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의 신앙 및 의례생활
조도군도(鳥島群島) 주민의 신앙 및 의례생활을 고찰하기 위한 항목들로 분류되는 자료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통적인 마을 공동의 신앙형태를 보이는 당신앙(堂信仰), 개인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깊이 관여하여 온 무속신앙, 조상숭배의례를 나타내는 제사(祭祀)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주기의 단면을 보여주는 민속적인 장례(葬禮)(독집과 초분(草墳))에 관하여 개략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마을 주민의 건강과 안녕 그리고 다산 및 풍요를 비는 마을공동제사인 당신앙(堂信仰)은 형식상 완전히 소멸의 단계에 이르렀다. 지금은 각 도서마다 근년에 종식된 당신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노목거수(老木巨樹)들과 제사를 지내던 장소 그리고 주민들의 직접·간접적인 경험들을 통하여 이곳 도서지방에 유전되었던 당신앙(堂信仰)을 살펴보고자 한다.
1978년 12월 2일에 '당집'이 헐린 관사도(觀沙島)의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당집이 헐린 장소에는 군(郡)에서 써 붙인 작은 팻말이 당목(堂木)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작은 팻말에는 철거된 건물이 '잡신사'이며 크기는 2평에 1동이라고 적혀 있다.
관사도의 당주(堂主)는 중(승僧)이기 때문에 관사도의 당(堂)은 '중당'이라고 한다. 제관 1명과 보조 1명이 그믐날 밤에 당에 올라가서 음력 정월 1일부터 3일까지 제를 모셨으며, 제관은 동네에서 가장 깨끗한 사람 중에서 생기복덕을 맞추어서 선정했다고 한다. 집안에 부스럼·곤발(종기)난 사람이 있어도 제관 자격에서 제외되었으며, 상사(喪事)나 출산(出産)도 결격사유에 적용된다. 정해진 기일에 산고가 있으면 이웃마을인 관작으로 산모를 이동시키고,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 산고가 들면 제사를 중지한다는 규율이 있었다. 제관은 소변 후에는 세수를 해야 하고, 대변 후에는 목욕을 해야만 했다.
당제 모시는 우물, 즉 당샘이 따로 있었고, 현재 이 우물은 초등학교의 간이상수도원이 되어 있다. 몇 주민들은 잡신사라고 규정하여 堂을 철거시킨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당신앙(堂信仰)을 통한 마을의 단결, 상호 봉사정신 등의 장점을 들고 있다.
상조도(上鳥島) 맹성리(孟城里)의 당(堂)은 4년 전에 철거되었으며, 당제를 모시는 날은 음력 정월 1일과 2일이었다고 한다. 당 음식(제수)으로는 소머리와 약간의 해찬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212호인 후박나무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관매도(觀梅島)의 당(堂)은 1976년에 철거되었다. 군수의 명에 의하여 당집은 철거되었고, 후박나무 보호를 위한 '가드 레일'이 설치되었으나 그 다음에 부임한 군수가 '가드 레일'을 시멘트 담으로 바꾸라고 지시하였다.
의례적 기능의 측면만을 고려하여 堂을 철거한 행정당국의 근시안은 생태적 기능을 하고 있는 당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즉, 당 나무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잘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당산(堂山)은 수목(樹木)이 잘 보존될 뿐만 아니라 각종 토양미생물의 좋은 서식처가 되고 있다. 유기물을 분해하는 능력을 가진 토양미생물은 지력을 증진시키는 관건이 된다는 것을 상기할 때 당산(堂山)의 기능도 자연보호의 측면에서 재평가될 수 있다(전경수(全京秀)·이정덕(李廷德), 1982: 357). 그 후에 발간된 진도군(珍島郡) 편찬의 홍보용 책자에서는 이미 깨어져버린 '신성림 관매도 후박나무'를 자랑삼아 기술하고 있음(진도군(珍島郡), 1982: 230-231 참조)은 행정당국의 자가당착적 모습을 지적하기에 충분하다.
주민들의 무속신앙을 알아볼 수 있는 1차자료로서는 무당의 존재와 그들의 활약에 관한 정보들이 있다. 하조도(下鳥島) 창리(倉里)의 당골(무당)은 본토태생이며, 성냥간을 하던 남편은 사망하였다. 상조도(上鳥島) 동구리에는 현재 40대의 남·여 당골이 있다. 원래 있던 당골은 서울로 이사갔으며, 현재의 당골은 장산 부근에서 이사해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음력설을 세고 나면 액매기를 주로 하며,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혼을 건지는 굿도 자주한다. 주민들과 당골들의 진술에 의하면 보건소의 증설과 교회 때문에 당골의 세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관매도(觀梅島)에서 면접에 응한 박성호(62세), 최두심(62세) 부부당골을 중심으로 그들의 무가계승(巫家繼承) 내력과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남편은 이곳 태생이고, 부인은 흑산면 수천 태생이다. 朴씨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하시는 무업(巫業)을 도와드리다가 21세 때부터 스스로 굿을 시작한 학습무(學習巫)이며, 그 해에 최씨와 혼인을 하였다. 부인 최씨는 결혼 전에는 무당 일은 해본 적도 없고 친정에는 무당이 없다. 그녀는 26세가 되던 해에 몸이 자주 아프기 시작했고 밥을 못할 정도로 아프게 되어 무당인 시어머니가 그녀를 위해서 굿을 해 주었다. 그 후로는 병이 나았으며, 스스로 굿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위를 들거나 대나무를 곡식에 꽂으면 저절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즉, 최(崔)씨는 입무과정(入巫過程)으로서의 신병(무병)(神病(巫病))을 경험했고, 입무식(入巫式)으로서 무당인 시어머니 양씨가 굿을 했던 것이다. 그 후 최(崔)무녀는 신모(神母)로서 흑산도에서 시집온 시할머니인 金씨, 시어머니인 양씨 그리고 손님(천연두)으로 15세 때 죽은 시고모가 현몽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점을 치게 되었다.
최(崔)씨는 31세 때 제주도에 가서 하숙하면서 굿을 하여 아픈 사람들을 치료했다. 그 후에는 죽은 시어머니가 현몽하여 속초를 다녀오라고 하여 51세 때 장기간 속초를 중심으로 강원도를 다녀왔다. 굿이 있을 때는 남편인 朴씨는 소고치고, 부인 崔씨는 염불과 무용을 한다. 그들이 갖고 다니는 악기에는 징, 장고, 피리가 있다. 박(朴)씨는 남의 집 묘소에 명당경을 읽어주러 가기도 한다. 최(崔)씨가 점을 칠 때에는 방안의 일정한 한쪽 구석에 손님을 정좌시켜 놓으면, 주로 시고모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알려 주며, 가끔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가 나타나기도 한다. 박(朴)씨에 의하면, 이 집안의 무업(巫業) 시작은 해남군 문내면 태생인 그의 증조부가 흑산도에 갔다가 그곳에서 결혼하였으며, 그의 부인(무당)이 죽자 그는 신이 들렸다고 한다. 그 후 朴씨 집안의 며느리들이 대대로 신이 들리는 과정을 밟아서 무계(巫系)가 계승되어 왔다고 한다. 朴씨 무가(巫家)의 계통을 친족도표로 그려보면 [그림 9-9]와 같다. 박·최(朴·崔) 부부의 큰아들은 강진읍에서 이발사로 있고, 둘째아들은 어디 있는지 모르며, 셋째아들은 형무소살이를 하고, 막내아들은 부부와 같이 살고 있다. 자식들은 거의 집에 오지 않고, 굿을 위해 마련했던 음식은 먹지도 않는다. 아들들도 부모를 가까이 하지 않을뿐더러 며느리들도 전혀 찾아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당일을 하는 부모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창피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崔씨 자신도 이 무당일이 자식들에게 "유전될까봐 가슴이 오금 도금하다."고 한다. 그래서 崔씨는 집에 신당을 모시지 않고 있는데, 꿈에 계속하여 시어머니가 집에 와서 굿하면서 신당모실 것을 주장하고 있다. 신당을 모시지 않으면 자식들을 괴롭히겠다고 주장하는 시어머니의 혼 때문에 자식들에게 얘기도 하지 못하고 있다. 崔씨는 셋째아들이 감옥소에 간 것도 시어머니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최(崔)씨 부부가 해온 굿 중에서 씻김굿에 관하여 알아보자. 씻김굿에는 진 씻김굿과 모른 씻김굿의 일반적인 두 가지와 병사 직후에 하는 곽머리씻김굿(곽음씻김굿)이 있다. 진 씻김굿은 물에서 혼 건질 때하며, 초분 할 경우에 洗骨 후 뼈를 곽에 담아 집으로 옮겨놓고 병풍으로 가려놓고 한다. 초분 때 하는 것이 진짜 진 씻김굿이라고 한다. 모른 씻김굿은 돌아가신 분의 옷을 놓고 하는 것이며, 부모가 돌아가신 후 기년복을 입는 경우에 소대상시에 하는 것이다. 곽머리씻김굿은 사령이 저승에 들어가서 염라대왕 앞에서 판결을 볼 때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하는 것이며(예를 들면, 왕생극락으로 보내달라는 것.), 초장(初葬)에서 이장(移葬)까지는 이 곽머리씻김굿이 유효하고 그 이후에는 또 다른 씻김이 필요하다고 한다.
죽항도(竹項島)에서는 상방을 볼 수 있었으며, 상주는 초하루와 보름에 '삭단'을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기년복을 입는 것이 요즘의 통례라고 한다. 그리고 집집마다 '기곳' 또는 '신주'를 모시고 있는데, 이들은 최근에 돌아가신 증조부모까지 직계조상의 위패 또는 신위를 모신 것이다. '기곳'은 전통적인 형태로서 여자 조상을 위해서는 빈 오가리, 그리고 남자 조상을 위해서는 대그릇을 창호지로 발라서 각각에 쌀을 담고 그 그릇을 시렁 위에 얹어서 모셨다. 그리고 그 조상이 시제로 넘어갈 때에는 밖으로 내었으며, 기곳을 모시는 풍속은 10여 년 전부터 없어지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대부분 가정에서 '신주'를 모신다. 예전에는 기곳에 고기, 쌀을 갖다놓고 빌기도 했다. '신주 모시듯'이라는 말 대신에 이곳에서는 '기곳 모시듯'이라고 한다. 신주는 단순한 위패이며, 때로는 망자의 사진에 돌아가신 날짜를 적어서 대용하는 수도 있다.
기 제삿날 신주의 문을 열어놓고 제사를 지낸다(독거도(獨巨島)). 독거도의 이용배(70세) 씨는 동학 난 당시 선고가 나주에서 독거도로 이주한 분인데, 신주는 기제사를 지내는 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네 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데 그들의 기 제삿날은 조부(9.25)·조모(7.23)·부(10.5)·모(7.28)이다. 갈목도(乫木島)의 조씨 집에는 신주를 모시는 통에 남편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그 옆에는 빈곳인데, 시어머니가(현 85세) 돌아가시면 그 자리에 모실 것이라고 한다.
기 곳이나 신주는 모두 조도군도 주민들의 조상숭배사상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조령의 신령화(神靈化)(enshrinement) 현상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신령화(神靈化)에 관련된 의례가 구조적인 시간 개념에 표현된 것이 기제사이며, 생태학적 시간개념의 주기에 관련되어 나타나는 것이 세시의례에서의 조상숭배의례일 것이다.
죽항도(竹項島)의 이근배(61세) 씨는 아홉 분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李)씨와 그분들의 구체적인 관계 및 제사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4대조부(10.30)·4대조모(9.26)·3대조부(7.23)·3대조모(5.23)·부(3.5)·모(9.26)·4대조부 형제내외(7.16·7월 그믐) 그리고 3대조부 미혼형제(11.5)가 포함된다. 기혼인 경우에는 양위진설을 하며, 오후 9시경부터 12시경 사이에 행제한다. 음복시에는 이녁부모만 동네본다. 李씨가 진술한 내용 중 4대조부라고 한 것은 증조부를 가리키며, 3대조부라고 한 것은 조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상기의 사실을 볼 때, 이 지방에서의 조상숭배의례는 두 가지의 지역전통(local tradition)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삼대봉사의 원칙'에 의하여 제례(祭禮)의 절차 및 집단이 구성되며, '기둔제사'가 행해지고 있다.
미혼으로 돌아가신 조부의 형제에 대한 제사는 그 날을 그냥 보내기가 어려워서' 제사를 간략하게 지낸다. 예전에는 집안마다 다 이 할아버지의 제사를 각기 따로 모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미혼으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후손들을 괴롭힐 가능성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이다. 집안에서 그 사령을 달래기 위해서 '문복'에게 물어서 '큰애기 무덤에 장가보냈다.' 그 결혼식(死婚: ghost marriage)은 미혼으로 죽은 '큰애기'(처녀)의 묘와 합장하는 식이 중요한 절차이다.
20여 년 전경에 이 지방에서는 소멸된 것으로 보이는 초분(草墳)은 역상(逆喪)(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아들이 죽는 경우)의 경우, 정초에 땅을 이루지 못할 경우, 그리고 전염병이 돌 때 땅을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실시되었다. 죽항도(竹項島)에서는 초뭇골에 돌로 덕발을 쌓아서 시체를 얹고 그 위에 마람을 얹는다. 돌담까지 두르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축소판 초가집이었다. 각 도서에서는 아직도 행해지고 있는 '독집'을 볼 수 있었다. 어린이가 죽은 경우에 돌로 시체를 눌러 놓는 장법(葬法)을 말하는데, 관사도(觀沙島)에서는 추지터(더러운 자리)에 독집을 만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