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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Mosin-Nagant M1891), 일본제 아리사카 30식 소총(1897년 제조), 아리 사카 38식 소총(1905년 제조), 독일제 마우저 소총(Mauser Gew71/84)등을 주로 사용했던 것 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모신나강총의 경우는 러시아혁명 이후 자제 조달이 어려워진 러시아가 미국에 생산을 의뢰한 다음 다시 구입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독립군 부대가 사용한 모신나강은 주로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이였다고 한다. 권총으로는 홍범도가 사용했던 마우저 권총, 안중근이 사용했던 부라우닝(Browning) 권총 및 나간트(Nagant) 권총과 루거(Luger PO8) 권총 등이 있었으며, 이밖에 일제가 개발한 남부 식 권총 등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슈타이어(Steyr) M95 장총과 러시아제 PM1910 맥심 기관총 등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박환, 독립군과 무기선인, 2020. 박환, 「3.1운동 직후 만주지역 독립군과 무기」, 전쟁과 유물 7, 2015. 신효승,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동북지역 한인 무장단체의 무기」,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3,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20.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러시아에 의해 미국에서 주문생산된 모신나강총의 경우 완성품 불량이나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 총기의 상당수가 독립군에게 제공되 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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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1920년 7월 14일자 정탐 보고서를 정리하여 각 독립군단 별 무장력을 정리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서 보면 대한군정서는 徐一을 총재로 하고 장정 약 1,000명, 군총 약 1,800정, 탄약 1정에 약 800발, 권총 150정, 기관총 7정, 기타 다수의 수류탄을 가졌다. 대한북로사령부 홍범도가 거느리는 것인데 부원 약 300명, 총 200정, 권총 약 40정, 탄약은 총 1정에 대하여 약 200발 가량이다. 대한국민회 具春先을 회장으로 하고 회원 약 500명, 군총 약 400정, 권총 150정, 약간의 수류탄을 가졌으며, 상해 가정부에 속한다. 대한북로독군부 최명록을 부장으로 하고 대원 약 300명, 군총 약 800정, 권총 50정, 기관총 2문, 탄약 및 수류탄 약간을 가졌다고 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0)-독립군전투사 자료집, 1976. 17-12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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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의 戰果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일본군은 1920년 10월 하순부터 11월 하순까지의 작전을 종합 정리하면서 사살 375명, 체포 177명, 귀순, 1558명 이라고 하였으며, 일본군측의 피해는 전사 하사 1명, 병졸 9명이었다고 하였다.(김태국, 「청산리전쟁 전후 북간도지역 일본영사관의 동향과 그 성격」, 韓國史硏究 제111호, 한국사 연구회, 2000. 現代史資料28, 707쪽. ) 반면에 독립군측에서는 독립신문에 게재된 안정근의 「간도 사건 후의 간도 상황에 관한 정부 특파원의 보고」(「間島事件後의 間島狀況에 관한 政府特派員의 報告」(1920. 11. 25), 高警 第三七二三一號 ) 를 비롯하여,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북간도에 재(在)한 아(我) 독립군의 전투보고」(「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전투보고」,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9, 국사편찬위원회, 2006, 48-52쪽.), (「군정서격고문」,獨立新聞 1921년 2월 25일 ) 「대한군정서보고」,獨立新聞 1921년 2월 25일 ) 그리고 독립신문에 연재된 김훈의 「삼일절의 산물인 北路我軍實戰記)」 獨立新聞 1921년 3월 1일, 3월 12일 ) 외 다양한 기록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 연구가 있다.(신효승, 「‘보고’에서 ‘석고화한 기억’으로-청산리 전역 보고의 정치학」, 역사비평 통권 제124호, 2018.08)
청산리 전역 ‘전과’ 기록
파견원보고/1920.11 중순 이전/안정근/1,000여 명
전투보고/1920.11.12. /서일 /1,100여 명(자상 400여 명 포함)
아(我) 군대의 활동/1921.1.21./1,200여 명(자상 400여 명 포함)
군정서격고문/1921.2.25./서일/1,200여 명
대한군정서보고/1921.2.25./서일/1,257+自相擊殺者 500여 인
북로아군실전기(1)ㆍ(2) /1921.3.1. 1921.3.12. /김훈/약 146명+自相擊殺者/명중자
求亡日報/ 1939.6.21./1개 연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0.12./ 박은식/우리 사령부조사 1,600여 명-중국 관청 조사 1,300여 명-일본 영사관 비밀보고서 900여 명-서양 신문의 평론 2,000여 명- 중국신문 遼東日日新報 추산 2,000여 명
경천아일록/1921.3.21./김경천/1,200여 명
우둥불/1971/이범석/3,300여 명
이밖에 중국 호남성 장사에서 발행되던 1921년 1월 6일자 大公報에서는 ‘日本稱兵間島 之本旨’라는 제목하에 청산리대첩으로 사망한 일본군은 600명이며, 독립군은 50명에 불과 하다고 보도하였다.(김주용,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과 역사적 의의」,한국학연구32,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