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이 강하다구요? 알고 보면 코미디언이에요" 손 ㆍ 병 ㆍ 호
삼류 조직의 잔인한 두목, 정신분열증의 포악한 남편, 두뇌 게임을 즐기는 테러조직의 보스. 손병호는 <파이란><인디안 썸머><비너스>에
연속적으로 악독한 악당으로 등장하고 있다. 영화에서 본 손병호라면
조그만 말실수에도 양은쟁반이 당장 날아올 듯 하지만 잠시라도 그와
이야기하게 되면 그런 걱정은 헛된 상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용식이도 참 불쌍한 놈이다
우정도 의리도 없는 악한 용식을 연기한 손병호는 연속해서 악인으로
등장한다. 그가 악역을 많이 맡는 데에는 그의 강한 첫인상에 큰 이유가 있다. "안경을 쓴 것도 눈이 나빠서가 아니라 강한 눈빛을 좀 가리려고 쓴 거예요.
옛날 연극할 때 선배들 앞을 지나가면 불러 세워놓고 눈풀어 눈풀어
라며 혼내곤 했어요. 눈빛이 강해서 조금만 눈 사이를 찌푸려도 사람들이 겁낼 정도였어요. 내 삶이 그랬으니까 은연중에 나오는 것 같아요. 연극을 한다는 것 자체가 치열하지 않으면 안됐고."
그런 그가 가진 강한 이미지에 역중의 악인 이미지까지 가세해 그 캐릭터로 굳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연기자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민이다. "악역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것 같아요. 그 속에서 인간적인 삶만 잘 표출한다면 미운 악역이 아니라 애정
받는 악역이 될 수 있겠죠. 악역도 제대로 잘해야 손가락질 받는 거잖아요." 이렇게 그는 열린 연기자로 자신이 맡은 역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영화를 통해서 본 손병호는 그가 가진 한 일부분 중이지 전부가 아니다. 그는 순간의 연기에 열중해서 그 감정에 몰입했던 것임을 우리는
잘 잊어버리곤 한다. 실제로 그를 만나면 눈매가 매섭다는 인상은 순간적인 느낌일 뿐이다. "저 사실 부드러운 남자예요. 주변 사람들은 저보고 코미디언이라고 말하거든요." 아무리 손병호가 악인만 주로 맡는다고 해도 그의 눈빛에 보여지는 강한 열정과 미소 짓는 입술에서
드러나는 선함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악역도 제대로 해야 사랑받지!
<파이란>의 동네 깡패조직의 보스인 용식이는 입단 동기인 강재(최민식)와는 달리 차갑고 잔인한 인물이다.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자는 살인이든 배신이든 물불 가리지 않고 제거한다. 그런 인간에게 무슨 정을
느낄 수 있겠냐마는 그도 사람인지라 미운 정이라도 들게 된다. "이 인물도 강재와 마찬가지로 삼류인생이에요.
보스가 되긴 했지만 작은 나이트클럽하고 직업소개소 정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파 아이들이 치고 올라오니까 항상 긴장되고 숨가쁘게 살게 되죠. 그는 그런 삶이라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입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정신병적으로 똘마니들을 내리 찍는
잔인한 용식이가 정말 불행하고 힘든 삶을 사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미친 듯이 소리치면서 때리는 그 자체가 연민 아니겠습니까. 발악하는 거죠. 내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라면서 울분을 터뜨리는 거죠. 나름대로 애정이 갔어요. 좋은 캐릭터인 것 같아요."
연기는 깨달음이라...
그는 연기란 깨달음이라는 말을 한다. 연기가 일상의 모방이라고 해서 흉내내기에 그친다면 연기자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거친 후 깨닫게 되는 것들은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실한 연기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자기만의 체험담이나 고생담,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아프거나 했던
경험들은 분명히 연기에 도움이 됩니다. 인간의 감성이나 표현 방법에서 깨닫는 것들이 연기자의 폭을 넓히는 것 같고 그게 연기인 것 같아요. 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해요. 맡고 있는 역할에 집중하는 순간 생기는 감정 그것이 순간의 진실일 테니까."
그는 연기의 첫발을 내딛는 어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을 믿어라. 여기에 컵이 없어도 있다고 믿어라. 니가 믿으면 남들도 믿는다. 그게 연기자에게는 중요하다." 나 자신에 충실한 것이 바로 진실에 가까워지는 방법이 아닐까. 거짓으로 만들어진 상황이지만 그 순간 집중해서 표출되는 감정은 순수한 진실일 것이다.
손병호가 영화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진솔한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배우
손병호가 연기해 내는 인물이 아무리 죽일 놈이라고 해도 매력적인
인간미를 풍기고 있을 것 같다. 항상 열린 마음으로 내적인 변신을 시도할 손병호의 연기는 우리에게 언제나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 신선함과 옛 친구를 만나는 친숙함을 동시에 전해 줄 것이다.
프로필
영화 <비너스>(2001)
<인디안 썸머>(2001)
<파이란>(2001)
<유령> (1999)
<소풍>(1999)
<우리 시대의 사랑> (1994)
연극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태>
<춘풍의 처>
<백마강 달밤에>
<도라지>
<천년의 수인>
<잃어버린 강>
<블루 사이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