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종
949년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 제 4대왕이 된 광종은 태조 왕건의 3남으로 이름은 왕 소이다. 3대왕 정종의 친아우이며 태조의 세 번째 부인 신명순왕후 유씨 소생이다. 신명순왕후는 충주를 대표하는 유긍달의 딸로 태조의 부인 가운데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왕후이다.
충주를 외가로 한 광종은 형 정종보다 정치적 세력이 더 막강하였다. 그 배경으로 황주를 기반으로 한 대목왕후 황보씨의 탄탄한 후광이 있었다.광종은 두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 번째 부인이 대목왕후 황보씨로 신정왕태후와 태조사이에 태어난 이복누이이고 또 다른 부인인 경화궁부인 임씨는 2대왕 혜종의 맏딸로써 광종에게는 조카가 된다. 광종은 동생 및, 조카와 결혼한 고려왕실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근친혼이었다.
2. 광종의 생애와 업적
광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끈기 있고 정력적으로 노력해 큰 성과를 거둔 왕이었다.
그의 치세(治世)는 즉위년∼7년, 7년∼11년, 11년∼26년 등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즉위년∼7년 첫째 시기(949~955)
이때에는 왕권강화와 관련된 정책은 시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내정세는 평 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종대에 최승로가 “광종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三代: 중국의 하·은·주 3대)에 견줄 만하다.”고 격찬할 정도였다.
또한 중국 왕조와도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책을 통해 새 국왕으로서의 지위 및 그 정치기반을 닦아나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2) 7년∼11년 둘째 시기(956~960)
이때부터 호족세력의 제거와 왕권강화에 필요한 제도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956년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했고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노비안검법: 956년, 노비신분을 조사해서 전에 양민이었던 자를 해방하려
는 가히 혁명적인 조처.
당시 귀족들이 소유한 사노비는 전쟁포로이거나 가난한 양인 들이 많았는데 이제도를 시행함으로써 귀족들을 누르고 세금 을 낼 수 있는 양인을 늘림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킴.
▶과거제: 958년. 후주에서 광종 즉위를 축하하려온 사신 설문우를 따라온 쌍기의 충고를 받아 과거제를 실시함으로써 널리 재야의 젊은 지식인들을 모아 기반을 다짐으로써 왕권을 더욱더 견고히 함.
(고려시대에 벼슬길에 오르는 방법은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시험이 아닌 힘센 호족 가문에서 물려받거나 추천해서 임명되었다.)
▶백관 공복제 실시: 960년. 신하들의 예복을 등급에 따라 입도록 하는 제도.
이때까지 만해도 고려에는 정해진 관복이 없었다. 대부분 신라나 태봉국, 후백제 시절의 예복을 그대로 입고 다녔으므로 광종은 960년 백관들의 예복을 4가지로 정한 복식 제도를 공포하였다.
이는 고려가 통일 되고 42년이 지나서였고 과거제도를 통해 왕권
이 강화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윤 의상은 자색, 중당경 의상은 적색, 도항경 의상은 주황색, 소 주부 의상은 초록색을 입었다.
3) 11년∼26년 셋째 시기(961~976)
▶공포 정치의 시작:
특권을 박탈당한 공신들의 반발과 그들을 제거하려는 광종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시작되었다. 호족들은 역모를 꾸몄고, 광종은 역모의 낌새를 차리면 여지없이 제 거해 버렸다. 왕권강화책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호족세력에 대해 과감한 숙 청을 단행하였다.
① 사건의 발단은 평농 서사인 권신이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의 역모를 알려 광종 은 그들을 역모죄로 처벌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 이후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기회를
얻어 충직하고 어진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
를 참소하는 행태가 벌어졌다고 하였다. 또한 감옥이 항상 가득차서 따로 가옥
(假獄)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 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고 하였다.
② 당시 왕권안정에 대한 광종의 집념은 매우 강렬해 호족세력은 물론 골육(骨肉) 과 친인척에 대한 경계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한번 의심이 가면 살육마저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혜종과 정종의 아들마저도 비명에 죽어 갔다.
③ 심지어 말년에는 부인인 대목왕후와 자신의 외아들 경종마저 의심의 눈초 리로 쳐다보았다.
④ 또한 964년 석영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박수경 일가를 제거.
박수경 집안은 3명이나 되는 후비를 내기도 했고 왕식렴과 함께 정종과 광종에 적극적인 지원을 한 집안이었으나, 늘 호족들의 반란을 두려워하고 의심하던 광 종이 박수경의 3 아들을 모두 역모에 얽혀 숙청하였다.
▶963년 적극적인 불교 정책
호족세력 등 정치적 적대세력들의 반발도 더욱 거세져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광범위한 세력기반의 구축이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963년 왕권을 지지하는 화엄종 계열의 귀법사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와 재회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 정책을 펴 나갔다. 귀법사의 승려 균여와 탐문 등을 통하여 호족 세력의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을 끌어들이고 개혁을 지지해 주는 사회적 세력을 만들고자 하였다.
3.그외 광종의 업적
▶밖으로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
▶국방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영역을 서북과 동북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 시에,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
▶광종은 즉위 직후 각 지방의 공부의 양을 보고토록 지시.
공물의 수량과 세목 등을 정확히 챙겨 정부가 지방조세를 직접장악.
▶963년 제위보를 설치하여 빈민에 대한 구제사업은 좀더 적극적으로 실시.
▶968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 가지 시책을 펼쳤는데 혜거를 국사(國 師)로 삼고, 탄문을 왕사(王師)로 삼음으로써 고려국사·왕사제도의 체계를 완 성하였다.
4.평가와 의의
광종(光宗)은 제2대 혜종, 제3대 정종과 여러 면에서 대비되고 있다. 우선 재위기간도 혜종의 2년, 정종의 4년보다도 훨씬 긴 26년이었다. 그리고 혜종과 정종이 각각 박술희와 왕식렴으로 대표되는 측근의 세력기반에 의지해 왕권을 부지한 반면, 광종은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왕권을 확보하였다.
따라서 광종은 주변세력의 영향력 없이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 결과 태조 이래 열세에 놓여 있던 왕권을 호족세력보다 우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광덕(光德)’·‘준풍(峻豐)’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명명하였으며 만년에 ‘황제(皇帝)’라는 호칭까지 사용하는 것은 모두 그 결과물들이라 할 수 있다.
광종의 노력으로 국가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왕권의 한계성도 함께 노출되었다. 왕권 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는 침투하지 못했고 호족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호족세력에 대한 왕권의 일방적 승리는 아니었다. 그가 죽고 경종(景宗)이 즉위한 이후에 나타난 대대적인 반광종운동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광종의 치적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상훈과 추모시호는 대성(大成)이며, 능은 헌릉(憲陵: 현재 경기도 개풍군 적유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