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가을이면 음악회와 단풍축제 열려 관음 바위 얽힌 전설 고스란히 전해져 서울시 문화재 ‘목조보살좌상’ 눈길 좌선대에 앉으면 서울 전경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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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암 관음굴 옆의 바위가 ‘물개바위’ 혹은 ‘관음바위’로 불리는 신령스런 바위다. 기도 후 아들을 낳았다는 설화가 전해지며, 이 곳에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
비바람이 몰아친 후 썩은 가지들을 훌훌 털고선 나무들의 기상이 더욱 싱그럽다. 장맛비가 잠시 그친 8월 서울 인근의 작은 사찰을 가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이 있다. 바로 북한산 심곡암(深谷庵)이다.
심곡암은 북한산 동편 형제봉 아래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암자다. 국민대를 지나 북한산 입구 긴골을 따라 올라가면 그 끝에 심곡암이 있다. 깊은 계곡인 심곡(深谷)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심곡암은 울창한 숲과 깊은 계곡 안에 위치해있다. 지금은 길이 나 있어 힘들지 않게 갈 수 있다.
정릉의 북악터널 입구에서 올라가는 길 옆에는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심곡암에는 115년 된 굴참나무 아래 커다란 너럭바위가 보기 좋게 놓였다. 이 바위를 중심으로 매년 4월과 10월이면 산사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바삐 오르느라 송글송글 맺힌 땀을 돌계단 아래 약수물로 날려버린다.
아들 낳는 관음바위 유명해
심곡암은 개창된 지 100여년 정도 된 사찰이다. 하지만 심곡암의 유래는 조선시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관음바위’의 전설이다. 심곡암 대웅전 위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일명 ‘물개바위’ 또는 ‘관음바위’다. 이 곳에는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들이 기도해 소원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특히 정릉 김판서 댁 마님이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어 조선시대부터 기도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현재 관음굴이라는 전각이 남아있다. 그 설화가 재미있다.
조선시대 말엽 정릉에는 김참판이라는 이가 있었다. 김참판의 집안은 대대로 큰 부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가문의 이름을 나라에 올리면서 곤궁하지 않은 삶을 살아 왔다. 하지만 이 집안에는 언제나 근심거리가 있었다. 바로 손이 귀한 것이었다. 육대 째 내려오는 독자인 김참판은 그 대에서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었다. 첫째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보았는데 딸이 셋이나 됐다. 집안에서는 후처라도 두어 아들을 낳아 대를 잇고자 했으나 허사였다. 둘째부인 역시 딸 셋을 낳고 친정으로 쫓겨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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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굴 안에 모셔진 옥불관음상.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
김참판의 부인은 매일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부처님, 부처님. 부디 후사가 생겨 대를 잇게 해 주세요. 제가 아니더라도 좋으니 반드시 이 집안에 아들을 점지해 주십시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난다.
“자네의 소원을 들어주겠네, 그러며 북한산 형제봉 아래 커다란 졸참나무가 있는 곳에서 물개바위를 찾고, 기도를 해보게.”
그 곳은 길도 없고 곳곳이 칡덩쿨에 뒤덮혀 자주 맹수가 나타나는 곳이었다. 김참판의 부인은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산길을 올랐고, 물개바위를 찾아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김참판의 부인이 비바람이 몰아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를 올리는데 그 눈앞에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새가 하얀 새로 바뀌어 날아올랐다. 그 하얀 새의 온몸은 백옥 같이 변했고, 곧 천수천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바로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다.
기도하는 이들은 바위 안으로 차츰차츰 굴을 파기 시작하고, 공간이 넓어지면서 누가 모셔다 놓았는지 관음보살상도 등장했다. 세월이 흐르자 요사채도 들어서며 작은 암자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바로 심곡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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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암 너럭바위와 굴참나무. 여기에서 매년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
봄 가을 산사음악회 열리는 문화사찰
현재 심곡암은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원경 스님이 머물면서 봄이면 산꽃축제, 가을이면 단풍축제를 13년째 열고 있다.
사찰의 특설무대에서 벗어나 사찰 자연을 활용해 양희은·장사익 씨 같은 예인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고, 조각가 오채현 씨가 천진불과 석탑을 조각해 사찰에 전시해 다양한 불교문화를 맛볼 수 있다. 절마당의 너럭바위는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훌륭한 무대가 된다.
이밖에 심곡암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37호인 목조보살좌상이 있다. 이 불상은 높이가 88.3cm 정도로 중형에 속하며 전체적으로 얼굴 상체, 하체의 형태가 안정감을 띠고 있다. 비록 발원문이 남아있지 않아 제작연대를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불상의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작은 불상 앞에 잠시 서서 경건히 기도를 올린다.
심곡암 한켠에는 높은 바위위에 좌선대가 마련돼있다. 이 곳에 오르면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거침없이 대려다 보인다. 깊고 깊되 어둡지 않고 높고 높되 드러나지 않은 절묘한 도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려오는 길 심곡암 석가진신사리탑 옆에는 5심 글이 눈에 띈다.
수용심(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세요),
하심(내려놓는 마음이 불심입니다),
기도심(모든 순간이 기도가 되게 하세요),
자발심(행복에 대해 원력을 지니고 주도적으로 움직이세요),
자비심(참사람과 평화의 길을 걸으세요)다.
심곡암의 노보살님은 심곡암 대중들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글을 읽고 내려가는 길은 아까와 달리 마음이 편안하다. 비록 잠시뿐이지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내려놓은 것 같다. 올라오며 흘린 땀방울도 어느새 날아가버리고, 이곳이 바로 깊은 계곡의 무릉도원이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할 시간. ‘무아’(無我)라고 이름붙여진 공양간에서 시원한 냉수 한잔을 마시고 다시 속세로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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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암에서 가장 높은 좌선대에 앉으면 맑은날 서울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아래로 부처님 진신사리탑이 빼꼼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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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둘러볼만한 곳
▲ 정릉
정릉은 조선 태조의 2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릉으로 사적 제208호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산역을 시적할 때 물이 솟아 지금의 정동에 자리하게 됐다. 태종(이방원)이 1409년 옮겼는데 이는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데 대한 앙갚음이라는 설이 있다.
태종은 릉을 옮긴 뒤 정자각을 헐고 석물을 모두 묻어 없애기도 했다. 이후 수백년간 왕후의 릉으로 불리기 어려울 정도의 격을 지니고 있었다. 1669년 송시열의 계청으로 종묘로 꾸며졌으며 재실이 중건됐다.
▲ 북한산 명상길
북한산 정릉입구에서 형제봉으로 오르는 길은 북한산 둘레길 5구간으로 정릉 명상길이라 불린다.약 2.4km 구간으로 걷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20분이다.
‘둘레길’이란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돼 있어 안내에 따라 걷기 쉽게 해 놓았다. 초반에는 가파른 길이 조금 있지만 계단이 놓여있어 걷는데 불편하지 않다.
명상길의 끝인 형제봉은 형봉과 제봉으로 이뤄진 쌍둥이 봉우리다. 여기서는 능산을 따라 사자바위 등으로 갈 수 있다.
▲ 정릉계곡과 청수장터
정릉계곡은 오랜 옛날부터 청수동의 계류를 따라 형성된 계곡으로 여름철이면 피서를 위해 찾아드는 인파가 길을 메웠다고 한다. 특히 정릉유원지 깊은 곳에 위치한 청수장은 장안의 부호들이 즐겨찾는 장소였다. 청수장이라는 명칭은 삼각산 남측의 깊은 계곡의 맑은 물과 산수가 조화를 이룬 곳이란 의미다. 청수장은 현재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매입해 삼각산 탐방안내소로 사용하고 있다.
■ 심곡암 가는길
서울 내부 순환도로에서 정릉을 거쳐 국민대 입구를 지나 북한산 입구로 들어서면 된다. 정릉 길에서는 북악터널을 지나기 전 우측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북한산으로 오르면 심곡암을 찾을 수 있다. 평창동에서 올 때는 북악터널을 지나 국민대 앞에서 유턴을 하면 된다. 북한산 탐방소 입구에서는 등산길을 20~30여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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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집에서 지근한 거리에 있기에 심곡암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네요. _()_
북한산 산행시 번번히 옆을 스쳐지나가기만 했는데 이 다음 이곳을 지나가게 되면 꼭 들려 보고 싶네요.
작년 가을 법우님들과 함께 북한산 산행중 영불사 순례를 하면서 영불사에서 _()_
15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심곡사와의 인연은 닿지 않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