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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인문 교양 | 2011.07.02 20:1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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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란 단어를 접하는 나의 첫느낌은 ’읽고 싶다’ 다. 그 ’읽고 싶다’란 말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이렇다. 인문학은 왠지 어려울 것 같다. 읽고 싶다. 읽어 볼까? 하지만 알아가는 것, 배운다는 것이 그 모든 주저함을 이겨버린다. 끝내 읽고야 말았으니까. 제목 ’길 위의 인문학’은 뭔가 다른 인문 도서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어려울 거라는 인문도서의 선입견을 벗어나 쉬운 서술의 책이었으므로. 거기에 하나 더, 예상대로 많은 지식을 얹어 주었다는 점. 옛 학자들이 어찌하여 한권의 책을 여러번 마르고 닳도록 반복해 읽었는지 그 이유가 간파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맘 같아선 (정치개혁에 실패한 고려 충선왕이 성리학 연구를 펼치고자 아들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하고 지은) ’만권당[萬卷堂]’ 과 같은 나만의 작은 도서관에서 몇일몇날 인문도서에 심취하고 싶었다. 알면 알 수록 배우면 배울 수록 그 갈증은 끝이 없다. 1부, 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 이란 주제아래, 퇴계 이황 선생을 필두로 남명 조식,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허균- 에 이르기까지 대략 1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김이재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분들이다. 개인적으로 평소 흠모하던 학자들이기도 하다. 특히 이황, 김정희, 정약용. 길할 인물은 태몽도 남다르다더니, 이황 선생의 어머니는 유교의 창시자이자 동양 최고의 스승인 공자를 대면하고 그의 문하에 드나드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선생은 길몽에 걸맞게 청나라 대학자 양계초(梁啓超)와 신해혁명 당시 혁명 수령이었던 려원홍(黎元洪)의 찬가에서도 증명하듯 그는 조선 역사에서 국보급 유교사상가로 불리운다. 또한 퇴계 선생의 뛰어난 학문성은 일본.중국 그리고 미국의 유명 동양학자들이 ’퇴계학 국제 학술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이럴 때 나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긍심이나 자부심이 느껴진다. 2부, 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파란만장한 역사의 보고, 서울 성곽에 대한 장황한 기술이 나온다. 특히 서울 뚝섬에 대한 기원이 눈에 띤다. 과거 왕이 군사훈련을 직접 지휘하면서 커다란 깃발을 땅에 꽂았는데, 그 깃발을 ’독기’라 했단다. 그 ’독기를 꽂은 섬’이란 뜻의 독섬이 ’둑섬’으로, 다시 오늘날의 뚝섬’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렇듯 유래나 기원은 항상 나의 호기심을 간질인다. 그런데 찬란했던 서울 성곽도 군사시설로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유인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내란 때조차 선조와 인조는 적이 가까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접하기 무섭게 도성을 버리고 피난해 버렸기 때문. 또 한 곳,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이 태어난 곳이면서 고려때 삼별초가 처음 결성되었다는 강화도. 병인양요로 프랑스군이 퇴각하면서 조선 후기 왕실 문화의 보고였던 외규장각 도서들을 약탈해갔던 곳도 바로 강화였다. 다행히 그때의 강화군 외규장각 도서들은 올 4월 1차 반환을 시작으로 145년만의 고국 귀환이라는 역사적 쾌거로 떠들썩했었다. 이밖에도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고향 강릉과 금강따라 흐르는 우리의 역사, 은유와 상징의 집, 양동마을과 향단이라는 건축양식에 대한 설명으로 과거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뿌듯함을 다시금 부각시켜주었던 도서, 나는 차후 이 도서를 역사지침서로 반복해 읽어야 하는 목록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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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책사랑이=글사랑이, 같은 분 아닐까?
<동주>연재가 끝나고 그냥 허전하여 무심코 열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 댓글에 답글이 줄줄이 달린 숫자 표시가 뜨는 거예요. 우찌 선생님이 또 답글을 쓰셨을까?
놀라서 열어봤더니 '글사랑이'라는 분이더군요.
그 댓글 속에서도 '길 위의 인문학'에 대한 짤막한 도입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다시 보네요.^^
딩동댕.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