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집 제4권 / 비명(碑銘)
통제사 이순신 노량비명(統制使 李舜臣 露梁碑銘) - 백사 이항복
옛 임진년에 남쪽 왜구(倭寇)가 제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전함을 줄줄이 띄워서 바다를 건너왔는데, 조령(鳥嶺)으로부터 호서(湖西)까지가 그 병폐(屛蔽)는 한산(閑山)이고, 그 경계는 노량(露梁)이며, 그 요충지는 명량(鳴梁)이었으니, 만일 한산을 잃고 노량을 지키지 못하여 곧바로 명량을 축박해 온다면 경기(京畿) 일대가 마음을 동요하게 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때 누가 능히 공을 이루어 삼도(三道)의 적을 막아 내었던가. 그가 바로 원후(元侯) 통제(統制) 이공(李公)이었다.
지난날 임금께서 적당한 사신(使臣)이 없자, 나를 명하여 군사를 시찰하게 하였는데, 출발에 임하여 하교하기를, “고(故)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왕가(王家)에 충성을 다하여 나를 방위하였는데, 남변(南邊)이 복이 없어 불행히 목숨을 잃었으므로 내가 그를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그러나 묘우(廟宇)를 세우지 않으면 충절(忠節)을 권면할 수 없으니, 그대는 가서 그 일을 공경히 수행하라.”고 하였다.
신(臣)은 명을 받고 물러가서 사전(祀典)을 상고해 보니,“죽기로써 국사에 힘썼으면 제사를 지내 주고, 큰 환난을 능히 방위하였으면 제사를 지내 준다.”고 되어 있었다. 이 오직 정당한 전례가 고부(故府)에 실려 있었다. 추후하여 생각하건대, 임진란의 초기에 공은 호남 지방을 맡았으므로 직무의 책임이 한계가 있었으나, 국가의 피해를 깊은 수치로 여기고 이웃 고을의 재난을 자기의 걱정거리로 삼아, 관할 지역을 초월하여 나가서 옥포(玉浦), 노량(露梁), 당포(唐浦), 당항(唐項), 율포(栗浦), 한산(閑山), 안골(安骨)에서 적들과 싸워 적선 220여 척을 불태우고, 적병 590여 급(級)을 참수(斬首)하였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러자 적들이 필사적으로 큰소리만 치면서 감히 공의 목채(木寨) 밑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공은 인하여 한산에 진을 쳐서 적의 충돌을 방어하였다. 병신년에 이르러서는 무능한 장수가 통제사를 대신함으로 인하여 한산이 패몰되었으므로, 이에 수군(水軍)의 패장(敗將)과 분졸(奔卒) 및 남토(南土)의 백성들이 모두 탄식하면서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이 통제(李統制)가 만일 그대로 있었다면 어찌 이 적들로 하여금 일보(一步)의 땅이나마 호남(湖南)을 엿보게 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정이 급하게 여기어 공을 찾아서 재차 전직(前職)을 임명하였다. 이에 공은 단기(單騎)로 군졸들을 불러모아서 명량(鳴梁)으로 나가 진을 쳤는데, 갑자기 밤중의 습격을 받아서 소수의 군졸로 필사전을 벌인 결과, 새로 모은 13척의 전함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수많은 적을 상대하여 30척의 적선을 파패시키고 용맹을 다하여 전진하니, 적들이 마침내 퇴각하여 도망쳤다.
무술년에는 천조(天朝)에서 대대적으로 구원병을 발견(發遣)해 와서 수군 제독(水軍提督) 진린(陳璘)이 공과 진영을 합하여 있었는데, 진린이 공의 하는 일을 기특하게 여기어 공을 반드시 이야(李爺)라고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는 적들이 합세하여 대거 진격해 와서 노량(露梁)에 이르자, 공이 스스로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적의 예봉을 시험하니, 천병(天兵)이 협격(夾擊)해 와서 공의 군대와 기각(掎角)의 형세를 취하였다.
그런데 이날 첫닭이 울 무렵에 바다 귀신은 길을 인도하고 바람 귀신은 위엄을 그쳤으며 사방에는 운무(雲霧)가 환히 걷히었다. 그러자 새벽 중반에 이르러 양쪽 군대가 일제히 일어나서 일천 돛이 날아 춤추는 가운데 공이 맨 먼저 뛰어들어가 예기(銳氣)를 타서 적진을 무너뜨리니, 적들이 이에 개미처럼 궤산(潰散)되어 목숨만 살아남기에도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전고(戰鼓) 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장성(將星)이 빛을 감추더니, 공이 마침내 동틀 무렵에 적탄을 맞아 넘어지고 말았다. 이때 공은 오히려 군중에게 경계하여 자신의 죽음을 말하지 못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꺾일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이때 제독은 그 소식을 듣고 자기 몸을 세 번이나 배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함께 일을 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하였고, 천병들 또한 고기를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남민(南民)들은 분주하며 길거리에서 통곡을 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노유(老幼)들이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는 광경은 곳곳마다 한가지였다.
아, 공 같은 이야말로 죽기로써 나라 일에 힘썼고 능히 큰 환난을 방위했다고 이를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원신(元臣)으로 책훈(策勳)하고 상상(上相)으로 봉작(封爵)하여, 모토(茅土)를 내리고 초상(肖像)을 그려 기린각(麒麟閣)에 걸어서 영원토록 보답을 받게 한 것은 마땅하거니와, 또 영웅들로 하여금 길이 눈물을 닦게 하였으니, 장부(丈夫)가 세상에 났다가 참으로 천고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더구나 나는 남쪽의 직무를 담당하여 왔으니, 감히 좋은 계책을 쓰지 않겠는가.
이때 통제사(統制使) 이시언(李時言)이 그 말을 듣고 감격하여 실제로 이 일을 주장하였는데, 일찍이 공의 덕을 입었던 모든 군중(軍中)의 장교(將校)와 졸오(卒伍)들이 상은(上恩)에 몹시 감격하고 공의 죽음을 매우 슬피 여긴 나머지, 일천 군사들이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고 수많은 연장들이 번개처럼 번득이어, 일을 시작한 지 열흘도 안 되어서 공사를 마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5년 뒤인 갑인년에 해서 절도사(海西節度使) 유형(柳珩)이 급히 편지를 보내 와서, 노량의 일에 대하여 그 공적을 기록해서 영원히 후세에 전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의 덕은 남민(南民)에 있어 구비(口碑)로 전하여 썩지 않을 것이고, 공의 공훈이 사직(社稷)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태사(太史)가 기록을 하였으니, 어찌 비(碑)를 일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오직 집에 있을 적에는 외로운 조카를 사랑하여 돌보아서 은혜가 자기 자식에게와 같았으니, 이것은 내행(內行)의 순박함이요, 수년 동안 군중(軍中)에 있을 적에는 어염(魚鹽)의 이익을 크게 개척하고 둔전(屯田)을 널리 설치하여 군중에 핍절(乏絶)된 것이 없게 하였으며, 전공(戰功)으로 얻은 상사(賞賜)에 대해서는 남김없이 아랫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었으니, 이것은 외행(外行)이 구비된 것이다.
그리고 온화하고 대범한 덕과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재능과 형상(刑賞)을 반드시 온당하게 행하는 용기에 이르러서는, 사람됨이 이 정도면 백세(百世)의 명성 높은 사람이 되기에 충분하거니와, 공에 있어서는 하찮은 행위일 뿐이니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지난 임진년에 / 在壬辰年
미친 왜구가 역심을 품고 / 狂寇不臣
이웃 조선을 침학하기 시작하였네 / 虐始於隣
열군이 산산이 궤멸되어 / 列郡瓦裂
수많은 적들을 맞아 싸움에 / 迎敵津津
마치 무인지경을 밟듯 했는데 / 若蹈無人
이때에 오직 이공만은 / 時維李公
그 용기를 더욱 떨치어 / 其氣益振
바닷가를 진무하였네 / 扼拊海漘
황제께선 그 무공을 이뤄 주려고 / 皇耆其武
수많은 군사를 내보내면서 / 出師甡甡
용맹한 신하 진린을 장수로 임명했네 / 命虎臣璘
그러자 번갯불은 기치를 흔들고 / 列缺掉幟
바다 귀신은 시각을 맡아 도우니 / 玄冥司辰
적들이 군박하여 허둥지둥하도다 / 賊窘而嚚
험난한 골짝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 師于阨巷
그 언덕에서 큰 싸움을 벌일 제 / 大戰其垠
화살들이 뱀에게로 집중되었네 / 矢集脩鱗
죽은 뱀이 꼬리를 흔들어서 / 斃蛇掉尾
공의 몸에 추한 독을 뿌리매 / 毒于公身
신의 보우를 받지 못하였도다 / 不佑于神
노량에는 대포 소리 요란하고 / 露梁殷殷
물은 오직 깊기만 한데 / 維水淵淪
여기에 이 비석 세우노니 / 樹此貞珉
영원토록 실추되지 않고 / 後天不墬
공의 비석 우뚝하게 서서 / 公石嶙峋
오직 제사를 길이길이 받으리 / 維永宗禋
<끝>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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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統制使李公露梁碑銘
在昔壬辰。南寇匪茹。連艫泛海。由嶺而湖者。其蔽曰閑山。其界曰露梁。其扼曰鳴梁。若失閑山。露梁不守。直蹙鳴梁。畿輔搖心矣。疇克有庸。式遏三越。乃元侯統制李公。日君乏使。命余視師。臨發有敎曰。故統制使臣李舜臣。其勤王家。捍衛我。南邊無祿。大命隕墜。予惟嘉寵之。廟宇不立。無以勸忠。汝往欽哉。臣受命而退。稽諸祀典曰。以死勤事則祀之。能捍大患則祀之。玆惟貞哉。載在故府。追惟亂初。公職在湖南。官守有限。以國害爲深羞。隣災爲己憂。踰南海蹈寇地。玉浦之戰。露梁之戰。唐浦之戰。唐項之戰。栗浦之戰。閑山之戰。安骨之戰。焚燒賊船二百二十餘艘。斬首五百九十餘級。溺水死者。不記其數。賊死咋不敢近公寨下。因陣閑山。以遏賊衝。至于丙申。代斲血指。閑山敗沒。於是舟師敗將奔卒及南土之民。擧咨嗟一口齊聲曰。李統制若在。豈使此賊窺湖南一步地。朝廷急而求公。再莅前職。公單騎召收。進陣鳴梁。猝遇夜襲。用少致死。以十三新集之艦。當大萬蔽海之寇。破船三十。賈勇而前。賊遂退遁。戊戌。天朝大發兵來援。水軍提督陳璘。與公合陣。奇公之爲。必稱李爺而不名。其年冬。賊合勢大來。進至露梁。公自領銳師。先甞其鋒。天兵夾進。與公掎角。是日鷄鳴。馮夷啓道。飛廉戢威。四維搴擧。軫乃曉中。兩軍齊作。千帆飛舞。公先躍入。乘銳崩之。賊乃蟻潰。救死不暇。鼓音未衰。將星沈彩。公於黎明。中丸而顚。猶戒衆諱言死曰。恐我師熸也。提督聞之。以身投於船者三曰。無可與爲矣。天兵亦却肉不食。南民奔走巷哭。操文以祭之。老幼遮道而哭者。所在如一。嗚呼。若公者。可謂以死勤事能捍大患者非耶。宜其勳爲元臣。爵爲上相。賜之茅土。形圖麟閣。食報無窮。又使英雄永抆危涕。丈夫生世。良足千古。况余受命。職當南事。敢不良圖。時李統制時言。聞言感激。實主張是。凡軍中將校卒伍飮公之德者。蹈舞上恩。慷慨公死。千羣雀躍。萬斧電翻。不十日而告訖功。後十五年甲寅。海西柳節度珩走書來。願以露梁之事載烈垂永。余曰。公之德。在南民口碑不朽。公之功。在社稷者曰太史有籙。何事於碑。唯其處家。愛恤孤姪。恩若己出。內行之淳也。在軍數年。大開魚鹽。廣設屯田軍無乏絶。所得戰賞。施下無餘。外行之備也。至於和易之德。果辦之才。刑賞必當之勇。作人如斯。足爲百世聞人。而在公則爲踈節可畧也已。銘曰。
在壬辰歲。狂寇不臣。虐始於隣。列郡瓦裂。迎敵津津。若蹈無人。時維李公。其氣益振。扼拊海漘。皇耆其武。出師甡甡。命虎臣璘。列缺掉幟。玄冥司辰。賊窘而囂。師于阨巷。大戰其垠。矢集脩鱗。斃蛇掉尾。毒于公身。不佑于神。露梁殷殷。維水淵淪。樹此貞珉。後天不墜。公石嶙峋。維水宗禋。<끝>
『白沙先生集卷之四 上 / 碑銘』
『李忠武公全書卷之十 / 附錄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