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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시는 은혜
데바다스(Devadas)는 인도의 대학원생으로 아주 잘 생긴 젊은이였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오래전 야외 집회에서 한 전도자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퍼득 떠올랐다. 그 얘기인즉 어떤 회의론자가 동네의 한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당신네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종교란 기껏해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해 주는 정도이지 도무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종교는 못되는 것 같습니다. 당신에 그리스도인들만 보면 나는 두통 환자가 생각납니다. 두통을 계속 끓이고 다닌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머리를 잘라버릴 수도 없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당시 나는 인도의 어떤 도시의 한 영어 사용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거의 10년 동안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선교사역을 하다가 이제 막 도시로 옮겨온 참이었다. 그 전에 한 일은 주로 교육 수준이 높지 못한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새 신자들을 불러 일으키고 또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도시에서 접하게 된 사람들은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산업화된 도시에서 살다보면 으레 부딪치게 마련인 이런저런 문제들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데바다스가 털어놓은 문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였다. 사실 데바다스는 우리 교회의 가장 훌륭한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오랜 기독교 가정 출신인데다가 깊이 헌신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에도 걸 맞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 데바다스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힘들게 몇km를 달려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할 만큼 충실했으며 성경을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가 하면 지신을 조롱하는 동료 힌두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신실한 증인이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데바다스는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이었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왜 그가 지금 자신의 신앙 때문에 다 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게 되었느냐는 것이었다. 1975년의 그 오후만 해도 나는 그가 털어놓고 있는 얘기가 행위의 덫이라는 올가미에 걸린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통상적인 특징들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아주 난감해졌다. 그의 말은 다 사실인 것 같았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라든가 증거라든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굳이 그에게 묻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영역들에 대해서는 그의 능력을 족히 보아 왔던 것이다. 그 난감함의 와중에서도 성령님께서는 한 구성에서 내게 강하게 말씀하셨다. "이제 입을 다물고 그가 하는 말에 참으로 주의 깊게 들어보아라. 너는 그의 문제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서 너의 답을 얘기해 주는데에만 급급해 하고 있다."
내가 만났던 그리스도인들은 민감하고 성실하며 의욕이 강한데다 일의 열심히 대단한 사람들이었으나 하나같이 단조롭고 고된 영적 행위라는 덫에 꽉 붙잡혀 있었으며 거기서 빠져나올 출구조차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혀 사는 포로였다.
끊임없는 죄책감, 정죄감, 하나님이 나를 판단할 것이며 싫어할 것이라는 느낌,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언제나 죄책감을 느낍니다” 라고 호소해온다. 죄책감은 어떤 특정한 죄으 행위나 태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른 아침 계곡을 온통 휘감은 안개만큼이나 우리의 전인격을 송두리째 휘감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의 죄책감이다. 하나님이 항상 자신을 싫어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옅은 안개가 되어 그 속에 묻혀사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안개가 너무 짚어서 거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돼 버린 사람들도 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정서적 고통과 영적 절망이란 이미 더 이상 악화될 수 없는 지점에까지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무가치감, 낮은 자존감, 끊임없이 엄습해오는 내적 자기비하와 자기경멸, 자존감(self esteem). 존중(esteem)이라는 말의 본래 사전적 의미는 "귀히 여기다. 존대하다. 높이 평가하다. 존경하다" 등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자존감은 한 인격으로서 자신을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행위지향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성취와 무관하게 한 인격으로서 자신에 대하여 별로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괜찮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비하(belittle) 시킨다. 글자 그대로 그들은 자신에게 작아지라(be little)고 거듭 다그친다. 그래야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하찮은 존재일 것이라는 사고를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 장난 같고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느낌, 공허한 껍데기가 되는 것 같은 기분, 나의 참 자아를 잃어버린 것 같고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는 것만 같은 기분,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자기 모순들에 부딪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특유의 자아 상실감이 찾아오게 된다.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되어야 할 모습(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그렇게는 되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 있는 갭이 워낙 커서 그 고통이란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참자기란 하나님이 주시고 또 자신의 뜻을 위해 사용하시기로 계획하신 그 본래의 독특한 자아이다.
종은 수용과 가치 인정의 근거가 행위에 있지만 자녀는 신분에 있다.
주인이 진정 나의 일을 맘에 들어하실까 하는 생각하면서 종은 하루를 불안과 염려고 시작하지만 자녀는 가정의 안전한 사랑 속에서 쉼을 누린다.
종은 일 솜씨 때문에 받아들여지지만 자녀는 관계 때문에 받아들여진다.
종의 소속은 능력과 행위에 달려있지만 자녀의 소속은 한 사람으로서의 신분 자체에 달려 있다.
하루를 마칠 때 종은 자기의 일로 자기의 가치를 입중해 보였다는 확신이 설 때에만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자녀는 하루 종일 안전하며, 내 일이 자신의 신분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종은 일을 잘 못하면 자리가 위태해진다. 실직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는 실수를 하게 되면 부모를 속상하게 해드렸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플 수 있고 또 꾸중을 듣고 훈계를 받을 수는 있으나, 버림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자녀는 가족의 일부로 소속이 돼 있고 또 사랑을 받는 존재이므로 근본적으로 당당하며, 행위가 그의 신분을 조금도 흔들어놓지 못한다.l (갈4:4~7)
"사람이란 누구나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자기 자신이 문제이거나 문제와 더불어 살아야만 한다"고 말한 사람은 위대한 쌤 슈메이커(sam shoemaker)라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의 말을 "완전주의 자들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들 자체가 문제 이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바꿔 쓸 수 있을것 같다.
그리스도인의 행위적인 삶은 교만이라는 악성 바이러스에서 비롯된다. 교만은 죽음에 이르는 거짓말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거짓에 의존하며 삶을 구축해 가도록 우리를 몰아간다. 그 거짓말을 주장한다. 만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그것을 얼마만큼 하는 가에 달려 있으며,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일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사랑과 수용도 우리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고 성공과 지위도 우리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라고..
은혜에 대한 건전한 신학은 사실상 단순한 머리속에 있는 명제로만 그칠수 있다. 가슴속까지 와 닿지가 않는 것이다. 가슴속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얼핏 그것이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말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성경시대의 사람들이 깊은 신념이나 감정 경험의 근원을 뱃속이라고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다. 보통 '마음'이라고 번역되는 말들이 영어 흠정역에는 '배'나 '뱃속'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에 대하여 건전한 성격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으며 머리로 부타는 그것을 에누리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믿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슴속으로 부터 그분과 더불어 사는 차원은 아니다. 그것은 타인들과 자기 자신을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교리적인 것이지 관계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믿긴 하지만 그렇게 살아내지는 못한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하기 쉬운 말은 무조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 타락의 결과들을 얘기하면서 교만과 자기 중심성과 하나님께 대한 반항으로 특징지어지는 우리의 죄성을 들춰 내는 것이다. 결국 죄야말로 이 모든 악순환의 시초가 아니겠는가? 그건 맞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지금 이런 식의 반응을 취한다면 그것은 다시 한번 머리를 되돌아가는 일에 지나지 않을까 싶어 우려가 된다. 즉 가슴 속에 참된 변화를 주지 못하는 지적 수준을 향하여 또 하나의 그럴듯한 교리 행각을 벌이는 것이 될수도 있다는 말이다. 불행히도 실제로 많은 목사들 및 상담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진짜 문제를 놓지고 있다. 즉 많은 사람들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채 굳어져 있는 은혜의 장애물들을 간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장애물을 가운데에는 사고(思考)와 같이 우리 인성의 인식 수준에서 활동하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과거의 경험과 관계들의 유형 및 그 기억들이 빛어낸 감정, 습관, 태도 및 반응, 그리고 성향 및 선입관 등도 들어있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이 우리 인성의 깊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것들로서 결코 단순한 개념이나 지적인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과 개념, 개념과 감정이 뒤얽힌 것이며, 지적인 관념과 정서가 서로 맞물려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한번 복음으로 담금질을 받아야만 한다. 많은 경우 그런 영역들에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과 아울러 치유의 은혜가 있어야만 한다.
전통적인 가톨릭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오직 하나뿐이며, 그 구원의 은혜는 그들의 특별한 교회를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 속엔 아주 중요한 구분하나가 빠져있다. 교회가 우주적이고 불가시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킬 때는 그것은 거룩하고 완벽한 유기체로써 그리스도를 참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그 구성원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가시적인 교회는 다분히 인간적이고 불완전한 조직체이다. 교회 안에도 인간의 타락되고 불완전한 모습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참 신자는 우주적인 교회의 뗄레야 뗄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가시적인 지역교회이다. 우리는 가시적인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 특정한 문화의 산물들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하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받아들이고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막는 다음과 같은 장애물들이 교회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그리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율법주의는 언제나 교회에 문제가 되어왔다. 명령과 규율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이 세상 모든 종교가 지니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허위이다. 즉 도덕적인 율법 사항들을 지킴으로써 신(神)의 인정과 사랑을 얻어 낼수 있다는 생각이다.
복음적인 교회 및 목사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을 믿고 또 가르친다. 그들은 행위 구원을 의도적으로 전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일학교 공과나 설교를 보면 은혜의 메시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심심치 않게 있다. 게다가 듣는 사람들을 한번 걸러서는 하나의 모순된 복음 즉 은혜와 행위가 뒤석인 메시지 무조건적인 사랑과 행위를 따지는 수용이 혼합된 복음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모든 혼합된 복음이 그러하듯이 이런 변질된 복음 역시 혼돈을 야기시켜 결국 정서적 영적 문제들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울 사도는 십계명의 제 5계명을 신약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하게끔 다시 새롭게 풀어 쓴바 있는데 거기서 그는 자녀의 순종에 대한 책임이 일부는 바로 부모의 태도에 있다고 딱 잘라 말했다. 여기서 태도란 곧 부모의 은혜가 표현되는 중요한 통로이다. 부모의 명령과 규율은 "주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 말은 곧 하나님의 도덕 원리와 일치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을은 또한 올바른 정신 가운데 행해저야 한다. 훈계가 아이들로 좌절하게 하며 노엽게 하며 적개심을 품게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바로 이러한 부모의 은혜, 특히 아버지의 은혜를 받고 자랐다는 것에 대하여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아버지는 내가 하늘 아버지를 믿고 그분께 순종하는 일을 아주 쉽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안정감에 대한 예화>
나의 안정감은 어렸을 때 여러모양으로 다져졌다. 매일 밤 나는 잠옷을 입고 내방 문간에 서서 "아빠 잘 준비 다 됐어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아버니는 내 방으로 오셔서 같이 기도를 해주셨다. 내 마음 속엔 아버지가 그렇게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신 뒤 그 자상하신 성품으로 아주 슬거머니 어깨 위까지 이불을 잘 덮어주시곤 하시던 모습이 언제나 남아 있다. 그리고 나면 내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잘 자라. 코리~ 아빠는 코리를 사랑한다."
아버지가 가시고 나면 나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고 했다. 몸을 뒤척이게 되면 아버지의 손길이 조금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그낌이 남아 있는 상태 그대로 잠들기를 원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내가 독일의 한 집단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였다. 나는 종종 어릴적 내 얼굴을 만져주실 때의 아버지의 손길이 주던 그 느낌을 떠올리곤 했다. 인간성이라고 찾아 볼 수 없는 수용소 안, 그 누더기 같은 더러운 매트리스 위에서 벳시(Betsie) 언니와 함께 누어 있을 때 나는 이렇게 기도를 드리곤 했다. " 오 주님 제 얼굴을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시옵서소. 주의 날개 그늘 밑으로 살며시 파고들게 하옵소서"
그 고난의 한 가운데에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안전한 보호가 있었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랑으로 인한 관심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모든 죄나 거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일관성 있는 배척을 의미한다. 분노는 미움이 서로 뒤엉키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한층 더 혼란스럽게 된다. 그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매우 화가 나있음녀서도 동시에 그들을 깊이 사랑할 수 있다. 사실 후륭한 부모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줄을 안다. 왜냐하면 바로 분노가 우리가 자녀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입증해 주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으로 그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외부로부터든 내부로부터든 그들을 해롭게 하거나 파멸에 빠뜨릴 만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그냥 놓아둘 수 없을 것이다. 하니님의 분노 죄를 향한 그분의 거룩하신 배척은 그분이 자녀들의 구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고 걱정해 주시는 분이기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한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는 자기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인하여 자신의 그런 필요들이 다 채워지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나는 선교사나 목사들의 자녀들로 부터 이와 같은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부모님이 나를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으로서 대해 준다는 느낌도요. 그들이 나한테 정말로 관심을 보였던 것은 내가 어떻게 자기들의 영적인 평판에 영향을 줄것인가 하는점 한가지 뿐이었어요"
심리학적으로 가장 심오한 의미가 담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는 "오직 너의 말을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 5:37) " 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 "옳다"와 "아니라"를 동시에 말하기를 일삼는 부모는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깊은 혼란과 모순된 감정을 유발시키게 된다. 예건데 "엄마 나가 놀아도 돼요?" 하고 묻는 아이에게 "글쎄 , 그러렴 하지만 엄마가 네 방을 청소하게 되겠구나 " 라고 대답함으로써 혼돈을 불러일으켜서는 안된다. 차라리 그보다는 " 방 청소부터(또는 숙제부터) 우선 한다면 그래도 좋다"나 " 안돼, 오늘은 엄마를 좀 도와줄 일이 있거든" 하고 말하는 것이 훨씬 건강하다.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조건적이고 행위근거적인 수용의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는 또 다른 영역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라와 하지말라에 대한 지나친 강조인다. 물론 아이들에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명들을 가르쳐 주는 일은 부모의 책임이다. 그들은 이 일을 교육(자신들의 가르침)과 모본(자신들의 삶) 둘 다를 통하여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이 어떤 정신에서 행해지느냐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6:4 및 골로새서 3:21 에서 바울은 "노엽게 하거나" "격노케 말라"고 부모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다른 번역에 보면 그 뜻은 이렇게 상술되어 있다. "부모들은 자녀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들이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지나치게 꾸짖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라면서 자신을 못나게 여기고 좌절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소멸형>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즐겨 취하는 태도로써 그들은 이 과도한 연약함이라는 악덕을 두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길이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그것이 미덕인 것처럼 영적포장을 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하다면 과격해지고 마찰도 불사할 수 있는 참 사랑의 최악의 모조품일 수도 있다. 자기 소멸형의 사람들은 실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날 사랑만 해준다면 뭐든지 하겠아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날 해치지 않을 테니까요."
이런 사람들이 이성(異性)과 관계를 맺는 것을 보면 대개는 상대방에게 문제만 야기시키는 비참하고 치명적인 관계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도 개탄할 일은 에베소서 5:21~24을 곡해한 일부 목회자 및 지도자들 조차도 그런 태도를 축복하고 신성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결혼인양 그런 식의 파괴적이고 신경증적인 관계를 조장하곤한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받아 들인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아주 어려운 일이다ㅏ. 왜냐하면 그들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자유가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 자기소멸형 인간은 수용받고 싶은 옥구가 너무도 강하여 사람들 마음에 들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집요하리 만치 복종적이고 동조적이며 늘 다른 사람의 결정에 따르는 쪽이다.
나는 오랫동안 목회를 하면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을 상담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수 있었다. 그런 것을 통해서 내가 내리게된 하나의 화고한 결론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할 최후의 것은 곧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죄를 포기할 것이다. 야망과 돈과 명성과 위안을 포기할 것이며 그 모든 것을 다 하나님 앞에서 희생하며 그분께 내어드리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해야할 가장 어렵고 가장 값지불이 큰 최후의 것은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얻어내기 위해서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거라는 생각이다. 찬송가 '만세반석 열리니'의 2절 가사에 보면 우리의 무능력이 시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눈물이 흐른들 아주 영원하겠으며
영정이 있은들 곧 식지 않겠는가
그것이 어찌 죌를 속해주겠는가
오직 주님만이 구원하시는 것을
내 손에 드릴 것 아무것도 없이
오직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네.
한편 보다 직접적인 방법이랄 수 있는 소심증도 들 수 있다. 이들은 세심하고 꼼꼼하고 늘 노심초사하며 엄격하고 빈틈없는 방식으로 율법-말씀의 율법, 사회적 문화적 율법들-을 준수함으로써 보답을 해보려고 애쓴다. 일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나타나는 이러한 경향은 바로 인식한 현명한 쌤 슈메이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10년 전의 회심자가 10년 후에 바리새인이 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나는 우리교회 중등부 학생들 가운데 한명의 삶에 찾아왔ㄷ언 신앙생활의 그 전환점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미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시돼있었다. 그는 아주 열심이었으나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그렇듯이 늘 신앙 생활의 기복들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난 예배 후 초정 시간이면 자주 강대상 앞에 나가 기도를 하곤 했다. 그 학생은 그날도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ㅏ. 나는 그와 함께 기도한 뒤 이번에는 그와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는 해보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얘기하는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결연해 보였다. 그러더니 물었다. "하지만, 또 실패하면 어쩌죠? 제가 넘어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스티브 나는 너를 아주 잘 알고 있단다. 아마 우리 교회에서 그 누구보다도 너를 잘 알거다. 그래서 말이지만 나는 너에게 한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보장할 수 있을것 같다. 너는 실패할 것이고 너는 넘어질 것이다. 그것이 어쨌다는 거지?" 그는 약간 충격이라는 듯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내게서 실패의 보장이 아니라 뭔가 확식을 원했었던 것이다. 그라 대답을 못하고 있는 사이 나는 그가 지금 " 그것이 어쨌다는 거지?" 하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윽고 그에게 뭔가 빛이 떠오른 것같았다. 그것은 마치 플래쉬의 광선이 천천히 그의 얼굴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아주 천천히 그는 미소를 머금기 시작하더니 고개를 끄억이며 말했다. "음... 목사님 말씀의 의미를 알것 같아요. 갑자기 깨달아 젔다고나 할까요! 그래요. 저는 실패할 것이고 넘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을것 같아요. 그러지요? " 이내미소는 큰 얼굴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그뒤로도 많은 성장이 뒤따랐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그에게 은혜의 길에 대한 첫 발견이었다. 그리고 그 발견-은혜에 있어서 실패가 달라지게 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후에 그는 읂몌의 반포자가 되어 11년 동안 목회를 했으며 지금은 한 신학교에서 조직 신학 교수로서 여전히 은혜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은 내가 그에게 "나는 너를 너무 잘 알기에 네가 실패할 것도 확신하고 있다"고 한 말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 좀 의아스러워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바로 그의 아버지었기 때문이었다.
구원이라는 것은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 들이는 것이며, 그 근거는 완전한 행위가 아니라 신뢰하는 믿음인 것이다.
(롬 3:21~24, 11:6)
은혜의 신학 속에 있는 교리적인 신념이 물론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행위 지향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주지도 못한다. 이것은 목사, 전도사, 교사, 상담가 등의 수많은 그리스도인 사역자들 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들은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문제를 단지 인지적 차원-설교, 교육, 경계 등-에서만 다루어줄 뿐이다. 아주 열정적이지만 그러나 실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잘 먹혀들어가지 않게 되면 그들 그리스도인 일꾼들-대개의 경우 그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권위적인 위치에 있게 마련인-은 상대의 문제들을 죄, 반항, 불신, 불순종, 헌신의 부족, 자기 중심성 따위 등으로 규정해 버린다. 이것은 상처입은 사람의 기존의 죄책감과 우울과 절망감을 더 부채질해 주기만 할 뿐이다. 나는 정죄들을 인하여 마음에 괴로워 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편지와 전화와 내방을 겪으면서 많이 울곤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토록 열정은 있지만 결국은 잘못 행해지고 있는 노력들을 보시며 우실 거라는 확신이 든다. 율법의 추종자들에 대한 바울의 말이 여기에 딱 들어 맞는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 여기보다 바람직한 길이 있다. 그 길은 은혜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길이다.
- 과거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은혜
- 파괴된 인간관례를 재건하는 은혜
- 왜곡된 인격 유형을 회복하는 은혜
- 연악한 사람들을 섬김의 일꾼들로 변화시켜주는 재활의 은혜
그가 모든걸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날마다 하나님과 고문자들 앞에 완전히 정직한 태도로 자신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분의 용서와 깨끗께 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문자들이 그의 개인적인 잘못들을 들어 그를 공격해 올 때마다 그는 거침없이 그것을 인정했으며 심지어는 기쁘게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중략) .... 그들이 내 모든 부족함들을 들추어 내어 내게 제시해올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하지만 선생님 저는 그 보다 훨씬더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인데요. 여러분들도 깨달아 알고 있겠지만 나 역시 나 자신을 정당화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나를 위해 그 일을 해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인데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간해서 깨뜨려지지 않은 이 죄책감의 악순환은 이렇게 우리가 죄책암에 매달리게 됨으로써 가동되기 시작한다. 출구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들오올 입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할 때에만 들어 올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혔는지를 인정하고 또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기분을 갖고 있는지를 적면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죄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잘못한 책임을 내가 지려고 하는 태도를 고집하는 한에는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는 구약의 요셉의 이야기에서 요셉이 형들을 용서해 주는 구절을 자주 듣고 또 인용하곤 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나니(창 50:20)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우리는 이 절의 뒷부분은 제대로 강조를 잘한다. 그러나 우리는 앞부분도 간과화해서는 안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여 하였으나" 요셉은 형들이 저지른 악을 있는 그대로 악으로 인정했다. 그것을 축소시키려거나 변명해 주려 들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용서란 자기에게 행해진 악을 간과해 주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인자하고 사랑 많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은혜의 능력을 차단하는 비현실적인 행동이다.
클리프와 같이 그런 부모의 비은혜 속에서 자라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상처는 곧 그들의 비성경적이고 비은혜적인 하나님의 개념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신 바된 그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운 하나님이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완전한 행위로써 그 수용과 사랑을 얻어 내야만 하는 종처럼 쉽게 기쁘시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애써 참 죄책감화 거짓 죄책감을 가려냈던 작업은 어떻게 보면 그를 더 악화시켜버렸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책감의 문제는 -지금 이 글의 대상은 그리스도인들이나는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이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껴야되고, 저것에 대해서는 최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라고 얘기해 준다고 풀릴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율법의 요구대로 살아내는 것에 있어서 우리가 보기에 실패로 여겨지는 것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정죄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실제와는 정반대의 사실 즉 우리에게는 율법의 모든 일들을 수행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의롭게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얘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행위의 복음이지 은혜의 복음이 아니다. 율접 준수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 다는 기쁜 소식이 아니던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느 태도에 달려 있다.
클리프 나는 지금 있는 바로 그대로의 모습으로 너를 사랑하고 너를 받아 들인단다.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의 느낌은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러나 이내 나느 나 자신이 흥분하여 거의 분노에 찬 모습을로 하나님께 속으로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요? 하나님은 저를 받아들이실지 모르지만 저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데요. 제게는 저의 기준들이 있으니까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성경에 아홉번 나온다. 모세가 두번(레 19:18, 9:34), 예수님이 다섯번(마 19:19, 22:39, 막 12:31, 33, 눅 10:27) 바울이 두번(롬 13:9, 갈 5:14) 그리고 아고보가 한번(약 2:8)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한번은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들...자기와 같이 사랑하라(레 19:34)로 되어 있다. 이 구절들이 본질상 자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지는 않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정상적인 기초는 곧 온당한 방식의 자기 사랑이라는 사실을 매 구절에 너무도 분명하게 깔려 있다. 자애(自愛)는 명령이 아니라 당연한 가정인 것이다.
자기 부인이란 자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를 부정하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려는 태도를 버리는 것을 말한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코리텐 붐 여사에게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그 모든 칭찬과 찬사를 어떻게 교만해지지 않고 잘 다룰수 있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녀는 말하기를 자기는 각각의 칭찬을 자기에게 주어진 줄기가 긴 아름다운 꽃 한송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는 잠깐 동안 그 향기를 맡은 뒤 다른 것들과 함께 꽃병에 꽃아 두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전 그녀는 그 아름다운 꽃다발을 취하여 예수님께 넘여그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님. 저로 이 꽃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녀는 참된 겸손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겸손이란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하고 또 다른사람들의 인정을 그대로 고맙게 받아 들이면서도 하나님이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의 가치를 증며해 보일 필요가 없는 모습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자존감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 들여졌고 소중하게 여겨지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고 하는 그 견고한 기초 위에서 싹트게 된다.
일단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에게는 죄책감이나 정죄감이나 자기 경멸은 더이상 올바른 삶의 동기가 될 수 없다. 변화에는 다소간 시간이 걸리겠지만 사랑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하고 율법의 강압적인 힘으로부터 자유로우며(롬 7:7~9) 율법이 요구하는 의식들로부터 자유하다(갈 5:16)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율법의 도덕적인 목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죄책감과 자기 협모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움을 올바른 삶의 동기로 삼는다면 그것은 우리를 더욱 더 자기 중심적이고 불안스럽게 만들뿐이다. 즉 두려움은 그 자체가 목표를 허물어 내리며 결국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우리를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반면 사랑과 은헤에 찬 인격적인 관계의 강조는 거의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계명을 지키는 것에도 동일한 기초가 된다. 즉,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14:15)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지키면, 그러면 내가 혹 너를 사랑할 것이다." 정도로 바꾸고 있다.
이번에는 치유하시는 은혜의 가장 중요한 면이면서도 심각하게 무시되어 왔던 측면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최악의 장애물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과거의 건강치 못하고 파괴적인 인간관계들이 비은혜로 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그 장애물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현재의 건강하고 건설적인 인간 관계들을 통하여 대폭 제거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동동체 은혜가 차지하는 자리이다. 야고보서 5:13~20은 위대한 치유의 말씀인데 그 중간쯤엘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여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항간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및 교회 공동체들이 이 말씀을 거꾸로 적용하고 있다는 따끔한 얘기들도 있다. 즉 서로 남의 죄를 고하고 남의 죄를 가지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이 책 앞부분에서 우리는 행위지향적인 삶의 가장 비참하고 값 지불이 큰 결과를 살펴 보았다. 즉, 그것은 자신의 참 자아로부터 소외된 것같은 느낌. 겉 다르고 속 다른것 같은 느낌. 모든게 다 가짜인 것같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초인적 자아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인들에게 공적인 자아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타인들이 믿어주기 바라는 그들의 자아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내보이는 공적인 자아는 대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자기의 사적인 자아로부터 점점 분리되어가서 결국은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예 잊어버리게 되기까지 한다.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통하여 그렇게 되려고 아주 열심히-어떤 때는 필사적으로까지- 정성을 다 한다. 그러나 우리 삶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수있는 그런 정직과 자기를 앎에는 거의 언제나 다른 사람의 존재가 필요하다. 우리가 자아를 진정으로 온전히 알게되는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참된 사적인 자아를 열어보일 때이다.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우리의 참 자아의 실장에 대하여 아주 희미하게만 지작하고 있기 쉬우며 그러면서도 초인적 자아를 가지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덮어 버리기 쉬우며, 그러면서도 초인적인 자아를 가지고 그것을 부텅하거나 덮어버리기 쉽다. 그것은 기도할 때조차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일단 한번 자신의 참 자아의 실상을 말로 표현해 보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보게 되면 계속해서 그 그릇된 자아를 고수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행위지향적이고 완전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비난이나 정죄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참 자아를 내 보일 수 있는 그런 수용적이고 사랑이 있는 교제권이 특별이 더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진리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밝혀지든지 간에 그것을 거절하거나 경멸해서는 안된다. 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모욕할 뜻만 없다면 말이다. ... 모든 진리는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고 따라서 설사 악한 사람이 한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옳고 정당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거절해서는 안된다. 그것도 하나님께로 부터 왔기 때문이다.
칼빈이 '보편 은총'이라고 불렀던 것을 존 웨슬러는 '선행적 은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즉 그것은 인간의 모든 지혜와 자식의 근워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지칭하는 말이다.
오용(誤用)의 해답은 불용(不用)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그분의 영광과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올바로 사용해야 할 의무를 받은 사람들이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찾음의 장인 누가복음 15장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명백히 보게 된다. 잃은 양과 잃은 동전의 경우에는 즉각 행동을 취해 그것을 찾아내고 만다. 그러나 잃은 아들(탕자)의 경우에는 좀 다르다. 아버지는 침묵한다. 그의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ㅏ.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들을 막지 않는다. 그를 찾아서 그의 뒤를 좇아가지도 않는다. 그는 가만히 있으므로써 그들 찾는다 그가 먼 나라로 가 얼마 후 '큰 흉년'을 만나고 비로소 '궁핍하여져서' 마침내 '스스로 돌이키게' 되도록 그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내가 십대 소년이었을 때 나는 중서부에서 있었던 여름 대성회에 여러번 참여한 적이 있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발을 예배당 마룻바닥의 톱밥을 문지르면서 나는 당시의 위대했던 전도자들의 예시지를 경외심에 가득차 듣곤 했었다. 그들의 은혜 충만한 메시지들을 인하여 나는 언제까지나 감사드릴 것이다. 그 때 들었던 얘기들 중에 특히 우리가 천국 문을 통과해 들어갈 때에 벌어질 일을 묘사해주는 얘기가 생각나곤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늘 나라 문의 현판에는 이런 글씨가 붙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곳 " 그러나 그문을 통과해 들어가서 그 현판의 뒤면을 보면 다시 이런 말이 씌어있을 것이라고 했다 "은혜로 구원 받은 자만 들어올 수 있는 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