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64주년 광복절에 위당 정인보가 작시한 광복절 노래를
곰곰히 음미하며 그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보았다.
조국의 광복을 누구보다 열망했고
일제강점기에 민족자존을 위해 목숨까지 내걸었던
인물로는 바로 만해 한용운을 감히 꼽는다.
"풍난화 매운 향기
님에게야 견줄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가 이 위 없으니
혼아, 돌아오소서."
위당 정인보는 한용운을 추모하는 유명한 시를 남긴다.
승려, 시인, 연설가, 독립 투사로서 일생을 살아온 한용운은
조국의 독립을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대의 아픔을 속으로 켜켜이 쌓아오다가 영양실조가 겹치면서 열반에 든다.
벽초, 위당, 몽양 등 여러 민족지사는 한용운을
차마 일인이 운영하는 홍제동 화장장으로 옮기지 못한다.
그는 미아리로 보내 미아리의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은 안치된다.
만해 한용운은 조선 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땅(지금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이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이었다.
어린 유천은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9살이 되던 해에《서상기 西廂記》와《통감 通鑑》을 독파하고
《서경 書經》에도 능통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이렇게 뛰어난 유천의 재능에 대하여 조용한 두메산골 박철 부락 에서는
칭찬이 자자하게 퍼져 나갔다.
국내정세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러일전쟁(1904∼1905)이 끝난 후 한반도의 정세는 날로 악화되고
국운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군국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굴욕적인 을사늑약(1905)이 강제로 체결될 때
2천만 민족의 분노는 하늘에 닿았다.
안중근(1879-1900)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통쾌하게 사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한용운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만 섬의 끓는 피여! 열 말의 담력이여! 벼르고 벼른 기상 서릿발이 시퍼렇다.
별안간 벼락치듯 천지를 뒤흔드니 총탄이 쏟아지는데 늠름한 그대 모습이여! "
1919년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한용운의 꼿꼿한 성격은 '독립선언서' 뒤에 붙은 '공약삼장'에 잘 나타나 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쓸 당시 최린에게 "나는 학자로서 일생을 마치기로 했으니,
이번 운동의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네.
그러나 독립선언문의 기초는 내가 잡아 보고 싶네."라고 말했다.
최린에게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선생은 자신이 독립선언서를 쓰겠다면서,
"비겁하게 앞에 나서지도 않을 사람이 쓴 독립 선언문은 필요 없소.
더구나 문장도 너무 한문 투라서 일반 백성들이 읽기에도 불편합니다.
내가 새로 써 보겠소이다."
주변 사람들은 한용운의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며 말렸다.
결국 그의 뜻에 따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대목의 '공약삼장'을 덧붙이게 되었다.
그래서 독립선언서보다 더 강한 독립의지를 담고 있는 공약삼장이 탄생된 것이다.
기미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최린의 사회로
"이제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만해의 축사와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마포경찰서로 잡혀가게 되었다.
붙잡혀간 독립지사들은 말할 수 없이 심한 고초를 당해야 했다.
국가내란죄로 사형된다는 소문에는 모두 마음이 약해졌다.
미결수로 있는 동안 너무 힘들어 눈물 흘렸다.
"나라 잃고 죽는 것이 서럽거든 당장에 취소하라"
그들에게 똥통을 둘러엎으며 만해는 불호령을 내렸다.
재판때 스님의 취조 차례가 왔지만 처음부터 입을 열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 보아도 재판장의 인정신문부터 묵살해 버렸기 때문에
재판은 조금도 진행되지 못했다.
하루는 재판장이 피고는 왜 말이 없느냐고 다그치자
그는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백번 마땅한 노릇인데 일본인이 어찌 감히 재판하려 하느냐’고 오히려 호령을 했다.
재판정에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재판장의 물음에 대하여
그는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몸이 없어지면 정신만이라도 남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너희 나라에 승려 월조대사가 있지 않느냐,
조선에도 한용운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대답했다.
3·1운동 직후 재판장에서 ‘내 육신이 죽어 썩어 문드러진다면
정신이나 영혼이나마 영원토록 민족운동을 해 나갈 것이다’라고 밝혔듯이
한용운은 입적하는 날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당당한 독립지사로 살았다.
그는 민중들을 지도하고 계몽하려면
역시 언론의 힘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생각하였다.
그래서 늘 신문사 경영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눈치 챈 총독부에서는 식산은행을 통하여
서류 뭉치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
"왜 도장을 찍으라는 거요?"
"성북동 일대의 산림 20여만 평을 무상으로 드리려는 겁니다.
도장만 찍으시면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돌아앉았다.
"난 그런 거 모르오! 어서 나가보시오."
한용운은 말년(1933년, 55세)에 이르러 비로소 성북동 막바지에 집 한 칸을 갖게 되었다.
마음 놓고 기거할 방 한 칸 없는 생활을 보다 못한 몇몇 뜻있는 분들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당시 조선일보사 사장이던 방응모 선생이 다시 서울로 돌아온 스님께 거처를 마련해주려 하자
벽산 스님이 토굴을 지으려고 성북동에 마련해 놓았던 54평의 땅을 기꺼이 내놓았다.
거기에 60여 평을 더 보태어 20평 정도의 한옥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집을 지을 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았다.
이것을 본 그는 “그건 안 되지, 남향이면 바로 조선총독부를 바라보게 될 터이니
차라리 좀 볕이 덜 들고 여름에 좀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낫겠어.”
하며 주춧돌을 돌려놓아 북향집이 되었다.
보기 싫은 총독부 청사를 자나 깨나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집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몸담았던 심우장(尋牛莊)이었다.
손수 지은 이 집의 택호(宅號)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소는 마음에 비유한 것이므로 마음자리 바로 찾아
위없는 큰 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란 뜻이다.
사랑방 문 위의 심우장 현판에는 '一滄'이라는 아호가 보인다.
이는 서예가 유치웅(1901-1998)이시다.
위창 오세창이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대청에는 경남 사천에 있는 다솔사에서 가까운 도반과 지인들이 마련해준 회갑연에서
찍은 기념사진이 초상처럼 걸려 있다.
그 성북동 골짜기에 집을 짓고 이름하기를 심우장이라 했다.
이곳에서 한용운은 마지막까지 몸과 마음을 닦았다.
조선의 땅 어디라도 왜놈의 발아래 짓밟히지 않은 곳이 없어도,
이곳 심우장 만은 민족의 혼을 간직하고 조국을 지켜준 마지막 보루였다.
조선의 땅에 핀 한 그루의 무궁화였다.
한용운은 성품이 강직해서 일제에 아부하며 사는 자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았다.
일본이 중국 침략으로 제국주의적 식민 활동에 박차를 가할 무렵이었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아부하여 가짜 일본인 되기에 광분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하루는 지기(知己) 한 분이 선생을 방문하여 대단히 격분한 어조로
"이런 변이 있소!
최린(崔麟:佳山麟)て윤치호(尹致昊:伊東致昊)て이광수(李光洙:香山光郞)て주○○(松村*一)て이○○(岩村正雄) 등이
창씨개명들을 했습니다. 이 개자식들 때문에 민족에 악영향이 클 것이니 청년들을 어떻게 지도한단 말이요! "
이 말을 듣고 난 선생은 크게 실소하고는,
"당신이 그 자들을 과신(過信)하는 듯하오. 그러나 실언(失言)하였오.
만일 개가 이 자리에 있어 능히 말을 한다면 당신에게 크게 항쟁할 것이오.
'나는 주인을 알고 충성하는 동물인데 어찌 주인을 모르고 저버리는 인간들에 비하느냐?'고 말이요.
그러니, 개보다 못한 자식을 개자식이라고 하면 도리어 개를 모욕하는 것이 되오."
한번은 문학 친구 이광수가 찾아왔다.
그가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지라
집안에 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는 호통을 쳐서는 쫓아낼 정도였다.
그리고 육당 최남선이 변절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지들을 불러 모아 '최남선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다.
그 뒤 우연히 파고다공원-지금의 탑골공원-인근에서 그를 만나자 외면했다.
최남선이 인사를 하고 성명을 대자" 나는 최남선을 모른다"
그래도 또 옷깃을 잡으며 말하자
"내가 알고 있는 최남선은 이미 장사를 치러서 저승으로 보내버렸다"고 경멸했다.
어느 날 친구 홍재호(洪在浩)가 그와 더불어 한가히 잡담을 나누던 중
무심코 일본 말을 한 마디하였다.
한용운은 하던 얘기를 중단하고,
"나는 그런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오."
하고 말했다.
"선생, 내가 그만 실수를 했구려. 그러나 때가 때인 만큼 안 쓸 수도 없지 않습니까? "
홍재호는 변명하였다. 그러자 한용운은 그의 뺨을 한 대 철썩 때리고는 쫓아버렸다.
한용운은 심우장에 살 때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적에 검거되어
그 후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애국지사 일송 김동삼 선생이 별세하자
그의 유해를 인수해서 자기 방에 놓고 5일장을 지냈다.
한번은 최린이 심우장을 방문하여 딸 영숙에게 100원을 주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몹시 화를 내며 부인과 영숙을 꾸짖었다.
그리고 영숙이 받았던 돈을 가지고 최린의 집을 찾아가 그 돈을 문틈으로 던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일본이 통치하는 동안 그들은 처음엔 민적(民籍), 그 후엔 호적법(戶籍法)을 실시했다.
한용운은 처음부터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하며,
시집 《님의 침묵》에도 '나는 민적이 없어요'라는 구절이 있듯이 평생을 호적 없이 지냈다.
그래서 그가 받는 곤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 모든 배급 제도(쌀 고무신 등)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보다도 큰 문제는 그가 귀여워하던 외딸 영숙이가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점이었다.
아버지가 호적이 없으니 자식 또한 호적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본놈의 백성이 되기는 죽어도 싫다.
왜놈의 학교에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하고는 집에서 손수 어린 딸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그는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혁명적인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렇게 열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눈앞에 두고 육신을 털어버린 곳이 성북동 심우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