 늙은 아버지의 가슴 뼈 밑에 숨어사는
느린 곰의 촌스러운 진지함을 새삼 사로잡아
혓바닥에 박고 싶다, 아주 가학적으로
- 안차애 「사냥감을 찾아서」전문
시대를 풍자하는 시 한편이 새롭고 힘차다. 피어싱을 즐기며 시속 100Km 속도를 즐기는 폭주족들. 바람까지 잡을 수 있는 위험한 젊음, 제 살을 뚫으며 자학하는 빗나간 젊음이 파괴적인 힘을 가졌다. 안정된 작품보다는 틀을 깨뜨리고 가슴을 뛰게 하는 도전정신이 심사위원의 눈길을 붙잡았다. 규격에 맞춘 비슷비슷한 시들은 선택받지 못한다. 지루하고 평범한 것들은 평범에서 그친다. 좋은 소재가 좋은 시를 낳는다. 신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싱싱함이다. 엉뚱한 상상력과 새로운 언어이다.
2003년은 내게 잊지 못할 해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당선의 영예가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문성해의「귀로 듣는 눈」 조선일보 천수호의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 자 찾기」가 기억에 남는다. 다행히 세계일보 당선작「신발論」도 적잖은 사랑을 받았다. 그 중 천수호의「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 자 찾기」는 여느 시와 다른 독특한 시의 맛을 보여주었다.
도랑을 한 번 쭉 훑어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놈이 살고 있는지
흙탕물로 곤두박질치는 鰍
그 꼬리를 기억하며 網을 갖다댄다
다리를 휘이휘이 감아오는
물풀 같은 글자들
송사리 추, 잉어 추, 쏘가리 추
발끝으로 조근조근 밟아 내리면
잘못 걸려드는
올챙이 거머리 작은 돌멩이들
어차피 속뜻 모르는 놈 찾는 일이다
온 도랑 술렁인 뒤 건져 올린
비린내 묻은 추(秋)는 가랑잎처럼 떨구고
비슷한 꼬리의 (송사리)추, (잉어)추, (쏘가리)추만
자꾸 잡아 올린다.
- 천수호「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전문
(송사리추, 잉어추, 쏘가리추는 원래 한문 글자로 표기해야 하나 컴퓨터 한자의 제한으로 한글로 대치함)
잠재된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심사위원의 안목이다. 다소 위험 부담이 가는 엉뚱한 상상력도 숨겨진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를 찾다보니 비슷한 송사리 잉어 쏘가리 추만 자꾸 눈에 잡힌다. 다리를 휘이휘이 감아오는 물풀 같은 글자들 사이로 올챙이 거머리 작은 돌멩이들까지 걸려 올라온다. 옥편은 뜻 모를 글자들이 모여 사는 도랑이다. 이 얼마나 즐거운 상상인가? 바지를 걷어붙이고 함께 그 도랑으로 들어가 미꾸라지를 잡고 싶다.
2004년도 신춘시들은 IMF 금융위기 때문인지 신춘의 지면을 장식하기엔 무거운 좌절과 죽음을 다룬 시들이 많았다. 암울한 세태를 대변하듯 당선작 역시 죽음을 소재로 한 동아일보 김성규의「독산동 반 지하동굴」과 대구매일 이동호의「조용한 가족」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문화일보 김지훈의「시월의 잠수함」과 경향신문 안성호의 「가스통이 사는 동네」도 개성이 넘치는 작품이었다. 이동호의 「조용한 가족」은 뛰어난 묘사로 시를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무상 임대 아파트 8층 복도,
한 덩이 어둠을 치우고 걸어 들어간다.
복도가 골목 같다.
이 골목은 일체의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복도가 직장이기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도를 벗어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이곳에서 사표를 낸다는 것은
極貧의 뜻이고,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일층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승은 주로 일층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고층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시 죽음과 내통하는 셈이다.
작년, 두 사람이 일층으로 순간 이동했다.
올해는 벌써 두 명분의 숟가락이
고층에서 주인을 퍼다버렸다.
몇 사람 더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으니
한 두 집 더 빈 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밤하늘은 눈치가 빠르다.
미리 弔燈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아파트 속에 조의금처럼 들어앉아 있다.
일부는 여전히 복도를 서성이다가
아무런 말없이 일층을 내려다보곤 한다.
이곳에서는 침묵도 하나의 宗派가 된다.
사람들은 침묵을 광신도들처럼
따른다.
- 이동호「조용한 가족」전문
갈 데도 없어 복도를 서성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은 사라진지 오래 8층 복도에서 몸을 날리기도 한다. ‘작년, 두 사람이 일층으로 순간 이동했다. 올해는 벌써 두 명분의 숟가락이 고층에서 주인을 퍼다버렸다'는 시구가 압권이다. 무상 임대아파트에 사는 극빈자들의 아픔을 그려낸 「조용한 가족」은 냉정하게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차분한 목소리가 믿음직하다.
2005년 신춘문예 당선작으로는 조선일보 김승해의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중앙일보 박연준의「얼음을 주세요」세계일보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가 기억에 남는다. 특히 박연준의「얼음을 주세요」는 현대 젊은이들의 성모랄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과감하고 거침없는 언어가 패기를 넘어 발칙하기까지 하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생생하고 자극적인 언어들이 제목과 잘 맞아 떨어졌다. 2006년 동아일보 곽은영의「개기월식」도 눈여겨 볼만하다.
밤의 문이 열렸어요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800Cal 가게 문을 열고 누가 왔어요 저녁을 먹다간 입가 훔치며 정육점 여자는 일어섭니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둥근 밥상 가장자리가 보여요 오늘은 개기월식이 있겠습니다 어린 딸 리모컨을 눌러요 채널을 바꿔요
여자는 손님에게 웃어보이지요 붉게 물든 장갑을 끼고 비닐장갑을 또 끼고 차가운 살덩어리 하나 척 베어서 저울에 올려요 200g 중력이 달랑 하늘에서는 쓱쓱 사라지는 하얀 달조각 여자는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요
엄마 나 쉬 마려 칭얼대는 딸 탁탁탁 도마에 칼을 부딪치며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쓸어모아 검은 비닐에 담아 들려 보내요 달랑 떠 있던 마지막 달조각이 사라졌어요
달이 밟고 가는 모든 길에 검은 비단을 깔고 바람은 휙휙 채찍질 구름마저 쫓아버렸어요 이제 무엇을 바치오리까 보셔요 은빛 가면 벗고 강림하신 핏빛 달님 여자는 장갑을 벗고 선지 한그릇 뚝 떠내요 스테인리스 밥그릇 안에 오늘은 핏덩어리 달이 잠겨요
36.5℃ 365일
달님의 체온은 몇 도인가요
엄마 나 정말 쉬 마려 발 동동 구르는 딸 여자는 계집애 팔 잡고 한 볼기 때리고 바지를 까내리고 엄마 한번 쳐다보고 제 오줌줄기 한번 쳐다보고 바람이 보듬어가는 어린 것의 지린내 윤기나는 밤의 비단에 싸서 달님 앞에 내려놓아요 하얗고 새초롬한 아가씨 얼굴로 돌아오는 달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여자와 아이가 다시 밥을 먹어요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돌려요 달은 개기월식 궤도를 완전히 벗어났어요 그녀 힐끔, 가게 문을 쳐다보아요
-곽은영 「개기월식」전문
곽은영의「개기월식」은 치밀하다. 저녁을 먹는 정육점 여자를 등장시키고 문틈으로 둥근 밥상의 가장자리만 슬쩍 보여준다. 둥근 밥상은 만월이며 밥상의 가장자리는 월식의 시작을 알리는 예시이다. 핏물 든 장갑, 밥그릇에 담긴 선지 한 그릇은 지구에서 반사된 빛으로 붉게 변해 가는 달이기도 하다. 저녁밥의 열량 800Cal, 저울에 올려진 살코기 200g, 36.5℃ 의 체온 등, 구체적인 숫자는 한층 시의 질감을 느끼게 한다. 살코기의 무게에 슬쩍 중력을 끼어 넣는 솜씨도 돋보인다.「개기월식」은 마치 동영상을 보는 듯 지상과 천상에서 동시에 벌어진다. 곽은영의 '개기월식'은 먹고 먹히며, 배설하는 풍경이 월식과 오버랩 된다. 시 한편이 그대로 개기월식이다. 생성과 소멸이 교차되는 우리의 삶이다.
한국일보 김두안「거미집」매일신문 강경보 「우주물고기」조선일보 이윤설「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진주가을문예 김애리나 「봄날의 부처님」도 눈에 띄었다. 갈수록 시들이 대담하고 발랄하다. 김애리나 「봄날의 부처님」은 고즈넉한 절간 속에서 춘정을 불러와 부처님까지 노곤한 봄의 색정 속으로 밀어 넣는 능청이 선자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쉿, 부처님 주무시는 중이세요
햇살이 부처님의 이마에 키스하고파
법당 안을 기웃대는 봄날이었지요
졸립지요 부처님? 그래도 봄인데
나들이는 못 갈망정 마당 가득 피어난 꽃나무 좀 보세요
산사나무 조팝나무 매자나무 꽃들이 치마를 올리고
벌써 바람을 올라탈 준비를 하는 걸요
꽃가루 가득 실은 바람과 공중에서 한 바탕 구르다
주워 입지 못하고, 흘린 치마들이 노랗게 땅을 수놓는 걸요
화나셨어요 부처님? 왜 오롯이 눈은 내리깔고 침묵하셔요
이 봄에 관계하지 못한 生이란 울기만 하는걸요
보세요, 대웅전 계단 옆 고개 숙인 한 그루의 불두화를
향기 많은 꽃에 벌과 나비가 꼬여 열매를 맺는 모습은
수도승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여 성불코자 심었다는 불두화가
관계를 나누다 쓰러진 것들을 보며, 눈물을 찍어내고 있어요
천년이 넘게 한 세상 굽어만 보시는 부처님
오늘처럼 법당에 둘이만 있는 날에는
당신 한번 넘어뜨리고 싶은 마음 아시는지,
헛. 헛 기침하시네요 토라져 눈감으시네요
긴 손 뻗어 몇 날 며칠 불두화의 눈 감겨 주시니
아, 그제야 봄 저무네요 절름발로 지나가네요
- 김애리나「봄날의 부처님」전문
2007년 당선작으로는 문화일보 김륭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경향신문 신미나 「부레옥잠」서울신문 이산「연금술사의 수업시대 」세계일보 이기홍 「근엄한 모자」를 재미있게 읽었다.. 그 중 김륭의「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는 단연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1.
실직 한 달만에 알았지 구름이 콜택시처럼 집 앞에 와 기다리고 있다는 걸
2.
구름을 몰아본 적 있나, 당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내 머리에 총구멍을 낼 거라는 확신만 선다면 얼마든지 운전이 가능하지
총각이나 처녀 딱지를 떼지 않은 초보들은 오줌부터 지릴지 몰라
해와 달, 새떼들과 충돌할지 모른다며 추락할지 모른다며 울상을 짓겠지만
당신과 당신 애인의 배꼽이 하나인 것처럼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위질하는 것은 주차딱지를 끊는 말단공무원들이나 할 짓이지
하늘에 뜬 새들은 나무들이 가래침처럼 뱉어놓은 거추장스런 문장일 뿐이야
쉼표가 너무 많아 탈이지 브레이크만 살짝, 밟아주면 물고기로 변하지
3.
구름을 몇 번 몰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해나 달을 로터리로 낀 사거리에서 마음 내키는 데로 핸들만 꺾으면 집이 나오지
붉은 신호등에 걸린 당신의 내일과 고층아파트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보다 깊은 어머니 한숨소리에 눈과 귀를 깜빡거리거나 성냥불을 긋진 마
운전 중에 담배는 금물이야
차라리 손목과 발목 몇 개 더 피우는 건 어때? 당신
꽃 피우지 않고도 살아남는 건 세상에 단 하나, 사람뿐이지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새가 아니라 벌레야
구름이란 눈이나 귀가 아니라 발가락을 담아내는 그릇이란 얘기지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말이야 그걸 아는 나무들은 새를 신발로 사용하지
종종 물구나무도 서고 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구름이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소란스러울까
4.
아주 드문 일이지만 콜택시처럼 와 있는 구름의 트렁크를 열어보면
죽은 애인의 머리통이나 쩍, 금간 수박이 발견되기도 해
초보들은 그걸 태양이라고 난리법석을 떨지
뜬구름이나 잡으러 다니는 사내는 이제 구름을 노련하게 몰고 다닌다. 그러나 운전 중에 담배는 금물, 백수인 사내는 손목과 발목을 잘라서라도 담배를 끊어야한다. 시적 발상이 뛰어나다. 실업의 아픔을 시종일관 역설적 상상력으로 경쾌하게 끌고 간다. 그의 경쾌한 상상력이 삶의 고통을 이기고 있다.
아래는 심사를 마친 어느 시인이 낙선자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 고려 때, 백운거사 이규보는 동국 이상국집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어려운 글자를 쓰기 좋아해서 남을 쉽게 현혹하려 했다면 이것은 함정을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체격이다. 사연은 순탄하지 못하면서 끌어다 쓰기를 일삼는다면 이것은 강제로 남을 내게 따르게 하려는 체격이다. 속된 말을 많이 쓴다면 이것은 시골 첨지가 모여 이야기하는 체격이다. 기피해야 할 말을 함부로 쓰기를 좋아한다면 이것은 존귀를 침범하는 체격이다. 사설이 어수선한 대로 두고 다듬지 않았다면 이것은 잡초가 밭에 우거진 체격이니, 이런 마땅치 못한 체격을 다 벗어난 뒤에야 정말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다. 남이 내 시의 병을 말해 주는 이가 있으면 기쁜 일이다. 그 말이 옳으면 따를 것이고 옳지 않아도 내 생각대로 하면 그만인데, 하필 듣기 싫어해서 마치 임금이 간함을 거부하여 제 잘못을 모르듯이 하리요. 무릇 시를 지었다면 반복해서 읽어보되, 내가 지은 것으로 보지말고, 다른 사람 또는 평생에 제일 미워하던 사람의 작품처럼 여겨 덜되고 잘못된 것을 찾아보아서 찾을 수 없을 때 내놓아 발표할 것이다.-
2000년에서 2007년까지 당선작을 훑어보며 상상력이 시를 끌어가는 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좋은 시는 독자의 상상을 앞지른다. 그렇다고 가슴(감동)을 빼고 머리(기교)만으로 시를 쓰겠다고 하면 위험하다. 곧 신춘문예 공모가 시작될 것이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싱싱한 상상력으로 도전하라. 신춘문예는 도전하는 자의 것이다.
[출처] 2000년 뒤돌아본 신춘문예|작성자 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