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설교(64)
하루살이와 낙타
마23:23-24
"스페인의 투우 경기"는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투우는
투우사와 소가 일대일로
맞대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한 사람의 투우사와
그를 돕는 조력자들이 함께 나섭니다.
물론 최종적으로 소를 죽이는 것은
투우사의 몫이지만,
경기 중 소에게 붉은 천을 흔들고(분노 유발꾼),
작살을 등에 꽂는 행위
(장창 찌름꾼, 작살 꽂이꾼)는
조력자들의 몫입니다.
결국 소가 "무기를 지닌 인간 집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가 투우장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가 투우사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소는
자신을 흥분시키는 붉은 천에 달려들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 일도 하지 않고 푸른 초원을
유유자적하며 즐기던 소가
투우장에 끌려오면 투우가 시작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캄캄한 독방에 갇힌다.
갑자기 변한 주변 환경에 정서적으로
크게 불안해하다가 햇볕이 작렬하는
투우장에 나서는 순간,
또다시 변한 환경과 관중들의 함성에
흥분하기 시작한다.
소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지만
인간에게 적대행동을 당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흥분상태에서
비록 붉은 색은 보이지 않지만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천이
몹시 신경에 거슬려 위협을 느끼고
뿔로 받으려한다.
오히려 붉은 색 천에 흥분하는 것은
열광하는 관중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우리는 ‘소가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붉은 천이 자신을 유인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달려드는 소나,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썩어질 것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승리하는 비결은
세상의 온갖 유혹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만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비유의 배경>
예수님은 내용보다는
형식을 좋아하는 사람들,
영적인 것보다는 세속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
겉모양만 화려하게 꾸미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눈에 드러나는 것들, 인간적인 것들,
형식적인 것에 지나친 관심을
갖기를 좋아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마23장에서 예수님은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었습니다.
오늘 비유 말씀 역시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신앙>
그 당시에 사람들은 율법의 명령을 따라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신14: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레27:30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어떤 이는 “십일조가 구약 율법시대의 산물인데
은혜의 시대인 신약시대에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모세 이전,
곧 율법의 명령 이전부터 드려졌습니다.
원래 십일조는 은혜 받은 것에 감사해서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을 치른 후에
크게 감사하여 당시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모든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드린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십일조는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모세 때는 이것을 율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십일조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구별된 레위 족속들을 부양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온전한 십일조 신앙생활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가치를 하나님께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곧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신앙고백의 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땅의 소산의
십일조만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23절a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당시 일반적으로 ‘땅의 소산’은
곧 곡식, 포도주, 기름, 가축의 경우에만
적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뿐 아니라
십일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했습니다.
이것들은 재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는 들풀이었습니다.
주로 향신료로 사용하였습니다.
박하 - 유월절 때 먹는
쓴 나물의 양념(출12:8).
회향과 근채 -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
대체로 향료로 사용하였다(사28:25, 27).
이것들은 굳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될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띠고 뭐 할 것도 없을 만큼
아주 작은, 미세한 것들입니다.
그로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런 것의 십일조까지도 드렸습니다.
그만큼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엄격하고
거의 완벽한 신앙생활을
추구해 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예수님도
“그들의 말은 받아 행하고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도 그들의 가르침 자체는
존중을 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 마지막 부분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의 가르침과 십일조의 행위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23절c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토지소산의 십일조뿐 아니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내는
그들의 철저한 신앙과 열심을
본받아야 할 것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
외적이고 객관적인 요소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주일성수 열심히 하고,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생활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헌신해
주님의 일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바리새인의 철저한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 - 정의와 긍휼과 믿음>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외적인 형식들은
매우 철저하고 엄격하게 준행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소홀히 한 정도가 아니고
아예 무시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23절b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들이 무시한 것은 무엇입니까?
율법의 참 정신입니다.
율법의 본질입니다.
형식이 아닌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정신(내용, 본질)은 무엇입니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와 인과 신’)입니다.
1) ‘정의’(Justice) - 하나님의 의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말과 행실에 있어서 올바름으로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2) ‘긍휼’(Mercy) - 긍휼은 고아나 과부,
이방인 등 불쌍한 자에게 베푸는 사랑,
자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무서운 것은 냉랭함과 무관심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깊은 곳에
하나님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고 긍휼이 있어야
진정한 신앙입니다.
3) ‘믿음’(Faithfulness) - 믿음은
‘신실성’을 의미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그 하나님의 신실함이 내 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요구하는 이러한 중요한 정신은
결코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오직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반면 십일조는 분명하게 객관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사람의 영광을 구했던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바 근본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와 인과 신’)은
저버리고 자신들의 의를 사람들 앞에서
쉽게 드러낼 수 있는 십일조를 바치는
일에 매우 열심을 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행위를
비유를 들어 책망하셨습니다.
24절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첫째, ‘맹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맹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그들의 육적인 눈은 떠 있으나
영적인 눈이 맹인 같아서
율법을 주신 참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곧 율법의 형태는 지키지만
율법의 정신에 이르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맹인’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당시의 영적 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결국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마15:14)
이들 때문에 이스라엘도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경이 담긴 비유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신학자들, 목회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눈이 열려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그들의 행위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하루살이는 팔레스타인 기후에서 사는
곤충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자
가장 작은 것으로 여겨지는 곤충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음료로 포도주를
사용하기 전에 포도주를 걸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종종 하루살이들이 포도주통에
몸을 던지곤 했는데,
하루살이는 부정한 곤충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나마 그것을 섭취함으로써
부정을 덧입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낙타는 팔래스타인에서
가장 몸집이 큰 짐승입니다.
그런데 이 낙타 역시 부정한 짐승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지극히 사소한 일에
정성을 다하면서도,
장작 하나님 앞에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와 인과 신’)은
무시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극단적인 표현하신 것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식도 중요합니다.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이왕이면 바른 형식에다 내용을 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옷을 깨끗이 입고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을 준수해야 합니다.
이왕이면 준비된 새 돈으로
헌금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성으로 준비하여
예배하는 것을 귀히 여기십니다.
정성스럽게 봉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형식적 준비가
완벽하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형식보다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에 합당한 예복을 입고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삶으로 형식에서나
내용에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