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 이야기는 다른 나라보다 유럽 북부에 널리 퍼져 있다. 558년에 북부 아일랜드 벨파스트 호에서 잡힌 인어 이야기는 기구하다. ‘리반’이라 불린 이 인어는 홍수로 가족이 모두 죽고 1년 동안 호수에서 살며 인어로 변했다. 어부들은 소녀를 ‘바다에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머젠(Murgen)’이라 불렀다. 그들은 머젠을 물통에 넣어 사람들에게 구경시켰다. 머젠은 세례를 받았고 수많은 기적을 보여줬는데 죽은 뒤에는 ‘성녀 머젠’이라고 불렸다.
1403년 지금은 네덜란드 땅인 베스트프리스란트 지역에 인어 한 마리가 표류해 왔다. 마을 여자들은 인어의 몸에 붙은 바다 이끼를 떼어주며 다정하게 대했다고 한다. 인어는 끝내 말을 배우지 못했지만 15년 동안 살다가 죽어 교회 묘지에 묻혔다.
고대 팔레스타인과 바빌로니아인들도 물고기 꼬리를 단 신을 숭배했다. 페니키아와 코린트에서 발행된 주화에도 인어가 나타난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름다운 바다 처녀들과 함께 유리 공을 타고 바닷속을 탐험하는 모험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로마의 문인 플리니우스는 갈리아 지방에서 많은 인어가 해변 모래사장에 밀려와 죽어 있는 것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관이 봤다고 적었다.
대체로 민간 전설에 등장하는 인어 이야기에는 애처로운 내용이 많다. 『인어 공주』와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꾸며져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서양과 동양의 인어에 대한 생각이 매우 다르다.
그리스 신화에는 바다의 신 트리톤(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로, 하반신은 물고기 형태를 띤다)이나 바다의 요정 네레이데스(바다의 신 네레우스의 딸)처럼 개성적인 반신(半神)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화와 실재가 섞여 네레이데스는 돌고래나 바다표범에 비유됐다.
독일 뮌헨 글립토테크 미술관에 전시된 바디의 신 트리톤과 네레이데스의 부조
사이렌을 인어 공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사이렌은 시칠리아에 살며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꾀어 배를 난파시킨다. 그러나 사이렌의 몸은 원래 물고기가 아니라 날개와 두발이 있는 인면조신(人面鳥身) 바다 요정이다. 중세가 되면서 비로소 인간 여성 상반신, 새의 날개, 물고기 지느러미가 있는 사이렌으로 변했다.
꼬리를 파닥이는 사이렌 인간 여성의 상반신과 물고기 지느러미를 하고 있다.
『오디세이아』를 보면 트로이 전쟁의 용사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고 싶어서 동료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게 하고 자신은 배 마스트에 몸을 묶었다고 한다. 마녀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에게 사이렌을 피하는 방법을 이야기해준 대로였다. 사이렌의 아름다움과 마법을 다른 마녀가 저지한 셈이다. 그러나 키르케 또한 유혹의 대명사인 동시에 남자를 파멸시키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을 피하기 위해 동료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배 마스트에 몸을 묶고 있다.
1893년 영국 화가 아서 해커는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이 키르케의 최면에 홀리는 광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키르케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아름다운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선원들은 그녀를 향해 슬금슬금 기어가 그녀가 더 잘 보일 것 같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아우성이다. 자기 몸이 돼지로 변해가는 것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벨기에의 화가 펠리시앙 롭스는 한술 더 떠 키르케를 돼지 한 마리와 산책하는 여성 지배자로 그렸다. 키르케는 여성적 관능미를 맘껏 뽐낸 여성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육욕이라는 유혹을 버텨낼 남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키르케가 선원들을 유혹하는 장면 그녀의 몸을 본 선원들은 돼지로 변해갔다.
인어가 보여주는 마술과 같은 세계는 인간에게 엄청난 만족감을 제공한다. 인어가 노래를 부르는 안식처에서는 근심, 걱정 따위는 제쳐놓고 마음껏 자유로워질 수 있다며 남자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인어의 유혹을 받아들인 남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환희가 아니라 결국 죽음뿐이다. 인어든 키르케든 여성의 유혹은 남성이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며 경고한다.
반인반수인 인어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오래됐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해신인 오안네스는 남신이지만 나중에 유럽의 인어상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한다. 셈족의 달 신이자 물고기 신인 아텔가티스도 인어로 등장하는 것을 봐 인어의 유래는 기원전 30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심원한 공포는 대체로 여인 형상으로 구체화됐다. 특히 그들이 오가던 지중해에는 괴력을 발휘해 배를 바닷속으로 빨아들이거나 선원을 낚아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는, 머리가 여섯 개나 달린 바다 괴물 ‘스킬라’가 있다고 믿었다.
17세기 중반에 인쇄된 어류 도감에 등장하는 인어
한편 중국에서는 인어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달랐다. 중국의 인어 모델은 양서류인 큰도롱뇽으로 아름답지도 신비롭지도 않다. 큰도롱뇽의 전체 길이는 1미터 이상이며 생명력이 매우 강하다. 동양의 인어에는 괴물적인 요소가 강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이자 신화집인 『산해경(山海經)』을 보면 인어는 다리가 네 개 있다. 『산해경』은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 사이에 쓰였는데 특히 날짐승과 들짐승이 다양하게 조합된 괴물 이야기가 많이 수록돼 있다. 각 동물을 숭배하는 원시 부족이 연합하는 과정에서 복합적인 동물이 발생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산해경』은 한국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우리나라 고분 벽화에 가끔 등장하는 이상한 짐승은 『산해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인어가 워낙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다보니 인어를 미끼로 한 사기꾼도 적지 않았다. 1830년대 런던의 한 박제사는 반은 인간, 반은 물고기라는 괴상한 동물의 표본을 만들어 런던에서 전시했다. 이 박제를 본 박물학자는 물고기 껍질을 원숭이에 씌워 꿰맨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어찌나 인기가 있었는지 5만 달러라는 거금에 팔렸다.
19세기에도 인어 박제가 많이 유행했는데 특히 일본 어민들이 재미를 봤다고 한다. 일본 어민들이 만든 가짜 인어는 유럽으로 건너가 떠돌이 서커스단이나 박람회 등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는데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이 박제품이 모두 원숭이에 물고기 껍질을 씌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