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공동체 문화의 흔적
권종순(법륜행)
순창은 대부분이 산간지형이지만 강과 하천을 끼고 있어 수량이 풍부하고 수질이 좋다고 한다.
순창하면 고추장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만 아닐 것이다.
이 고장에서 생산된 고추와 콩을 사용하고 깨끗한 물로 담그고
발효에 적합한 기온이 어우러져 순창고추장이 탄생된다고 한다.
순창고추장이 유명하게 된 것은 고려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만나로 순창에 왔다가
어느 농가에서 먹어 본 고추장 맛을 잊지 못하여 돌아가서 진상하게 하게 하였단다.
아쉽지만 우리 일정에는 고추장마을은 방문예정에 없었다.
이번 답사 일정은 순창에 있는 남근석과 장승 그리고 강천사를 가는 것이다.
먼저 팔덕면으로 향했다. 이 마을에는 공동체문화의 흔적으로 입석과 남근석, 당산나무가 있었다.
입석마을의 논 가운데 있는 당산나무와 입석에는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의 안녕과 자손의 번성을 빌었다. 이제는 당산나무와 입석이 원래의 기능은 잃어버리고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벌판을 지키는 수호신 마냥 있었다.
마을 앞을 지나는 793번 지방도로는 키가 큰 수종인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초록의 터널을 만들었다.
아침부터 스멀거리던 하늘은 비를 내렸다. 비와 안개에 젖어 희뿌연 가로수 길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몽환적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인양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들이 천진하기만 하다.
팔덕면 팔왕마을에는 오래된 소나무를 지나서 남근석이 있었다.
비가 내리는 들판에 우뚝 솟아있는데 너무나 사실적인 표현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잠시 웃음으로 때웠다.
어느 작가는 ‘싱싱하고 당당하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것을 만든 이도 너무나 사실적인 표현이 민망했는지 가운데 부분을
연잎과 줄기 연꽃봉우리로 묘사하였다. 이것의 크기는 거의 우리의 키 높이와 같았다.
1500년경 어떤 여인이 남근석 두 개를 깎아서 치마에 싸가지고 오다가 너무 무거워
하나는 창덕리에 두고 오고 하나는 산동리 까지 가져와서 세웠다고 전한다.
이 여인의 염원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힘들게 옮겨왔을까.
마을사람들은 이를 미륵이라고도 불렀다.
민중구원의 염원인 미륵이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당시
여인의 염원과 결합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한때 이것을 상스럽다고 생각하여 마을 청년들이 넘어뜨렸다고 하는데,
그러자 마을의 샘이 말라버려 다시 세웠다고 한다.
다시 여인이 한 개를 두고 왔다는 창덕리를 찾았다. 주변에 있는 밤나무들은
잘 익은 밤들을 툭툭 던져놓았다. 이것을 발견한 우리들, 터진 밤송이 사이로
알밤을 까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답사에 재미를 더하는 보너스.......
이곳의 남근석은 낮은 언덕 위에 있었다. 산동리와 거의 유사한 모습이나 돋을새김으로
힘줄까지 표현해 더욱 사실적이었다. 여는 남근석과 마찬가지로 아들을 못 낳는 여자가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고 안아주면 아들을 낳는 다는 말이 전한다.
신동리와 창덕리 남근석은 각각 민속자료 14, 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마도 이 둘이 전국 어느 곳에 세워진 남근석과 비교하여도 결코 뒤지지 않을 튼실한 모습이었다.
여러 지방에서 발견되는 남근석을 세운 뜻은 가지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겠지만,
이는 농경사회에서 필요한 공동체 생활의 중심에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한 것이며,
또 남해 가천마을처럼 바닷가 동네에서는 풍어와 다산을 빌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풍수에서는 정읍의 원백마을처럼 음기가 강한 곳에 남근석을 세워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은 때를 정하여 이러한 곳에 모여 제를 지내고 마을의 번영도 빌었다.
또 순창에서는 풍수를 위해 세워진 것으로 돌장승이 있었다.
순창의 지형이 북쪽이 허하기 때문에 두 기의 장승을 각각 먼 거리에 세워서
북쪽을 향하게 했다고 한다. 지금은 두 기의 장승을 순창문화원 뒤뜰에 옮겨 놓았다.
충신리 돌장승은 사각의 화강암을 대강 다듬은 형태로, 특이한 것은 이마에 백호를 새기고
작은 젖가슴을 동그랗게 표현하여 여장승임을 알게 했다.
남계리 돌장승은 백호와 동그랗게 표현한 두볼 아래 부처님의 목처럼 삼도를 새겼다.
또 내륙지방의 장승에서는 보기 드물게 두 손을 새겨서 미륵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순창여중 교문을 지나 학교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니 잘 생긴 고려시대 탑이 있었다.
물론 폐허가 된 인근 사찰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비록 집을 떠나 이사를 왔지만 여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탑은 외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탑은 고려시대의 것이나 지역적인 특성이 가미되어 백제탑 양식을 띄고 있었다.
백제탑의 지붕돌은 부드럽고 풍성하여 여유로운 멋이 느껴진다.
그래서 세련된 신라탑보다 더 정이 많이 간다.
순창에서 가장 내놓으라면 그래도 강천산과 강천사가 아닐까 한다.
강천사 가는 길은 계곡이 1.8Km 이어졌다. 입구에는 병풍폭포가 있었다.
병풍처럼 깎아지른 절벽에서 마치 하얀 비단이 넘실대듯 부드럽게 물이 흘러내렸다.
후에 알았지만 이것은 인공폭포라고 한다. 주변의 조건과 잘 어우러져 있어서
자연을 거슬리지 않는 안목이 탁월하였다.
계곡의 물은 얼마나 맑은지 일급수에 산다는 송어와
다슬기가 무리지어 있었다. 계곡을 따라 평평하게 이어지는 숲길은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절 입구에 다다른 얕은 계곡에는 수 만 가지 기원을 담은 돌탑들로 가득 메웠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이들의 사연이 두런두런 들릴 것만 같았다.
계곡 오른쪽에 강천사는 신라시대 도산국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고려 충숙왕 때 사세가 매우 커져서 스님 천여 명이 머물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절은 다 불타버리고 고려시대 5층 석탑만이
전쟁의 상처를 딛고 굳건히 절터를 지키고 있었다. 현재의 건물은 근대에 지어서
고풍스런 멋은 없지만 말끔한 경내가 인상적이었다.
종일 가을을 재촉하는 비를 맞으며 즐겁게 답사를 마쳤다.
낯선 풍경은 늘 우리를 설레게 하고, 익숙해짐은 다시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늘 이 둘 사이를 오가는 것 같다. 떠날 때 우리를 설레게 한 낯선 풍경이
가슴에 오래오래 남아 있는 것을 보면.......또 답사가 기다려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