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주능선 등반의 관문역할을 하며 노고단을 오르는 대표적인 등반로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의 집단시설지구에서 화엄사를 거쳐 10㎞의
계곡을 따라 오르는데, 길은 코재부근을 제외하곤 비교적 수월한 편이고 안내판과 안전시설
도 충분하여 어느때나 안심하고 오를 수 있는 곳이다.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가와 식당, 여관이 즐비한 집단시설지구 주차장에서 아스팔트 도로
를 얼마 오르면 매표소가 나온다. 성인 1인당 1,200원으로 지리산 입장료 중에서 이곳이
제일 비싼 편이다.
우측 계곡 건너에 백색의 프라자 호텔이 보이고 얼마 안 가 다시 우측에 국립공원 남부
관리사무소 건물과 남악사(南岳祠)가 있는 곳이 나온다. 화엄사 앞에서는 포장도로가 끊기
고 노송과 전나무가 빽빽한 곳에 화엄사가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가 수두룩한 거찰, 화엄사
우리나라 10대 사찰, 31본산의 하나인 화엄사(華嚴寺)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연기조
사(緣起祖師)가 세웠으며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증축되었다.
그후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두게 되면서부터 화엄사는 늘
많은 대중이 모이는 큰 절이 되었다고 한다. 화엄사는 임진란 말기인 정유재란(1597년) 때
왜병의 방화로 전소 되었는데 이때 장육전(각황전의 전신)과 화엄경 80권을 새긴 석경(石經)
도 모두 파괴되어버렸다. 30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화엄사를 벽암선사가 1630년 복구하고
숙종 25년(1699년)에 계파선사가 각황전을 재건하였다. 6?25 전란때도 화엄사의 부속암자
가 폐허로 변했는데 다행히 화엄사만은 큰 화를 면하게 되었다.
화엄사 경내에는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으뜸이라고 하는 국보 67호의 각황전을 비롯하여
동양 제일의 석등(石燈)인 국보 12호 각황전 앞 석등과 불국사의 다보탑과 더불어 한국탑의
쌍벽을 이루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국보 35호 4사자 3층석탑 등 국보 3점과 보물 4점의
문화재가 있다. 그리고 화엄사 앞 개울을 건너 지장암 옆에는 일본 벚꽃의 원조로 알려진
수령 300년의 올벚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인조 때 벽암선사가
불교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을 표시하기 위해 심은 것이라 사홍목이라고도 하는데 8?15해
방 때 거센 바람에 나무중턱이 부러졌다.
원효, 도선, 대각 등 선덕고승이 배출되기도 한 화엄사의 경내에 들어서면 조선 선조의
여덟번째 왕자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의 필체로 알려진 '智異山 華嚴寺'라고 쓰인 글
편액이 눈길을 끈다(현재 불이문 뒤편에 걸려 있다).
전나무가 높이 치솟아 있는 길을 따라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면 보제루와 종루를
거쳐 웅대한 대가람이 펼쳐져 있는 대웅전 앞뜰이 나온다. 서쪽의 웅장한 목조건물이 바로
각황전이고 주위에 영산전, 나한전, 원통전, 명부전 등의 건물이 있다.
잘 다듬어진 돌길을 따라
화엄사 경내를 나와 화엄사 오른편의 담장을 끼고 평탄한 길을 20여 분 오르면 계곡 오른
쪽 방향으로 철다리를 건너게 된다. 잘 다듬어진 길 옆에는 한 키를 넘는 산죽소로길이 전개
된다. 용소와 제2야영장을 거쳐 큰 고목나무가 서 있는 써나무터를 어렵지 않게 올 수 있고
여기서 다시 철다리를 건너면 제3야영장에 도착한다.
노송숲이 우거진 곳에 식수대와 화장실, 야영장이 잘 구비되어 있다. 제3야영장부터는
다소 경사진 길을 걷게 되지만 잘 다듬어진 계단식 돌길이다. 단풍나무를 비롯한 활엽수가
짙은 녹음을 드리워 여름에도 시원하기 그지없는 오솔길이다. 길가에 참샘터가 있지만 잘
마르는 편이다. 돌거지와 국수등의 안내판을 지나면 돌계단을 올라 자그마한 등성이를 넘게
되는데 이곳이 중재이다. 건설부 계획에는 장차 이곳에 50평방미터 면적의 휴게소가 들어선
다고 한다. 비교적 화엄사계곡 코스는 등반로가 뚜렷하고 이정표도 많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다만 부속암자로 난 길과 희미한 옛 길등이 얽혀 있기도 하므로 이 길로 빠지지 않도록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계곡과 다소 멀리 떨어진 경사 급한 길을 오르면 투박한 돌길이 펼쳐지고 시원한 물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오면서 길 오른편에 자그마한 폭포를 보게 된다. 이곳이 집선대이며 이곳에서
식수를 보충해야 한다.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힘들어서 '코재'
집선대부터는 경사 급한 너덜지대를 올라야 하기 때문에 다소 힘들다. 속칭 '코재'라 하여
등반하는 사람들의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경사가 심하다는 곳이다. 혹자는 '궁둥이길'이라
고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소 짜증스런 경사지대를 오르면 편편하고 전망이
훌륭한 반석에 도착하게 되는데 여기가 눈썹바위이다.
밤재능과 원사능 사이로 펼쳐진 화엄사계곡이 고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
어오고 구례읍도 보인다. 눈썹바위에서 돌계단길을 조금 오르면 무넹기이다. 노고단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도랑을 파서 인위적으로 화엄사 계곡으로 넘어가게 했다고 해서, 즉 물을
넘겼다는 뜻으로 무넹기라 부른다. 이처럼 노고단의 물을 화엄사계곡으로 넘기게 된 이유는
일제 미나미 총독 때 전국적인 대가뭄이 있어 구례 벌판의 마산 저수지에 물을 가두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성삼재에서 올라오는 도로와 마주치는 곳에서 그 길을 따라 오르면 노고단산장
이 나온다.
교통과 숙박
한마디로 지리산 주변에서 교통체계와 숙박시설이 가장 완벽하게 구비된 곳이 바로 화엄
사 집단시설지구이다.
구례읍까지는 버스로 10분 남짓한 거리이고 구례구역까지도 20여분 걸리는 교통이 편한
곳이다. 전라선 열차편을 이용했을 때는 구례구역에서 완행버스가 수시로 있고 요금은 280
원이다. 한편 구례구역에서 화엄사까지 택시요금은 3,000원선이다.
남원?전주방면(24회), 광주방면(12회), 부산방면 직통버스(13회), 진주?마산?순천방면
(각 3회)의 직행버스 편이 있는데 일단 구례읍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진입하여 다시 갈아타고
화엄사로 들어온다면 배차회수도 많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욱 편리하다.
아직은 서울 등 대도시와 구례 사이에 고속버스편이 편성되어 있지 않은데 역시 남원, 전주,
광주, 순천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와서 다시 직행버스로 갈아타는 방법도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화엄사 집단시설지구에는 지리산 주변에서는 유일하게 호텔과 콘도미니엄이 자리잡고 있
고 또 장급여관도 수두룩하다. 민박촌은 황전리에 있는데 성수기와 비수기에 다소 가격차가
있지만 보통 여관은 10,000~15,000원선에서 결정된다.
야영할 만한 곳으로는 화엄사를 지나 조금 오른 곳에 제2?제3야영장이 잘 조성되어 있다.
* 지리산녀와 지리산가 *
지리산녀는 구례현(求禮縣)의 여자로 자색이 아름답고 부도(婦道)를 다하는 정절의 여인
이었다. 백제 어느 왕이 그 미모를 탐하여 들이려 하였으나 지리산가(智異山歌)를 지어 부르
며 한사코 따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편}과 [고려사], {악지}
참조). 같은 백제가요인 정읍사(井邑詞), 무등산곡(無等山曲), 방등산곡(도적떼들에게 욕을
당하는 아낙이 자기를 구원하러 오지 않는 남편을 풍자하면 지은 노래), 선운사가{기한이 넘
도록 정역(征役)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리며 지어 부른 노래} 등과 함께 백제 여인
의 정절을 읊은 노래인 지리산가의 가사는 애석하게도 전해오지 않는다. 한편 백제 개루왕의
세 번에 걸친 집요한 수청요구를 재치있게 극복하지만 그 때문에 고낭을 당하여 남편이 실명
되고 끝내는 고구려로 가서 함께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都彌)
의 처가 바로 지리산녀라는 얘기도 있으나 알 길 없다.
* 지리산 다(多) 등반 기록 *
부산 대륙산악회의 성산(成山) 씨가 1955년부터 1982년까지 200회 지리산 등반을 기록
하고 있고 지금도 계속 지리산을 찾는다. 비교적 교통도 불편했던 1960, 70년대에 꾸준하게
지리산을 찾았던 점에서 성산씨의 기록은 큰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 광주의 장형석(59세,
목포의료원장)씨는 지난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주말마다 계속 동부인해서 지리산을 찾는
사람으로 남몰래 알려져 있다.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한 느낌을 주는 지리산이 마냥 좋다고
하는 장씨는 주로 노고단 주변을 많이 찾았는데, 지금까지 약 500회 이상 등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구례군 토지면 직전리에서 노고단이나 임걸령까지 울창한 원시림 속의 계곡길 14㎞를 오
르는 코스이다.
가을철 단풍이 가장 손꼽히는 절경이지만 봄철의 진달래, 여름의 울창하고 시원한 녹음,
겨울의 환상적인 설경 등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가진 계곡이 이 피아
골이다. 흔히 피아골에 관해서는 6?25 직후 적과 아군, 즉 피아(彼我)간의 치열한 싸움터였
기 때문에 피아골이지 않은가 하는 얘기도 있고 피아골의 어감이 피를 많이 흘린 골짜기라는
연상을 심어주어서 그런지 6?25 당시 국군과 빨치산들의 격전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과거에 김진규, 노경희 주연의 반공영화 [피아골]이 나온 탓에 빨치산 소굴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해 [남부군]의 저자 이태 씨는 보급문제의 곤란 등 때문에 실제로 피아골
을 근거지로 삼았던 도(道)단위 이상의 빨치산 부대는 없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편에선 임진왜란 때 치열했던 석주관(石柱關)싸움에서 피아골 이름의 유래를 찾기도 한
다. 경상?전라도의 길목인 천연의 요새 석주관에서 칠의사(七義士)가 이끄는 승병과 의병
들이 왜병과 맞서 싸우다가 모두 숨졌는데 이때 의병들의 피가 내를 이루며 흘렀다 하여 피내
골(血川谷)로 부르다 피아골로 전화되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러나 석주관이나 피내골
은 피아골과 지역적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이 또한 잘못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피아골이라는 말은 실은 옛날 이곳에서 오곡의 하나인 식용피(稷)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稷田谷)이라 하다가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며 지금도 피아골 입구에 직전리(稷田里)
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연곡사는 한때 의병들의 근거지
구례에서 혹은 하동방면에서 섬진강변을 따라오면 외곡리 검문소가 나오고 여기서 북쪽으
로 2차선 포장도로를 다시 달리면 차창 밖으로 산비탈을 가득 메운 계단식 다랑이 논들이
많이 눈에 띄고 연곡천이 좌측으로 요동치며 흐르고 있다. 연곡사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토지면 내동리 평도(平道)부락이고 여기서부터 피아골 등반이 시작된다(구례에서 직전마을
까지 운행되는 완행버스편을 이용할 수도 있다).
민박집과 상가 건물이 있는 평도부락을 얼마 오르면 당재(堂峙)와 새미산 기도원으로 오르
는 길이 우측에 보이고 다시 조금 가면 넓은 주차장과 광장이 나온다. 아직 집단시설지구
공사가 완료 안된 듯 곳곳이 파헤쳐져 있는데 매표소를 지나 조금 가면 우측에 연곡사가 나온
다. 연곡사(燕谷寺)는 신라 진흥왕 6년(545년)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임잔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5년 소요대사(逍遙大師)가 복구하였지만 6?25동란 때 다시 파괴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81년 3월 구(舊)법당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것이며 경내에는 국보 53호인
동부도(東淨屠)와 국보 54호인 북부도(北淨屠)를 비롯하여 보물 4점 등 문화재가 있다. 또
연곡사는 구한말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고광순(高光洵) 등 수백 명의 의병이
진을 치고 유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高)의사의 순절비가 경내 좌측 동백숲속에
있다. 옛날 연곡사 경내에는 밤나무가 많아 왕가(王家)의 신주목(神主木, 位牌木)으로 봉납
해왔고 또 지체 높은 승통(僧統)이 있어 승려들도 호기가 당당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옛보
다 여러모로 초라한 느낌까지도 드는 절이다.
연곡사에서 나와 비포장도로를 따라 가면 좌측으로 갖가지 홈 파인 기암 위로 옥류가 시원
하게 흐르는 것이 아름다운데 이렇게 30여분 가면 직전마을에 도착한다. 서울대 연습림 사
무소가 길가 좌측에 있고 상가와 민박집도 보인다.
신비한 토종벌의 세계
피아골 일대는 널이 알려진 것처럼 한봉(韓蜂, 토종벌)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가을~
이듬해 봄철 이곳 상가에서도 벌꿀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 벌들의 세계에 대해 잠시 알아보
자. 토종 벌통 하나에는 보통 여왕벌 1마리를 최고 통치자로 수십 마리의 수펄, 그리고 2~3
천 마리의 일벌들이 나름의 위계질서를 이루고 조직적인 분업생활을 하며 산다. 부지런히
꿀을 채집하여오는데 봄, 여름, 가을 동안 이렇게 해서 채집된, 하얗게 엉겨붙은 꿀을 가을에
사람들이 채취한다. 그리고 5월경에는 새끼벌을 치는데 이때는 사람이 벌통 주위에 상주하
면서 이들을 새로운 벌통에 무사히 입주시켜야 하는 다소 까다로운 일이 생긴다. 기존의
집에서 분가할 때는 수천 마리의 벌들이 마치 집단시위를 벌이듯 주위를 맴돌다가 나무나
바위에 잠시 머무는데 이때(2~3시간 안에) 새로운 벌통으로 옮겨야지 만약 방치하면 가출하
여 깊은 산야를 방황하게 된다. 소위 '자연석청'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때 놓쳐버린 벌들이
깊은 산속으로 옮겨와 자체적으로 바위틈이나 통나무 속에 살면서 꿀을 채집하여 생긴 것들
이라고 한다.
토종꿀이라고도 말하는 이 한봉벌꿀은 꽃을 찾아 이동하면서 치는 양봉꿀보다 우수하고
효과가 뛰어나 고가에 팔리기 때문에 지리산 인근 주민들의 목돈 마련에 심심치 않게 기여하
고 있다.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또 해마다 새끼를 쳐서 벌통도 늘려가기 때문에
유망한 소득 업종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만 이제껏 지리산의 온갖 꽃들이 풍부한 밀원(密源)
을 제공하였지만 숲이 우거지고 점차 밀원이 줄어드는 추세라 어떤 마을에서는 양봉으로 전
환하기도 한다. 덩치가 큰 양볼벌이 토종벌을 죽이기도 하기 때문에 보호구역내에 양봉 벌통
반입은 규제된다. 벌통 앞에서 가만히 앉아 바라보면 때때로 번짓수 잘못 찾아 남의 집에
들어온 벌이 그집 벌들에게 호되게 당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기하학적으로 정확한 육각형
의 틀과 크기로 벌집을 지어가는 벌들의 신비한 공학세계도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연곡천 담수어가 줄어들고 있어
직전마을에서 산모퉁이를 하나 돌면 직전 윗마을이 다시 나타나고 민박집과 상가가 십여
채 보인다. 지난 1982년경 피아골 일대에 종합 학술조사를 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의 자료
와 필자가 들은 바를 토대로 지리산 지역 민물고기 서식 종류를 참고로 나열해보면 꺽지(꺽저
기), 피라미 등이 주종을 이루고 여름철 범람 후에는 뱀장어, 메기 등도 상류로 물을 차고
올라온다. 섬진강을 가까이 끼고 있는 연곡천에는 뱀장어, 피라미, 갈겨니, 쉬리, 돌고기,
눈동자개, 메기, 동사리, 밀어, 꺽지 등이 쉽게 목격되고 은어, 황어, 잉어, 모래무지, 참마자,
미꾸리, 줄공치, 숭어, 쏘가리 등도 연곡천 하류 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지리산의
계류는 대개 맑고 수온이 낮아 다양한 종류의 어류가 산란?서식하기에는 부적당한 일면이
있다고 하는데 또 제피나무 껍질을 말려서 빻은 가루 등 독극물에 의한 폐해와 밧데리 등
전기충격에 의한 불법 어획 행위도 담수어 어류상을 빈곤케 하는 또다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섬진강과 그 연안 계곡 등은 그나마 다양한 어류상을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북쪽 엄천강
일대의 연안 하천에는 남강댐 건설과 인근 석재공장에서 내뿜는 뿌연 돌가루물 때문에 담수
어가 옛날보다 급격히 줄어드는 안타까운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직전마을에서 선유교까지는 30여 분 남짓 걸리는 넓은 길이다. 스기(杉)나무와 침엽수가
새로 조림된 듯한 선유교에서는 철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바로 계곡 우측으로 오르는 옛 길도
보인다. 시원하고 깨긋한 계류를 바라보며 선유교를 건너면 울창한 숲속에 야영장이 아늑하
게 자리잡고 있다. 옛 일제시대 때 이곳에서 표고를 재배하였다고 한다. 수백 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야영장을 지나 반반하게 잘 다듬어진 돌길을 오르면 갖가지 활엽수가
울창하다. 졸참나무, 생강나무(아구사리), 오리나무, 서나무, 갯버들, 신갈나무, 산초나무, 초
피나무, 등이 눈에 띄는데 가히 수목 전시장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 이 피아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곡에 홈 패인 암반으로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2~3m의 아담한 폭포가 보이며
잠시 두 갈래 길이 나오지만 어디로 가나 다시 만나고 쉴 만한 바위 반석이 나오는데 계곡
건너편에 일본목련(후박나무)숲이 눈길을 끈다.
산도 물도 붉고, 사람마저 붉게 물들여지는 삼홍소
진달래가 몇 그루씩 보이고 계곡에는 아름다운 소들이 이어지면서 어느덧 삼홍소(三紅沼)
에 도착한다. 1986년 11월 준공된 길이 30m의 삼홍교가 가로놓여 있는데 다리 위에서 보면
좌측 계곡가 바위에 '삼홍쏘'라는 페인트 글씨가 보이고 위쪽으로는 아담한 폭포가 서너 개
정도 이어져 있어 멋진 신비경을 이룬다. 울창한 수림과 흰 포말을 이루며 흐르는 계류가
장관인 삼홍교를 건너면 투박한 길이 잠시 나타나고 맞은 편 계곡(합수골)에는 폭포수를 이룬
지류가 흘러 내려온다.
오른쪽으로 잠시 꺽어지던 길을 가다보면 와폭의 연속인 계곡에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구계포(九階泡)계곡에 이른다. 철다리(구계포교)가 놓여 있어 여기에서 위쪽을 보노라면,
완만한 암반 위로 영롱한 오색구슬들이 함박 쏟아지듯 층층계단을 타고 흐른다. 피아골의
계곡미의 극치를 이룬 곳이며 뒤에는 울창한 수림 속 잔잔한 수면 위에 천수를 다한 고목등걸
이 얼굴을 처박고 있어 고풍스러 분위기도 보여준다.
구계포교를 건너 조금 가면 텐트 7~8동 칠 수 있는 평지가 나오고 얼마 안가 시원한 포말
음과 함께 남매폭포가 나타난다. 높이 3~4m의 쌍폭포인데 짙 푸른 소로 쏟아지는 폭포수가
뼈속까지 시원하게 하며, 아래쪽으로 멋진 소들이 이어진다. 얼마 안 가면 다시 10m의 와폭
이 눈에 보이다가 기억자(ㄱ)형 비박지가 있는 거대한 바위들과 만난다. 성벽 밑을 거닐 듯
높이 15m 정도의 이 바위병풍 밑을 지나면 출렁다리를 거쳐서 쇠줄을 붙잡고 경사 급한
곳을 오르게 된다. 거목들이 우거진 이곳을 오르면 평편한 쉼터가 나오고 여기서 완만한
길을 얼마 안 가 피아골 삼거리이다. 용수암과 질매재 방향의 두 물줄기가 모이는 곳이며
또 두 방향으로 각기 등반로가 전개되는 갈림길인 피아골 삼거리 숲속 공터에는 피아골 산장
이 자리잡고 있다.
사실 직전마을에서 이곳 피아골 삼거리까지는 거의 경사라곤 느낄 수 없을 만큼 완만하기
도 하지만 계곡 양쪽으로 각기 길들이 나 있다. 대체로 잘 다듬어진 흔적이 역력한 걸로
보아 예로부터 도벌이 심했던 곳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점은 피아골 일대에 거의 침엽수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수림상태에서도 증명되는데 흔히들 말하는 '피아골 원시림'이라는 얘
기도 달리 표현하자면 옛 수림상태가 잘 보존된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다만 온갖 활엽수들만
이 밀집?군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피아골 단풍도 어떻게 보면 이러한 부조리한 일면
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인골 한 트럭분이 나왔던 피아골산장터
피아골산장은 지리산의 뭇 산장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계곡변에 위치하고 있다. 좌우로
물이 흘러서 산장 앞에서 만나는 그리고 양쪽으로는 능선이 둘러쳐 있어 금방 풍수지리상으
로 명당임을 느끼게 한다. 지난 1984년 82평방미터, 60명 수용규모로 이 산장이 지어졌는데
온통 돌투성이닌 주변과는 달리 지금 산장터는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산장 앞
50m 전방에 있는 화장실 건물터도 마찬가지(함태식 씨의 설명에 의하면 풍수지리상 산장에
서 앞의 합수물이 안 보여야 천혜의 명당인데 바로 화장실 건물이 그 역할을 한다고). 1984
년경 산장을 지을 때 유일한 흙지대인 지금의 산장터에서 거의 한 트럭분의 매장된 인골이
나왔다. 옛 빨치산들의 유해인데 지리산 여타 지역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누렇게 잘 썩은
이 뼈들은 그후 무슨 특효가 있다고 믿은 나병환자들 차지가 되었다.
아직껏 역사적으로 복권되지 못한 불명예스런 이름으로, 영혼마저 올바로 천도되지 못하
고 구천에 맴돌아야 하는, 비참하게 이 골짜기에서 죽어간 패배자들을 잠시 생각해본다.
피아골산장 동쪽에는 암봉 하나가 눈에 띈다. 옛날 사명당(유정)이 피아골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곳 위에서 의병을 작전 지휘하던 곳이라고 전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흰덤
봉('흰 무덤'이라는 뜻)으로 불리는 봉우리이다.
피아골산장에서 서쪽으로 가면 경사가 심하고 투박한 돌밭길을 올라 질매재에 이르고 여
기서 노고단까지 능선길로 해서 오를 수 있다. 피아골산장 우측으로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
면 산죽도 듬성듬성 있는 울창한 숲속으로 계속 가게 되는데 얼마 안 가서 좌측에서 지류와
만나는 곳에 아치형 교각의 철다리가 나온다. 길이 20m, 폭 1m의 불로교이다. 철다리를
건너면 용수암(龍水岩) 삼거리 이정표가 있고 갈림길이 전개되는데 여기서 가파른 좌측 비탈
길로 올라야 한다. 10여 분 오르면 길이 잠시 완만해진다. 다시 나무뿌리가 노출된 길을
갈지자를 그으며 힘들게 오르면 평탄한 산죽밭이 나온다. 옛 초암터이다. 단풍나무와 참나
무가 많은 흙길을 오르면 뒤로 왕시루 능선이 나타나고 또 한차례 오르면 좌측으로 암봉이
보인다. 소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들이 서서히 짙어지는데 이렇게 약 1시간 넘게 오르면
삼도봉과 불무잔등 능선 전모를 드러내다가 임걸령이 훤히 보이는 능선위에 올라선다. 잣나
무를 돌아서 숲을 오르면 임걸령 삼거리가 나온다.
피아골 삼거리에서 질매재까지 그리고 임걸령 삼거리까지는 급경사길이다. 식수 준비하고
쉬엄쉬엄 여유를 갖고 오르기 바란다.
피아골 종녀촌의 기이한 전설
옛날 피아골의 깊은 골짜기에는 종녀(種女)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해온다. 종녀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집에 팔려가서 아이를 낳아주는 것을 자기생업으로 하는 소위 '씨받이
여자'를 말한다. 피아골에 있었다는 종녀촌에는 절대자로 군림하는 성신(性神)어머니를 비
롯하여 그 밑에 많은 종녀들과 시동(侍童)들이 절대 순종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
었다고 한다. 남존여비의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가능했던 이 기이한 풍습 때문에 때때로
종녀들은 갖은 수모와 학대를 감내해야만 했다. 어느 집에 팔려 들어가서 만약 아들을 낳으
면 타의에 의해서 혈육의 정을 끊고 되돌아서야만 했고 만약 딸을 낳게 된다면 그 딸을 종녀
촌으로 데리고 와서 다시 종녀로 길러 불행한 운명의 길을 대물림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종녀들의 피눈물 어린 통한의 인생 살이와는 달리 많은 종녀들을 거느린 성신어머니는
종녀들의 희생과 순종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과 향락을 즐겼는데 자주 성신굴에 찾아가 성신
(性神)의 제단 앞에서 무궁한 생산을 비는 기원제를 올렸단다. 은촛대에는 촛불이 휘황찬란
하게 빛나고 성신상과 남근(男根)이 새겨진 제단 앞에서 성신어머니는 주문을 외우고, 입었
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 던지면서 성신가(性神歌)를 부르며 관능적인 춤을 추다가 흥분의 절
정에 이르면 젊은 시동과 어울려 한바탕 욕정을 불태우곤 했다. 물론 지금은 사라진 피아골
종녀촌의 애절한 전설은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했던 우리 중?근세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교통과 숙박
일단 기차나 직행버스를 이용하여 구례읍까지 와서 다시 완행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연곡사 앞 주차장까지 가는 버스는 06:40~18:40까지 2시간 간격으로 배차되어 있고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피아골 직적부락까지 가는 버스로는 08:30,11:40, 15:40, 17:30,
19:40에 구례읍에서 떠나는 완행버스가 있다.
내동리 일원에 집단시설지구 공사가 한창이고 직전부락에도 민박집은 넉넉하다. 표고막
터 건너편에 야영장이 있고 피아골 산장 앞에도 야영할 공간이 있다.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짓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짓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노고단에서 구례군 토지면 소재지까지 장장 19㎞의 인적 드문 험한 능선 코스이다. 왕시
루봉 남(南)사면의 드넓은 억새밭이 장관이라 만복대 능선 코스와 더불어 가을 산행 코스로
알려져 있는데 한편으로는 갈증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힘든 능선길이기 때문에 인내심이
필요하고 식수 준비와 관리에 신경써야 한다. 아무래도 이 코스에서는 노고단에서 왕시루봉
까지 11㎞가 해발고저차도 심하고 샘물 하나 찾기 힘들기 때문에 초행자들은 체력안배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구간에 해당되지만 아침 일찍 노고단에서 출발한다면 당일 하산에 별
무리가 없는 편이다.
노고 운해를 보며 기암 절경 문수대로 향해
노고단산장에서 남쪽으로 도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얼마 후에 구례벌판과 화엄사계곡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초원?관목 지대가 나오게 된다. 좌우로 기암 절벽이 솟구쳐 있고 전망은
막힘없이 탁 트인 곳인데 노고단산장이나 부근 야영장에서 1박 하면서 아침 산책 삼아 이곳
에 들르면 섬진강의 물안개가 피어 올라 사방이 구름에 잠긴 장면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봉두산(鳳頭山), 조계산(曹溪山), 모후산(母后山), 무등산(無等山)이 구름 위에 작은 섬처럼
둥둥 떠 있는 멋진 풍경이다.
길이 정상 쪽으로 휘어지면서 방송 송신탑과 부속건물이 있는 곳으로 콘크리트 포장된
갈림길이 나타난고 여길 오르면 정문 앞에 이른다. 이정표 있는 오른쪽 소로길로 접어들어
내려가면 기암과 초지가 펼쳐지고 다시 얼마 안 가면 노고단 남쪽 산기슭을 감돌면서 숲길로
내려가게 된다. 산죽이 잔잔하게 서 있는 잡목 우거진 돌밭길을 20여 분 가면 문수대(文殊
臺, 1,280m)가 나온다. 노고단 부근에 아니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50m가 넘는
아찔한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데 아름드리 침엽수가 울창한 절벽 밑 공터에는, 주변
의 산죽을 베어 그걸 엮어서 지붕을 얹은 암자 한 채가 있다. 지금은 이곳에 젊은 수도승
성문(聖文, 29세) 스님이 혼자 살고 있다. 바위 절벽 밑에서는 희한하게도 넉넉한 샘물이
솟아 나오는 전망 좋고 시원한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90여 년전 화엄사 승려 초운대사
(楚雲大師)가 창건한 문수암(文殊庵)이 있었던 옛 절터인데 지금도 좌측에 그 터가 남아 있
고 질매재로 가다보면 또다른 옛암자가 있다. 아무래도6?25전란통에 옛 문수암 건물도
무사하지 못했던 듯한데 이상하게도 문수암에 관한 자세한 내력은 이 이상 알수 없어 안타까
울 뿐이다. 문수암에서 식수 보충하는 것을 잊지 말고 떠나길 바란다.
문수대를 뒤로 하고 평지 돌길을 조금 가면 샘물이 또 하나 솟는 곳에 야영한 흔적이 있고
여기서 다시 산죽길을 따라 얼마 오르면 능선과 만난다. 노고단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
는 곳인데 이제부터는 산죽과 참나무가 빽빽하고 그 사이로 문수리계곡, 피아골이 간간이
내려다보이는 완만한 내리막길을 마냥 가면 된다.
사거리인 질매재부터는 스릴 만점
풍도목(風倒木)이 처참하게 나뒹굴기도 한 평탄한 길은 얼마 후 끝나고 경사 급한 미끄러
운 흙비탈길을 내려가는데 좌우로 벙커 흔적이 보이다가 잘룩한 능선안부 질매재(長嶝峙)에
이른다. 마치 질매(길마)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며 피아골 삼거리와 문수리 계곡으로
도 길이 훤히 나 있는 사거리이다.
질매재에서 얼마간 오르막길을 오르면 장등(長嶝)에 이르고 능선 서쪽 사면 길을 따라 각
종 기암들을 구경하며 가게 된다. 굴곡이 심한 오르내리막길에 다가 잡목들이 우거져 이것을
헤치며 가는 때가 많다. 그리고 양쪽이 거의 급경사인 칼날 능선길을 가기 때문에 등반의
묘미랄까 스릴감 넘치는 길이 펼쳐지는데 앞에 문바우등(文岩峰, 1,198m)이 바라보이는 고
대(高臺)에서 뒤돌아보면 진달래 관목지대 너머로 노고단의 훤칠한 면모가 드러난다.
잠시 내려갔다가 다시 문바우등을 향해 오르면 암봉인 문바우등 정상에는 접근하지 못하
고 계속 서쪽사면을 따라 비껴 지나가면서 갖가지 기암괴석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간다.
잠시 동쪽사면을 넘나들던 길이 완만하게 내려가 싸리나무와 진달래가 밀집되어 있는 완경사
흙길을 오르는데 광활한 경사면에 억새가 무성하다. 문수리 방향으로는 헬기장이 있는 드넓
고 평탄한 초원지대가 내려다보이고 바로 정면을 바라보면 왕시루봉은 암담할 정도로 높기만
하다. 시선을 좌측으로 돌리면 우유 빛깔처럼 희뿌옇게 섬진강이 보이고 피아골 진입로가
확연한데 기세등등하게 남으로 뻗어내린 남부능선 자락은 잣둣날 그대로다.
왕시루봉을 향해 싸리나무를 헤치며 발걸음을 떼놓으면 시푸른 산죽터널을 갈지(之)자를
그리며 기약없이 내려가기만 한다. 무덤 하나가 나타나고 피아골 쪽으로도 헬기장이 보이지
만 이내 잡목숲 사이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왕시루봉을 다시 올라붙을 생각에 지루한 내리막길
이 마냥 밉기만 하다.
느진목재에서는 본전 다 털리고 다시 새롭게 올라가야
해발 1,000m도 채 안되는 느진목재에 오면 토지면 내서리 남산(南山)마을에서 올라오는
뚜렷한 길과 만난다. 느진목재에서 잡목 우거진 오르막길을 서서히 오르면 한숨 돌리라는
배려인지 평지길이 잠시 나타나면서 단풍나무와 산죽이 우거진 길을 다시 오른다. 가다보면
기억(ㄱ)자형 바위와 병풍 둘러친 듯한 바위, 그리고 두 쪽의 바위가 연이어 서 있기도 한데
산죽이 짙어갈수록 경사도 높아가다가 능선 위에 다다르면 양 갈래길이 나온다. 우측길은
전망 좋은 바위에 오르는 길일 뿐이니 좌측길을 택해 평탄한 능선 소로길로 사뿐히 걸어가면
된다. 남쪽으로 한참 편한 길이 계속되다가 무덤을 지나면 서서히 전망이 트이면서 황금빛
억새 물결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억새밭을 누비며 얼마간 내려오면 우측으로(서쪽 방향)
잣나무가 질서정연하게 도열하고 있는 넓은 길이 보인다. 여기를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외국인 별장촌의 공공건물과 관리인 사택이 넓은 연못과 함께 나온다.
애당초 노고단에 있던 외국인 별장촌이 6?25전란 때 폐허화되고 또 노고단이 번잡스러워
지자 1957년경부터 이곳 왕시루봉 일대로 옮겨와 자리잡게 되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1920년대쯤에 홍콩처럼 99년간의 조차계약을 맺어 노고단을 미?호주 등 외국인 선
교사들 하계별장지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그 계약이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유효한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왕시루봉에는 외국인 개인별장 11여 채와 테니스 코트 2동, 간이 풀장,
탁구장이 있는 교회건물, 창고 1동 등이 있다. 호텔과 공회당, 자가 발전기, 심지어 젖소를
사육하여 생유까지 지급했다는 옛 노고단 시절보다는 규모도 물론 축소됐거니와 소박한 생활
의 일면까지 느껴진다. 1962년부터 구례군 황전면이 고향인 단아한 체구의 이강협(李康協,
71세) 씨가 관리인으로 계속 상주 근무해오고 있고 여름철에만 잠시 들르는 외국인들도 필요
한 모든 물자 등을 직접 지고 올라온다고 한다. 개인별장 건물은 서북쪽의 야트막한 산등성
이를 넘으면 있는데 마치 백설공주 등 동화의 세계에서나 나옴직한 통나무집들이 숲속에 아
담하게 자리잡고 있어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난다. 그런데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든 우리네
서민들의 삶을 구차하게 떠올리지 않아도 이곳 외국인들의 별장을 바라보는 마음 한구석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수만 평의 광활한 왕시루봉 남사면은 억새 천국
처음 들어오던 길로 다시 나오면 아래쪽에 밀양 박(朴)씨 묘소 6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이하게도 왕시루봉 자락에는 무덤들이 즐비하여 하산하다가 20~30기 정도는 목격할 수
있다. 헬기장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너무도 아름답다. 구례평야와 함께 산야를 감돌며 흐르
는 섬진강 물줄기 그리고 건너편 백운산(白雲山)의 웅자(雄姿), 그 어느 것 하나도 감탄사를
멈출 수 없는 절경을 이룬다.
억새밭을 내려오며 잣나무와 소나무가 정원수처럼 이어지고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 내리막
길이 계속된다. 바짝 마른 개울을 건너면 오른쪽으로 방향이 꺽이면서 소나무숲 터널을 지나
고 진달래, 철쭉도 무수하다. 잠시 후 앞에 기암기봉이 나타나면서 전망이 탁 트인 초원이
다시 나오는데 능선길을 버리고 오른쪽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이후로는 뚜렷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되는데 비록 소나무 숲으로 가지만 햇볕을 정면으로 받기 때문에 후덥지근하고 짜
증스럽기까지 한다. 한 시간여 내려간 곳에 논배미가 나타나며 토지면이 시야에 가까워진다.
이곳에서 몇 갈래의 길이 보이지만 토지면 소재지로 방향을 잡으며 내려오면 무난하다. 단산
리에서 다리 건너 토지면 농협창고 앞에 오면 구례행 완행버스가 연결된다.
교통과 숙박
이 코스를 노고단에서 하산하는 과정으로 택한다면 가장 편한 방법은 성삼재 도로를 이용
하는 것이다. 구례읍에서 08:00~18:00까지 매1시간 간격으로 성삼재를 오르는 정기노선
버스가 있다. 구례읍 완행버스 터미날에서 출발 화엄사 앞 주차장에서 잠시 정차한 후 성삼
재까지 곧바로 오르는 데 약 50분 소요되고 요금은 800원이다(다만 여기에 별도의 입장료
800원이 또 추가된다. 그리고 겨울철과 늦가을, 이른봄에는 결빙문제 때문에 차량통행이 금
지되므로 아울러 참고 바란다).
앞서 지적했듯이 왕시루봉 능선 코스는 다소 무리하더라도 당일하산을 원칙으로 계획을
짜야 한다. 물론 왕시루봉 근처에 야영 정도는 가능하지만 차라리 무거운 텐트라든가 짐들을
과감히 생략하고 필수 안전장비(윈드쟈켓, 보조 수통, 간식 등)만을 간단히 챙겨 속보산행을
강행한다면 토지면까지 무난하게 하산이 가능하다. 중도에 기상이 악화되고 체력에 이상이
오면 질매재에서 피아골 삼거리(피아골산장이 있음)로 하산하던가 느진목재에서 피아골 내
서리(內西里) 쪽으로 빠지면 된다.
토지면에서 오르려면 구례읍에서 20여 분마다 있는 완행버스를 타고 20여 분쯤 가 토지면
에서 하차하여 단산리로 들어서야 한다. 토지면에는 민박집과 여관 등이 없으므로 구례읍에
서 1박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