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구 원신흥동 덜레기마을(덕락동) 동북쪽 마을입구에 탑바위라고 하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원래 탑처럼 생긴 바위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무너뜨려서 돌로 탑을 쌓았다고 한다. 이 탑바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지금의 신흥리에는 목씨들이 20여집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부자로 잘 살았는데 그것은 탑바위속에 살고 있는 한 쌍의 학이 목씨 집안을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는 그들은 늘 오만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색했다. 더러 마을사람들이 양식을 꾸러 가면 그들은 온갖 거드름을 다 피우면서 양식을 꾸러온 사람을 내쫓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야 죽든지 살든지 자기들만 잘 살면 그만 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 사람대로 이들과 거래하지 않으려고 했다.
어느 해였다. 봄부터 가뭄이 들기 시작하더니 가을이 다 가도록 가뭄이 들었다. 여름 내내 논과 밭이 타서 흉년이 들었다. 모두들 살아갈 길을 걱정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흉년이 들어 양식은 없는데다 어디서 쌀 한되라도 구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디를 가나 한숨 짓는 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밥을 먹는 사람들 보다 굶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양식을 빌리러 가지 않았다. 그것은 목씨가 양식을 빌려주지 않으리란 것을 너무나 뻔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 마을에 중이 시주를 왔다. 중은 다른 집에는 가지않고 마을에서 제일 가는 부잣집에만 갔다. 중은 그 집주인이 인색하다는 소문도 듣지 못하였는지 대문 앞에서 근엄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우면서 목탁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를 본 부잣집 주인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당신은 무엇 하러 온 중이오?" 주인은 중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부처님께 시주를 좀 하십시오." "시주?" "네 그렇사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심술이 떠올랐는지 머슴을 불렀다. 머슴이 달려오자 외양간에 가서 두엄을 퍼 오도록 명령했다. 머슴은 주인의 말대로 삽에 쇠똥을 담아 가지고 왔다. "나는 이것 밖에 줄 것이 없으니 이것이나 받아 가시오." 주인은 머슴이 가지고 온 쇠똥을 중이 등에 짊어진 바랑 속에 담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은 눈 하나 움직이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염불을 외웠다. 이를 본 주인은 중을 대문 밖으로 내쫓고 대문을 잠가버렸다. "그대의 집은 탑바위 속에 있는 학이 도와주어서 잘 사는데 그 학을 날려보내면 모두 몰락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중은 안색이 변하여 가지고 대문 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주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들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마을 사람들의 인심은 더욱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중이 부잣집에서 쇠똥을 받아 가지고 쫓겨났다는 소문이 나서도 그랬지만 광속에 쌀을 잔뜩 쌓아놓고도 굶주리는 마을 사람들을 모른 체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어느날 부잣집에 양식을 꾸려갔던 어느 젊은이가 거절을 당하고 나와서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탑바위로 달려가서 탑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서 탑은 무너지고 그 속에 있던 학은 날개를 치면서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마리는 탑이 무너지면서 다리를 다치게 됐다. 그리하여 그 학은 얼마 날아가지 못하고 가까운 마을에 날아가 앉았다. 그래서 학이 앉았던 마을을 학마을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 마리가 날아가 앉은 마을을 학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부잣집은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점점 집안이 펴 나가면서 마을에서는 풍년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신흥리에는 커다란 바위 위에 돌들로 쌓여진 탑의 흔적이 옛날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유성문화원-유성의 역사-구전설화> 중에서
첫댓글 동구의 학고개 설화와 유성구의 탑바위 설화가 많이 유사하다. ^^;;
같은게 아주 많아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