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해(崔瀣,1287~1340)
익재 선생이 연우(延祐)초기에 사명을 받들고, 아미산(峨眉山)에 강향(降香)할 적에 〈서정록(西征錄)〉을 지어 초승(楚僧) 가모옥(可茅屋)이 서문을 하였고, 지치(至治) 말기에 이르러 또 태위왕(太尉王)을 맞기 위하여 임조(臨洮)를 지나 하주(河州)에 이를 적에 〈후서정록(後西征錄)〉을 지어 나에게 내보이며 서문을 짓게 하였다.
나는, 오직 만 리의 땅을 가보지 않고 만 권의 서적을 읽어보지 않고서는 두보(杜甫)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알고 있는데, 천박한 지식으로 성편(成編)에 눈을 붙이는 것만도 오히려 참람하다 하겠거늘, 하물며 제사(題辭)를 쓰라는 명령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삼가 두어 번을 내리 읽을수록 사의(詞義)가 침착하다. 본시 가슴속에 충만한 충의가 물에 접촉하여 발로되었기 때문에 형세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언(媱言) 만어(嫚語)는 대개 한 구도 없으며, 회고(懷古) 감사(感事)의 구절에 이르러서는 뜻이 또한 정미하여 전배(前輩)의 가려운 곳을 긁은 데가 많았다.
회암 부자(晦庵夫子 주희〈朱熹〉)가 일찍이 구양공(歐陽公)의 한 연구(聯句)를 칭찬하며 이르기를, “시로 말하면 이는 제 일등의 시요, 의논으로 말하면 이는 제 일등 의논이다.” 하였는데, 나는 이 시에 역시 동감되는 바 있다. 짐짓 써서 명령에 답하는 바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남만성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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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益齋後西征錄序
益齋先生。在延祐初。奉使降香峩眉山。有西征錄。楚僧可茅屋序矣。至至治末。又迎太尉王。行過臨洮。至河州。有後西征錄。出示予俾序焉。予惟不行萬里地。不讀萬卷書。不可看杜詩。以予寡淺。寓目盛編。尙懼其僭。題辭之命。所不敢當。然伏讀數過。詞義沉玩。本乎忠義。充中遇物而發。故勢有不得不然者。其媱言嫚語。蓋無一句。至其懷古感事。意又造微。爬着前輩癢處多矣。晦菴夫子甞稱歐公一聯云。以詩言之。是第一等詩。以議論言之。是第一等議論。予於此。亦有所感。姑書以賡命云。<끝>
동문선 제84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