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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瑞智軒 원문보기 글쓴이: 지헌
1997년 4월 30일 일본 긴자(銀座)의 어느 미술관과 백화점 전시실에서 서예 전이 동시(4월 29일부터 5일간)에 열리고 있었다. 한 곳에서는『현대서전(現代書展)』,그리고 또다른 곳에서는 우리나라에서의 서예전과 마찬가지로「書展」 이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이 두 서예전이 광고만으로는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으나 그 내용은 대단히 달랐다. 우선 분위기부터 달랐는데, 현대서전(現代書展)이 열리고 있는 곳에는 60호 이상 됨직한 정사각형 규모의 작품이 많았다. 작품의 내용을 '書'라는 관념으로 볼 때는 작품을 설명한 안내와도 아무런 상관 없는 것 같았고, 물론 문자를 사용한 것 같지도 않았다. 오직 검은색 종류의 물감과 붓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는 것 뿐이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전시장을 구경하는 사람이나 전시장 입구를 관리하고 있 는 사람은 나이가 60∼70은 넘었음직한 할머니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시장은 입장료를 받고 있어서인지 비교적 한가하였고, 관람자를 위한 다과 나 음료수도 없었다.
다른 한 곳에서 열리고 있는 書展에서는 우리의 서예전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단지 우리처럼 200x700으로 된 큰 작품은 하나도 없었고, 대부분 반 절 이하의 족자 작품이었으며 소품도 제법 있었다는 정도이다. 그리고 전서 와 예서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행초서였다. 물론 이곳에서는 위의 『현대서 전(現代書展)』과는 달리 입장료도 없었으며, 간단한 다과가 몇 개의 테이블 에 준비되어 있었다. 관람자들도 비교적 많았으며 그 중에는 젊은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이와 같이 이들 서예전에서는 그 안내서의 '서도(書道)'라는 동질성과 달리 그 내용이나 형식이 대단히 달랐는데, 이것은 서예존질이나 서예미에 대해서 서로의 미적 표현기준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서예전이 일본 서예의 어떤 대표성을 가지는 것도 아니며 일본서예의 흐름을 말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기서 서로 다른 한 가지의 본질적 차이점을 생각할 수 있다. 즉 서예(전통서예)에서는 서예사와 서법에 서예미의 원천을 두고 있는 것이며 현대서예에서는 서(書)의 시각적, 예술적 표현에 그 미의 원천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수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현대서예가 표면으로 등장했을 때 다소의 토론이 있었기에 그것을 참고하면 한편에서의 이해는 있을 것이므로 이들 서예전에 대한 논평을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서법(書法)'이 라 하는 중국에서는 서법의 '법(法)'발저보다는 차라리 서예의 '예(藝)'발전을 시도하는 추세인 것 같고, '서도(書道)'를 강조하는 일본에서도 서도의 '도 (道)'정신이 흐려지는 대신에 다양한 서예의 표현기법(예 : 木谷聖雲樂しぃ書の 小作品つくり 日貿出版社, 1996)이 개발되는 것 같으며, '서예(書藝)'라고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서예의 '예(藝)'해석솨 다소 혼돈스러움을 생각할 때 (문헌의 예 : '필묵(筆墨)의 재해석(再解析)과 세계성(世界性)의 확보(確保)', 월간서예, 1997년 5월호, p.59∼65), 서예의 특성 내지는 본질을 하번 더 생각 하게 한다.
그리고 본질성이 있는 서예로 다시 간추리기 위해서는 지금(전회)까지 이야 기한 서예의 특성과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서예의 본 질은 유(儒),도(道) 뿐만 아니라 기사상(氣思想)을 중심으로 하는 선진(先秦)의 미사상, 즉, 동양예술정신으로 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대 서예의 근본적 본질에 대한 문제는 연구의 한분야가 될 수도 있으므로 간단히 이야기할 수도 없으며 쉽게 이해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서예의 근본적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현대적 서예성의 본질까지 논의 하는 것은 본 강론의 목적이 아니므로 통상 사용하는 협의에서의 서예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 몇가지를 간추려 보면 다음 과 같다.
(1)서예의 단순성과 무궁성
서예는 먹물을 매개물질로 하여 유연한 붓으로 흰색의 평면공간에 표현하 는 예술이므로 재료면에서는 대단히 간단하다. 서예의 기본적 표현요소인 이 3가지 재료는 초심자뿐만 아니라 숙련자들도 이 이상의 재료는 필요하지 않 다. 서예의 소재인 문자는 일점 일획의 결합에 의하여 성립하며, 그 일점 일획 의 예술성은 운필의 방향, 속도, 그리고 운필중의 압력에 의하여 표현된다. 운필의 결과로 얻어지는 이들 글자가 일획이 서로 모여서 한자의 글자가 구 성되고, 이들 글자가 모여 하나의 모양 (서예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러나 그 일점 일획에는 먹의 윤갈(潤渴), 선의 굵기와 방향이 있을뿐이며, 어 떤 화려한 자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각자(各字) 또는 수자(數字)의 연속에 있어서도 그 모양은 간단하고 소박한 것이다. 서예는 이렇게 간단하고 소박 한 단순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표현에는 무궁성이 있는 예술이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중에는 서예와 마찬가지로 간단하고 소박한 것이 많 다. 우리의 전통의복인 흰옷이 그렇고, 고려의 청자나 조선의 백자가 그러하 며 반다지와 옷장 등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목기류의 자연적 소박미가 그 렇다.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의 어떤 민족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 문화 의 한 가지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식견있는 서양 사람들도 우리의 이러 한 문화유산에 최고의 예술미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문화가 표현이 단순하고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세계가 무궁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서예와 닮아있다. 서예는 우리문화의 표현방식과 마찬가지로 간결한 묵선으로 자연을 표현할 수도 있으며 인생을 묘사할 수 도 있는 무궁성이 있는 것으로 수천년 동안 유지하여 오고 있는 동양미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즉, 유가(儒家)의 경전(經典)인 역경(역경(易經)의 계사상(繫辭上)에 "일음일 양(一陰一陽)을 도라한다. 도는 음양 2종의 기의 모순적 통일이다. 우주간에 는 양의 기가 만물을 창조하는 방법은 쉬운 방법이며, 양의 기가 만물을 생 성하는 방법은 간단한 방법이다. 쉬우면 알기 쉽고, 간략하며 순응할 수가 있다. 쉽고 간단한 즉, 사회의 모든 일을 합리성을 가질 수가 있고 이것들을 천지간의 적절한 위치에 안정시킬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도는 하나를 만들어 내고, 하나는 둘을 만들어 내며, 둘은 셋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셋은 만물을 만들어 낸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도는 통일적 사물을 만드어 내고, 통일적 사물은 분열하여 대립하는 양면성을 가지게 되며, 일들이 또 제3의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다. 그리고 제3의 것이 만들어진 후에 천차만별의 사물이 존재하게 된다고 하였다. 노자는 또 가장 큰 소리는 들어도 소리가 없다. 즉, 구체적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성인들의 표현은 어느 것이나 동양미의 바 탕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서예의 특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서예는 가장 간단하고 소박한 예술인 동시에 가장 복잡하고 무 궁한 예술이다. 이것은 묵색의 선으로만 구성되나 회화와 같이 외계만물의 실제 형상을 소재로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선의 결합과 분포등에 의한 변 화로 함축, 상징, 암시 등의 예술적 수법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획에 표정을 함축시켜 품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나 그 내면성은 무궁 하다. 서법으로 유명한 후한(後漢)의 종요(鐘繇, 151∼230)는 필법을 이야기하는 중에서 필적이라고 하는 것은 계(界)이고, 유미(流美)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결국 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선이 만드는 경계에 지나지 않으나 그 선으로부 터 유출하는 미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선은 결코 복잡한 것은 아니나 그래도 인간의 번미이념(審美理念)과 정조(情調)를 표현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8세기 전반에 활동한 당대(唐代)의 장회관(張懷瓘, 8세 기 초중경 활동)은 '문자론'에서 문장은 몇 개의 문자를 연결하여 그 뜻을 전하는 것이나 서(書)는 한 자로서도 충분히 그 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실 로 절약의 도(道)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문자를 사용하여 하나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단어나 구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서예에서는 한자의 글자만으로도 작가의 심정이나 정 신을 표현할 수가 있으므로 서예는 실로 생략의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 큼 단순한 것이다. 고전미학에서는 구성상황에 따라 단상미(單象美), 개체미(個體美), 종합미(綜合美)로 단순하게 분류할 수가 있다. 단상미라고 하는 것은 개체에 부속하고 있는 일부분이 가지고 있는 미를 말한다. 예를 들면 나무의 꽃 하나 하나는 색체가 선명하며 모양도 아름답다. 이러한 것이 단상미이다. 개체미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어느 정도 독립하여 존재하는 단체전체(單體全體)가 표출하는 미를 말한다. 예를 들면 꽃, 가지, 잎으로 구성되는 하나의 수목이 이것이다. 그리고 종합미라고 하는 것은 많 은 단체의 집합으로 모여서 되는 하나의 종합체가 나타내는 미로 화초나 수 복으로 구성되는 정원의 미는 이것의 예이다. 종합미는 각 단상미간(單象美間)의 관계, 각 개체미간의 관계의 유기적인 관련을 나타내고, 이들 모든 미 의 종합체이다. 그리고 또 형식과 내용의 융합체이기도 한데 이 미는 보는 사람에 미의 심층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미학개념을 서예에 비교하면 단상미에 해당하는 것은 필획(선)의 미 이다. 필획에는 장단이나 굵고 가는 선의 구별이 있고, 또 선이 굽거나 꺾이 는 곳이 있다. 또 자유분망(自由奔忙)한 것이 있으며 경색된 것이 있다. 그러 나 결국은 역시 어떤 제약된 범위를 넘지 않는 형태이고, 이것이 서예에서의 간략, 간소라고 하는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바로 서예의 본 질중의 하나는 선의 예술이라는 것으로 귀착될 수 있다. 따라서 서예의 미는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선상에 집중되는 것이므로 서예는 가장 단순화 된 예 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예는 극도로 간소화 된 서(實線 혹은 虛線)의 표현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고도의 미(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 서예의 영원성과 시대성
동양 최고의 문자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은대의 갑골문자를 시작으로 많은 종정이기의 명문이나 석각, 목간서, 육간 등이 많은 수난을 겪고도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자료에 의하여 약 3500년 전부터 각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미적 감정은 물론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서예양식(style)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당시의 시대성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없는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당시 작가의 서예감각이나 개성의 표 출이라기보다는 각 왕조의 서로 다른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서예 의 시대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헌 : 김수천, '명문서예(銘文書藝)의 변 천단계', 월간서예 97년2∼4월) 우리나의 것으로도 삼국시대의 서물(書物)들 이 그대로 발견되어 오늘날 그 내용을 알 수 있고, 또 그 내용으로부터 그 시대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것도 서예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 들이 긴긴 세월동안 없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은 제 작 당초부터 그 보존가치가 높은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많은 서예관련 자료 중에는 후세에 전하기 위한 어떤 의도하에 만들어진 것, 예를 들면 석각과 같은 것도 있으나 대부 분은 당시의 단순한 기록으로서 일시적 필요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지만 그 것이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 가치가 점점 커지게 된 것이 많다. 왕희지의 편 지, 손과정의 서론 등도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시적 필요성 에 의하여 씌여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예의 이런한 특성을 생각할 때, 현 시점에서 그 존재가치가 큰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후대를 위한 어떤 보존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좋을 것이며, 현 재로서는 별 보존가치가 없는 서예작품이라도 미래의 어떤 시대에 가서는 서예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서예가 다른 예술 과는 달리 그 시대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예는 시대성이 표현되는 예술로 당시의 시대정신 즉, 시대사조, 시대감정 이 작품중에 나타날 수 있다. 시대정신에 의하여 시대양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 같은 시대의 예술가는 같은 표현양식을 취하는 공통성이 있 게 된다. 이러한 공통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대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 다. 이러할 경우 예술가의 개성양식은 그 시대양식의 개성적 변화로서 나타 나는 것으로 그 시대정신, 즉, 분위기는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 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특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시대성으로서 작 가는 이것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진전, 한예, 당해도 그러하 거니와 당의 태종에 이르러 극치를 이루던 왕희지풍의 서체가 유행한 것이 나 송대에서는 안진경풍의 서체를 중심으로 독창성 있는 서풍이 유행하게 되었고, 또다시 원명대에서는 왕희지풍의 서체, 그리고 청대에서 고증학의 발전과 더불어 고전서체의 유행, 그리고 또다시 안진경풍의 서체가 유행하는 대체적인 서예사의 경향이나 진운(晉韻), 당법(唐法), 송의(宋意)등와 같은 서평(明代의 동기창(董其昌)은 중국의 서예를 시대별로 개괄하여 '진인상운 (晉人尙韻) 당인상법(唐人尙法), 송인상의(宋人尙意)'라 하였음)은 서예가 그 시대의 시대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서예가 그 시대의 사회적 경향 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서예의 정신성 및 개성
자기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서예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글에 필자의 정신이 표현된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 하였으며, 이것이 서여기인의 바탕이기도 하다.
서예란?
개요: 글씨쓰기 지도, 다시 말해 펜글씨, 붓글씨 등의 서도교육을 뜻하는 말이다.
글씨는 서(書), 서예, 서법, 서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서예(書藝)라 부르며 예술적인 글씨를 말한다. 서예는 동양의 독특한 미술로 그림과 같이 간주하여 서화일치를 주장하였고, 나아가서 동양 미술의 원천은 서에 있다고 하였다.
서는 물론 중국에서 발생하였으나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벌써 수천년이나 되어 삼국시대~고려시대의 유작으로도 빛나는 것이 상당수 남아 있다. 그러나 근대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인해 서예를 경시하는 경향이 확산되어 극히 침체되고 쇠퇴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는 고래로 6예(六藝)의 하나로써 인격 완성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누구나 식견을 갖추려면 일생을 통하여 수득(修得)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실용적이고 예술적인 문제를 떠나 인간 정신도야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서예교육은 그 기법을 배우는 것보다 서를 통하여 동양적 정신 혹은 민족정신의 순수성과 고유의 미덕의 함양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동양에서는 서가 이와 같이 존중되어 왔으므로 서에 인격의 반영을 역설하였고, 모든 문화의 기본을 이에 두었던 것도 사실이다.
서예교육은 회화나 조소, 음악과 같은 심미적 성격의 교과로써 정서교육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교육에서는 서예교육이 무척 등한시되었고, 가르친다고 해도 되는대로 적당히 가르치는 경향이 강했다. 또 학교에 따라서는 자율로 정하는 교과나 특별활동으로 과해지고 있기는 하나 유명무실하여 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또 근래에 들어서는 인스턴트 제품과 컴퓨터 사용의 대중화로 인해 청소년들이 쉽고 간편한 것에 길들여지기 쉬우며, 그에 따라서 학교에서 서예교육이 환영받지 못하는 실정에 있다.
서예란 무엇인가?
서우가 되기 위해서는 붓 잡는 법을 알기 전에, 중봉(中鋒)과 만호 제착(萬毫齊着)을 알기 전에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서예를 왜 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전근대적 유물이나 사상을 비판할 때 흔히 쓰는 '인간이 달나라에 갔다 오는 세상'이란 표현도 이미 30년 전의 것이 되어 버 린 지금 과연 서예라는 것을 하는 것이 어떤 필요가 있는 것일까. 또 필요성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이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조차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서예에 대한 다소 터무니없어 보이는 생각들도 곳곳에 퍼져 있어 더욱 혼란스럽다. 학생의 신분으로 글씨를 쓰고 있으므로 서예의 자리매김을 전문 서예인의 몫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살핌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실질적인 서예 입문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충분히 그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
서예, 다시 말해서 서법예술(書法藝術)은 예술의 한 분야인가(정답을 다 써 주고 응모 엽서를 받는 신문의 경품광고같다)? 정 답은 물론 'YES'이다. 예술이 당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요구를 담아내는 것이라면 서예도 예술의 한 분야인 만큼 그러한 기 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수라가 부른 '兒! 대한민국'은 노래도 아니다. 서예의 예술로서의 다른 예술 분야와의 공통된 특징이 이러한 것이라면, 서예만의 고유한 특징들도 존재하고 이 두 가지가 어우러져 서예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면 서 예만의 고유한 특징이 무엇인가.
첫째
그림이나 음악, 문학 등의 다른 예술 분야들이 당시대의 삶의 모습과 요구를 직접적으로 나타낸다면 서예는 상대적으로
간접적으로 그러한 기능을 한다. 청대(淸代)나 민국초(民國初)의 금석학(金石學), 전서에 대한 연구 등은 그 성과물 자체에 어 떠한 삶의
모습이나 요구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작업 자체에 만주족 지배 구조에 대한 간접적 저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 다.
둘째
다른 예술 분야들이 밖으로 향하는 힘의 방향을 지니고 있다면 서예는 안으로의 끝없는 세계로 파고드는 예술이다. 따 라서 다른 예술 분야는 낭만파 고전파 조용히살고파 등의 시대 사조들이 패러다임 교체의 방법으로 격렬히 변해온 반면, 서예는 수천년의 역사를
두고 매우 완만하게 혁명적 변화 없이 발전해 왔다.
세째
서예는 주변적인 수많은 요소들의 영향을 받으며 그 요소들과 분리시켜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주 변적인 요소란 작자의 상황이나 인격, 쏟아부은 노력 등을 들 수 있겠는데, 다른 예술은 이러한 요소들이 일방적으로 작품에 영 향을 미친다고 보아도 무방하고 따라서 작품에 대한 평론도 그러한 시각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서예에서는 역방향의 영향은 흔 한 일이며 따라서 이러한 주변적인 요소는 서예의 주요 요소가 된다. 송준호 교수님께서 '書展에 붙여'라는 글에서 지적하셨듯, 인격과 분리된 서품(書品, 서예 작품을 말하는 듯)은 아무리 그것이 뛰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사람이 지니는 연륜이나 인생 경험 따위가 '경력'보다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예 작품을 직접적 분석적으로 감상하는 행위는 전체 작품 의도의 대부분을 버리고 감상하는 행위가 되고 그것은 별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음악에서 '소나타 형식'의 완벽한 적용이, 미술에서 '원근법의 효과적 사용'이 작품의 완성도(完成度)를 높일지 모르나, 서예에 서는 '파책의 완결'이 서예작품의 완성도를 반드시 높인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네째
서예의 미적 요소에는 다른 예술에는 없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추가되는데 그것이 바로 서예 작품에 쓰인 문자(혹은 문장)의 뜻이다. 석고문에서 '第 1鼓'라고 불리는 것 중에서 아마 낚시하는 내용이 나올 텐데 이 부분에서의 주요 포인트는 '물 수( )'자이다. 전서의 상형자는 대부분 그렇듯이 써 놓은 그 자체가 물이 흐르는 느낌을 주게끔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분위기는 전체가 물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게 써야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은 여러 가지가 있 겠지만 (전에 박준호 서우가 임서한 부분은 고구려 건국 신화의 내용이었다) 만주 벌판을 정벌하던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쫀쫀한 전서로 썼다고 하면 어떨까.
위에서 말한 '경품 퀴즈' 이야기에서 답을 찾으세요.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따라서 광개 토 대왕비는 (보는 이에 따라서는 다르겠지만) 호방한 고예(古隸)로 되어 있다.
예술 분야이기 때문에 가지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지적한 점들 때문에 서예를 대할 때에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아 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가 이러한 점들을 무시하고 다른 예술 장르들이 삶의 모습과 요구를 담아내는 공식에 대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다른 시각 예술(그림, 사진, 영화, 무용 등)의 주요 미적 요소인 상징의 방법을 서예에다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힘의 방향이 끝없는 내적 세계를 향하던 서예를 무리하게 외부로 끌어냄으로써 발생하는 각종 부작용을 겪을 것이다. 우선 서예와 한데 어우러져 있던 주변적 요소들을 분리시킴으로써 이 요소들의 차이에 의해 나타나던 작품의 맛은 완전히 배제될 것이고, '얼굴은 X같지만 노래 하난 끝내 줍니다.'라는 동요처럼 될 것이다. 삶의 요구를 담아낸 예는 아니지만 베를리오즈같은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자는 오히려 '홍콩 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환상 교향곡을 썼으며, 고흐 같은 정신 이상자의 그림은 오히려 명작이 되었다. 서예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서예에 무조건 무언가를 표현하도록 '요구' 한다면 내적 완성과 예술적 표현이 본디 하나였던 서예를 이 둘로 양극분해함으로써 서예의 성질을 잃고 말 것이다. 특히, 예술 쟝르를 하나의 수단으로 봄으로써 서예를 그 희생양으로 만들 것이다.
서예가 하나의 예술로써 현재의 삶을 담아내고 무엇인가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은 서예를 즐기는 사람들 내부에서 논의되어 나 와야 하는 것이지 어떠한 공식에 대입될 변수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서우회의 나아갈 바를 밝힐 때가 되 었다. 앞에서 서예가 당시대의 삶의 모습과 요구를 담아낼 때에는 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서예 작품에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가 그러한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화우회에서 서우회가 독립하여 나왔을 때의 정신은 무엇인가. 바로 전통 에 대한 관심이다. 화우회 안에서는 도저히 그것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중국서예사
한자의 기원부터 각 체의 성립까지 -
1. 머리말
인생의 취미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 은 예술을 감상하고 창작하는데 있다고 본다. 서예(書藝)는 고대 중국에서 처음으로 창조된 동양의 문자 - 한자(漢字) - 를 수사 미화(手寫美化)한 정신적 조형예술이고, 다른 외부의 영향이 없이 중국 문화권 특유의 예 술로서 회화와 밀접하게 관련하며 극히 미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 기원은 무릇 5천년, 즉 서양 회화사보다도 오래된 전통 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면, 서예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지혜가 있고 감정표현의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따라 문자( 文字)나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중국에서 일찍 발달했다. 문자(文字)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 최초의 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 서예의 예술성은 순순한 정신을 필묵에 의탁해서 표현하는데, 각 개인의 개성과 지역, 시대에 따라 상이하다. 이러한 상이한 추세와 변화를 알아 보는 것이 서예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중국역사의 시대구분에 맞춰 서예의 역사를 서술해 보고자 한다. 그 대상이 되는 시기는 한자의 기원에서 부터 한나라에 해당하는 각 서체의 성립기까지 다루어 보겠다.
2. 한자(漢 字)의 기원과 문자 자료의 등장 이전
한자(漢字)는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갈고 닦아 내려온 문자이다 . 이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 서예이다. 서예가 중국에서 특수한 예술로서 발달한데는 한자 그 자체가 가지는 특성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한자는 서예의 발달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한자의 기원에서 서예의 출발을 엿볼 수 있으며, 그 변천과정에서 서예의 흐름을 느낄 수가 있다.
1)한자이전
인간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언어 생활을 함으로써 의사의 전달이 비로소 제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말이란 직접 서로 상대해 있지 않으면 할 수가 없 고, 서로 상대해서 말을 주고 받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오래 기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이 말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문자'라는 것이 필요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문자는 이상적인 방법으로 구체화해서 어떤 의사라도 모두 표현할 수 있도록 꾸며져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체적인 방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중국에서는 한자이전에 결승(結繩), 서계(書契), 팔괘(八卦)등이 있었던 것으 로 전해온다. 결승이란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글자 그대로 풀어 쓴다면, 노끈의 맺음이라고 보아진다. 대소(大小), 장단(長短), 다과(多寡)의 매듭으로 의사표현을 했다. 서계란 것도 역시 어떠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書)자는 '쓰다' 또 는 '긋다'의 뜻이 있고, 계(契)는 '새기다'의 뜻이 있으니 서계도 역시 문자이전에 긋고 새기고 해서 수를 헤아리던가 또는 믿 음 의 표시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팔괘는 결승, 서계와는 달리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주역에 전해지 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음양의 변화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의 부호를 기초로 하여 자연물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팔 괘는 어디까지나 그림에 속할지언정 문자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2)창조적인 문자의 정리 (한자의 발명)
황제(黃帝) 시대에는 문물이 점차 번잡해져서 문자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사관 창힐로 하여금 상형문자(象形文字)를 만들 게 하였다. 이 전 설적인 말을 믿을 근거가 없으나, 대개 이 시대에 상형문자의 체계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금수의 발자국과 거북등의 무늬에서 착상하여 초보적인 문자의 체계를 잡았다. 이로써 한자구성의 육법(六法)의 시조를 터 놓았고 여기 서 오늘날 한자의 형 태로까지 변천해 왔다.
3)채색토기(彩色土器)의 발견
문자자료가 등장해서 역사를 조금이나마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은( 殷)나라 22대 반경(盤庚)이라는 왕 이후의 일이다. 앞 에서 얘기된 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어떤 사료도 발견된 것이 없다. 그런데 , 1921년 이래 수년에 걸쳐서 중국의 하남(河南), 산 서(山西), 협서(협西), 감숙(甘肅)의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신석기 유적에서 다수의 채색토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그 당시 에 사용하고 있던 일종의 기호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각입한 채색토기가 이 따금 있다. 물론 어느 것이나 문자라고는 할 수 없 지만,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나 인물, 조수 등을 볼 때 중국 원초의 그림 문자 의 형태를 엿볼 수가 있다.
그림문자는 상형문자보 다도 더 그림에 가깝고 쓰는데 불편하며 간단한 구상물(具象物)밖에 표현할 수 가 없다. 아마도 한자는 문자로서의 이러한 결함 이 있는 그림문자를 추상화하고 단순화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 그림과 글씨도 분화돼 각자의 독자적인 예술로 발전했을 것이다.
3. 문자자료의 등장과 대전(大篆)의 성립
우리가 오늘날 확실히 알 수 있는 중국 최고의 문자는 은왕조(殷王朝)의 것이다. 그 이전의 것은 아직 도 발견되 지 않았다.
1)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
갑골문은 현재 잔존하는 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에 속한다.
1899년 북경 한약방에서 왕의영(王懿榮)과 그의 식객 유악(劉顎)이 발견한 이후 수집과 연구, 발굴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현 재는 상당한 수의 자료가 모아졌다. 연구 결과에서 출토지가 하남(河南)의 안양현(安陽縣) 서북 소둔(小屯)이라는 마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골문은 은인(殷人)이 점복(点卜)에 사용하고, 전쟁, 수렵, 벼농사 등에 관한 복사(卜辭)를 칼로 각한 것인 데, 좌반(左半), 우반(右半)을 대(對)로하여 같은 문자를 각입(刻入)했다. 예리한 칼날로 귀갑(龜甲)이나 짐승 뼈에 새겨 넣었기 때문에 필획이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획은 생략이 많고 안제(按提)가 없다. 그리고 갑골문의 서체나 서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 그 곳에는 몇 가지 다른 유형이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다. 또, 갑골주서(甲骨朱書), 수골묵서(獸骨墨書)등이 최근에 발 견되었음에 비추어 당시에 이미 붓(筆)이 존재하여 필사(筆寫)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갑골문이 처음 발견되고 학자의 관심을 집중하게 한 것은 그다지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 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 왔 지만,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2)금문
*은왕조의 금문
문자자료는 앞서 지적했듯이 은왕조 22대 반경왕 이후부터 등장했다. 이 때는 청동기 시대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 서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많은 동기(銅器)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의 동기는 위로는 조종(祖宗)을 기념하며 아래 로는 유급자손(留級子孫)하기 위해서 주조(鑄造)된 것으로 거의 일상기물이다. 금문이란 이들 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말하 는 것이다. 거의가 은말이후의 각으로 갑골문보다는 뒤에 것으로 갑골문에 비해서 문자로서의 조형이 한층 뛰어나고 또한 필력( 筆力)도 능히 엿볼 수 있다. 또, 은기의 명문은 동시대의 갑골문 보다는 획이 많고 자형(字型)이 복잡하다. 은왕조의 동기에는 명문이 있는 것이 적다. 그리고 이때의 명문은 회화적인 성격이 뚜렷하고 상형(象形) 또는 그에 가까운 것이 많고, 일품(一品)의 잣수가 적다.
*서주(西周)의 금문은망주흥(殷亡周興)에 미쳐 갑골의 사용은 급격히 쇠하고, 반대로 동기 제작이 성행하여 명문이 갑골과 자리를 바꾸어 문 장기록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주(周)로 와서는 동기제작의 사유도 확대되어 여러 씨족들이 무공, 훈공을 세워서 왕실에서 은상 을 받음을 기념하는 내용 등 세속적인 내용이 동기에 새겨졌다. 그리고 은대와는 달리 명문이 장문화(長文化)되었다.
이 시대의 금문은 초기에는 주(周) 특유의 의례적인 엄숙함이 있는 가운데 은대의 서풍(書風)을 이어 비후(肥厚)함이 있어 생명 의 약동이 보인다. 또, 자체가 차차로 정제되고, 자간, 행간이 정해지고 상하좌우의 자연스러운 구성이 좌우편방의 균형을 가져 오게 하여 자형은 고정화 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접어들수록 점차로 생기를 잃어가고 형식화해 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주(周) 왕실의 쇠퇴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고문의 정리
금문이 통용하던 시대 (서주(西周) 선왕(宣王)때로 추정)에 사관 주가 사주편(史?篇)을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문자를 정연 하고 획일적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서체를 결합, 정리하기 위하여 점획을 증익(增益)하여 혼돈하지 않게 하였다.
이를 주 문이라 하는데, 획이 복잡하고 문체는 방정하다. 주문의 번중(繁重)함은 당시 문자의 필연적인 현상이지 사주가 인위적으로 글 자 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사주'에 의한 문자 정리를 기점으로 그 이전에 통용되었던 모든 서체는 고문(古文)으로 통칭 되 었고, 주문은 진(秦)제국의 서체인 소전(小篆)과 구별하기 위해서 대전(大篆)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4. 서체의 혼란과 문자 통일
춘추 전국시대는 중국에서 이때까지 오래토록 계속되어오던 고대 사회가 크게 변화를 일으킨 시대이다 . 산업의 발달과 상공업의 발흥, 그리고 자유로운 언론의 성행과 이에 따른 제자백가(諸者白家)의 등장 등 사회적, 경제적, 문화 적으로 눈부신 발 전을 이룩했다. 시대의 상황에 걸 맞게 서예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 시대의 서예의 자취는 금문(金文), 석각(石刻), 죽간(竹簡), 백서(帛書) 둥에서 엿볼 수가 있다. 이 때의 금문은 서주 시대 의 금문이 정제되고 고정화되어 가는데 배해서 그와는 역으로 지방적인 특색을 지닌 것으로 분화해가는 경향으로 변화해갔다. 그 자체는 주문(?文)이다. 전국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청동기 문화가 급속히 쇠퇴하고 새로운 철기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동기의 수가 갑자기 적어져서 발견되는 금문 또한 아주 적다.
1) 춘추 전국시대의 석각(石刻)
석고문 이전에 존재했으리라고 여겨지는 석각류들은 신빙성이 낮기 때문에, 석고문을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석각으로 인 정한다. 석고문은 수말 당초(隋末 唐初) (AD 7 C 경)에 섬서(陝西)의 진창현(陳倉縣)의 들에서 발견되었는데, 큰 북의 모양을 한 돌이며 모두 열 개가 있다. 언제 만들어진 것 인지에 대해서는 의론(議論)이 구구하지만 춘추시대말기나 전국시대초기가 유력하 다. 석고문은 사언구로 내용은 인민애물(仁民愛 物)의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글자 크기는 4cm 정도로 주문의 대자(大字)를 볼 수가 있다. 자체는 주문으로서 동기의 명문 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필획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돈되어 있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곳이 있어 주문에서 소전으 로 옮겨가는 동안의 변화를 읽을 수가 있다.
또, 이 시대의 석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조초문(조楚文)이다. 전국시대 진(秦)의 혜문왕(惠文王) 12년 [B.C. 313]에 각입된 것 으로 내용은 초왕이 여러 번 맹약을 어기어 진나라가 그를 저주한 것이다. 북송때 발견되었으나 곧바로 없어졌으며 원석(原石) 이 없다. 자체의 크고 작은 변화가 한결같지 않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으며 서사체(書寫體)의 맛이 있다. 석고문과는 유사 한 점이 많으나 더 간략하게 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2) 춘추, 전국시대의 죽간과 백서
죽간(竹簡)은 춘추 무렵부터 일반적 으로 서적이나 문서의 기록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실물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근년 에 여기저기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1953 년 호남(湖南)의 장사(長沙)에서 발견된 43편의 전국시대의 죽간과 1957년 하남(河南) 의 신양(信陽)에서 발견된 전국시대의 죽간 과 모필(毛筆), 칼, 죽관(竹管)등 죽간에 문자를 쓰는데 사용된 공구가 바로 그것이 다. 위의 죽간은 전국시대에 초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이들이 죽간을 쓴 것은 은인(殷人)이 갑골에 각(刻)한 것에 비하여 편리하고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체는 고문(주문)에 가깝고, 간편하고 독창성이 풍부하며, 체세(體勢)는 편장(扁長)하고 횡획에는 비수 (肥瘦)가 심한 것이 많다. 필의(筆意)가 이미 한예(漢隸)에 가까워졌고 주문에서 예서에로의 변천을 엿볼 수가 있다. 초의 죽간 에서 진 이전에 이미 예서(隸書)가 싹트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 1954년 6월 장사(長沙)교외의 전국 시 대의 묘에서 좋은 토호(兎毫) 모필이 발견되었는데, 초인(楚人)의 필사용구(筆寫用俱)로 밝혀졌고 그 우수함은 놀랄 만하다. 이 는 죽간에 사용되었으리라 믿어지는데, 모필(毛筆)에 묵(墨) 또는 옻으로 썼음을 알 수가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백서(일명 繪書)는 죽간과 더불어 춘추전국시대부터 일반에서도 널리 사용된 것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유품도 적 지 않다. 1934년 장사 근교의 고묘에서 출토한 초의 백서(帛書)는 둘레에 세가지 색깔로 신물(神物)을 그리고, 가운데는 좌우로 나누어 장편의 문자가 쓰여있다. 이들 문자는 필획이 잘 정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힘차고 일치(逸致)가 있어 옛 맛을 더 해주고 있다.
3) 진(秦)의 소전(小篆) (문자통일)
진은 하(夏), 은(殷), 주(周)의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하고 따라서 서법 도 또한 획일하게 정리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전( 小篆)이다. 서체의 변천은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르기 마련이지만, 소전은 국가 통제상의 필요에서 의식적으로 연구하여 고치고 변화시킨 서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던 고문(古文)을 폐지하고 진나라의 전통서체인 주문 을 약간 간략화하여 새로운 자체인 소전을 만든 것이다. 소전의 구조는 정사각 형에서 장방형으로 되었으며, 획도 처음과 끝의 굵기가 같고, 사이와 포백이 고르고 형태는 좌우가 대칭을 이루었으며 중심을 잡 아서 평행을 이루도록 하였다. 당시의 서체를 전하는 자료로는 각석(刻石)과 와당(瓦當), 권(權, 저울추), 양(量, 되)의 명문이 있다. 또 최근에 발견된 다수의 죽간도 있다.
진의 각석은 여섯 군데에 칠석(七石)이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태산(泰山)과 낭야대(낭야臺)의 두 각석뿐이다. 이들도 훼 손이 심해서, 엄정하고 중후하여 소전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태산각석은 원석에 9자만 있을 뿐이고, 낭야대각석도 글자가 대부 분 뭉그러지고 희미하여 읽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소전의 둥글고 힘차며 중후한 맛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진의 권량명(權量銘)은 소전의 자료로서 청동제 또는 철제의 권(權)이나 양(量)에 각입한 명문(銘文)을 뜻하는 것이다. 진시황 은 도량형의 통일을 위해서 관제(官製)의 원기(原器)를 만들어서 민간에 배포하였고 그릇 옆에 그 취지를 알리는 소서(소書)를 새겨 넣었다. 훌륭한 소전으로 쓰여진 것이기는 하나, 문자도 작고 각석의 문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 점점 간소화되어 필획을 생략, 점진적으로 후대의 예서와 같이 되어버린 것도 있다.
1975년 호북(湖北)의 운몽(雲夢)의 고묘에서 천 점이나 되는 많은 양의 진대 죽간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전서가 차차로 예서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과정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4) 예서의 출현
급속한 인지의 발달은 여러 가지 사무의 복잡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서사(書寫) 기록도 변모해 가야만 했다. 이전 의 대전(大篆)이나 새로 만들어진 소전(진전)에는 아직 상형문자의 특징인 곡선적인 필획이 많기 때문에 서사에 불편하고 비 능 률적이었다. 이에 따라 곡선을 직선으로 바꿔 필사를 쉽 게 하고 그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 예서(隸書)라는 새로운 서체가 생겨났 다. 예서는 소전을 간략화한 것이나, 소전과 같이 국가가 제정한 자체가 아니라 민간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것이다. 그 예서 라는 명칭은, 소전이 국가가 제정한 바른 서체인데 대해 서 예서는 일반 민간에서 사용되던 간략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천하게 취 급해서 '도예(徒隸)의 서(書)'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예서는 전서가 변화된 서체로서 전서에 내포되어 있던 모든 서법이 밖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로부터 해서와 초 서가 발생한 근본이라 할 만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리하여 예서의 필법은 중요하며 모든 서법의 기초가 된 다.
전서의 간략체로서 자연발생한 예서는 진대 이전부터 발생의 징조가 엿보였으며 그런 대로 불충분했던 진을 거치면서 차차로 사 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널리 일반 민간에서 사용되고 한대에는 소전과 위치를 바꾸어 통용서체가 되어 더욱 발전하였다.
5. 예서의 진전(秦篆)과 초서(草書)의 등장
한 제국을 세워 올린 전한 때에는 광대한 국토와 비견되는 문화적인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상 대적 으로 서예에 있어서는 시대에 걸맞는 진전이 없었다. 이 시대의 서예자료는 대단히 부족하다. 앞선 시대에서와 같은 훌륭한 금문 은 전연 그 자취가 없어졌으나, 남아 있는 몇 개의 금문에는 진대의 전서의 풍취가 있고, 또 다른 것들은 모두 옆으로 길어 서 전서와 예서의 중간 형태를 띠었다.
이 시대의 각석은 몇 개가 지금도 전하지만, 아직 전서의 영향을 완전히 탈피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예서로 쓴 것들은 예서의 완성된 형태인 파책이 있는 글씨가 아니다. 이 이외에도 당시의 서예자료로는 거울의 명문이나 동인(銅印)의 문자나 와당의 문자 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둥근 맛을 가진 전서를 도식화한 것이며, 모두 전서의 풍취가 있다.
1) 전한의 한간(漢簡)
금세 기 초두에 들어서 발견되기 시작하여 50년대와 70년대에 많은 양이 발굴된 목간(木簡)류와 백서(帛書)들은 한대의 서 예자료로서 의 서체의 변천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는 것들은 마왕퇴(馬王堆) 1호묘의 한 간(漢簡)과 돈황(敦煌), 누란(樓蘭) 한간, 그리고 거연(居延) 한간이다.
먼저 마왕퇴 1호묘 한간은 문자 자료가 적은 전한대의 글씨로서 서체의 변천기의 중요한 출토품이며, 그 서체의 특징은 결구와 획의 곳곳에 전서의 풍치를 남기면서 상당히 진보된 예서의 필법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전서가 예서로 넘어가는 과도기 의 서체를 아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다음으로 돈환, 누란한간과 거연한간은 기존의 학설을 뒤엎을 만큼 귀중한 자료이다. 이것들에 의해서 파책의 서법이 이미 전한 때 존재하였으며, 예서를 간략화하여 빠르게 쓰는 초예(草隸), 일종의 초서(草書., 장초(章草))가 쓰이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 다. 이 한간들의 내용은 주로 변방의 기록들이므로 초서체가 일반 민간에 널리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의 정식서 체로는 대부분 예서(파책이 있는)가 사용되었고, 일상의 서사체로는 예서의 속서(速書)로 장초(章草)와 초예(草隸)가 쓰이고 있 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한대의 서체에 대한 연구는 돌에 새겨 영구히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에서 엄격하게 쓰여진 한비(漢碑)가 주종을 이루어 왔지만, 한간(漢簡)의 발굴로 그 연구영역은 한층 더 확대된 셈이다. 한간은 대부분 필세가 자연스럽고 억지로 붓을 돌리지 않 았으며 붓으로 쓴 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서 한비와는 대조적인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또 전서에서 예서로, 예서에서 초서 로 변화되는 전환기의 서체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데에서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2) 새로운 움직임
아무리 전한시기 가 서예에 있어서 미약한 시대이기는 하였지만, 그 말기가 되자 차차로 서예가 일종의 예술로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이때까지 의 원시적인 서예 예술시대에서 자각적인 서예술로 옮겨가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의 원제(元帝), 성제(成帝)때 [B.C. 49 B.C. 7] 일반 사회에서도 글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글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 게 되었다. 이는 과거 에 제왕이나 권력자들이 자신의 의도에 의해서 서예술을 이끌어가고, 그 문자를 쓴 당사자도 전문인인 것 에 비추어 볼 때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가 있다. 일반 민간의 관심 고조가 찬란한 후한의 시작을 재촉하고 있다.
6. 일대 전환기
후한 시대는 중국서예사 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원시 서예술이 참다운 서예술로 욺겨가는 일대 전환기 이다. 또,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다른 형태의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후한의 전반기 약 120년간은 아직 그 다지 대단할 것은 없었고 그 때의 서예자료로는 각석( 刻石), 석궐(石闕), 마애(摩崖)등의 석각문자가 전한다.
이 때의 각석은 비의 형식을 구비하지 않은 것이 많았으며, 비(碑)라고 지칭하기에는 타당하지 않다. 당시의 서귈은 사천(四川) 과 산동(山東)에 많았으나 마멸이 심한 것이 대부분이고 또 새겨진 문자는 적다. 마애는 천연의 암벽에 직접 문자를 각입하는 것 인데, 이 당시부터 시작되었고 여기에는 자연의 맛이 더욱 돋보인다. 중국의 서예술은 후한의 말기 즉, 환제(桓帝), 영제(靈帝) 때 [147 189]에 눈부신 진전이 있엇고, 이에 따라 본격적인 서예술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 이유는 석비의 유행과 종이의 발 명으 로 대표되는 필기구의 급격한 개량에 의해서다.
1) 석비의 유행
돌에 문자를 새겨 기념하는 것은 주대(周代)에 시작되었지 만, 소위 비(碑)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후한대(後漢代)이고, 말기에 이르러 갑자기 유행하여 많은 유품들이 남아 있다. 비석 의 성행으로 한예의 각석입비(刻石立碑)가 수없이 많아졌다. 특 히 환제, 영제의 연간 [147 189]의 40년간은 그 전성기로 근 2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원석이 백점이상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서예의 발전을 촉구하게 되었다.
비석의 문자로는 한대에 들어와 완성되어 통용서체가 되었던 예서가 새겨졌고, 예서는 예술적으로 점점 그 아름다움을 발휘하였 다. 일반적으로 비석은 인물의 공덕을 표창하여 널리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당시 유교사상의 도덕주의에 기인한 것 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그 문장이나 서법에도 충분한 주의가 기울어져 훌륭한 문장과 아름다운 글씨가 추구된 것은 당연하다. 한 비는 어느 것이나 독자적인 서풍을 가진 뛰어난 것 뿐이고, 전형적인 한예(漢隸)로 쓴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비석의 유행도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처음의 입지취지와는 동떨ㅇ져서 거짓 행적을 기록하는가 하면, 가문을 과시 하는 호화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되자 현제때 [205] 에 석실(石室), 석수(石獸), 비명(碑銘)등의 제작을 모두 금지시켰다.
2) 종이의 발명
서기 105년에 환관인 채륜(蔡倫)이 종이를 발명하였는데, 그동안 실용적으로 문자기록에 사용하던 목간이나 비단 의 단점으 로 인하여 종이는 이것들에 대체하여 서서히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종이를 사용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편리하기 때문에 일반 민간 에 빠른 속도로 번져갔을 것이다. 종이가 발명되면서 척독(尺讀:짧은 편지)에 이를 사용하는 일이 생겼으며, 대체로 여 기에 초 서로 서사를 한 것 같다. 이로써 초서가 종이의 보급과 함계 발달하였는데, 이는 예서가 한비의 유행으로 발달한 것과 맥 락을 같이한다.
3) 서가(書家)의 등장
진 이전에는 글씨의 공졸(工拙)을 비교하지 않았으므로 서학(書學)이나 서법의 설이 없었으나, 한대에 이르러 비석이 성행 하면서부터 글씨의 심미적(審美的) 요구가 이어져 서법의 전승(傳承)에 계통을 찾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전문적 인 서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조희(曹喜)와 두도(杜度)이다.
두 사람은 장제(章帝) [75 88] 때 활동하던 인물이며, 조희 는 전예(篆隸)에 능하고 두도는 초서에 능했다고 한다. 이들 이후에 나타난 서가를 보면 두사람중의 어느 한편에 속해있다. 그래 서 전자를 전예파, 후자를 초서파(혹은 행초파)라 했는데, 전예파는 채옹(蔡邕)이, 초서파는 장지(張芝)가 대표하고 있다. 두세 력으로 구분되어있던 것이 점차로 시대가 지날수록 초서파가 세력을 증대해갔다. 종이의 보급과 함께 초서가 새로운 혁신적인 글 씨로서 일반 민간에서 환영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한대에 서가가 전예파와 초서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남북 조사대의 북파의 비(碑)(예서, 해서), 남파의 첩(帖)(행, 초서)이 두파의 원류가 될 수 있었다는 데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 다.
4) 설문해자(說文解字)
후한때에는 중국 언어학사상 불후의 명저일 뿐만 아니라 고문 연구에 뻬어놓을 수 없는 기초 자료가 되어 서예사에서도 귀 중한 책이 되는 '설문해자'가 편찬되었다. 설문해자는 허신(허愼)이 서기 98년에 초안을 잡아 100년 에 완성하였는데, 모두 14편 으로 9,353자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만든 목적은 학자들의 그릇된 견해를 풀어주고 성인들이 문 자를 만든 신성한 목적을 알 리기 위해서다. 설문해자에는 완전하게, 그리고 계통적으로 소전을 보전하고 있고 당시 통용하던 고문, 주문 속체(俗體)가 포함 되어 있다. 설문해자는 설문내의 소전과 일부 주문의 형체로 더 오래된 문자를 해독할 수가 있으며, 오늘날 현존하는 고서를 정 리, 주석하는데 있어서도 반드시 갖추어야할 책이다. 또, 서예 자료에 있어서는 갑골복사(甲骨卜辭)와 종정관지(鐘鼎款識)를 연 구할 때, 설문해자의 도움을 받아야 할 뿐아니라 진한이래 간책백서(簡冊帛書)의 정리, 해독에도 설문 해자는 사용된다. 실례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마왕퇴 출토의 백서죽간은 설문해자를 적용하여 해독할 수 있었다.
5) 각 체의 성립
후한대에 들어서자 많은 서가들은 서예의 여러가지 변형체를 발전시켰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오늘날 통용되는 모든 서체 가 성립된 것 같다.
앞서 이야기됐지만, 초서는 진의 예서가 간략화되어서 이룩된 것으로, 원래 한자의 발전으로 인한 자연적인 산물이다. 진대에는 소전을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통용되던 글씨는 오히려 초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돈황의 한간(漢簡)에서 발견할 수가 있 다. 따라서 당시의 초서를 정확히 부른다면 초예(草隸)라고 할 수있으며, 그 후의 초서를 금초(今草)라고 할 수 있다. 후한의 장 제(章帝)때 이르러 초예에 능한 '두도'가 나왔으나
그의 유품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후 '장지'가 초서를 더욱 발전시켜 금초 를 이룩하였다.
또, 한대의 말기가 되어서는 우로 삐치는 파책의 필법이 대단히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싫증을 느끼게 되었 다. 그래서, 전서와 예서의 둥근 맛이 있는 형을 받아들여서 해서를 만들었다. 해서는 예서의 사각형과 정확성이라는 기본 성격 과 장초의 간결성과 속필(速筆)을 결합한 서체이다.
그리고, 해서의 출현과는 전후구분이 어려운 행서가 등장하였는데, 행서(行書)는 후한의 유덕승(劉德昇)이 간편하고 쉽게 쓰고 자하여 만들었고, 예서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난 진보된 형태이다. 예서의 모난 각(角)이 죽었고 운동감과 경쾌한 맛이 가미되었 다. 행서의 획과 자형은 해서와 동일하나 속필로 썼다는 사실이 다르다. 아마도 해서와 행서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 유행했을 것 이고, 해서가 발전하고 분화됨에 따라서 그 변형체는 해서와 행서의 혼합체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서체들은 한대에 이미 모두 만들어졌다. 그만큼 한대 특히, 후한시기는 중국서예사상 매우 중요 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7. 맺 는 말
한자는 중국에서 끊임없이 진보해왔고 발전해 오기를 몇천년, 그러는 동안에 한자는 여러 번의 변화를 가져왔다. 갑골문으로부터 금문, 대전, 소전, 예서, 초서, 해서, 행서에 이르기까지 비록 발전의 속도는 느렸으나 추세로 보아 서는 점점 간단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시대마다의 이러한 추세와 새로운 서체의 출현은 한사람의 힘에 의해서 이 룩된 것은 아니고, 일반민간의 심리 즉, 번잡하고 귀찮은 것은 누구든지 싫어하고 간단하고 알기쉬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 는 인정( 人情)에 의해서다. 새로운 서체의 발명의 근거가 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있어 끊임없이 생각하고 개선해 나가려고 한 다는 점 과 일반 민간들의 잠재력이다. 서예의 긴 흐름속에서도 그것을 이끄는 주체는 일개 특정인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인 것을 알 수 가 있다.
본 글은 문자의 시작부터 다루어 현재 통용하는 서체가 성립되기까지의 긴 서예사의 흐름을 짚어보았다. 물론 이것이 그 모든 것을 포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앞으로 새로운 자료와 연구가 축적된 이론들이 공급된다면 역시 많은 부분들이 수정이 가 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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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書畵) 87년 1월, 2월
서예(書藝) 73년 77년 5, 6월
서통(書通) 73년 가을호, 75년 여름호
서예가
1. 우리나라의 서예가
1) 김생(金生)711-791( 성덕왕 10 - 원성왕 7 )
신라의 명필. 자는 지서(知瑞), 별명은 구(玖).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에 매우 뛰어났으며, 평생동안 다른 재주는 배우지 않았다. 일생을 서예에 바쳤으며, 예서(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 > 이라 불렀고, 송(宋)나라에서도 왕희지를 능가하는 명필로 이름이 났다. 그 한 예로서, 고려의 학자 홍 관이 송나라에 사신 으로 갔을 때, 한림원의 한 관리들에게 김생의 글씨 한 폭을 내보이자 그들은 깜짝 놀라며, "오늘 뜻밖에 왕 우군(왕희지 의 호)의 친필을 보는군!" 하고 말하였다. 홍관이, "아니요, 이것은 신라사람 김생의 글씨요." 라고 하자, 그들 은 믿지 않으며, "천하에 우군을 빼고 어찌 이런 묘필이 있으랴!" 하고 끝내 믿지 않았다고 한다.
김생의 서풍은 왕희지에 뿌리를 내렸고 필력이 힘차고 결체(結體)에는 무리와 과장이 엿보인다. 작품으로 글씨에 <<백률사 석당기>> <<창림비>> <<화엄사 화엄경 석각>> <<전유암서>> <<유점사편액>> 등이 있다.
2) 최치원(崔致遠)857 - ?( 헌왕왕 1 - ? )
신라말기의 학자. 경주최씨의 시조.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85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874년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가 되고 승무랑(承務朗)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875년(헌강왕 5) 황소의 난 때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로 지냈다.
894년(진성여왕 8) '시무 10조'를 건의하여 정치의 어지러움과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구제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며 해인사 쌍계사를 비롯하여 여러 절을 찾아서 각지를 유랑하였다. 오늘날 불리는 부산의 '해운대'라는 이름은 최치원의 자인 '해운'을 따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 뒤, 그는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글을 쓰고 시를 읊으면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는 구양순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의 법을 좇아 썼는데, 무척 글씨에 뛰어나 그가 쓴 <<난랑 비서문>>은 신 라시대의 화랑도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숭복사 쌍계사 성주사 봉암사 등 4군데의 비석 글씨를 합하여 <<4산비명>>이라 하는데, 그 글씨체와 글씨가 모두 뛰어났다. 이외에도,글씨에 <<숭복사비>> << 진감국사비>> <<지증대사적조탑비>>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 >> <<중산복궤집>> <<석순응전>>이 있다.
조선 시대에 영평의 고운 영당 등 여러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3) 탄연(坦然)1170 - 1159 ( 문종 24 - 의종 13 )
고려시대의 승려이자 서예가. 속성 손(孫). 호는 묵암(묵庵), 시호는 대감(大鑑).
1085년(선종 2) 명경과에 급제하였고, 묵종의 청으로 세자(후에 예종)를 가르치다가 88년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안적사에서 중 이 되어 광명사 혜소국사(慧炤國師)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각지를 다니며 참선과 교학을 연구하다가 1105년(숙종 10) 승과에 급제하여, 1106(예종 1)에 대사(大師), 1109년 중대사(重大師), 15년 삼중대사(三重大師), 21년 선사(禪師)에 올랐다. 23년(인 종 1) 첩수가사(帖繡袈裟)를 하사받고 29년 보제사 주지로서 법회를 열었다. 32년 대선사(大禪師)로서 왕의 자문역이 되고 46년 왕사(王師)가 되었다. 47년 의종이 즉위한 후에는 예우가 더욱 극진하였으나 48년 은퇴하고 단속사에 들어가 계속 선교(禪敎)의 중흥에 이바지했다.
서예에도 뛰어나 김 생에 버금가는 명필로 알려졌으며 왕희지의 필체를 따랐다. 격조높은 시문을 남겼다.
국사(國師)에 추증 되었고, 단속사에 비(碑)가 있다.
작품에 <<청평사문수원중수비>> <<북룡사비>> <<승가사 중수비>> 가 있다.
4) 안평대군(安平大君)1418 - 1453 ( 태종 18 - 단종 1 )
조선 세종의 세째 아들.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각거사( 珏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졌고 30년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그의 맏형인 문종이 다스릴 동안에는 조정의 배 후 에서 실력자 구실을 하며 둘째 형 수양대군의 세력과 은연히 맞서 있었다. 그러나 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꾸며 김 종서 등을 죽일 때 억지로 죄를 씌워 강화로 귀양 보냈다가 사약을 내렸다.
시문 그림 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혀, 중국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갔다 한 다. 글씨는 조맹부체를 본받아 썼으며, 오래 살았다면 크게 발전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1452년(문종 2) 경자자(庚子字)를 고쳐 임신자(壬申字)의 자모를 썼고, 그림에도 뛰어나 화가 안견과도 친분이 깊었다.
대표작으로는 <<몽유도원도 발문>> 이 있고, 이외에 글씨로 <<영릉신도비>> <<청천부원군 심 온 묘표>>가 있으며, 저서로는 <<비해당집>>이있다.
5) 양사언(楊士彦)1517 - 1584 ( 중종 12 - 선조 17 )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서예가. 본관은 청주이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海客) 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 평창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사 철 원군수 회양군수를 지냈는데, 자연을 사랑하여 지방관을 자청한 그는 회양군수 때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 ( 蓬萊楓嶽元化洞天)>의 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군수로 재임 중 지릉의 화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귀양갔다가 2 년 후 풀려나오는 길에 병사하였다.
시와 글씨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초서(草書)와 큰글자를 잘 써서 안평대군 김 구, 한 호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 렀다.
저서에 <<봉래시집>>이 있고, 작품중에는 많이 알려진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등이 있다.
6) 한 호(韓濩)1543 - 1605 ( 중종 38 - 선조 38 )
조선시대의 서예가.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 청사(淸沙). 본관은 삼화(三和)이고, 개성 출신이다.
어머니의 떡 써는 고사로 잘 알려진 석봉은, 일찌기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에 정진하여, 왕희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 (行) 초(草) 등 각 체가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99년 사어(司禦)가 되었으며,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 흡곡현령 존숭도감 서사관 을 지냈다. 그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석에 나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으며, 우리 나 라 서예계에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석봉 나름대로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창시했다. 선조도 한석봉의 글씨를 특히 아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어 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 으 나 그가 쓴 비문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 <<허엽신도비>> <<서경덕신도비>> <<기자묘비> > <<행주승전비>> <<선죽교비>> <<좌상유홍묘표비>> 등이 있다.
7) 김정희(金正喜)1786 - 1856 ( 정조 10 - 철종 7 )
조선시대의 서화가 문신 문인 금석학자. 자는 원춘(元春)이고,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 노과(老果)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108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사가원설서, 충청우도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등 을 역임하였다.
일찌기 스승인 박제가에게서 학문을 깊이 깨우쳤으며,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당시 동양에서 중심지가 되고 있던 청나라의 뻬 이징으로 가서 그곳 대학자인 옹방강 완원으로부터 그의 재능을 크게
인정받았으며, 경학을 널리 연구하여 높은 수준에 이르러 ' 해동의 제1의 유학자'란 별명을 얻었다. 그외 금석학 서화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귀국 후 고증학을 도입하였다. 40년(헌종 6)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48년 풀려나왔고, 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 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고통스러운 귀양살이에서도 학문과 예술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그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 게 학문과 예술을 가르쳤다 한다.
그는 금석학과 서예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금석학이란 쇠붙이나 돌에 새겨진 글을 연구하여 역사적 사실을 밝 혀내은 학문을 말하는데, 그는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를 고석(考釋)하고, 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 비 가 이대조의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고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이며, 그 세워진 연대가 진흥왕 29년 남천주 설치이후임을 밝혀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서예사상 두번 다시 찾아내기 어려운 서예의 대 가로서, 소식, 구양순 등 대가들의 글씨를 열심히 연구하여 그의 독특하게 뛰어난 추사체를 이룩하였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는데, 난초 대나무 산수화를 잘 그렸다 한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는데, 그는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 로 학문을 하여서는 아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뻬이징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 져와서 마곡사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 <<실사구시설>> <<금석과 안록>> <<완당척독>> 등이 있 고,작품에 <<묵죽도>> <<묵란도>> 등이 있다.
2. 중국의 서예가
1) 왕희지(王羲之)307 - 365
중국 동진(東晋)의 서예가. 자는 일소(逸少)이다. 우군장군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의 산뚱성 린이현[臨沂縣]인 낭야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 도의 조카이고, 왕 광의 아들이다. 중 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 (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서진(西晋)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의 서풍을 배웠고, 뒤에 여러 가 지 서체의 장점을 두루 체득하고 종합하여,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질박하고 옹훈한 서풍을 연미하고 유려한 서풍을 바꿈으로 써 서예를 예술로 끌어올리는 데에 눈부신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왕희지 이후의 역대 서예가들이 왕희지를 배우지 않고서는 안 되 었을 정도로 끼친 영향이 막대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유 양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 그는 명문출신이며,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 호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 안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 였다. 그러나 일찌기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 술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 년(永和 11) 벼슬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은사(隱士)와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 허 매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 때 모 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이른바 <<난정서(蘭亭序)>> 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그는 예서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 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 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 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의 태종이 992년에 조각한 < <순화각첩>>이라는 법첩에는 그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나라의 회인이라는 승려가 고종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 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 에 <<상란첩>> <<공시중첩>> <<유목첩>> <<이모첩>> <<쾌설시청첩>> 등의 필적이 전하여 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 다.
당나라 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 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은 전아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 품이 매우 높다.
2) 우세남(虞世南)558 - 638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자는 백시(伯施)이고, 여요출신이다. 6조(六朝)의 진(陳) 때부터 서와 학재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수의 양제를 받들었으나 그리 중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의 태종의 신임을 받아 홍문관 학사 비서감을 거쳐, 638년에는 은청광록 대부가 되었다. 왕희지의 서법을 익혀, 구양순 저수량과 함께 당초의 3대가로 일컬어지며, 이왕(二王)과 지영을 배워 원융(圓融 )하고 질박한 필치를 이루었다. 특히 해서의 제1인자로 알려져 있다. 태종은 우세남에게 서(書)를 배웠는데, <세남에게 5절( 五絶)이 있는데, 그 첫째는 덕행(德行), 둘째는 충직(忠直), 세째는 박학(博學), 네째는 문사(文詞), 다섯째는 서한(書翰)이다 > 라고 절찬하였다고 한다. <<공자묘당비>>가 그의 필적으로 가장 유명한데, 행서로는 <<여남공주묘지고 >> 가 있다. 또 시에서도 당시의 궁정시단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시문집 <<우비감집>>을 남겼다.
저술로 <<북당서초>> 160권이 있다.
3) 구양순(歐陽詢)557 - 641)
중국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 자는 신본(信本)이고, 담주임상 사람이다.
진(陳)나라의 광주자사였던 아버지 흘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가, 태어나기를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 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를 섬게 태상박사가 되었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고, 태자솔경령 홍문관학사를 거쳐 발해남으로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으며, 이왕(二王), 즉 왕희지 왕헌지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황보탄비>> <<구성궁예천명>> <<황도사비>> 등의 비와
<<사사 첩>>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의 골격을 지니고 있어,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 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고 있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 않은 서예가로서 유명하다.
구양순체는 구양순의 서체로서, 자획과 결구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에 순간이라도 정신적 이 완을 불허하는 율법적인 특색을 가진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구양순의 서적은 비 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명하였다.
4) 저수량( 遂良)596 - 658)
중국 당나라때의 서예가. 자는 등선(登善)이고, 항조우 첸탕 사람이다. 우세남 구양순과 아울러 초당(初唐) 3대가로 불린다.
아버지 양은 학문과 서도에 뛰어나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저수량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시서가 된 뒤 충절과 엄정으로 역 시 신임이 두터웠다. 왕희지의 필적 수집사업에서는 태종의 측근에서 그 감정을 맡아 보면서 그 진위를 판별하는 데 착오가 없 었다고 한다. 고종때 하남군공에 봉해졌으나, 만년에 황제에게 직간(直諫)한 것이 노여움을 받아 좌천된 지 3년 후 불우한 가운 데 생애를 마쳤다.
그의 글씨는 처음에 우세남의 서풍을 배웠으나, 뒤에 왕희지의 서풍을 터득하여 마침내 대성하였다. 그의 서풍은 아름답고 화 려한 가운데에도 용필(用筆)에 힘찬 기세와 변화를 간직하고 있다. 왕희지 이후 글씨체 변화의 새로운 시작을 연 인물로 평해지 며, 후세에 끼친 영향이 막대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맹법사비>> <<이궐불감비>> <<안탑성교비>> 등이 있다.
5) 안진경(顔眞卿)709 - 784?
중국 당나라 서예의 대가. 자는 청신이고, 노군개국공에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렀다. 산뚱성 낭야 임기 출 신이고, 북제의 학자 안지추의 5대손이다.
진사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평원태수가 되었을 때 안녹산의 반란을 맞았으며,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조정을 위하여 싸 웠다. 후에 중앙에 들어가 현부상서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의 권신(權臣)에게 잘못 보여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4년 덕종 의 명으로 회서의 반장인 이희열을 설득하러 갔다가 연금당하 였고, 이어서 곧 살해되었다. 글씨는 처음에 저수량을 배우고 후 에 장욱을 배우고 중장(衆長)을 합도(合度)하여 해서와 행서에서 고법(古法)을 크게 변화시키는 등 새 풍격을 이루었는데. 남조 이 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의 전아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당대 이후의 서도를 지배 하였 다. 인품과 충절에서도 추앙받는 까닭에 더욱 글씨가 천고에 빛남을 후세에 보여준사람이다.
안진경이 남긴 행초서의 대표적 필적 세 가지, 즉 <<제질문고>> <<고백부문고>> <<쟁좌위고> > 를 가리켜 안진경삼고(顔眞卿三稿)라고 하는데, 이들 글씨는 모두 글씨를 쓴다는 의식이 없이 졸연간에 휘갈겨 쓴 초고 그 대로의 필적이어서 더욱 자연의 묘미가 있고, 가장 진귀하게 여겨지는 글씨이다.
대표작은 해서의 <<안씨가묘비>>와 행서의<<쟁좌위>>가 있고, 이 밖에도 많은 금석문과 뛰어난 수적 ( 手迹)을 남겼다.
6) 조맹부(趙孟 )1254 - 1322
중국 원나라의 화가 서예가. 자는 자앙(子昻)이고 호는 집현(集賢) 송설도인(松雪道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敏). 저장성 우싱 현 태생이다.
송나라 종실 출신이며, 원나라 세조에 발탁된 뒤 역대 황제를 섬겼고, 벼슬은 한림학사승지 영록대부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위 국공(魏國公)에 추봉되었다. 송나라 태조의 후손이면서도 원나라를 섬겨 영달하였으므로, 후세에 명분상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 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교양인으로서 정치 경제 시서화에 넓은 지식을 가졌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났다.
서예에 있어서도 왕서(王書)로의 복귀를 주장하였으며, 글씨와 그림은 근원이 같다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을 주장하였다. 서 풍은 단정하고 경건한데, 우리나라 고려와 조선시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림에 있어서는 남송의 원체(院體) 화풍을 타파하 고, 당 북송의 화풍에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림은 산수 화훼 죽석 인마 등에 모두 뛰어났고, 서예 는 특히 해서 행서 초 서의 품격이
높았으며, 당시 복고주의의 지도적 입장에 있었다. 그의 아내 관도승(管道昇)은 묵죽에 이름이 있었고, 아들 옹 도 산수 화조 화가이며 서예에도 탁월하였다. 또 화우 문인이라 할 수 있는 전 선 진중인 왕 연 등이 있어, 우싱파라는 한 파를 이 루었다.
그림으로 <<중강첩장도>> <<사마도권>> 등이, 글씨 유품으로는 <<여중봉명본척독>> 등 이 있다. 그림은 오 진 황공망 왕 몽과 더불어 원대의 4대가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