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재락(李在洛) 선생은 (1886. 8. 26. ∼ 1960. 9. 25.) 울주군 웅촌에서 출생했으며, 선생은 남창3·1운동을 주도적으로 활동하신 분이다.
자랑스런 우리고장(울산·양산)에서는 이달(2001.08)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으며, 주요공적은 다음과 같다.
남창3·1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도적 역할
1886년 8월 26일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서 농사를 짓던 이석륜의 외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경성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조국광복의 꿈을 키워갔다.
1919년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키위해 상경한 선생은 이 곳 서울거사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
인근 온양면에 거주하는 이수일과 상의하여 이 지역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문중의 노소와 지역민들에게 서울 거사소식을 전하면서 동지 규합에 나서 1919년 4월 8일 남창3·1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소유재산 헌납 등 군자금 모금활동, 건국훈장애족장 추서
1925년 8월 심산 김창숙(金昌淑)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 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선생은 소유재산을 팔아 군자금 1천원을 헌납하였다.
그러나 20만원 군자금 모금계획이 목표에 미달하자 1926년 3월 17일 부산 범어사(梵魚寺)에서 손후익(孫厚翼), 정수기(鄭守基) 등과 함께 밀의를 거듭하여 제2차 계획으로서 소액기부한 부호들에게 거액 기부를 요구키로 결정하고 모금활동을 벌이다 1926년 3월에 일경에 발각되어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언도받고 출옥하여 조국광복이 되기까지 고향에서 은둔 칩거하면서 조국광복의 그 날까지 항일 의지를 키워 나갔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인정하여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출처> 울산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