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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忠州) 포암산(布巖山961.7m), 만수산(萬壽山983.2m)을 가다.
글 쓴 이 都 庵 高 枓 永
8월24일, 창밖에 여명(黎明)이 밝아오니 섬돌밑에 뀌또리는 가을을 재촉하고, 길섶에 코스모스는 하나 둘 씩 서둘러 꽃망울을 터뜨린다.
배낭을 꾸려 차에 오르니 앉을 자리가 모자란다.(53명) 칠곡 휴게소에서 조반(朝飯)을 드시고는 아포(牙浦)에서 중부내륙고속국도를 달리니 먼데 하늘은 맑고 푸르다.
차내는 최대장(산대장)이 9월에 설악산 무박산행(無泊山行) 동참자(同參者)를 접수하느라 진행이 분주하며, 총무단에서는 참가 하실분들에게 예약금 일만원씩을 받는 신중함도 보여 주신다. 만사불여(萬事不如)튼튼인가?
차는 어느 듯 문경IC를 벗어나 하늘재 방향으로 달린다. 녹색 물결의 들판에는 벼가 고개를 숙인 논도 있고, 막 패고 있는 곳도 보인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드니 사실이 그렇습니다!
관음리(觀音里)로 접어드니 진입로는 더욱 구불 구불하여 진행속도가 더디고, 언덕빼기 양지바른 곳에는 도예(陶藝)를 만들어 전시 해 둔 집들이 여러군데 보인다.
이 깊은 山中이 조금도 외롭지 않고 한적한 느낌이 없으니, 도시화 물결이 넘쳐 멀리 이 곳 까지 잠식(蠶食) 해 들고 있는 것인가?
하늘재에 도착하니 시계는 9시30분을 조금 지나있다. 더 이상은 달릴 수 없는 곳... “하늘재”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지나가는 고개마루요, 옛 유생(儒生)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다니던 길이 아닌가?
하늘재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 3년(156)에 개척되었다고 하며, 하늘재를 넘어 '지릅재'를 지나서 충주로 이어지는 길이다.
지릅재는 하늘재로 이어지는 계립령(鷄立嶺)의 일부이며, 이 보다 2년뒤에 열린 죽령(竹嶺)길과 더불어 오랫동안 영남과 충청도를 넘는 주요 교통로(交通路)로 이용되었다. 이후 고려 말쯤에 문경 새재가 뚫려서 조선시대를 통해 주요 통행로가 되었고, 새재가 뚫린 후 완만하지만 거리가 먼 계립령 길은 차츰 쇠퇴 하였다.
간단한 준비운동으로 몸을 푼 뒤 산행길로 접어드는데... 정국진 회원님은 미리 와서 모든 회원님들을 반갑게 맞아 주신다. 영문을 몰라 여쭈니 “처가(妻家)가 문경(聞慶)이라 잠시 왔노라”며 오늘은 산행을 함께 할 수 없다 하신다.
오늘 산행은 설악산 무박산행을 대비한 전지훈련(轉地訓鍊)이라 산행코스도 빡쌔다. 백두대간상에 있는 포암산 능선길을 오르니 짙은 숲 터널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요, 숲 그늘의 기온은 시원함을 넘어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선두에는 박번 회원님이, 중간에는 필자와 디카맨 황부회장님이, 후미에는 최대장이 진행을 돕는다.
20여 분을 오르니 경사는 가파르고 등산로는 바위로 덮여있어 진행이 더디며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포암산(布巖山)의 이름이 허명(虛名)이 아니며, 산명(山名)이 시사(示唆)하 듯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정상 까지는 즐비하다.
한고비 한고비 오를 때 마다 산~들 산~들 불어오는 솔 바람이 땀에 젖은 몸을 서늘하게 식혀 주시고, 가는 여름이 아쉬운지 매미소리가 매~엠 매~엠 신나게 들려 온다. 자세히 들으니 풀 숲에는 매미 소리 만도 아니요, 새소리, 이름 모를 중생(衆生)들의 노래 소리가 어우러져 숲속의 향연(饗宴)이 벌어지고 있는가 봅니다.
옛 말에 “오뉴월 불도 쬐다 나면 서운하다.”드니 덥다! 덥다! 하던 여름 날씨도 처서(處暑)를 고비로 한풀 꺾여 물러 나시니... 시원하다 할까, 서운타꼬 할까요? 가는 더위를 어찌 붙잡고, 오는 가을을 어찌 말릴 것인가?
다시 20여 분을 더 걸어 정상에 이르니, 조그마한 팻말에 포암산(布巖山961.7m)이라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주워모은 작은 돌탑(돌무더기)이 한기 서 있다.
정상은 산 아래서 올려다 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평범하고, 10여 명이 쉬어 가기에도 비좁다. 도착 하는대로 앉아 가져 온 과일들을 나누며 얼마간 쉬었다가, 회원님들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잠시 천하를 조망(眺望)합니다.
북으로는 만수봉이 지척에 보이고, 그 너머로 월악산 영봉들이 찬란히 빛나며, 남으로는 주흘산이 사자머리 모양으로 다가온다.
이 외에도 하설산, 문수봉, 대미산, 신선봉 등 이름 모를 산들이 천하에 펼쳐지시니... 인가(人家)는 거대한 자연속에 깃들어 겨우 보일까 말까다!
또한 포암산을 지나는 백두대간을 경계로 서북쪽은 충청도요, 남동쪽은 경상도며, 아울러 서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남한강으로 흘러들어 충청도와 서울시민들의 생활용수가 되고, 동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으로 유입되어 영남의 젖줄이 돼고 있슴니다.
그 밖에도 백두대간은 충청도의 중원문화와 경상도의 영남문화권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여, 문화와 풍습, 언어(言語) 까지도 다르게 느껴지니... 山 은 인류문화의 시작이요, 또한 끝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궁고개(마골치850m)로 향하는 길은 육산(陸山)이라 순하고도 편하다. 엊 그제 내린 비로 땅은 꼽 꼽하여 먼지하나 일지 않고, 주위의 나무 숲들은 물기를 머금어 있어 싱그럽기 그지 없다.
처서(處暑)를 전후(前後)로 한 산색(山色)은 녹색의 절정으로 보이며, 맑고 청명(淸明)한 날씨라 사람에게 이로운 “피톤치드”의 방출량이 많아서 인지 기분도 상쾌하여 발걸음도 가벼웁다.
노익장(老益壯) 꼬치까리(산구호) 서부장님(73)은 오늘도 중간쯤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잘도 걸으시고 노래 소리도 우렁차다. 뒤이어 디카맨 황부회장님은 사진촬영에 분주(奔走)하시며, 홍총무, 이진학, 구윤서, 최영수, 천여순, 박번 회원님 등은 선두 구룹에서 잘도 가신다.
한시간 여를 걸어 궁고개(마골치)에 이르니, 백두대간의 대미산 방향과 만수산의 방향이 정 반대다.
만수봉 가는 길은 오르락 내리락 작은 봉우리들이 여러개 있어 산행이 쉽지 않다. 40여 분을 더 걸어 정상 근처에 이르니 산죽(山竹)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만수교 부근에서 오른 등산객들도 많아 서로간에 진행이 더디다.
정상에 이르니 여러 산행단체의 선착객(先着客)들이 앉아 점심을 들고 있으며, 남산님들도 도착 하는데로 삼삼 오오 자리하여 점심을 드신다. 만수봉 정상도 별로 넓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식사자리가 편치 못하다.
점심후 만수봉(萬壽峰 983m) 정상 팻말 앞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월악산(月嶽山)의 영봉(靈峰)들이 더욱 가까이 선명하게 신령스런 기운을 뿜어 내고 있다.
백두대간의 포암산 부근에서 뻗어 나온 한 지맥이 궁고개를 거쳐 만수봉을 지나 월악산(1092m)에서 크고 장엄하게 솟구쳐 충주호(忠州湖)에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월악지맥(月嶽支脈)'이라 한다.
밝고 신령스러운 산자락에는 포암산 아래 미륵대원사지(彌勒大院寺址)가 있으며, 월악산 기슭에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덕주사(德周寺)가 있어 사바세계의 전법도량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없다 하리요!
동쪽으로는 지나온 포암산이 지척에 보이고, 연이어서 남북으로 공룡(恐龍)의 등뼈처럼 우람한 백두대간의 능선들이 참으로 장엄하게 보이며, 서쪽으로는 송계계곡을 사이에 두고 6월에 산행 했던 북바위산이 암봉(岩峰)으로 펼쳐져서 박쥐봉과 동산(東山)이 좌우로 나란하다.
녹색(綠色)으로 펼쳐진 장엄한 파노라마(Panorama)를 보면서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하산길로 접어듭니다.
한시간 여를 걸어 나려오니 오르락 내리락 작은 봉우리들을 여러개 넘어서, 때로는 반반한 반석(盤石)위에 쉬기도 하면서... 살아서 건강한 몸으로 조국의 산하(山河)를 걷는다는 것 자체가, 천하의 승경(勝景)을 본다는 그 자체가 크나큰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하산 기점인 만수 휴게소에 도착하니 선발대로 도착하신 7~8명이 반갑게 맞아주시고, 얼마를 쉬고 있으니... 후미에 최대장을 비롯한 박태옥, 천가희, 정의석 부회장, 디카맨 황부회장님 등 월드메르디앙 아파트에서 오신 분들도 함께 도착하신다.
하산주(下山酒)를 마치고 귀갓길에 들리기로 한 미륵대원사지(彌勒大院寺址)를 잠시 답사(踏査) 합니다.
미륵리 절터는 하늘재 아래, 백두대간의 부봉(釜峰) 기슭에 고즈넉이 들어 앉아 중원문화(中院文化)의 中心이 되는 곳에 있다.
1970년대 말부터 10여 년간에 걸쳐 발굴되어 옛모습을 다 복원 하지는 못했으나, 2점의 보물과 옛 유물들이 남아 있어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다.
발굴 당시에 수습된 유물 가운데 “명창3년 대원사 주지 승 원명(明昌三年大院寺住持僧元明)”이라는 기와조각이 나와서 1192년 고려 19대 명종(明宗1170~1197)때 원명스님이 주지로 있을 당시 불사(佛事)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설에는 936년 신라 56대 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께서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서 잠시 머물며 절을 세웠다고 전해 오니, 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또한 미륵리 절터는 불교사원의 역할뿐 아니라 군사,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 했다.
절 입구에는 부러진 당간지주(幢竿支柱)의 부분들이 보이고, 그 뒤로 거대한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돌거북이 북쪽을 향하여 있으며, 머리는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용머리 모양을 한 고려중엽의 다른 귀부(龜趺)의 형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거북이 등에는 새끼 거북이 두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조각을 해 놓아 코믹 하기도 하고, 퍽 재미있는 발상이라 생각된다.
그 뒤로 도량(道場) 중간쯤에는 5층석탑이 미륵불상과 나란히 일직선으로 서 있고, 석탑 역시 자연석을 다듬어 지대석(地臺石)과 단층 기단(基壇)을 만든 후 탑신부를 쌓아 올린 5층석탑(보물제95호)으로 장중하고 둔탁하여, 중후한 멋을 풍기며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연이어서 자그마한 8각석등(八角石燈)이 자리하며, 소박하고도 앙증스러워 귀엽다.
도량의 맨 뒤에는 미륵불상(보물제96호)이 서 있는데 머리 위에는 8각형의 갓머리돌이 얹혀 있어 정형화된 기분이 들고, 왼손에는 연꽃봉오리를 들고 계신다.
앞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미륵불(彌勒佛)의 어깨 높이 까지 자연석 막돌을 쌓아 올렸으며, 그 위로 목조건물을 지어 기와를 얹었던 흔적이 보인다.
통일 신라시대의 토함산 석굴암은 돌로 천정까지 덮은 석굴법당의 양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6.25사변 이후 다래넝쿨이 덮여 묻혀 있던 것을 어느 보살님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니... 불력(佛力)이 영겁(永劫)으로 찬란 합니다.
몸통은 연화좌대(蓮花坐臺) 위에 전체가 4등분으로됀 거대한 돌덩이로 만들어 쌓아 올렸으며, 높이는 자그마치 10.6m에 이른다고 한다. 눈은 지그시 감아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 있고, 귀는 커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겠슴니다.
미륵불상은 북쪽(子坐午向)을 향하여 서 있고, 서북쪽(戌乾方)과 동북쪽(丑艮方)에 귀봉(貴峰)이 있어 수행도량으로서는 훌륭한 길지(吉地)라 하겠으며, 도인과 귀인이 배출될 수 있는 곳이다.
주산(主山)과 백호는 훌륭하나 청룡쪽이 약간 허(虛)하며, 물은 우에서 좌로(甲水申破)로 비스듬이 휘둘러 흐른다.
외청룡과 외백호의 끝 머리에는 월악산의 영봉들이 찬란히 빛나고, 영봉 위로는 뭉개구름이 피어 오르는데... 그 모습이 미륵불상(彌勒佛像)을 닮아 있다.
날씨도 청명하여 찬란한 석양빛이 노을에 물드니... 함께하신 회원님들이 모두가 탄성(歎聲)을 지른다! “등산도 좋았지만, 미륵대원사지에 온 것이 더 좋다!” 하면서... 묵묵(黙黙)히 걸어 나오며 무언(無言)의 미소(微笑)를 짓는다.
백두의 정기가 포암산과 만수봉으로 이어져서
월악(月嶽)의 영봉(靈峰)에서 찬란히 빛나고!
천하에 제일 높은 하늘재와 부봉 기슭에는...
영겁의 미륵불과 마의태자의 혼이 살아있도다!
단기 4341년(서기2008년)8월24일,
충주 포암산(布巖山 961.7m),과 만수봉(萬壽峰 983.2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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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책을 편집하기 위해 "세기사"의 사진을 추가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