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붇다왕사 187강 - 아딛타나 빠라미 (10)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소멸하신 분, 스스로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아딛타나 빠라미와 삿짜 빠라미의 차이
아딛타나 빠라미(adhiṭṭhāna-pāramī)에 대해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법문할 내용은 ‘아딛타나 빠라미와 삿짜 빠라미의 차이’입니다.
삿짜 빠라미(sacca-pāramī)도 10가지 빠라미 안에 따로 있죠. 그리고 아딛타나도 빠라미 10가지 중의 하나로 분명히 두 가지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삿짜와 아딛타나. 진실 빠라미와 결심 빠라미, 두 개가 서로 다릅니다. 다르니깐 각자 따로 있는 거겠죠. 다릅니다.
삿짜는 앞에서 ‘삿짜 빠라미’ 부분에서 봤던 것처럼 그 삿짜가 좋은 것이든 안 좋은 것이든, 불선업에 관한 것이든 선업에 관한 것이든 그게 사실이면 진실이면 ‘삿짜’입니다. 그게 진실한가 진실하지 않은가, 이걸로 삿짜 빠라미의 무게가 생기는 거죠. 이게 삿짜인가 삿짜가 아닌가는 그게 진실인가 진실이 아닌가, 이게 관건인 거죠. 선한 것인가 불선한 것인가 이게 아니라. 그게 진실인가 진실이 아닌가 이걸로 판가름 나는 거죠. 삿짜의 가치는 그게 안 좋은 것이라도, 불선업이라 하더라도* 이게 진실이면 진심이면 삿짜입니다. 진실을 근거로 원하는 것을 바라면 잇차뿌라나 삿짜입니다, 진실한 무언가를 걸지 않고 원하는 것을 바라면 아딛타나입니다.
[*편집자 주: 깐하디빠야나 자따까(Kanhadīpāyana jātaka, 444번 자따까)에서 보디삳따였던 '깐하 디빠야나'라는 유행자는 독사에 물린 아이를 살리기 위해 '출가하고 1주일 이후로 출가생활이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진실을 고백한다. 아이의 아버지는 '수행자들에게 보시할 때 한 번도 기쁘지 않았고 마지못해 했다'고 고백한다. 아이의 어머니는 '결혼생활을 하며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안 좋은 사실들'이지만 모두 '사실'이었기에 그 진실의 힘으로 독사에 물린 아이를 살릴 수 있었다.]
진실이라기보다 진심이라고 해야 되겠네요. 그쵸. 진실은 진짜 사실이고 진심은 진짜 속에 있는 마음이지 않습니까? 진실과 진심은 다르지 않습니까. 다른 것 같은데 진심과 진실은 다른것이지 않습니까? 진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이고 진심은 속에 있는 마음이죠. 눈에 보이는 사실과 진심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쵸.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진심이 삿짜입니다. 삿짜 빠라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로, 아내가 “남편을 진짜 싫어한다”라고 이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이거는 드러나 보이는 사실과는 다르게 진심인 거죠. 진심이면 삿짜입니다. 그게 불선업이라 하더라도 진심이면 삿짜의 효력이 있습니다. 이게 삿짜 빠라미입니다.
진심을 다 내보이고 살면은 안 되죠. 안 됩니다. 진심을 다 내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5계가 있는 거죠. 5계를 지키는 선 안에서 진실되게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아딛타나는 그게 진심인지 진실인지 이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딛타나 빠라미(결심 빠라미)는 그 결심이 사실에서 근거한 건지 진실에서 근거한 건지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고 그냥 내가 지금 현재 필요한 것, 내가 원하는 것. 이것을 결심하는 것. 이게 아딛타나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 내가 지금 현재 원하는 것을 내가 굳건히 결심하는 것. 이게 아딛타나입니다.
수완나사마 자따까(suvaṇṇasāma-jātaka, 540번 자따까)에서 그 수완나사마가 독화살을 맞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지 않습니까. 이때 아버지가 내 아들의 독이 사라지기를, 이렇게 그걸 서원할 때 이때는 잇차뿌라나 삿짜(icchāpūraṇa-sacca), 내가 원하는 것을 완성시키는 삿짜. 이거죠. “내 아들이 이렇게 되기 전에 항상 바르게 살았다. 바르게 살았고 부모를 잘 봉양했다. 이 진실로 내 아들의 몸에서 독이 사라지기를” 하는 것. 잇차뿌라나 삿짜입니다. 진실을 말하면서 원하는 것.
그다음에 보디삳따가 “내가 붇다가 될 것이 확실하면 이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기를” 이렇게 하면서 허공으로 던지는 것. 이것은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실과 상관없는 거지요. 내가 진짜 붇다가 되고 싶다, 이 아딛타나인 거죠. 이 심정으로 자른 머리카락을 허공에 던진 거죠. 진실을 말하면서 원하는 게 아닙니다. ‘정녕 이번 생에 붇다가 되고 싶다’ 라고 하는 이것만 있는 거죠. 책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위두라 대신이 말의 꼬리에 매달려서 가면서 “내 하의가 벗겨지지 않기를” 이렇게 아딛타나 하는 것. 이것도. 그냥 위두라 대신이 원하는 거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결심한 거죠. 진실을 걸고 결심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을 걸고 결심한 게 아닙니다. 그냥 원하는 바를 결심했습니다.
삿짜와 아딛타나의 차이는 '진실'이 있는가 없는가가 차이점입니다.
(3) 와따 아딛타나
와따 아딛타나(vata-adhiṭṭhāna)가 있습니다. 와따(vata)는 뭐냐면 ‘뭔가를 꾸준히 하는 것’을 와따라고 합니다. 습관이 되게 꾸준히 매일매일 하는 것. 이렇게 결심한 것을 한 번 결심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키는 것. 이것을 와따라고 합니다. 머리카락을 던지면서 내가 붇다가 될 것이면 떨어지지 마라, 이것은 그냥 한 번의 결심인 거죠. 그게 아니라 와따(vata)는 매일매일 하는 것. 매일 법문을 들으시는 것, 이거 와따입니다. 습관이 되게 매일매일 하는 것. 습이 되게 하는 것. 이런 것을 와따라고 합니다. 5계를 지키겠다, 이러면 5계를 지키려고 계속 노력하는 것. 이런 것 있죠. 그런 게 와따입니다. 좋은 것이든 안 좋은 것이든 다 꾸준히 계속 유지하는 것. 이것을 와따라고 합니다.
이게 어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실랍바따 빠라마사(sīlabbata-parāmāsa)’라고 있습니다. 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고 한자로 그렇게 나오는데, 실랍바따 빠라마사는 무엇이냐면 실라(sīla)는 습관입니다. 습관이고 와따(vata)는 무언가 반복해서 하는 일인 거죠. 잘못된 어떤 습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면서 이것을 하면 내가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믿는 것. 이것이 실랍바따 빠라마사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하면서 이걸 하면 내가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믿고 매일매일 그걸 하는 거죠.
그게 실랍바따 빠라마사인데 어떤 게 있냐면 고 실라(go-sīla)라고 합니다. ‘고(go)’는 소이고 ‘실라(sīla)’는 습인 거죠. 소처럼 지냅니다. 사람이 소의 흉내를 내는 겁니다. 사람이 소의 흉내를 내면은 힘들겠지요. 사람이 소처럼 네 발로 다니고 서서 먹고 서서 자고 서서 대소변을 보고. 이렇게 하는 게 쉽지 않지 않습니까?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세생생 전생에 지은 어떤 불선업이 있지 않습니까? 그 불선업의 결과가 우리에게 오죠. 오는데 그것을 내가 이 힘든 행위를 해서 그 안 좋은 결과들을 탕감한다는 거죠(흔히 업장소멸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윤회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그래서 소처럼 지내고 또는 개처럼도 지냅니다. 꾹꾸라 와따(kukkura-vata), 개처럼 이렇게 먹고 다니고 이렇게 옷을 입지 않고 그런 것을 실랍바따 빠라마사라고 하는데 그때 실랍바따의 바따가 와따입니다. 와따에서 바따로 변한 겁니다.
계속 꾸준히 뭔가를 하는 것을 한 번만 하지 않고 매일매일 계속 그렇게 사는 것. 그렇게 유지하는 것. 그런 것 많죠. 이것은 개와 소의 흉내를 내는 것이고 이거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 이걸 계속 하면, 100일 기도를 한다거나 하여튼 그런 것을 해서 특히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게 실랍바따 빠라마사입니다. ‘바른 길을 찾게 해주십시오.’ 이런 뜻으로 100일 기도를 하는 것은 이것은 실랍바따 빠라마사가 아니죠. 아니고 이걸 하면 될 거라고 믿는 것. 그게 실랍바따 빠라마사입니다.
이때 바따가 이 와따입니다. 꾸준히 하는겁니다. 매일매일 내가 이걸 꾸준히 하겠다. 계속 하겠다고 아딛타나하는 것. 이게 와따 아딛타나입니다. 아딛타나는 고귀한 빠라미입니다. 그래서 이 와따 아딛타나에는 저급한 와따, 소 흉내나 개 흉내처럼 저급한 것을 계속 하는 것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개처럼 지내면서 윤회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세니야’라는 외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렵게 그런 힘든 것을 지켰죠. 지켰는데 아무리 어렵게 해도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딛타나 빠라미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바른 것을 아딛타나 하고 그것을 계속 유지하는 것, 이것은 와따 아딛타나에 들어갑니다. 빠라미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빠라미는 고귀한 자의 일이니깐 고귀한 것을 아딛타나 하고 그걸 계속 유지하는 게 와따 아딛타나인 거죠. 내가 일주일에 한 번 8계를 지키겠다, 이렇게 아딛타나 하고 일주일에 한 번 포살계를 지키는 것. 오후 12시 이후로 먹지 않고 유흥을 즐기지 않고 이런 것. 이 결심을 계속 유지하면 와따 아딛타나입니다. 좋은 것, 고귀한 것을 결심하고 그걸 계속 유지하는 것. 하루 하고 끝내지 않고 매일 유지하는 것. 이게 와따 아딛타나입니다.
아딛타나가 세 종류가 있는데
1) ‘무슨 일이 있으면 미리 징조를 보여라’ 하는 ‘뿝바 니믿따 아딛타나(pubba-nimitta-adhiṭṭhāna)’가 있었고,
2)‘아시사 아딛타나(āsīsa-adhiṭṭhāna)’는 내가 원하는 것을 걸고 아딛타나하는 거죠. 그리고 고귀한 일을 계속 유지하도록 하는
3) ‘와따 아딛타나(vata-adhiṭṭhāna)’. 이렇게 3가지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마지막 세 번째, 이게 진짜 아딛타나인 것 같은데 아딛타나를 할 때 내가 한 결심이 절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마치 바위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부서지지 않는 것처럼 깨지지 않는 것처럼 아딛타나 하고 지켜야 된다. 이렇게 나옵니다. 수행기간에 8계를 지키기로 했으면 절대 깨지 않고 지키는 것. 아프다고 먹거나 그러지 않고 8계를 지키는 거죠. 고귀한 일이 하면서 타협하지 않고 이 기간은 꼭 하겠다. 이렇게 하는 것. 이게 아딛타나입니다. 아딛타나 할 때 이렇게 하라고 나옵니다. 무소의 뿔처럼 하라. 무소는 뿔이 하나이지 않습니까. 보통 뿔은 두 개가 있습니다. 사슴 뿔도 두 개고 소의 뿔도 두 개이고 이렇게 두 개씩 있습니다. 근데 무소의 뿔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 하나를 굳건히 지키는 것처럼 결심(아딛타나)하고 그 결심이 견고하고 확실하고 정확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가 아딛타나한 것을 계속 지키는 사람들 있지요. 내가 좋은 것을 결심하고 해야겠다, 이렇게 하면 그걸 어기지 않고 계속 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결과로 나중에 하고 싶은 일들이 쉽게 쉽게 이루어진답니다. 저절로. 그게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위빳사나 수행할 때 처음에 한 시간 앉기가 아주 어렵지 않습니까? 어렵고 힘들고. 근데 내가 한 시간을 꾹 참고 앉으면 그다음 번에 앉고 그다음 번에 앉고 할 때는 점점 쉬워집니다. 분명히 쉬워집니다. 그렇게 원하는 게 쉽게 이루어집니다. 그 뒤로는 계속 점점 쉽게 이루어진다는 거죠. 마지막에 도와 과를 얻을 때도. 아라한과를 얻을 때도 쉽게 이루어진다는 거죠. 평소에 좋은 일을 하기로 하고 잘 지키고 살았으면 나중에 꼭 필요한 큰 일을 할 때도 쉽게 이룹니다.
그래서 보디삳따들의 아딛타나 3가지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뿝바 니믿따 아딛타나, 아시사 아딛타나, 와따 아딛타나. 이 두 가지 뿝바 니믿따 아딛타나와 아시사 아딛타나는 보디삳따들이 아딛타나 빠라미가 될 정도이다, 이 정도는 아닙니다. 이건 제가 보기에도 빠라미라고 할 수 있나 싶은 그런 아딛타나인데, 지금 말하는 와따 아딛타나는 진짜 붇다를 만들 빠라미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아딛타나입니다. 앞에 한 아딛타나들은 붇다가 될 정도의 그런 가치가 있는 아딛타나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지막에 하는 와따 아딛타나, 이것은 보디삳따를 붇다로 만드는 진짜 빠라미 아딛타나입니다. 어떤 아딛타나들을 했냐 하면 시위 왕으로 태어났습니다(sivi Jātaka. 499번 자따까). <짜리야 삐따까(cariyāpiṭaka)>[*편집자 주: <쿳다까 니까야>에 속한 경전으로 보디삳따의 10가지 빠라미 각각과 관련된 주요 전생담이 모아져 있다.]라는 빨리 경전에 나오는데, 시위 왕으로 태어나서 보시를 많이 했습니다. 백성들에게 4대문을 열어서 항상 구휼미를 나눠주고 보시를 매일매일 했습니다. 그게 취미였습니다. 왕이 그러다가 어느 날 누대에 올라서 이렇게 시를 읊습니다.
“니삿자 빠사다와레 에왕 찐떼사항 따다.
양낀찌 마누상 다낭 아딘낭 메 나 윗자띠.
요삐 야쩨야 망 짝쿵 다데양 아위깜삐또”
nisajja pāsādavare, evaṃ cintesahaṃ tadā.
yaṃkiñci mānusaṃ dānaṃ, adinnaṃ me na vijjati.
yopi yāceyya maṃ cakkhuṃ, dadeyyaṃ avikampito’ti.
“오 사랑하는 아들, 사리뿓따여, 내가 시위왕으로 태어났을 때, 높은 누대에 올라가서 생각하기를 ‘내가 사람들에게 주지 않은 것은 없다. 다 줘봤다. 다 주었는데, 누군가 나에게 와서 내 눈이 필요하다고 달라고 하면 난 그 사람에게 망설임 없이 내 눈을 주겠다. 주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다. 누각에 올라가서 왕이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시위 왕이 자기 눈을 주고 싶은 거죠. 줄 거 다 주고 이걸 주면 나의 이 주고 싶은 마음이 해소가 될 것 같답니다. 너무너무 주고 싶어서. 그래서 이 시위 왕 보디삳따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날을 보내던 어느 날 정말로 어떤 브라흐마나(brāhmaṇa. 제사장 계급)가 와서 자기 눈이 없으니깐 눈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브라흐마나는 사실 삭까 천왕(sakka. 제석천)이었습니다. 천왕인데 인간인 것처럼 가장을 하고 온 거죠. 와서 눈이 필요하다고 눈을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만 달라고 했습니다. 근데 두 눈을 다 줍니다. 전혀 망설이지 않고 두 개를 다 줬습니다. 이것이 와따 아딛타나입니다. 자기가 아딛타나 한 것을 이루는 것. 망설이지 않고 이루는 것.
부리닫따 짜리야(bhūridatta-cariyā. 543번 자따까(bhūridatta jātaka))에도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리닫따라는 용왕은 전에도 애기했었죠. 물속 용궁에서 살다가 8계를 지키고 싶어서 인간계로 올라온 용왕입니다.
“짜뚜로 앙게 아딛타야 세미 왐미까묻다니.
차위야 짬메나 망세나, 나하루앋티께히 와
얏사 에떼나 까라니양 딘낭 예와 하라뚜 소.”
caturo aṅge adhiṭṭhāya, semi vammikamuddhani.
chaviyā cammena maṃsena, nahāruaṭṭhikehi vā.
yassa etena karaṇīyaṃ, dinnaṃyeva harātu so.
이 용왕이 그 포살계를 지키면서 아딛타나 하는 것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1) 내 살갗, 두터운 피부와 얇은 피부.
2) 살과 피.
3) 신경.
4) 뼈
이 네 가지를 누군가가 원하면 주겠다. 이 네 가지를 줘서라도 나는 이 포살을 지키겠다는, 8계를 지키겠다는 아딛타나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아딛타나 합니다. 나의 피부, 얇은 피부와 두꺼운 피부 그리고 살과 피 그리고 신경, 뼈. 이 네 가지를 잃으면 잃었지 이 결심을 꺾지 않겠다. 이렇게 결심하고 8계를 지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다노- 뿐냥 아-사왁카야-와항 호-뚜
이마노- 뿐냐바-강 삽바삳따-낭 바-제-마
삽베- 삳따- 수키따- 혼-뚜
(Idha no puññaṃ āsavakkhayāvahaṁ hotu.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Ima no puññabhāgaṃ sabbasattānaṃ bhājema.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Sabbe sattā sukhitā hontu.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Sādhu sādhu sādhu.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필사자: 익명
편집자: 담마삐야
* 2022-11-04 인터넷(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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