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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11
고린도교회는 소위 부흥한 교회입니다.
예배마다 성찬식을 행하고 교인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싸웠습니다.
편이 갈라졌고, 간음했고, 교회안의 분쟁을 믿음안에서 풀지 못하고
세상법정까지 끌고 가 하나님을 망신시켰고, 은
사는 있었으나 교만하여 오히려 은사 때문에 교회는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성만찬과 애찬을 나눌 때도 먼저 온 사람들이 음식을 다 먹어버려 나중에 온 성도들과 싸웠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가 사랑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은 1절에서 다시 복음을 알려줍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바울은 이 복음을 ‘내가 너희에게 전해준 것’이라 또 ‘너희가 받은 것’이라 말합니다.
왜 이렇게 새삼스럽게 굳이 확인합니까?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처음 전해주었습니다.
내가 주고 너희가 받은 복음이 어디있느냐 묻는 겁니다.
이 복음은 단순히 들은 정보가 아닙니다.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가운데 선 것’.
진짜 복음이 믿어지면 복음의 한복판으로 들어갑니다.
복음이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니 복음을 도저히 잃어버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잃어버렸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겁니까?
복음의 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은 아는데 멈추면 안됩니다.
복음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은 참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참여합니까?
복음을 알고만 있지 마십시오. 복음 속으로 들어와 복음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은행에 돈을 집어 넣기만 하고 죽을 때까지 쓰지 않는 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배가 항구에 정박만 하고 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이 복음을 사용하는 것이 복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속에서 복음을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이 용기를 주셔서 담대케 하십니다.
유혹속에서 복음을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이 결단케 하셔서 정결하게 하십니다.
자아가 살아서 날뛸 때 복음을 사용하십시오.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이 제대로 믿는 것이라 말합니다. 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반대로 이 복음을 굳게 지키지 않으면 헛되이 믿는 것이라 합니다.
헛되이 믿지 않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믿음이면 다 믿음이지 헛된 믿음이 있고 참된 믿음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사랑하면 진짜 믿음이요. 사랑하지 않으면 헛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랑하고 계십니까?
부디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만약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다면 점검하십시오.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을 겁니다. 3절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복음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아프시니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가 너무나 아프셨습니다. 왜요? 사랑하시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곁길로 행할 때,
사랑하는 자식이 범죄의 길로 갈 때 부모님의 가슴은 찢어집니다.
어떻게든 살길로 인도할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 대신 고통당하시고 죽으시는 겁니다.
복음에 참여하는 일은 이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게 참 믿음입니다.
지난 주에 안태근검사 성추행사건 때문에 온 나라가 소란스러웠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동료 여검사를 성추행했는데 거기 함께 문상하러 온 법무부장관부터 검찰관료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피해 여성 검사는 그날의 수치스런 사건을 여러 차례 상부에 보고하고 합당한 조치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급기야 온 국민이 시청하는 9시 뉴스에 나와 호소했습니다. 저는 그 불편한 소식을 듣다가 이내 부끄러워졌고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안태근검사의 간증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받아 신앙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피해 여검사는 하나님께 용서받기 전에 내게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안태근검사는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진정 모든 것 아시는 하나님께 회개했다면 반드시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회개의 영이 임하면 그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게 회개의 영이 임했을 때 하나님은 저의 죄악으로 인해 피해당한 사람들의 고통을 알게 하셨습니다.
죄악의 순간을 떠올려주셨고 고통스러워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셨습니다.
제 모진 말에 상처입은 사람들의 심정이 느껴졌습니다.
저수지 방죽이 터지듯이 평생에 범한 죄악으로 인한 모든 고통과 아픔이 저를 휩쓸었습니다.
회개하다가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 아팠습니다. 죄값이 사망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저는 다음 날 저의 피해자들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처음에는 뭘 그런 걸 갖고 민망하게 그러냐 하더니 이내 저를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들도 사실은 너무 아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진정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만의 경험인가요?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 모두가 그랬습니다.
1907년 한국인 최초의 목사 길선주도 그랬습니다.
죽은 친구의 재산을 글모르는 친구 부인몰래 빼앗았다고 예배 중에 전 교인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이후 평양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의 부흥이 임했습니다.
둘 셋씩 짝을 지어 다니며 빚을 갚고 용서를 구하고 서로 증인되어 주었습니다.
그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만들려면 교회 보내라.'
그렇게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질 때마다 예수님의 고통이 느껴지고, 피해자의 고통이 느껴지는 일이 복음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는 더 이상 죄질 수 없습니다. 아무렴요. 진짜 죽으려고요. 전적으로 죄악에서 돌이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자의 관심은 오직 하나입니다. 죄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 거룩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마땅히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아무리 죄짓지 않으려 애쓰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가장 강력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죄악에 대한 완전한 대비입니다.
사랑이 시작된 그리스도인은 거듭납니다.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이 말씀이 믿어집니다. 4절입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거듭난 사람은 사랑이 시작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보고도 놀랍니다.
하나님께 놀랍니다. 무릎을 치며 깨닫습니다.
아, 부활이 있구나. 이것이 부활이구나.
나를 이렇게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면 마땅히 부활하실수 있겠구나.
부활이 믿어지면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활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왜요?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진리를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사랑은 살리는 일입니다. 죄악은 죽이는 일이니 그 열매가 죽음이고,
사랑은 살리는 일이니 그 열매가 생명이요 부활입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생명과 능력으로 사람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사랑하게 하셔서 이 세상을 살리시려 합니다. 부활이 믿어지면 진정 사랑합니다.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부활의 증인들을 소개합니다.
5절에서는 게바, 즉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히던 밤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는 겁먹었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예수님으로부터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잡혀 죽을까봐 문을 걸어잠그고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놀랍게 변합니다. 백주 대낮에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담대한 제자들의 복음선포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6절에선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실 때 직접 목격한 500여 성도들을 증인으로 소개합니다.
땅의 사람이 하늘의 사람이 되는 일이 가능함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박해속에서도 쫒겨 다니고 직장을 잃고 가족이 흩어짐을 당했지만
그 쫒겨간 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요.
어떤 박해도 복음을 막지못합니다.
7절에선 야고보가 소개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 동생입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에게 예수님은 무책임한 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며 이스라엘을 두루 다니실 때 그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찾아와 걱정했습니다.
아마 야고보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형 정신 좀 차려, 엄마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
야고보는 예수님을 너무 잘 알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야고보는 변합니다.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어 장례까지 치른 형이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믿은 야고보는 이후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가 됩니다.
또 예수님은 다메섹으로 성도들을 사로잡기 위해 달려가던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8절로 소개합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예수님을 거짓이라 치부하고 박해에 앞장섰습니다.
스데반집사를 돌로 칠 때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바울의 발밑에 놓았습니다.
바울의 책임하에 벌어진 일인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어요.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바울이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달수를 채우지 못하고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사람처럼, 바울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바울에게 찾아오셔서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셨어요.
부활이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진짜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겁니다. ‘바울아 나는 너같은 박해자도 사랑한다.’
그 순간 바울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살아계셨는데,
자기는 그런 예수님을 없다, 거짓이다 했어요.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셨는데,
자기는 그런 예수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어요.
오늘도 예수님은 자기를 살리시는데,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했어요.
그제서야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그 충격에 3일 동안 눈이 멉니다. 너무나 많이 울었던 거지요.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부활합니다.
박해자에서 복음 전하는 자로, 죽이는 자에서 살리는 자로,
자기를 고집하고 주장하던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 부활합니다.
바울은 이후 인생을 걸고 목숨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진정 부활이 믿어지면 사랑합니다.
영원한 생명 주시니 감사하여 사랑하고
사랑하면 예수님처럼 죽어도 살리신다 믿으니 더욱 담대하게 사랑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고린도교회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말합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복음은 그렇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교회뿐인가요?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도 복음은 그렇게 전해졌습니다.
복음은 사랑을 통해 증명되고 전해집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하나님을 온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복음에 참여하십시오. 복음의 한 가운데 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