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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태조
고려 태조로 후삼국을 통일한 왕. 재위 918년~943년.
아버지는 금성태수 왕륭(王隆)이며, 어머니는 한씨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고, 이 해 그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었다.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몰아내고 철원에서 왕위에 올라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이흔암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이 당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24년 7월 고려와 후백제의 군사력 우열을 가리는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조물성전투가 그것이다. 조물성은 낙동강 상류의 안동과 상주 사이 지역으로 추정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전투에서는 피차 정예군이 총출동하여 대결하였으나 고려에서는 장군 애선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고, 후백제도 별 소득 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낙동강 유역에서 고려의 군사력이 커지고 신라와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자 후백제 견훤(甄萱)은 927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압박하였고,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의 고려군은 11월 대구 공산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하였고, 견훤의 군대가 왕건을 포위 공격하여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대장 신숭겸, 김락 등이 사력을 다하여 왕건을 구출하고 그들은 마침내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는 안동에서 벌어진 930년의 고창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10월에는 신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게 되어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하여 졌다. 마침내, 936년 9월 신검의 후백제군과 낙동강 지류인 일리천전투에서 최후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능은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 소재 현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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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감찬
고려 전기의 명장으로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수.
초명은 은천(殷川). 경주에서 금천(衿川 : 지금의 서울 금천구)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며,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된 후 한림학사·이부상서 등을 지내고, 1018년(현종 9)에는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와 서경(지금의 평양) 유수를 겸하였다.
당시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자주 고려에 칩입하였는데, 해를 거듭하는 침략에도 불구하고 별 성과를 보지 못하자 1018년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삼아 고려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12월 10일, 소배압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강감찬은 총사령관격인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의 대군을 이끌고 안주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그는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으로 전진하여 정예기병 1만 2천명을 산기슭에 잠복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인 삼교천을 막아두었다가 적군이 달려오자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적을 수장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패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지금의 개성)을 침공하려고 남진하다가 강민첨의 침공을 받아 자주의 남쪽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대패하였다.
거란의 소배압은 거듭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진하여 이듬해에는 개경을 위협하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전선에서 1만명의 병력을 후송 배치하여 개경을 방어케 하고 동북지방의 3천 병력도 들어와 원조케 하는 한편, 도성 밖의 백성들을 성 안으로 철수시켜 거란군에 대항하였다. 거란군이 거듭되는 패전으로 사기를 잃은 데다 수도 일원의 방비도 철통 같았으므로 소배압도 개경 공략이 불가능함을 알고 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군 도중 영변에 이르렀을 때 고려군의 습격을 받아 5백여의 군사를 잃고, 2월 1일 귀주에서는 강감찬의 맹공을 받아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침입군 10만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2월 6일 강감찬이 3군을 거느리고 개선하자 현종은 친히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친히 금화팔찌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귀주대첩 후 거란은 침략 야욕을 버리고 고려와 평화적 국교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감찬은 이후에도 개경에 나성을 쌓을 것을 주장하여 국방에 큰 공을 세웠으며, 말년에 문하시중(재상)이 되어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며 나라를 다스렸다. 재상으로 있을 때 중국 송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내가 문곡성을 못 본지 오래 되었는데, 그 별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면서 강감찬에게 하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현종 묘정에 배향되고 문종 때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낙성대(落星垈, 서울시유형문화재 제4호)는 바로 강감찬의 출생지를 기념하여 세운 유적지이며, 그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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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최충헌
고려 후기 무신정권의 기틀을 세운 집권자.
상장군 최원호의 아들로, 1174년(명종 4) 조위총의 난 때 원수 기탁성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별초도령이 되었으며, 뒤이어 섭장군이 되었다. 1196년에 아우 최충수, 생질 박진재 등과 함께 당시 실력자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집권하고 나서 그동안 누적되었던 폐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십조>를 올려 집권의 명분을 삼으면서 왕의 측근 50인을 추방하고 좌우승선을 거쳐 지어사대사가 되었다. 그해 9월에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하자 왕을 창락궁에 유폐한 뒤 신종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정국공신에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 주국이 되어 최씨 독재정권의 길을 텄다.
1198년(신종 1)에 만적(萬積)의 난을 평정하고, 그 이듬해 황주목사 김준거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였다. 1204년 신종을 폐하고 희종을 옹립한 후벽상삼한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판병부어사대사 태자태사에 오르고, 1206년(희종 2) 진강후가 되고 흥녕부를 세웠는데, 이때부터 그를 시종하는 문객이 3,000여인이나 되었다. 1211년 내시낭중 왕준명 등의 계책으로 궁궐에서 죽을 뻔하였으나, 도방의 구출로 살아난 뒤 왕을 원망하고 이를 폐위하여 강화로 내쫓고 강종을 즉위시켰다.
이듬해 그의 흥녕부를 고쳐 진강부라 하였으며,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에 봉하여졌다. 무신정권 수립 이후 하층구조와 사원 세력에 의한 반란이 거듭 일어났는데, 최충헌이 집권한 뒤에도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1198년에는 개성에서 만적의 난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에는 명주(지금의 강릉) 및 동경(지금의 경주)에서 도둑이 일어나 주군을 약탈하였으며, 최대의 등이 난을 일으켰다. 또한, 1200년에는 진주의 관리 정방의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금주(지금의 김해)에서는 잡족인이 난을 일으켜 호족을 죽였으며, 1202년에는 탐라(지금의 제주도)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경주에서는 별초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듬해에는 영주 부석사와 대구 부인사의 중들이 반란을 꾸미다가 잡혀 귀양갔다. 이렇게 거듭 일어나는 반란에 대하여 강경책을 써서 토벌을 강행하는 한편, 회유책을 써서 반란을 진압시키는 데 성공하여 그로 하여금 강력한 집권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중요한 뒷받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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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초조대자경
1) 대장경(大藏經) : 경 율(律) 논(論) 등 3장(藏)의 불전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2) 배경 : 성종(成宗) 10년 중국 북송의 개보(開寶) 판대장경이(송국판본) 전래로 큰 자극을 받았고 게다가 현종(顯宗) 2년 거란(契丹) 침입으로 대장경의 각판을 시작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
3) 과정 : 현종(顯宗) 때부터 시작되었다가 일시 중단되었다가 문종(文宗)에 이르러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문종(文宗) 17년 거란(契丹)대장경 수입 후에도 계속되어 문종(文宗) 27년 거의 마무리되고, 선종(宣宗) 4년에 일단락되었다. 그 이후 수입된 것은 추가 형식으로 조판 수록.
4) 저본이 된 것은 거란(契丹)본 수입 이전은 송(宋)본이고, 거란(契丹)본 수입 이후는 거란(契丹)본을 바탕으로 하고, 또한 송 대장경에서 신역 경론(經論)과 정원선사 이후의 경론(經論)을 받아들였다.
5) 규모 : 대략 570함, 6천 권. 당시 동양에서 조판한 한역(漢譯) 대장경 중 가장 큰 규모이다.
6) 의의 : 동양에서 우리 초조본이 가장 포괄적으로 경론을 수록하였다. 송(宋)본을 저본으로 하면서도 우리 나름의 수정을 가한 판서본을 마련하였다.(=조판의 우수함) 무수한 대형 판화가 정교하고 섬세하게 새겨졌다.→판화사상 초유의 일
5.최영
고려 후기 왜구 퇴치에 공을 세운 명장·재상.
평장사를 지낸 최유청의 5세손이며, 사헌규정 최원직의 아들이다. 처음에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우달치에 올랐고, 1352년(공민왕 1)에 안우 등과 함께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이 되었다가, 1354년에 대호군이 되었다. 이때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유탁·염제신 등 40여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가 공을 세우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1357년 동북면체복사를 거쳐 이듬해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가 되어 배 400여척으로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1359년 홍건적 4만명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생양·철화·서경·함종 등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이듬해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가 되었다. 1361년 홍건적 10만이 다시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하였으며, 그 공으로 훈 1등에 도형벽상공신이 되었고, 1375년(우왕 1) 판삼사사가 되었다.
이듬해 7월 왜구가 부여지방으로 칩입하여 공주를 점령하였는데, 원수 박인계가 이를 방어하다가 연산 개태사 전투에서전사하였다. 이 패보를 접한 최영은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왕의 허락을 받은 후 전지로 부임하여 홍산에서 왜구와 대치하였다. 왜구는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험의 요지를 선점하고 군세를 과시하며 고려군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나 최영은 직접 군졸을 지휘하여 왜구를 섬멸하고,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이 되었다. 1378년 왜구가 승천부(지금의 풍덕)에 침입하자, 이성계·양백연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이 되었다.
1388년 문하시중이 되어 왕의 밀령을 받아 부패와 횡포가 심하던 염흥방·임견미 일당을 숙청하였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이동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 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는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달래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 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그는 이성계에게 잡혀 고향인 경기도 고양으로 귀양갔다가 그해 12월 개경에서 참수되었다. 개풍군 덕물산에 있는 적분은 바로 그의 무덤으로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다 하며, 그 산 위에 장군당이 있어 무당들의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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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태조 왕건의 훈요 10조
여름 4월에 왕이 내전(內殿)에 나가 앉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希)를 불러서 친히 훈요(訓要)를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 들으니 순임금은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지었으나 마침내 요 임금의 왕위를 받았으며 중국의 한고제(漢高帝)는 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 나라의 왕업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나도 역시 한 개 의로운 평민으로서 그릇되게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다.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19년 동안 노심초사한 끝에 삼한을 통일하여 외람스럽게 왕위에 있은 지가 25개년이나 되었고 몸도 벌써 늙었다. 후손들이 감정과 욕심에 사로잡혀 나라의 질서를 문란시킬듯 하니 이것이 크게 근심스럽다. 이에 훈계를 써서 후손들에게 전하노니 아침 저녁으로 펼쳐 보아 영구히 모범으로 삼게 하기를 바란다. 첫째로, 우리 국가의 왕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불교 사원들을 창건하고 주지들을 파견하여 불도를 닦음으로써 각각 자기 직책을 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 간신이 권력을 잡으면 승려들의 청촉을 받아 모든 사원을 서로 쟁탈하게 될 것이니 이런 일을 엄격히 금지하여야 한다. 둘째로, 모든 사원들은 모두 도선(道詵)의 의견에 의하여 국내 산천의 좋고 나쁜 것을 가려서 창건한 것이다. 도선의 말에 의하여 자기가 선정한 이 외에 함부로 사원을 짓는다면 지덕(地德)을 훼손시켜 국운이 길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 공후, 왕비, 대관들이 각기 원당(願堂)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은 사원들을 증축할 것이니 이것이 크게 근심되는 바이다. 신라 말기에 사원들을 야단스럽게 세워서 지덕을 훼손시켰고 결국은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셋째로, 적자(嫡子)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것이 비록 떳떳한 법이라고 하지마는 옛날 단주(丹朱)가 착하지 못하여 요가 순에게 나라를 위양한 것은 실로 공명정대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후세에 만일 국왕의 맏아들이 착하지 못하거든 왕위를 지차 아들에게 줄 것이며 지차 아들이 또 착하지 못하거든 그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신망이 있는 자로써 정통을 잇게 할 것이다. 네째로, 우리 동방은 오래 전부터 중국 풍습을 본받아 문물 예악 제도를 다 그 대로 준수하여 왔다. 그러나 지역이 다르고 사람의 성품도 각각 같지 않으니 구태어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 그리고 거란은 우매한 나라로서 풍속과 언어가 다르니 그들의 의관 제도를 아예 본받지 말라! 다섯째로, 내가 삼한 산천 신령의 도움을 받아 왕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으로 되어 있으니 만대 왕업의 기지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사시절의 중간 달에 국왕은 거기에 가서 1백 일 이상 체류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게 할 것이다. 여섯째로, 나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하늘의 신령과 5악(岳), 명산, 대천, 용신(용의신)을 섬기는 것이다. 함부로 증감하려는 후세 간신들의 건의를 절대로 금지할 것이다. 나도 당초에 이 모임을 국가 기일(忌日-제사날)과 상치되지 않게 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굳게 맹세하여 왔으니 마땅히 조심하여 이 대로 시행할 것이다. 일곱째로, 임금이 인민의 신망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 신망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간하는 말을 좇고 참소하는 자를 멀리하여야 하는바 간하는 말을 좇으면 현명하게 된다. 참소하는 말은 꿀처럼 달지마는 그것을 믿지 않으면 참소가 자연 없어질 것이다. 또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되 적당한 시기를 가리고 부역을 경하게 하며 조세를 적게 하는 동시에 농사 짓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하게 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좋은 미끼 끝에는 반드시 큰 고기가 물리고 중한 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있으며 활을 겨누면 반드시 피하는 새가 있고 착한 정치를 하면 반드시 착한 백성이 있다고 하였다. 상과 벌이 적절하면 음양이 맞아 기후까지 순조로워지나니 그것을 명념하라! 여덟째로, 차현(車峴) 이남 공주(公州)강 바깥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반대 방향으로 뻗었고 따라서 인심도 그러하니 그 아래 있는 주군 사람들이 국사를 참여하거나 왕후, 국척들과 혼인을 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것이요 혹은 백제를 통합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방 사람들로서 일찍이 관가의 노비나 진(津), 역의 잡척(雜尺)에 속하였던 자들이 혹 세력가들에 투탁하여 자기 신분을 고치거나 혹은 왕후 궁중에 아부하여 간교한 말로써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또 그리함으로써 재변을 초래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은 비록 양민(良民)일지라도 관직을 주어 정치에 참예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홉째로, 배관의 녹봉은 나라의 대소에 따라 일정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니 현재의 것을 증감하지 말라! 또 옛문헌에 이르기를 공로를 보아 녹봉을 규정하고 사사로운 관계로 관직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만일 공로가 없는 사람이나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으로서 헛되이 녹봉을 받게 되면 다만 아래 백성들이 원망하고 비방할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신도 역시 그 행복을 길이 누릴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엄격하게 이를 경계해야 한다. 또 우리는 강하고도 악한 나라(거란)가 인방으로 되어 있으니 평화 시기에도 위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병졸들을 보호하고 돌보아 주어야 하며 부역을 면제하고 매년 가을에 무예가 특출한 자들을 검열하여 적당히 벼슬을 높여 주라! 열째로, 나라를 가진 자나 집을 가진 자는 항상 만일을 경계하며 경전과 력사 서적을 널리 읽어 옛일을 지금의 교훈으로 삼는 것이다. 주공(周公)은 큰 성인으로서 무일(無逸)한 편을 성왕(成王)에게 올려 그를 경계하였으니 마땅히 그 사실을 그림으로 그려 붙여 드나들 때에 항상 보고 자기를 반성하도록 하라!" 이 열 가지 훈계 끝에 일일이 중심장지(中心藏之-마음 속에 간직하라)라는 네 글자를 붙여서 후대의 왕들이 전해 오면서 보배로 여기게 하였다.
7.고려청자(청자어용형주자)
청자어용형주자(靑磁魚龍形注子)는 물고기 모양의 몸체에, 연꽃 봉오리와 연잎이 달린 줄기를 모아 엮은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물고기는 양각된 겹꽃잎 연화좌 위에 배를 대고 꼬리를 힘차게 틀어올린 모습인데, 입으로 물을 붓도록 되어 있고 꼬리 부분은 뚜껑이다. 물고기의 머리가 마치 용의 머리처럼 보이므로 어룡(魚龍)이라 불러왔으며, 황해에 사는 물고기의 일종인 호가 이러한 모습과 비슷하다고도 전해진다. 물고기의 머리 밑에 날개와 같은 큰 가슴지느러미가 양각되었고 온몸에 비늘이 정성스럽게 양각되어 있으며 튀어나온 배지느러미에는 음각선으로 연골을 그려 넣었다. 지느러미와 연꽃 봉오리, 연잎의 끝에 백토(白土) 점과 선이 장식되어 있고 물고기의 눈에는 자토가 찍혀 있어 생동감을 준다. 조금 어두운 편인 비색 유약이 전면에 입혀져 있고 빙렬(氷裂)은 없다. 뚜껑과 몸체가 닿는 부분 및 굽 바닥은 태토가 드러나 검붉은 빛을 보이지만 굽 안쪽 바닥에도 유약을 입혔다. 꼬리의 끝부분은 떨어져 나가 원형을 잃은 상태이다. 두 작품 모두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청자 가마터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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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각국사 의천
대각국사 의천은 문종의 아들이었다.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이름은 후(煦)이고 자는 의천(義天)이다. 고려 문종 인효왕(仁孝王)의 넷째 아들인 그는 왕자로서의 영화를 사양하고 승려가 되어 뒷날 우세승통(佑世僧統)에 봉해졌다. 시호는 대각(大覺)이며 문집 18권이 있고 영정은 선암사(仙岩寺)에 모셔져 있다. 고려는 불교 국가였으므로 승려 계급이 높았다.
고려 지배층 가운데 아들이 여럿 있는 사람은 그 중 한 아들을 승려로 출가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다. 승려가 될 자식은 출신 신분이 높든 낮든 어려서부터 사원에 들어가 행자(行者)가 되어 밥짓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등 고된 수련을 쌓아야 했다. 이 시련을 통과해야만 승려 생활을 수행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고된 행자 생활이 끝나면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사미승이 되어 스승을 정하게 된다. 여기서 정해진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후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면 그때부터 독립된 한 사람의 승려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어서 정식 승려가 되려면 국가의 공인이 있어야 했다. 불교 승려들이 보는 과거를 승과(僧科)라고 하는데, 국가에서는 승과에 합격한 승려를 다른 관리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공식적인 품계 조직에 포함시켰다.
승가에는 교종 승려를 선발하는 교종선과 선종 승려를 선발하는 선종선, 두 종류가 있었다. 교종선은 개경의 왕륜사에서, 선종선은 광명사에서 실시했다. 이러한 승과에 합격하면 우선 대선(大選)이라는 품계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다른 관직처럼 차례차례 승진하게 되는데, 그 정점에는 교종, 선종 구별없이 왕사(王師), 국사(國師)로 불리는 최고의 영예직이 있었다.
한편 국가에서는 불교를 관리하는 기관인 승록사(僧錄司)를 두어 승려와 교단 관련 업무를 관리하고 국가의 중요한 불교 행사를 주관하게 했다.
승려의 기본복식은 가사와 장삼인데, 승려계급이 매우 높았던 고려시대 승려복식에는 비단이 사용되기도 했다. 승려는 길을 갈 때 석장을 짚고 가는데, 꼭대기는 탑모양으로, 그 아래는 연꽃 모양으로 다듬었다. 머리 부분에는 벌레들이 듣고 피해 가라며 고리를 달아 소리를 냈다. 승려의 필수품 중 하나는 정수(淨水)를 넣는 정병이다. 여기 넣는 정수는 중생의 고통과 목마름을 덜어주는 감로수와 통한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5451&mode=title&query=%C0%C7%C3%B5&dircode=0
소감:나는 고려사전만들기프로젝트를 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알았다.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것과 단순한 일이 아니다는 것을 물론 나름대로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리고 오늘까지 숙제를 않해서 혼나서 반성을 하였다. 앞으로 난 숙제를 최대한 빨리 할것이다. 그리고 이 숙제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훗날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난 믿는다. 나는 이 힘든일들 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열심히 살것이다. 많은 뿌듯함을 느낀다. 하지만 카피한 것만 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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