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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향토문화연구회(全北鄕土文化硏究會)를 창립하다
전라북도 향토문화연구회가 태동한 날은 1976년 9월 16일이다. 이때 전북대학교 이강오(李康五), 김광언(金光彦), 정구복(鄭求福) 교수와 원광대학교 유재영(柳在泳), 김태곤(金泰坤) 교수 등이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모여 향토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모임체를 만들어 전북지방의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하자는데 뜻을 모았으며 9월 20일에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20여 명이 모여 발기인 총회를 열어 회칙 통과와 함께 전북향토문화연구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나도 이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회칙의 통과와 함께 임원을 선출하고 월례연구발표회 등의 운영방법을 협의 결정하였는데 회장에 이강오 교수, 총무간사에 김광언 교수, 연구간사에 정구복 교수가 선출 되었다. 그리고 매월 두 사람씩 향토문화에 관한 연구발표를 하기로 하여 나는 1977년 5월 31일에 전북대학교에서 최근무 교수와 둘이서 발표를 하였는데 이때 발표한 것이 <扶安地方의 土俗信>이다.
이렇게 10여 년을 학문적인 성과와 내실을 기하면서 운영하여 왔으나 법인체로 등록이 되지 않은 단체는 아무리 능력이 있고 실적이 현저하여도 관공서 등의 기관에서는 연구비나 연구용역 등을 줄 수 없다고 하여 법인체로 전환하기 위하여 1988년 2월 27일에 정관을 새로 만들고 운영체제를 이사제로 바꾸어 사단법인 체제로의 재발족을 하였는데 이때에는 이사에 선임 되어 그 운영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시군의 지표문화재 조사사업이나 전북의 3대사지(三大史誌 :文化財誌. 寺刹誌. 傳說誌) 발간 등 도청 등에서 간행하는 저작물들의 집필 용역을 맡아서 그 집필료를 받아 근근이 연구회 운영비와 학회지 <全羅文化硏究>의 간행비를 충당하여 왔다.
회장 이강오 교수의 열의가 대단하여 여기저기 아는 사람에게 전화로 가입을 권유하여 당초에는 회원 수가 70여 명이 넘었으나 그 절반 정도는 허수였으며 총회 때 보면 겨우 30여 명이 모이고 연구발표 때는 많아야 20여 명 정도가 참석하였으며 20여 년 지속 되는 동안 한 번도 참석 안한 회원도 반절이 넘었을 것이다. 이강오 회장이 서거한 후로는 사무실 사용료도 못 내어 결국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그동안에 연구 발굴된 성과는 매우 컸으며 이를 모두 학회지 <全羅文化硏究>에 수록하여 제 9집까지 발간하는 큰 성과가 있었다.
내가 이 모임에서 발표한 연구논문이 5~6편쯤이 되는데 앞에서 말한 <속신어> 외에 <부안지방의 석간당산> <대벌리 쌍조당산제의 고찰> <장수지역 당산제의 특성 -누석조탑제를 중심으로-> <부안지방 지명의 생성유형> 등으로 이때 나는 부안지방 민초들의 마을지킴이 신앙의 조사와 연구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기에 마을 사람들의 전래 공동신앙체인 당산에 관한 논문이 많았다. 장수(長水) 지역의 누석조탑(累石造塔) 당산제에 관한 논문은 1988년도에 향토문화연구회가 전라북도 도청으로부터 장수지역의 지표문화재 조사의 용역을 맡았을 때 내게 민간신앙 분야의 조사가 주어져 조사한 것을 논문으로 정리한 것이다.
내가 이 모임의 발기 때부터 참여한 것은 송준호(宋俊浩) 교수를 알게 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지금 성심여고 교장인 김낙완(金洛完)군이 하루는 여선생 한 분 을 데리고 와서 생물선생으로 추천을 하기로 채용을 하였는데, 그 분이 송준호 교수의 딸 송화숙 선생이다. 얼마 후에 송준호 교수의 식사 초대를 받아 거기서 처음으로 이강호 교수도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알고 보니 두분은 내 종형 건암(建庵 :金炯觀)과는 익히 알고 기린정사(麒麟精舍)에도 자주 출입하면서 학문에 대한 교유가 깊은 사이로 우리 집안에 대하여서도 잘 알고 있어서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나는 두 분의 행의의 정대함과 학문 연구에 있어서는 추호의 빈틈도 허락지 않는 엄격한 연구자세를 보고 배웠으며 같이 답사를 다니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 송교수의 제자 최병운, 오병무, 전경목 교수들도 기린정사에 드나들며 종형 건암에게 한학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두 위원회에서 활동한 이야기
● 전라북도 문화재 전문위원
나는 1982년 경에 도지사로부터 전라북도의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위촉되어 1998년경까지 약 16년 동안 전라북도의 지정문화재를 심의하는데 참여 하였다. 조상이 남긴 문화재 중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그 가치의 경중에 따라서 국가지정문화재와 지방문화재로 구분하여 전문인들의 심의를 거쳐 지정하는 기구가 문화재위원회인데 그 위원회에 전문가를 위촉하여 그 분들의 발굴과 조사보고에 의하여 심의를 거쳐 지정하였던 것이다.
문화재 지정을 위한 심의회의는 도청 회의실에서 열렸으며 위원장은 부지사였지만 주로 부위원장인 전영래(全榮來) 교수가 대리 진행하였다. 당시 위원들은 이강오, 송준호, 장명수, 김삼룡 등 5~6명이었으며 전문위원이 약 10여 명쯤 되었다. 문화재 지정 신청은 시군의 시장, 군수가 하는 겨우도 있지만 전문위원들이 발굴 조사보고서를 제출하여 심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장이나 군수가 조사 보고서로 신청한 경우라도 그 분야의 전문위원이 현장에 나가 다시 철저하게 조사하여 심의회의 때 설명을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내가 전문위원으로 있었던 동안에 부안의 문화재로는 이매창 묘 등 10여 건을 발굴 조사하여 심의 지정하였고 남원의 사직단(社稷壇)과 둔대 등도 내가 조사하여 지정한 것이며 개암동의 보령원(保寧院) 한 건만이 부결되었다. 부결된 이유는 이 사우(祠宇)의 건립된 연대도 짧고 또 김유신 장군의 후손들이 번창하고 있어서 국가에서 보전을 하지 않아도 잘 보전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들 문화재들을 심의 지정할 때 가장 힘들었던 일은 이매창 묘를 심의하면서였다. 이때 고집스럽게 반대를 한 분이 이강오 교수였는데 이유는 “어떻게 묘를 문화재로 지정하느냐.”는 것과 “지금까지 그런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나하고 30여 분간 논쟁을 벌였는데 나는 “묘를 지정한 사례가 전북에는 없지만 경기도에만도 3건이나 있고 기념할 만한 분의 묘인데도 관리 보전할 후손이 없는 경우는 마땅히 국가에서 관리 보전하여야 할 것이므로 지정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표결에 부쳐 간신히 지정을 하였다. 그래서 이매창 묘가 분묘로서는 전북에서는 최초로 전북 지방기념물 제65호의 문화재가 된 것이다.
내가 발굴 조사보고서를 내어 지정된 부안의 문화재들은 이매창의 묘 외에도 다음 12건들이다.
상서 청림리 석불좌상 : 전북 유형문화재 제123호
내소사 설선당과 요사채 : 전북 유형문화재 제125호
월명암 부설전(浮雪傳) : 전북 유형문화재 제140호
변산면 중계리 실상사지 일원 : 전북 지방기념물 제77호
부안농악 : 전북 무형문화재 제7호
대벌리 쌍조 석간당산 : 지방민속자료 제17호
부안읍 남문안 당산 : 지방민속자료 제18호
부안읍 돌모산 당산 : 지방민속자료 제19호
백산면 죽림리 석장승 : 지방민속자료 제20호
보안면 월천리 석장승 : 지방민속자료 제30호
부안읍 신석정 고택 : 지방기념물 제84호
나는 1980년 무렵부터는 때때로 부안지역 고가유풍의 문한가(文翰家)를 찾아다니며 옛 전적류(典籍類)며 고문서 등을 뒤져서 가치 있는 자료들을 발굴하였다. 나는 이런 일들이 우리 문화를 보존, 계승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으며 또 즐거운 일이기도 하였다. 보람도 있어서 몇 권의 희귀한 필사본의 기록들을 얻었으며 또 5편의 가사문학(歌辭文學) 작품을 발굴한 일은 큰 보람이었다. 1980년에는 주산면 성덕리의 김규원(金括源)씨 집에서 숙종(肅宗) 때 월천(月川) 출신 좌랑공(佐郞公) 김운(金運)이 지은 129구의 연정가사(戀情歌辭) <초운사(楚雲辭)>를 얻었고 보안면 우반동 김종규(金鍾奎)씨 집에서는 영정(英正) 때 내요리의 큰 학자 김익(金瀷 :1746~1809)과 그 아들 진사공(進士公) 김상성(金相誠 :1768~1827) 부자가 지은 99구의 <권농가(勸農歌)>와 91구의 <서호별곡(西湖別曲>을 이 분들의 문집인 <정일유고(精一遺稿)>와 <확은유고(確隱遺稿)>에서 각각 찾아내었으며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자손인 담양 출신 정해정(鄭海鼎 :1850~1923)의 유일 필사본 <석촌별곡(石村別曲)>도 입수하여 이상보(李相寶) 교수에 의해 국문학계에 발표했는데 이는 모두 명맥이 끊어져 가는 18세기 이후 호남지방의 가사들로 학계에서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작품들이었다. 이외에 진서면 용동리 출신의 계초(桂招) 박규양(朴奎陽 :생졸년 미상 1920년 무렵까지 생존설) 작이라는 412구에 달하는 <변산가(邊山歌)>와 작자미상의 <변산팔경가(邊山八景歌)>를 얻은 것은 부안지방 시문학사의 경사라 할 것이다. 이중에서 <石村別曲> 외는 모두 1982년에 간행된 <邊山의 얼>과 1991년 간행한 <부안군지(扶安郡誌)>에 주해(註解)를 붙여서 수록하여 놓았다.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내가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지방사료의 조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이 1984년부터다. 이 무렵에 나는 학회의 활동도 비교적 활발하게 하고 있어서 향토문화연구회 외에도 한국민속학회, 비교민속학회 등에서 학문적인 연구나 답사 활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문학 분야의 기초는 우리나라의 역사학을 바탕으로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역사공부, 역사지식이 없이 덤벼드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이와 같은 단편적인 역사지식으로는 안되겠다 싶어 1960년대 초에 진단학회(震檀學會) 발행 을유문화사본 전 7권짜리 <한국사(韓國史)>를 구입하여 본격적으로 국사공부부터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사에 도움이 될만한 보조서적들을 이것저것 구입하여 읽었는데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간행한 고전국역총서가 주류를 이루었다. <朝鮮王朝實錄> <高麗史節要> 이긍익(李肯翊)의 <燃黎室記述> <新增 東國與地勝覽> <國譯 東文選> 전12권과 동아대학교 간행본 전11권의 <譯註 高麗史>를 비롯하여 김부식의 <三國史記>와 일연의 <三國遺事> <전고대방(典故大方)> 등은 필독의 책이었고,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산해경(山海經)>과 위서(僞書)라고 평하는 <桓檀古記>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을 하였으며 읍지, 군지, 지리지류나 각종 개인 문집류에 이르기까지 지리, 역사 등의 문헌류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으며 이 분야의 각종 연수회나 세미나에 부지런히 참석하였다. 그래서 사료조사위원으로 활동을 하는 데는 별로 막힘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사료 조사위원으로 보람있는 일을 한 것은 2001년에 전라북도 서부 지역인 부안, 고창, 김제, 정읍지역의 전적과 고문서 등 2,200여 건을 발굴 조사하여 복사 분류하고 해제를 붙여 정리한 일이다. 고창의 이기화 위원과 둘이서 한 해 동안에 걸쳐 했는데 국사편찬위원회의 지원금으로 한 작업이지만 이러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자료들이 누구의 집에 사장되어 있을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 제일 어려웠고 알았다고 하여도 이를 빌리는 일 또한 쉽지 않았으며 95% 이상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 사료들이요 더욱이 난해한 초서를 탈초(脫草)하여 내용을 요약하는 작업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전적류는 출간된 일이 없는 필사본으로 유일본이라야 하므로 많지가 않았지만 고문서나 간찰류는 많이 조사가 되었으며 가장 많이 조사된 것이 호적단자, 산송문서, 토지매매문서 등의 고문서들이었다,
나는 이 일을 마치고 종합 정리하여 2001년 12월 5일에 국사편찬위원회 이만렬(李萬烈) 위원장 이하 임직원들과 전라북도 사료조사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주 코아호텔에서 보고회를 가졌었으며 노고에 대한 위로와 함께 격려를 받았다. 이 조사 활동을 하는 동안 어렵고 힘들기는 하였지만 많은 공부도 되었다. 특히 1537년에 흥덕사에서 간행된 희귀본인 <儒釋質疑論>, 수은(睡隱) 강항(姜沆)이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일본으로 포로로 잡혀가면서 일기체로 쓴 필사본 <萬死錄>, 1641년에 김현(金暢)이 만경 현령으로 있으면서 3년간 쓴 <萬頃日記>, 하서 출신 박동명(朴東溟)이 1655년에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쓴 <泮宮同遊錄> 등의 발굴은 흥미도 있고 사료적인 가치도 있어 보람있는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