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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安眠島]
우리나라 최초의 운하(運河)
안면도 개요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안면도의 크기는 면적 113.46km2, 해안선 길이 120km이며 최고봉은 북쪽의 국사봉(國師峰, 107m)으로 남북 24km, 동서 5km이다. 우리나라에서 6번째로 큰 섬이다. 안면읍에는 안면도 외에 59개의 섬이 있으며, 53개는 무인도이고 6개가 유인도이다. 안면도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승언리와 창기리 마을 해안에는 해안사구와 해안사빈이 잘 발달해 있다. 해안사빈은 모두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었고, 해안사구는 규사의 채취원이 되었다. 1968년 안면교가 생기기 전에는 고립된 섬으로 북쪽은 생활권이 태안읍에 속하고, 남쪽은 홍성군 광천읍에 속했다. 그러나 이 다리가 건설된 뒤로는 태안읍과 주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문화유적은 신야리에 조개무지, 승언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모감주나무 군락이 있다. 안면(安眠)의 유래를 보면 글자 그대로 「편하게 잘 잔다」는 뜻이다. 숲으로 우거져 있는 자연 환경을 나타낸 지명으로 여겨진다. 태안군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3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로, 국내 유일한 '해안국립공원'으로 해안선의 곳곳마다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태안군은 이 해변길을 테마로 하여 '태안해변길'이라는 이름의 트레킹코스를 만들었다.
국내 최초의 운하 안면도
고려시대 지방에서 모아진 조세를 풍선을 이용해 운송하면서부터 안면도가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안면도 앞바다인 안홍량은 암초가 많고, 잦은 안개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서 유속이 빠르기로 이름이 났다. 해마다 삼남지역의 조곡을 운반하던 세곡선들이 서해의 풍랑에 난파되어 인명 손실과 곡물 등이 많이 유실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태안반도의 안면곶을 굴착해서 섬으로 만들었다.
안면대교
옛날 나라의 재정은 세곡(稅穀)이 대부분이었다. 백성 대다수가 농사를 지어 나라에 곡물로 세금을 납부했다. 고려시대에는 한해에 대략 40만 석의 세곡미가 모아져 수도인 개경으로 풍선을 통해 보내졌는데 30만 석은 충청 · 전라 · 경상도 등 삼남에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곡미를 실은 풍선이 서해를 따라 올라올 때마다 태안반도의 안흥량 관장목 바다가 험하기에 해마다 암초에 부딪혀 난파를 당한 것이다. 안흥 앞바다 관장목은 황해도의 장산곶과 함께 서해에서 가장 험한 뱃길로 노련한 뱃사공도 두려워하는 뱃길 중 하나였다. 이 길을 피하여 우회하는 뱃길을 찾아 충남 태안과 서산 남쪽에 위치한 천수만과 서산 북쪽에 위치한 가로림만 사이를 가로막은 땅을 파서 운하를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관련 자료를 보면 이곳이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에 있는 굴포 운하인데 고려 인종 때 시작하여 조선 현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500년 정도 11차례나 시도된 국가적 대공사였다. 이 굴포 운하는 결국 포기하고 그 대신 차선책으로 안면도에도 운하를 건설하게 되었다.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대운하인데 1859년부터 1869년까지 10여 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된 운하로 길이는 192km이다. 예전에는 아프리카로 돌아서 갔지만 수에즈 운하로 가면 유럽과 아시아를 해상로로 바로 연결해준다. 이 운하의 개통으로 유럽의 인도 항로가 1만 km 이상 단축되어 유럽과 인도 및 중국에 이르는 무역의 규모가 크게 증가하였다. 수에즈 운하 공사 중에 무려 12만 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난공사였다고 한다. 1869년에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두 대륙을 오가는 상품을 배에서 내려 지중해와 홍해 사이 육로로 운반하기 때문에 시간과 물류비가 상당히 많이 들었다. 하루에 운하를 지나갈 수 있는 선박 수는 106척이다. 파나마 운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뱃길로 81.6km에 걸쳐 뻗어 있다. 1904년 미국의 주도로 다시 공사가 시작되어 1914년 8월 15일 운하가 개통되었다. 배들이 파나마 운하를 이용함으로써 약 8,000 해리의 항해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다. 연간 2만 척의 배가 지나가는 이 운하는 10년 동안 4만 명의 인부가 원시적인 방법으로 완공한 대규모 시설이다.
실패한 태안 굴포 운하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 이전에 조선에도 운하 건설이 시도됐다는 사실을 우리 세대는 잘 모른다. 이들 운하보다 무려 700여 년이나 앞선 12세기에 시작한 운하공사는 5백년 동안에 11차례나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고려 제17대 인종 12년(1134) 처음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고려 조정은 군사 수천 명을 동원하여 4km 정도의 땅을 팠지만, 나머지 3km는 암반에 막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오랫동안 중단된 공사가 공양왕 3년(1391) 당시 실세인 이성계가 조운(漕運)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다시 한 번 공사를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고려 말의 충정왕과 공양왕 시절, 약 40년 동안 나라의 재정이 바닥이 드러났다. 운하 공사 실패와 세곡선들의 난파와 왜구들의 조운선 약탈이 겹치면서 정부의 관리들에게 월급도 줄 수가 없었다. 조선을 창건한 이성계는 다시 세곡선의 운하 건설을 위해 최유경을 보내서 굴포 운하공사의 가능성을 다시 조사하게 했다. 태종 3년(1403)에 세곡선 34척, 태종 14년(1414)에 66척의 조운선이 안흥량에서 난파하여 세곡을 잃고 선원 300여 명마저 목숨을 잃었다. 해가 갈수록 태안 굴포 운하 공사는 중요하여 시도했지만 그 당시 기술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태종 12년(1412) 다시금 대규모 굴포 공사가 시작되었다. 태종 임금은 세자 충령대군(세종대왕)와 굴포 운하 공사를 시찰하였을 정도이다. 이때의 공사 역시 암반 때문에 진척이 어렵게 되었다. 그 후 조선 7대 세조 7년(1461) 다시 공사를 재개하였고, 11대 중종 16년(1521)에 다시 검토 중 임진왜란으로 계획이 중지되었다. 18대 현종(1660-1674) 때에도 공사가 시행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고려조 인종 12년에서 조선조 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장장 535년간에 걸쳐 10여 차례나 실시한 공사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굴포 운하의 제 2의 대안으로 안면도 운하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2007년 3월에 충청도 일간지에 태안의 굴포 운하 복원 추진을 알리는 기사가 나왔다. 태안군이 관광 및 물류 수송 확보를 위해 국내 최초의 내륙 운하인 굴포 운하 복원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태안의 인평ᆞ도내리 천수만부터 서산시 팔봉면 진장ᆞ어송리 가로림만까지 6.8km에 이르는 내륙의 뱃길로, 고려 인종(1134년) 때부터 조선 현종(1669) 때까지 500여년 넘게 사업이 벌어졌다. 굴착 공사는 강폭 14~63m, 수심 6m 구간 가운데 4km만 진행됐을 뿐 나머지 2.8km는 암반 등에 가로막혀 이뤄지지 못했다. 굴포 운하의 흔적은 논과 나대지에 지금도 남아 있다. 고려와 조선 조정은 나라 재정인 세곡을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 굴포 운하 건설에 나섰으나 기술 부족으로 운하 건설이 계속 실패했다. 조선은 굴포 운하 대안으로 안면곶을 절단하는 공사를 벌여 안면도를 인공섬으로 만들었다. 안면도는 1970년 연륙교 건설로 육지와 연결됐다.
태안군은 이런 역사적 아픔을 지니고 있는 굴포 운하를 복원해 물류 및 관광자원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수로 주변에 운하 전시관을 건립하고, 세곡 등을 보관하던 창고부지도 복원할 예정이다. 그러나 막대한 사업비와 경제적 타당성이 문제다. 배가 다니기 위해서는 천수만의 서산 B지구 방조제를 터야 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도크도 필요하다. 또 내륙운하 수송의 경제성이 떨어진 관계로 실현 여부가 불투명하다. 환경적인 측면에서 꽉 막힌 가로림만과 서산의 천수만을 터서 다시 바다로 만든다면, 두 만은 청정해역이 될 것이고 해산물 자원의 증가와 고기들의 산란장으로 변할 것이다. 또 생태계가 되살아나서 천수만 간척 이후 변모된 생태환경이 복원될 것으로 기대된다.
안면도 운하 공사 성공
조선 인조 16년(1638)에 안면도 북쪽인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사이의 운하 건설사업이 완료되면서 안면곶의 운명이 바뀌게 돼 이때부터 안면도는 섬이 되었다. 오늘의 안면도가 된 것이다. 안면도는 이런 역사적인 사건과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17세기부터 20세기의 1970년까지 무려 330여 년 동안 육지와는 떨어진 섬으로 살면서 불편을 겪어야만 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쌓인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가 1970년 태안반도와 안면도를 잇는 연륙교가 건설된 것이다. 1970년(연장 200m) 개통되었는데 2002년 꽃 박람회가 열리면서 다리를 하나 더 만들어 지금은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운하(運河)인 셈이다. 안면도 길이는 대략 25km 정도인데 안쪽 바다인 천수만으로 안전하게 오게 하려고 운하를 팠다. 요즘은 25km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전통 사회에서 풍선으로 가는 거리로는 대단히 멀다. 현대의 개념으로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에는 장비가 하나도 없었다. 당시 일일 공사인원은 5천 명 정도로, 이 작업은 매번 실패를 거듭했다고 한다. 공사는 물이 빠지는 썰물 때만 가능했는데, 그나마 파낸 개펄의 흙은 바닷물에 의해 다시 밀려 들어와 막혔다. 또 밑바닥에는 거대한 암반층이 형성돼 장비가 없던 시절, 오직 정과 망치만으로 바위를 깨다가 결국 목표한 깊이까지 파지 못하게 된다. 그러던 것이 태종 때 새로운 돌파구가 생기게 된다.
태종 때 하륜은 현대의 운하 공법과 유사한 축제저수(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드는 방식)법을 거론한다. 즉 수면의 높이가 각각 다른 5개의 저수지를 만들고, 배가 계단식 저수지 내에서만 움직여 옮겨 싣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갑문, 수문이 없을 뿐이지 현대식 운하와 같은 발상이었다. 안면도 일대를 옛사람들은 '쌀 썩은 여'라고 불렀다. 난파한 세곡선서 쏟아져 나온 쌀이 썩은 곳이라는 뜻이다. 17세기에 이곳의 원래 이름은 안면곶이었으나 숙종 3년에 안면도로 표기한다. 곶이 섬으로 바뀐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운하 공사가 가능했던 것은 암반이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라 깨기가 쉬운 편마암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운하 위에 안면대교가 이어져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이 공사는 뱃길의 안전과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1869년에 건설한 수에즈 운하나, 1914년에 완공한 파나마 운하보다 약 500년이나 앞선 역사적인 사건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다행히도 이 안면도 운하가 이 지역의 운명을 바꾸게 하였다.
안면도 해태 양식
이 운하는 천수만의 막힌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했다. 안면도는 지주식 김양식이 잘 되는 지역으로 알려졌다. 안면도의 김은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천수만 간척 이후에 바다에서 수확도 하기 전에 녹아내려 버려서 김양식은 문을 닫았다.
어은돌 해수욕장
안면도의 해태양식은 장목을 세우고 대나무 가지로 발을 해서 밑에 깔아 포자를 붙이는 방식이다. 워낙 김 포자가 많은 곳이라 자연적으로 김발에 포자가 붙어 버린다. 9월의 물에 김발을 바다에 넣고 설치하면 곧바로 포자가 붙기 시작하여 불과 2개월이면 수확에 들어간다. 김의 성장이 좀 약하다고 판단되면 한번에 훑어버리고, 잘 자라는 데는 2번까지 잘라낸다. 김발에서 따낸 김을 광주리에 담아서 깨끗하게 빨아서 세척한다. 헹군 김을 한 장씩 손으로 떠서 발장에 얹어 건장에서 말린다. 하루에 한 번 말리면 재래식 김 상품이 완성된다. 지금은 천연식이 아닌 기계식으로 대량 생산을 하지만 1970-80년대는 대부분 손으로 일일이 김을 생산했다. 그러나 천수만의 간척 사업으로 허리가 잘리면서 홍성 ab지구를 통해 뚝으로 막혀버렸다. 안면도에서는 이제 더 이상 김양식이 되지 않는다. 또 물 흐름의 약해져서 천수만의 포구들은 토사가 밀려들어 계속적으로 바다가 얕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어디든지 마찬가지겠지만 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통이다.
드르니 보도교
육지와 안면도를 잇는 다리가 놓인 시기는 1970년 12월이다. 1967년에 시작된 공사가 늦어져서 무려 4년 만에 길이 208m, 폭 8m의 다리가 완성되었다. 예산과 기술이 부족하던 시절이었지만 그 정도의 짧은 다리 하나를 건설하는 데 무려 4년이나 걸렸으니 주민들은 속이 탔었다.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와서 착공식을 했지만 공사가 지지부진하다가 4년 만에 어렵게 완성되어 70년 12월 31일 개통하였다. 안면교는 25년이 지났는데 1990년대 중반 붕괴의 위험 때문에 대형트럭의 통행을 제한하였다. 결국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끝냈지만, 1997년 안면교와 나란히 새로운 안면대교를 건설하여 차들이 안심하고 다니고 있다.
태안의 드르니와 안면도의 백사장포구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라 육지였다. 거친 뱃길에 조정에 올리는 쌀을 운송하는 선박의 좌초가 빈발하자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운하를 만들었다. 태안군 남면 드르니와 안면곶의 육지를 잘랐는데, 공사는 고려시대에서 시작돼 조선 인조 시대에 완공됨으로 인해 섬이 된 것이다. 그리고 태안읍에서 안면도로 넘어가는 길은 두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77번 국도를 타고 안면읍에 도착, '백사장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백사장1길'로 이어진다. 오른쪽은 바다, 왼쪽은 안면도 카라반파크가 있다. 여기서 안으로 더 들어가면 백사장포구다. 선착장 경사제는 계단식으로 된 호안 바로 옆에 나란히 이어져 있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다리가 보인다. 지난 2013년 11월 안면읍 백사장항과 남면 드르니항을 잇는 길이 250m의 해상인도교 '대하랑꽃게랑'(길이 250m)이 완성되었다.
'대하랑꽃게랑' 다리는 태안군이 해양관광의 랜드마크로 거듭나기 위해 개통한 백사장항 해상인도교다. 안면도의 백사장항과 남면의 드르니항을 연결하는 해상인도교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두 지역을 하나로 만들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이는 주위의 풍광이 아름다운데다 바다 위를 걷는 신비함이 더해져 개통하자마자 낙조 등 자연과 어우러져 사진 찍기 좋은 명소로 부각되고 있다.
다리가 연결시킨 두 개의 포구 중 안면도에 위치한 포구가 백사장포구다. '백사장포구'는 대하잡이배의 집어항으로, 초고추장에 날로 먹는 자연산 대하를 맛볼 수 있는 포구다. 포구에는 횟집들이 바다를 에워싸듯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앞으로 소규모의 어선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다. 특히 봄부터 여름까지는 꽃게잡이, 가을부터는 단백질과 칼슘이 풍부한 대하잡이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10월부터 11월 초에 대하축제가 열린다. 포구에 횟집과 수산물을 파는 상점들이 많아 먹거리가 풍부하고 수산시장에서 경매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다리는 북방파제 위에 있다. 입구에는 버스와 대형 운반용 트럭을 개조한 커피숍들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 바로 해수욕장. '백사장해수욕장'은 끝없이 펼쳐진 은빛 모래가 있어 자동차가 그냥 지나가도 될 만큼 단단해 여름철에 오토캠핑을 하기에 좋다. 모래사장 중간에 반원형의 공간이 있다. 마치 독살 같은 장치로 막대기들을 연결하여 꽂아 만들었는데 모래유실 방지용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싶다.
경사진 진입로 입구 오른쪽에 표지석이 있다. 대하랑꽃게랑 인도교에 대한 글이다. 여기서부터 다리는 달팽이처럼 오르게 된다. 올라가면서 주변 포구를 바라보는 경치도 멋있다. 다리 위에서 서쪽의 바다를 향해 바라보면 넓은 바다가 펼쳐진다. 바로 앞에 '길마섬'이라는 작은 무인도가 바닷길로 연결되어 있다. 그 옆으로 '한서대학교 태안비행장'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계속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드론이 수시로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웬만한 비행기 소음 못지않은 공해다. 이어 다리 끝, 이곳에서 내리막길로 빙글빙글 돌게 되어 있다. 백사장항 건너 다리로 연결된 '드르니항'은 안면도 연륙교를 지나기 전 오른쪽으로 약 2~3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다리 옆 계류장을 지나면 서방파제가 있고, 그 뒤로 바다는 갯벌로 이어진다. 이 옆으로 태안해안길이 통과한다. '솔모랫길'이다. 여기서부터 위로 몽산포까지 이어지는 해안길이다. 드르니항은 안면도에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며, 옛날에는 안면도를 연결해주는 곳이었다. 경치가 아름다운 드르니항은 안면도가 육지와 연결되기 전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던 나루터였다. 현재는 연륙교가 있어서 발전이 더디게 되는 '비운의 지역'이기도 하다. 독특한 이름 때문에 유럽식 이름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항이라는 뜻이다. '들르다'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드르니의 옛말 '들온이'는 다리가 없던 시절 맞은편의 안면도에서 배를 타고 사람들이 계속 들어온대서 붙여졌다. 일제강점기 '신온항'으로 바뀌었다가 2003년에 원래의 이름을 되찾은 사연도 갖고 있다. 한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한적했었는데 '대하랑꽃게랑' 해상인도교가 바로 앞 건너편의 백사장항을 이으며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포구로 새롭게 변신했다. 드르니포구 왼쪽에 긴 경사제 방파제가 있다. 이곳 방파제는 끝이 있는 방파제다. 이 앞에는 수협과 공판장 그리고 해양파출소 등이 들어서 있고 방파제 옆으로 길게 경사진 호안을 이루고 있다. 이곳 계류장 안에는 모래밭이 생기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모래해변이다. 그래서 그 좌우로 수로가 있는 셈이다. 그래도 암초가 아닌 게 다행이다.
해수욕장이 즐비한 안면도
안면도 섬 서쪽은 태안해안국립공원에 편입된 곳으로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방포, 삼봉, 꽃지, 삼봉, 백사장, 바람아래 해수욕장 등 안면도에는 해안선을 따라 14개의 해수욕장이 있다. 안면읍의 상징인 해송을 마음껏 감상하고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안면도 자연휴양림, 모감주나무군락지(천연기념물) 등도 있다. 특히 해변에는 규사의 원료로 쓰이는 하얀 모래가 많다. 또한, 2002년도 국제꽃박람회가 개최되어 성황을 이룬 후 꽃지 해안공원으로 재개장하여 많은 관광객이 이용하고 있다. 반 만년의 역사를 이끌어 온 황해의 물결이 중국대륙과 국경을 이루는 한반도의 중서부에 위치해 21세기를 향한 서해안 시대로의 나래를 펴고 우뚝 솟아 있는 곳이다.
현재는 연륙교로 육지와 연결돼 있고, 머지않아 태안반도 끝인 영목항에서 다리로 원산도를 연결하고 다시 해저터널로 보령으로 연결되는 연륙교가 2020년도까지 생긴다. 안면도-보령 연륙교(총연장 14km · 왕복 2~4차로) 사업으로 보령 대천항과 안면읍 영목항을 연륙교와 해저터널 등으로 연결하는 대형 국책사업이다. 연륙교는 대천항에서 5.7km 떨어진 원산도를 통과한다. 이 대형 프로젝트는 2020년까지 국비 5400억 원이 투입된다. 이 공사가 완공되면 종전 안면도 영목항에서 대천항까지 승용차로 1시간 반 걸리던 것이 10분대로 크게 단축된다. 그 밖에 안면도는 신야리의 패총과 고남리에 지석묘가 있다. 안면도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유구한 역사와 태고의 모든 신비를 골고루 간직한 안면도는 찬란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서해안시대에 발을 맞추고 있다.
태안반도 땅끝 마을, 안면도 영목항
태안군 안면도의 안면대교를 지나서 끝까지 내려가면 최남단에 영목항이 나온다. 영목의 원래 이름은 영항인데 항포구 의미 외에도 보령의 대천항과 오천항으로 이어지는 여객선이 있다. 영목항은 태안의 관문이자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영목항은 그리 작은 항구는 아니다. 다양한 인프라가 잘 정비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유람선을 탈 수 있고 체험마을 안내소에서는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횟집에 들어가기 부담되면 직판장에서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구할 수도 있다. 여기서 낚싯배들이 많이 출발하며 특히 유명한 해수욕장을 가진 섬인 원산도가 바로 앞에 있고, 태안의 제주라고 일컫는 장고도가 건너편 좌측에 있다. 태안에서 영목까지 달리는 길은 퍽이나 인상적이다. 산과 바다, 해수욕장 그리고 논과 밭, 솔숲을 달리면서 농촌과 어촌의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영목까지 가다보면 연륙된 대야도에서 '귀천(歸天)'으로 유명한 천상병 시인의 옛집을 볼 수 있다. 천수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집 덕분에 이 대야도는 '시인의 섬'으로 불린다.
영목항 가는 길에는 여러 개의 해수욕장이 있다. 그 중에 이름난 해수욕장은 꽃지 · 삼봉해수욕장이며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여행객이 사철 많이 찾는다. 영목항 앞에는 원산도와 효자도, 좌측에는 육도와 허육도와 소도, 우측에는 장고도, 고대도 같은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자리잡고 있다. 영목항에는 다양한 수산물 있고 횟집 또한 많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특산물은 까나리 액젓이다. 까나리 액젓은 김치의 맛을 높여주고 숙성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액젓은 아미노산, 불포화지방산을 다량으로 함유해 영양도 좋고 특유의 고약한 냄새도 없다. 맛이 담백하며 비린내가 나지 않기에 도회지 주부들에게 인기가 그만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더 좋아하는 음식 재료이다.
출처:(한국의 섬 - 충청남도)
2024-04-26 작성자 청해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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