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장 교수는 지난 7일 재입원했다. 8일 조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9일 오빠 병우(62)씨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타계하기 직전 장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엄마"였다고 오빠 병우씨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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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미안해" / 끝없는 추모행렬
암 투병 중 강단에 복귀해 희망을 전도했던 고(故)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미어문ㆍ영어문화학부)의 빈소가 마련된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11일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장 교수의 글을 읽고 팬이 되어 서강대를 지원했다는 제자 김재엽(30)씨는 이날 아침 일찍 조문을 마친 뒤 “‘암 투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항상 밝은 모습으로 희망을 주셨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장 교수의 어머니는 먼저 하늘로 간 딸의 영정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한 채 흐느껴 주위를 숙연케 했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는 의자에 앉아 “미안해”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슬픔을 토해냈다.
장 교수의 여동생들은 옆에서 어머니를 부축하며 “우리만의 ‘장영희’가 아니었고 모든 사람의 ‘장영희’였다”고 어머니를 위로했다.
장 교수의 오빠인 병우(62)씨는 “어제까지 제자, 학교 관계자 등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며 “가족을 사랑했고 제자를 사랑한 따뜻한 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암 투병 중에 동생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제자들이 운구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등 제자 사랑이 각별했다”고 전했다.
오후 늦게까지 학교 후배와 조교 등 40여명이 빈소를 지키는 가운데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과 가수 조영남씨 등 300여명의 지인과 선후배 등이 조문을 다녀갔고 동료 가톨릭 신자들의 방문도 이어지면서 빈소는 내내 연도(煉禱)의 물결로 숙연한 분위기였다.
과거 장 교수의 조교였던 윤모(32.여)씨는 “2000년도에 교수님 밑에서 1년간 조교생활을 했는데...얼마 전만해도 괜찮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렇게 돼 버렸다. 미리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장 교수의 팬이라고 소개한 한 70대 할머니는 “아프리카에 있는 아는 분이 꼭 빈소엘 다녀와 달라고 부탁을 해서 왔다”며 “마음으로 고인께 명복을 빌었다”고 말했다.
변주선(69.여) 대림성모병원 행정원장은 유족들의 손을 꼭 맞잡은 채 끝없이 눈물을 흘리다 빈소를 떠났다
그는 “지난 3월 먼저 떠난 (김)점선(서양화가)이는 우리 병원에서 따뜻한 밥 한끼라도 먹고 갔는데 영희는 그렇게도 못했다”며 슬픔을 토로했다.
빈소 안팎에는 한승수 국무총리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 등 저명 인사들이 보낸 화환 70여개가 들어차 고인을 말없이 애도했다.
2001년 유방암에 걸렸다가 완치됐던 고인은 2004년 다시 척추암 선고를 받고 교수와 수필가로서의 활동을 중단했지만 2005년 봄 다시 강단에 돌아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장 교수는 그러나 최근 병세가 다시 나빠져 학교를 휴직하고 투병 생활을 해오다가 9일 낮 12시50분 향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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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같은 단발머리에 옅은 미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글 때문에 사람들은 장영희 교수가 조용하고 나직하기만 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들은 그의 다른 모습도 기억한다. 빠른 서울 말씨로 단칼에 푹 찌르는 촌철살인. 어느 해 가수 조영남이 장 교수 생일잔치를 열어주자 "둘이 결혼하는 거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장 교수가 한 마디로 주변을 잠잠하게 했다. "난 처년데 아깝잖아!"
▶장영희 교수는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앉지 못해 누워만 있던 소아마비 1등급 장애우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엄마 등에 업혀 학교에 갔고, 엄마는 그를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번씩 다시 학교에 갔다. 그 후에도 평생을 목발에 의지한 삶이었다. 그러나 장 교수는 '천형(天刑)'이란 말을 제일 싫어했다. 그를 버티게 한 건 삶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에는, 한 남자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 라고."('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장 교수가 생산하는 희망의 바이러스는 그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역경에 부딪히고 삶에 지친 동시대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2004년 완치된 줄 알았던 암이 재발하자 그는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 일산 국립암센터의 환자들을 위한 서가에 장 교수가 쓴 책들이 그렇게 많이 비치돼 있고 손때가 묻어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장 교수의 글이 주는 치유의 힘을 '장영희 효과'라고 했다.
▶장영희 교수가 8년에 걸친 암 투병 끝에 9일 천국으로 갔다.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장 교수였으니, 짧은 생애였지만 보통 사람보다 많이 보고 갔을 것이다. 그리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남겼다. 그는 '영미시 산책'에서 "'내 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들 힘내'가 된다"고 했다. 힘들어도 다들 힘을 내 자기 안에 있는 용기와 인내, 열정의 깃발을 다시 흔들자는 얘기였다. 장영희 교수의 명복을 빈다.
첫댓글 하필이면~눈부신 5월에 떠나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