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학교는 우리나라 건국 이념이자 교육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에서 이름을 따왔다. 민족종교이자 항일종교인 대종교 재단은 1946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문을 연 홍문대학관을 이듬해 인수해 서울시 중구 저동으로 이전하며 교명을 홍익대학으로 바꿨다. 1948년 12월 용산구 문배동으로 교사를 옮긴 뒤 1949년 6월 4년제 인가를 받았다. 마포구 상수동에 캠퍼스가 들어선 것은 1955년이다.
대종교가 홍문대학관을 인수할 때 군산의 실업가인 이흥수가 사재 1억 환을 기부하며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 뒤로도 15억 환을 투자한 그는 1964년 대종교 6대 총전교에 추대됐다. 학장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3년간 옥고를 치른 국어학자 정열모가 맡았다.
그러나 홍익대학교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이흥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대종교와 관련된 내용도 없었으나 2000년대 들어서야 “1947년 운영난으로 ‘홍문대학관 관무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진을 대종교 관계인사들로 영입”이란 대목을 삽입했다. 단과대학 시절의 역대 학장 명단도 ‘초대 양대연(1946.6~), 2대 정열모(1947.7~)’라고 소개하고 있어 정열모가 초대 학장이라는 대종교 측의 주장과 차이가 난다.
홍익대 학생들도 대종교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1949년 7월 김구의 장례가 국민장으로 치러질 때 홍익대 3기생들이 운구를 맡았다. 김구가 1947년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도 1949년 8월 홍익대가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과 갈등이 불거졌다. 그해 12월 재단 이사와 교수, 학생회 간부 등이 용공 혐의로 경찰과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정권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정열모는 학장직을 사임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열모를 비롯한 대종교 인사 상당수는 자진 월북하거나 인민군에 의해 납북됐다. 빈자리에는 친일파 혹은 친이승만 인사들이 들어와 재단을 장악했다. 1956년에는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도영이 10억 환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도영은 기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족벌 체제를 강화하고. 오히려 이흥수가 기부한 재산으로 치부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에 반발한 교수와 학생들이 동맹휴업 사태를 벌이고, 동창회는 배임과 횡령 등의 혐의로 이도영을 고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간첩으로 몰려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4·19혁명 이후 이흥수가 이사장으로 복귀하고 이도영은 이사로 물러났으나 박정희 정권은 1963년 이도영을 다시 이사장에 앉혔다. 이도영은 박정희 정권 실세인 김종필에게 홍익대 1호 명예박사학위를 주고 아들을 박정희 처조카와 결혼시키는 등 5·16 세력들과 탄탄한 관계를 맺었다.
1973년 이흥수와 이도영이 사망한 뒤 홍익대 관련 자료에는 이흥수 등 대종교 인사들의 발자취가 지워지고 ‘설립자 이도영’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후임 이사장 최애경은 이도영 부인이다. 이흥수 삼남 이용석은 홍익대설립자유족회를 만들어 “이도영이 학교를 강탈하고 역사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한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1999년 이후 총학생회와 민주동문회 등에서 잇따라 문제를 제기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유족과 학생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이면영 현 이사장은 이도영의 육촌동생이다. 1966년 교수로 임용된 뒤 1985년부터 12년 동안 총장을 지냈고, 1997년부터 지금까지 재단을 이끌고 있다. 이흥수의 손자인 이준혁 홍익대설립자유족회장은 2016년에도 교육부에 홍익대 재단 임원진 승인 취소와 임시이사 파견을 요청하는 등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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