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8:4-17
찬송가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두려움과 겁이 많았던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주신 용기와 믿음으로 미디안 족속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움으로 미디안을 추격할 수 있었고 특히 에브라임 사람들은 미디안을 앞질러 요단 강에서 수로를 점령하여 오렙과 스엡 두 지도자를 죽여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사람은 세력다툼을 하며 기드온에게 어찌 미디안과의 전투 시작에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냐고 시비를 걸었고 기드온은 자신의 적이 에브라임이 아님을 알았기에 겸손히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며 에브라임의 공로를 높이며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 기드온과 삼백 명의 군사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도망친 미디안의 군대를 추격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거절(4-9절)
(4-7)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기드온과 삼백 명의 군사들은 피곤하여 지쳐 있었지만 미디안을 멸하고자 요단 강을 건너 추격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들은 급히 추적하느라 식량을 여유있게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것이 없었던 것은 미디안이 도망치는 루트가 요단강 동편 지파들이 거주하는 곳을 통과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보급을 책임져 준다면 좀 더 수월하게 미디안 족속을 쫒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에게 떡덩이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원수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따르고 있음을 말하였기에 갓 자손인 숙곳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숙곳 사람들의 반응은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는 냉소 어린 거절이었습니다. 당시에 전쟁에 승리하면 적군 특히 장수의 목이나 손과 같은 신체 일부를 가지고 와서 자랑 혹은 승리의 증거로 삼았기에 기드온의 손에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있냐는 질문은 아직 승리하지 않은 전투에서 어찌 너를 믿고 우리가 너에게 양식을 주겠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세바와 살문나의 명성과 군사력이 너보다 압도적으로 많고 크기에 너 같은 하룻강아지에게 뭘 믿고 양식을 줄 수 있느냐는 조롱이었습니다. 기드온을 도와주었다가 훗날 그 소식을 들은 세바와 살문나가 자신들을 공격할까 두려워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숙곳 사람들의 정치적 결정을 보게 됩니다. 숙곳 사람들의 판단에는 신앙적 이유도, 동족에 대한 사랑도 없었고 그저 미디안에게 짓밟혀 두려움에 떨던 패배의식에 짓눌려 눈앞에 도움을 요청하는 기드온의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명백한 판단 착오였습니다. 조금만 분별했더라면 이미 큰 승리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기드온의 손에 붙였음을 알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이를 갈며 세바와 살문나를 무찌른 후에 그들에게 돌아와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방백들의 살을 찢겠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브누엘 백성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8-9) 거기서 브누엘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브누엘은 요단동편 얍복과 숙곳 사이에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그곳에서 동일하게 기드온은 음식을 구했지만 브누엘 사람들도 동일하게 기드온을 업신여겼습니다. 기드온은 평안이 돌아올 때 그들의 성에 망대를 헐어버리겠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미디안의 패배(10-12절)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이 왜 이런 오판을 하게 된 것인지 10절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0)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미디안 군사 십이만 명이 죽었고 도망쳐 살아남은자가 만오천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이 적어도 만오천명을 이끌고 도망가는 세바와 살문나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인데 그를 쫒아가는 기드온의 사람들은 고작 삼백 명이 전부였던 것입니다. 아직도 무려 50배의 차이가 나는 병력입니다. 그러므로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의 생각에는 여전히 미디안의 군사가 더 강하게 보였고 또한 요단강을 건너 미디안의 본부에 가까운 갈골에 도착했기에 그들을 쫒아 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로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기드온과 삼백용사를 마지막으로 볼 것이라 생각해서 그들을 향한 조롱에 가까운 말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정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11-12) 적군이 안심하고 있는 중에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쪽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길로 올라가서 그 적진을 치니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
미디안 군사들은 본진과 가까운 갈골이라는 곳까지 도망쳤기에 이제는 살았다고 생각해서 안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기드온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일명 ‘헝그리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반드시 이겨서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의 노바와 갓 자손의 요새화된 성읍 욕브하의 길 곧 대상들의 운송로를 지나서 적진을 쳤습니다. 방심하고 있던 미디안 군사들은 놀라 도망하게 됩니다. 이미 혼비백산한 경험이 있는 미디안은 대열을 갖추지 못하였고 기드온과 삼백명의 군사들에게 먹잇감이 되고야 말았고 세바와 살문나는 생포되었습니다.
기드온의 복수(13-17절)
기드온은 미디안을 격파하고 세바와 살문나를 죽일수도 있었지만 생포해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그 세바와 살문나가 자신의 손안에 들어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3-17)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 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그를 심문하매 그가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 칠십칠 명을 그에게 적어 준지라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하고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
기드온은 매우 철저하게 복수를 준비합니다. 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심문하여 혹시라도 빠질지 모르는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 칠십칠 명의 명단을 받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붙잡아 와서 그들에게 세바와 살문나를 보게 하며 경고했던 것처럼 들가시와 찔레로 그들을 징벌하였고, 또한 브누엘에게도 경고한대로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게 됩니다. 이는 숙곳과 브누엘사람들의 정치적 선택 특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돕지 않고 위하지 않은 비겁한 선택에 대한 처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드온의 경고와 복수에는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말도안되는 이유로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었을 때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을 높여주며 동족끼리 싸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기드온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미 미디안편에 서는 것을 선택했기에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이유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인 것을 기억할 때 한 번 쯤 긍휼을 베풀어 그들 스스로 어리석은 짓을 행했음을 뉘우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이렇게 잔인한 복수로 동족을 죽인 것은 훗날 기드온의 가문에 아비멜렉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형제들 칠십명을 한 바위에서 죽인 사건의 전조를 보여줍니다. 한 민족, 한 집안에서 피의 역사가 얼룩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손으로 원수를 몇 번이나 갚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았고 요셉은 자신을 판 형들에게 복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자신을 무시한 동족들의 말에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고 적과 아군을 분별하지 않고 잔인한 복수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기드온의 영적 분별력은 훗날 뒷 부분에 그의 삶에 올무가 되는 실수를 또 저지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지나치면 모자란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오늘 기드온은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이 된 것은 좋았지만 지나쳐서 동족들이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잔인하게 복수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런 모습들이 기드온의 자녀 아비멜렉에게 필요하면 민족, 가족도 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열심도 중요하지만 분별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열심을 갖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열심만 있고 분별력을 갖지 못하면 오히려 잘못된 방향,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적 열심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아는 분별력이 동행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감정에 휘둘려 바른 판단을 놓치고 있었다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시다. 그리하여 모든 일을 행할 때 오점을 남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사람이 되십시다.
기드온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릇 행하여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을 막고자 미디안이라는 장애물을 두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해 그 장애물을 치우셨습니다. 실은 미디안이 문제가 아니었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장애물을 두실 때 우리는 그 앞에 좌절하고 넘어지고 싸우며 장애물을 상대하려 합니다. 그러나 실은 미디안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삶에 하나님께 나아기지 못하도록 만드는 죄의 장애물이 문제인 것입니다. 모든 삶의 문제가 하나님께서 두신 장애물이라 할 수 없지만 나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장애물을 허락하셨다면 먼저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우선됩니다. 그러면 삼백 명의 군사로 미디안을 무찌르신 하나님께서 내 삶에 내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이 커 보이는 미디안과 같은 장애물을 능력의 손으로 제거하여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내 삶에 문제가 가득할 때 그 문제 자체를 붙들고 씨름하려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문제가 아니었고 내 안에 불신과 죄악이 문제였음을 고백합니다. 미디안과 같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삶의 어려움을 만났을 때 겸손히 우리의 교만과 어리석은 죄악을 주님께 고백하며 무릎 꿇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기드온의 헌신앞에 정치적 계산을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지 못했던 어리석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과 같은 자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분노를 절제하지 못해 아군과 적군을 분별하지 못하며 복수했던 분별력 없는 자들이 되지 않게 하셔서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사랑과 공의로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 삶에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바라보지 못하고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처럼 숫자와 정치적 계산으로만 판단하던 모습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2. 분노로 인해 아군과 적군을 분별하지 못하고 복수했던 기드온처럼 내 삶에 감정에 충실하여 분별력을 잃어버린 모습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디안의 강함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바로 향하지 않았던 마음이 문제였음을 살펴보며 내 삶에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막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4. 동족에게 잔인하게 복수했던 기드온의 삶이 아비멜렉에게 잔인한 폭력의 빌미를 주었음을 기억하며 지금 내 삶에서 자녀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삶의 선택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강요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