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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6:1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6: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5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눅 11:2-4)>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 이 구절은 1-18절까지의 서론에 해당된다. 이 단락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세 가지 종교적 의무, 즉 의(義, 2-4절), 기도(5-15절), 그리고 금식(16-18절) 등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제시되고있다. 즉 5장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직접적인 내용에 대한 올바른 정신과 해석을 설명하시고도 높은 경지의 의(義)를 가르치신 후 이곳에서부터는 율법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유전(inheritance)과 관습에 관한 바른 지침 및 그들이 당면할 종교적 위선의 위험성을 계시하고 있는것이다. 특히 예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外飾)적으로 이 같은 종교적 관행을 하고 있음을 비난한다. 여기서 '보이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아데나이'(* )는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강조하는 제 1부정 과거 수동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보이려고'란 '그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사람에게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제시한다. 이처럼 전적으로 인간을 의식하고 그의 판단을 고려하면서 취하는 행동은 항상 위선의 위험성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성을 익히 아시고, 또 그것을 능히 극복케 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고려하고 날마다 신전(神前,Coram Deo)의식을 지닐때 인간의 오류와 위선은 최소화 될 수 있다.
너희 의를 - 어떤 사본에는 이 말이 '너희 구제를'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까닭은 아마 '의'란 말이 히브리어로 '체다카'(* )로서 70인역(LXX)에 따르면 간혹 구제를 위한 의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신 6:25).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의'를 '구제'란 의미로 직접 변형하여 사용한 적이 없고, 또 다음 절에는 '구제'란 말이 따로 쓰이기 때문에 이를 구제란 말로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구별되는 '너희'라는 말과 더불어 이 '의'(* , 디카이오쉬넨)는 예수의 제자들이 지켜나가야 할 의로운 생활 방식의 배후에 있는 거룩한 동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D.A. Carson).
행치 않도록 - 의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의 요구 사항을 실천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바른 행위를 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또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자로 인정받기 위해 고의적(故意的)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이를 행하였다. 이에 주께서는 이러한 위선적 행위를 규탄하고 하나님의실존을 의식하고 그분이 미구(未久)에 내려주실 온전한 보상만을 기대하며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해야 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주의하라(* , 프로세케테) - 이는 주로 고대 헬라어에서 종종 발견될 뿐 성경 문학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서(LXX, 욥 7:17), 특히 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는 '마음'을 뜻하는 '눈'(* )이란 말이 생략된 형태이다. 따라서 이 말의 원의(原意)를 살펴보면 '이것을 항상(생각)하라','오직 이 일에 마음을 집중시키라'는 뜻이 된다.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염려했으며, 또 그들에게서 이미 위대하며 경건하다는 칭찬을 상(賞)으로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사람의 행위 전체를 바라보고 계셨던 하나님께는 받을 상이 없는 것이다.
=====6:2
그러므로 - 이 말의 원어 '운'(* )은 여기서 앞 구절에 대한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보충적 설명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는 '예를 들자면', '이에 대한 구체적 사례를 들자면'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구제할 때에 - 이 어구가 '구제한다면'이라는 조건문으로 기록되었으면 구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이 어구는 단순히 직설적으로 '구제할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주께서는 구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말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구제가 공적(功績)을 쌓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편 중의 하나로 생각할 정도로 구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구약 외경 토비트 12:8, 9). 어쨌든 여기서는 공적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하거나 그들의 구원관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선(善)을 행함에 있어서 과시나 보이기 위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외식하는 자(* , 호이 휘포크리노마이) - 이는 '가면을 쓰다', '위선적 태도를 취하다', '...인 체하다'는 등의 뜻인 '휘포크리노마이'서 유래한 말로서 '타인의 흉내를 내는 사람', '배우'등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 용어는 주로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바리새인들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형태와 연관되어 본서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5, 16절;7:5;15:7;23:13-15;24:51). 여하
튼 '외식'은 타인과 자신을 동시에 속이는 악행으로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 앞에 반드시 단죄될 것이다(고후 5:10).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 의와 기도 그리고 금식으로 삼대별(三大別)되는 유대인의 종교적 의무 중에서 아마 '의'의 일부에 속한 이 구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셨던 것 같다. 그러나 외식자들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동기(動機)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회당과 거리에서 이러한 종교 의무를 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인간의 본분인 하나님께 '오직 영광'(Sola Gratia, 전 12:13;롬 11:36)을 돌리는 데는전혀 무신경했던 것이다.
나팔을 불지 말라 - 이에 대해 많은 주석가들은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성금을 모을때 나팔을 불던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Hill, Bonnard). 그리고 칼빈(Calvin)은 구제자들이 성금을 내면서 이 사실을 알리고자 나팔을 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어떤 학자는 헌금궤(눅 21:1)의 모양이 뿔피리 모양으로 생긴 데에 이 말의 근원이 있다고 주장한다(Edersheim, Jeremias).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이를 뒷받침할만한 확정적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단정 지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실제로 나팔을 부는 것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자랑하지 말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이와 더불어 '뷔흘러'(A. Buchler, St. Matthew V:1-6)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즉 '공적인 금식 기도는 나팔소리에 의해 선포되었다. 그런 때에는 사람들이 비오기를 탄원하는 기도 등을 길 거리에서 드리곤 하였다(5절).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구제 행위가 자신들의 그러한 금식과 기도의 효과를 한층 더 보장해 준다고 생각했다(Sanhedrin 35a;P. Tannith 2:6). 그리하여 사람들은 구제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 구제 행위가 자기 과시(誇示)적인 행동을 낳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상을...받았느니라 - 바리새인들이 원하던 것은 하나님의 상이 아니라 대중의 칭찬이었으므로 그들은 헛된 영광의 상을 이미 받은 것이다. 여기서 '받다'에 해당되는 원어 '아페쿠신'(* )은 상업 용어로서 자주 쓰이는데, 거기서 이 말은 전액을 영수(receipt)했다는 뜻이다.
=====6:3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도와주며 이둘은 항상 함께 일한다. 따라서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자신이 베푼 자선을 도무지 기억지말고 의식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그 선행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듯이 하라는 당부인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몇가지 설명을 들자면, (1) 겸손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말없이 주는 것을 상징한다(Chrysostom). (2) 오른손으로 일을 해놓고 왼손으로 그 결과를 거두려고 하지 말라(Luther). (3) 선을 행하고는 그것을 바다에 던지라 고기들은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시리라(동양 격언) 등을 열거할 수 있고다.
=====6:4
은밀하게 하라 - 이는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명령이기도 하고 또한, 사람의 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 이 어구는 이곳 외에 6절과 18절에 다시 반복된다. 그런데 KJV나 Textus Receptus의 자의적 해석에 의하면 본절과 6절에 '은밀히'와 대구를 이루는 '드러내 놓고'(openly, * , 엔 토 파네로)란 말이 첨가되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갚으시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의역이라고 생각된다. 예수께서는 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하실 뿐이다. 여하튼 우리가 우리의 자선을 잊게되면 잊게 되는 만큼 하나님이 주목해 보실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그것을 높이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한 만큼 하나님은 그것을 무시하실 것이다.
너의 아버지 -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은밀한 중에 그 위선의 속깊은 내면을 보고 계시는 심판주로 다가오시기 때문에 매우 두려운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의(義)를 드러내지 않는 주의 제자들에게는 자신의 선한 행위를 조용하고 따사로은 눈길로 다 하나하나 보시고 기억해 두시는 '아버지'로 다가오실 것이며, 따라서 그 같은 사실 자체가 크나큰 기쁨과 위로가 될 수 있다.
갚으시리라(* , 아포도세이 소이) - 직역하면 '그에 합당한 양을 어김없이 되돌려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주실 것인지 또는 그 보상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들이 계시하고 있는 여러 증거들을 참고할 때 우리는 그 보답이 현세와 내세에서의 지고(至高)한 기쁨과 원숙한 인격의 완성으로 주어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Broadus).
=====6:5
기도할 때에 -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직접 아뢰는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따라서 이는 구제보다 더 즉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때에'(* , 호탄)란 말이 가정법 현재 시상과 더불어 사용됨으로써 규칙적인 기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넌즈시 비추고 있다(Lenski).
외식하는 자 - 외식하는 자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1) 악하면서도 선을 가장(pretence)하는 유형, 이런 사람은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22:15-18). (2) 자기 만족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속이면서 또 타인을 속이는 유형, 이런 유형의 의식자들은 보통 스스로 경건한 체하지만, 타인을 속이지는 못하고 곧 발각된다(9:1-5). 아마 예수의 책망을 들었던 이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 유형에 속했던 것 같다. (3) 외식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스스로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유형, 이는 가장 완벽한 위선자이다. 따라서 이들은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그 행위를 보는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다.
되지 말라 - 이는 제자들의 기도를 전제한 표현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이 의식적인 기도에 빠지지 않도록 여기서 그 허황된 위선에 대해 경계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 '되지 말라'는 말은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미래 시상의 어구로서 이 경고를 받은 이후부터 절대 그 같은 잘못을 범치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회당과 큰 거리 어귀 - 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로서 1차적으로 외식자들이 자신의 경건 생활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수단으로서 이 장소를 택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비난한 내용이다. 대개의 경우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눅 18:9-14;행 3:1;10:9). 만약 외출 중에 기도 시간을 맞게 되면 길가에 서서라도 기도하는 열성을 보였다(M.Taanith 2:1, 2). 이렇듯 그들 행위의 처음 의도는 순수했으나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즉 기도 시간에일부러 외출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오직 하나님과 자아와의 순결한 만남의 장(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명성을 얻고자하는 것은 금을 주고 돌을 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며 나아가 창조자의 순결한 사랑을 인간의 음흉한 위선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눅 18:1-4). 이처럼 예수께서는 기도의 장소나 자세 등을 문제 삼아 그들을 책망하였다기 보다는 그들이 기도한 동기와 목적이 불순(impurity)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도를 통해 진실로 하나님께 호소하는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는 칭찬을 듣고자 외식적 태도로 장황하게 기도했던 것이다.
서서 기도하기를 - 성경에는 기도의 자세가 몇 가지 언급되고 있다. 즉 기도는 엎드려서(민 16:22;단 8:17;계 11:16), 또는 무릎을 꿇고(대하 6:13;눅 22:41;행 9:40), 또는 앉아서(삼하 7:18) 또는 서서(삼상 1:26;막 11:25)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도의 자세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 한 그들의 헛된 동기(motive)인 것이다.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외식자들은 관례에 따라기도 시간(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맞추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 장소에 나아가 수려하고 장엄한 언어로 기도한 것 같다. 그렇게해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여지(margin)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한 사람들 중에는 아예 공적(公的) 기도를 폐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분명 예수는 모든 공적기도를 금하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는 그것을 오해하지도 않았다(18:19, 20;행 1:24;4:24-30). 실로 공적인 기도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공적인 기도와 사적인 기도의 구분이 기도하는 사람의 동기를 판단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칭찬에 더 관심있는사람, 곧 경건보다 경건으로 인한 명성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 사적인 기도는 무시한채 공적인 기도만을 추구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식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골방 기도'이다.
=====6:6
네 골방에 들어가 -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엘리사의 침실과 비숫한 곳이었던 것 같다(왕하 4:33). 여기서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한편 '골방'의 원어 '타메이온'(* )은 '자르다'는 뜻의 '템노'(* )와 '청지기'란 뜻의 '타미아스'(* )의 합성어로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저장실(store room), 내실(inner room), 침실(bed room, 사 26:20)등을 가지고 있다.
문을 닫고 - 사 26:20에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란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분명히 이 예언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그런데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분명 마지막 심판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아마 제자들이 이런 심판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되, 이를 관습화하기 원하셨던 것같다. 여하튼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을 불허(不許)한다는 뜻인 동시에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이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은밀한 중에...기도하라...갚으시리라 -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4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을 온전히 반영한 약속이다.
=====6:7
이방인과 같이 - 산상수훈에는 이방인이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5:47;6:32), 본문의 이방인은 두번째의 언급이다. 갈릴리 지방은 이방 지역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방인들의 출입이 잦았고 심지어 그들과 섞여 살기도 했다. 따라서 갈릴리 사람들은 이방의 관습에 익숙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해서 예수는 자연적으로 앞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적 행동을 비난함과 아울러 바른신앙 생활을 가르치셨던 것같이 이들 이방인들의 잘못된 종교 관행을 빌어 참된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신 것이다. 물론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앞에서는 기도의 장소와 그 동기적 측면이 강조된 것이라면, 본문은 주로 기도의 내용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하겠다.
중언 부언 - 이 말의 원어는 '밭타로게세테'(* )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을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어원 역시 분명치 않다. 어떤 학자는 말더듬이인 '바투스'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며(Erasmus), 또 어떤 이는 장황하고 반복적인 시(詩)를 읊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대부분 이 말이 정확하지도, 그렇다고 명쾌하지도 않은 일종의 의성어(onomatopoeic word)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중언 부언'이란 말은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아무 의미없는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이방인들은 이와 같은 주문(呪文)과도 같은 내용을 지겹고도 공허하게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신(神)을 질리게 만들었다(왕상 18:26, 28)
말을 많이 하여야 - 이는 중언 부언하는 기도의 방법이다. 그렇다고 기도를 언제나 짧고 간단하게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온 밤을 지새우며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따라서 본문은 장황하고 긴 기도가 믿음의 순수한 표현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기도의 길이에 관계 없이, 그분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또한 기쁘게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이다(사 65:24;히 11:6)
=====6:8
본받지 말라 - 기도를 길게 하거나 반복하게 되면 기도의 효력이 강화(强化)되어 쉽게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진 이방인들의 어리석은 신앙관(왕상 18:26-28)에 미혹되어 신앙의 본질을 망각치 말라는 당부이다.
구하기 전에 -아시느니라- 이는 기도에 앞서 가져야 할 신앙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아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특히 여기서 '이시느니라'(* , 오이덴)는 말은 긴밀한 관계성 속에서 이뤄지는 직관적 인식을 뜻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전부터 그 간구하는 자의 삶에 깊이 개입(介入)해 오신 분으로서 그 필요(necessity)를 익히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필요를 모두 알고 계
신다는 사실을 오해하여 전혀 간구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의 인격적 대화를 원하시며 또한 그들이 당신께 대한 깊은 신뢰감을 지니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 필요를 구하기를 원하신다(Hill). 그렇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많은 기도와 많은 노력을 통해 신에게서 탈취하듯 복(福)과 소원을 앗아옴으로써 그 간구한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6:9
너희는 -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우리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 된 주기도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가도 주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데(눅 11:2-4), 양식(form)적인 면에서 몇가지 상이(difference)점들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복잡한 견해들을 내놓고 있으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태는 그 중의 한 경우를 기록했고, 누가는 또 다른 경우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고다(Carson). 본문의 '너희'는 이방인들과 대조된 주의제자를 가리킨다.
이렇게 기도하라 - '이렇게'에 해당하는 원어는 '후토스'(* )로서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내용 및 그 순서상의 방법에 대한 모범적 제안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경고하신 바, 그릇되고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신것이다. 한편 여기서 '기도하라'(* , 프로슈케스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회적인 행동이 아닌 지속적(continual) 행동을 염두에 둔 명령이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듸이 '기도할 때마다'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호 엔토이스 우라노이스, * ) -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계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친히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 특히 원문서는 복수로 표기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3충천(天)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왕상 8:27)과 편재성(偏在性, 시 139:8;사 66:1)을 언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3충천의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다(시 33:14;사 57:15;63:15). 따라서 '하늘에 계신'이란 기도의 문두(文頭)는 당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전지전능하시며 초연하여 계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를 안고, 또한 하늘나라가 진정 자신들의 본향(本鄕)임을 인식하고 기도할 것을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아버지(* , 파테르 헤몬) - 구약에서는 여호사 하나님을 이렇게 호칭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반역은 '자녀들'의 반역으로(사 1:2). 하나님을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분으로 묘사하여(사 63:16)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것은 예수에게서였다(Jeremias, Prayers, pp. 11ff).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기도의 서두에 '우리 아버지'로 묘사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grounds of being)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닌 유일한 아버지(only father)이시다(엡 3:14, 15). 한편 '우리 아버지'(Our father)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라는 복수형태가 주기도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 예수의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독
특한 관계성을 정립(定立)시켜 주는 말로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시다(5:45). (2) 주기도문이 혼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제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며 드리는 기도의 모범(18:19)이 됨을 시사해 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주기도문의 본론에 해당하는 7개항의 기도 내용 중(앞선 3개항-찬양과 친국 도래 및 하나님의 주권 ; 뒤이은 4개항-개인의 현실문제) 첫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의 제1, 3계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출 20:3, 7).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며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의 그 자신이시다(출 3:14). 따라서 그의 이름에는 거룩하신 인격과 능력과 권위도 함께 한다. 그리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가치만큼 거룩하게 대접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레 19:2;겔 36:23;벧전 1:15). 즉 이 세상에는 그분의 이름만큼이나 거룩한 것은 없으므로 그 거룩한 이름이 주의 형상대로 창조함 받았으나 순수성을 상실(loss)해 버린 인간들의 천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경멸받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이다(말 1:6). 실로 간혹 '분리', '성별'이라는 의미로 생각되는 '거룩'은 하나의 속성이기보다 '하나님 자신'(What he is)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신성 자체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세속과 사악에서 구별되며, 절대무흠(無欠)하신 지존자(至尊者)요, 유일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사 29:23).
=====6:10
나라 -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거룩하시듯이 또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란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reign)가 미치는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나타났지만 세상 끝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막 1:15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28:10;눅 21:27, 28;계 21:1-8).
임하옵시며 - 사람들이 하나님께 머리숙여 복종하고 또 구원의 종말론적 축복을 미리 누림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며, 그 나라가 완성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고전 16:22;계 11:17;22:20).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기다렸으며, 메시야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었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Jeremias, Prayers, p.98).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에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나라가 시작되어 그 나라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 )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26:42)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같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이 실현되어야 하고, 동시에 절대적 순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한편 본문의 '하늘에서'란 하나님과 천사들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두번째의 간구('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의(義)가 지금 현재 온전히 성취된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이와 상용되는 '땅에서'란 말은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대상(타락한 이 지상과 역사와 인격들 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뜻은 현재 '하늘'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기에는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구현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메시야 왕국의 왕성을 뜻하는 기도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