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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소설
마천공비 얘기
오동춘
마천 실덕과의 갈림길인 송알에서 바우는 아내와 함께 버스를 내렸다
송알소를 가로지른 강청교를 건너가는 바우의 눈에 거울같은 맑은 냇물이 흘러간다 지금은 물이 얕아졌지만 바우가 초등학교 시절엔 물이 시퍼렇고 물도 깊었다 그 깊은 송알소에 동네 청년들이 남포에 불을 붙여 던져 둥둥 떠오른 피라미를 헤쳐 먹던 그 모습들이 떠 오른다
그 때 송알소 위에는 물레방아가 세월처럼 돌아가고 방아를 돌리는 세찬 물이 떨어지는 그 물속에는 뱀장어나 미에기가 많이 살고 있었다 어느 겨울밤 바우 어머니가 송알소 전설을 들려 준 일이 있다 바우는 수박색 통으로 된 윗옷과 검정 바지를 입은 오늘의 아내에게 송알소에 담긴 전설을 이야기하여 아내를 기쁘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 뭘 그렇게 생각해요”
송알소를 바라보는 바우에게 아내가 바라보며 묻는다
“옛날 저 송알소에서 백마가 나와 저 도촌<속칭 섬말> 뒷산 곰달래산으로
울면서 올라 갔다는 말이 있어“
“그거 참 재밌겠네요 이야기 해 줘요”
아내의 재촉에 바우는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길 하기 시작했다
진주강씨네 장군대좌설 명당이 강청 안터 근처에 있었다 마을로 농업용수를
끌어오기 위해 봇도랑을 내느라 곡갱이로 수로를 팠다 산등성이를 팔 때 곡갱이에 피가 묻어 나왔다 거기는 강씨 문중의 한조상이 묻혀 있었다 시대를 만나 장군이 될 인물이 때를 기다리다 불행하게 죽은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뛰어난 인물이 나오면 시기 질투하고 모함하여 죽여버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나쁜 국민성이 아닐 수 없다 조선조 남이 장군이 시기를 당하여 유자광의 모함으로 약관에 병조판서를 지낸 남이장군은 아깝게 일찍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강씨문중 장군대좌 묘자리 장군목에 해당되는 곳에 수로 작업하던 곡갱이에
피가 묻어 나온 뒤로 긴 세월이 흘러 애기장군이 하나 태어 났다 갓난 사내
아이가 새가 되어 날기도 하고 불난 집을 조화를 부려 불을 끄기도 했다 애가 되었다 어른이 되었다 그 둔갑술이 정말 놀랍고 신기했다 이런 사실을 관가에 알리면 잡으러 올지도 모르고 계속 숨겨 두면 역적 집안으로 몰릴 위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문중회의는 죽여 없애기로 했다 어린이인데도 때리고 칼로 찔러도 끄덕도 없다 도무지 죽일 수가 없었다 효심이 강한 애기장군은 가벼운 삼대 세 개를 합쳐 자신의 겨드랑이를 찌르라
했다 힘센 삼손이 사랑의 아내 데릴라에게 속아서 힘의 원천이 머리에 있다고 알려 주어 머리를 깎인 삼손은 끝내 불레셋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강씨문중 애기장군도 스스로의 힘의 원천 곧 죽임을 당할 급소를 어머니께 알렸다 어머니는 애기장군 아들의 죽음이 슬프긴 하나 문중의 화를 면하기 위해 삼대로 애기장군 겨드랑이를 찔렀다 애기장군은 금방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시대의 큰 영웅적 장군이 될 애기장군이 운명을 달리하게 되자 송알소에서 백마 한 마리가 나와 슬피 울면서 곰달래산으로 올라 갔다는 전설이 저 송알소에 오늘도 담겨 흐른다
“강씨네 애기장군이 참 아깝네요”
안타깝게 바라보는 아내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애기장군 이야기는 끄쯤해 두고 내가 조선조 이현보 시조 한수 읊을테니 들어 봐요”
이렇게 아내의 관심을 불러온 바우는 눈을 지그시 감고 시조를 낭송한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에라
아희야,무릉이 어디오 나는 옌가 하노라“
낭낭한 시조소릴 들은 아내는
“ 참 잘 읊었어요 당신은 음성이 너무 좋아요”
감동의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내 말에 바우는 두류산<지리산의 다른 이름> 양단수가 송알소라고 말해 주었다 시조시인이기도 한 바우는 하동쪽 벽소령에서부터 시작하여 삼정 냇물을 거쳐 온 냇물과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시작하여 오층폭포 가내소폭포를 거쳐
백무동 냇물이 되어 송알소에 온 이 두 냇물이 합쳐진 송알소야말로
두류산 양단수라고 바우는 단정하듯 말했다 양쪽 냇물에 갇힌 섬마을이
섬말이라는 동네 이름도 갖게 된 것까지 바우는 자랑스럽게 말해 주었다
냇가 아카시아밭에 피서객 텐트가 몇개 더위를 식히고 있다 그 냇물 위로 놓인 도촌교
다리를 건너 오며 바우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긴 버드나무 두 개를 걸쳐 놓고 건너 다녔으나 큰물지면 그 다리가 멀리 떠내려 가버려 다시 놓곤 했다 시대가 변하여 강청교나 도촌교가 콘크리트다리가 되어 승용차나 버스가 다니는 현대문명이 꽃핀 것이다 지금 강청교를 건너 서울 부산을 비롯하여 정기버스는 물론 수많은 승용차가 뻔질나게 다닌다 바우도 오늘 서울 동부터미날에서 지리산고속으로 고향에 온 것이다 부모님 산소 참배를 온 것이다 오남매가 간혹은 함께 올때도 있으나 가끔은 장남인 바우가 아내와 오기도 한다
923미터의 창암산이 강청과 섬말을 바로 내려다 보고 있다 지리산 줄기의 하나인 참암산은 마천 전체에서 다 볼 수 있는 마천의 어머니 같은 포근한 산이기도 하다 지리산 푸른 정기를 마천사람들은 참암산을 통하여 다 받고 자라고 살다 떠난 것이다 그 정상에 비녀 바위가 우뚝 씩씩하게 서 있다 그 정상 바로 아래 상투바위가 있고 그 옆에 7대 장군대좌설의 나주오씨네 산소가 있다 영.정조무렵의 그 산소에 묻힌 오양원 할아버지는 재산이 넉넉하여
사랑방에 많은 손님이 3년 길게는 5년까지 그냥 묵고 가곤 했다는 것이다
3년을 묵고 가던 단지스님이 신세진 보답으로 창암산 정상 상투바위 옆 산소자리를 명담으로 알려 준 것이다 인심이 좋고 덕을 많이 베풀어 당시 수풀이 우거진 그 높은 정상까지 강청 섬말 청년들이 상여를 멨던 것이다 오후 3시경
쇠우산 쓰고 가는 사람이 보일때 하관 하라 했다 맑은 가을 날 쇠우산 쓰고
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참 희안한 일이다 푸르고 맑은 하늘에 먹구름 몇조각이 덮이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난데없이 나타난 여인 하나가 솥뚜껑을 거꾸로 쓰고 지나 간 것이다 바로 이때다 하고 오양원 할아버지 관을 묻은 것이다 이 명당 산소의 허점은 비녀 바위 밑에 상투바위가 있으므로 과부가 많이 나와 산소를 파헤칠 위험이 있으므로 무덤에 회가루를 썩어 단단히 묘를 쓰라 했다 마천에 철마가 다니는 그때 쯤에 7대 손에서 장군이 나올 것이라 했다 지금 함양에서 오도재로 휴천에서 마천으로 버스 길은 나 있으나 아직 기차는 진주나 남원까지 와 있고 마천까지는 와 있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오씨문중에 문학박사,교수,교사,시인,사장은 여럿이 나와 있으나 정작 육 해 공군 중에 장군은 아직 주춤하고 있다 비록 풍수지리설이긴 하나 하나의 마천고장 전설로 바우는 집안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섬말동네로 건너 오며 창암산 오씨문중 장군대좌설까지 이야기한 바우는 도촌교를 건너자 마자 상굿거리 이야기도 했다 여름 삼농사를 지어 그 삼단을 구덩이가 깊이 파인 곳에 삼단을 쌓아 두고 장작더미를 쌓고 그위에 자갈을
산더미처럼 들이 부어 불을 지펴 구어진 자갈 위를 풀로 덮고 군데 군데 괭이로 헤집고 길러 온 물을 동이채 내리 부으면 자갈과 숯불이 엄청난 수중기가 불아궁이쪽으로 쏟아진다 가득 쌓아서 묻어 둔 삼단으로 수중기가 쏟아져 나오면 삼단이 푹푹 익는다 바우가 어린날 삼상굿 가장자리에 감자를 묻어 두면 서슬도 허옇게 잘 익었다 냇가 반석에 앉아 어린이들이 정답게 나누어 먹던 추억도 늘 바우의 가슴에 살아 있다
도란도란 이야기 속에 디딜방아가 있던 섬말동네 앞을 지나 큰 은행나무가 서 있는 당산도 지나고 윗동네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지리산교회까지 왔다
“아,장로님 더위에 권사님과 오시네요”
목회를 하다가 손가락 다섯 개를 다 잃은 오른손과 왼손으로 김목사는 반갑게 손을 잡는다 고향에 오면 바우는 으레 이 교회를 찾고 김목사 부부를 만나 위로하며 격려한다 오늘은 수도가에 놓인 평상에 앉았다 호두나무 매미가 억세게 운다 뜰에 봉숭아가 붉게 피어 있다 잠자리가 날아 다닌다 터밭에 콩잎도 푸르고 교회앞 논마다 벼가 푸르게 넘실거린다 어느새 코스모스가 하늘거린다
이 지리산교회 위치는 바우네 고모 할머니댁이 있었던 곳이다 인정 많은 고모 할머니는 물오이를 따서 반겨 주셨다 불행하게도 공비의 유탄에 목숨을 잃었다 지리산교회 교육관 자리는 박순하,문봉렬 이웃이 살던집이 있었다 1936년 병자년 수파로 인하여 홍수를 피해 위쪽에 집을 지어 윗동네를 이룬 것이다 지리산교회에서 아래로 바라 보이는 동산 밑에도 이장을 지낸 강차춘집 강재춘집,신주식집,강판조집 그리고 우리집까지 다섯집이 옹기종기 정답게 살았다 아래로 바라 보이는 기와집,그옆에 숙부댁,정씨, 박씨댁,김씨댁 등이 이웃을 이루고 함께 살았다 신혼때 고향에 온 아내는 숙부대 똥돼지가 있는 변소에 들어 갔다가 놀라 기겁을하고 나왔던 일이 있다 한 20가호 정도 사는 작은 마을이었으나 품앗이를 해 가며 평화롭게 살던 동네였다 갑니 순희 덕이 등과 소꿉놀이도 했던 섬말은 늘 바우 가슴에 정다운 고향이다 이 섬말에 평화가 깨지고 불행과 불화가 생긴 것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생기면서부터이다 14년대에 남로당 좌익이 많았다 이들이 제주 4.3폭동 진압명령을 거절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동족상잔의 제주 출동은 거부하겠다고 말하고 일체 반란 폭동에 가담한 것이다
지창수 선임하사,김지회 홍순석 두 중위가 지휘하며 2500명에 이른 반란군은 한때 여수 순천을 비롯하여 광양 보성 고흥 곡성 구례 화순 일부,남원 일부까지 기세를 부리며 세력을 확장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을 총살한 반란군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정부가 송호성 준장을 반란군진압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진압작전을 펼쳐서 반란군이 차지했던 고을을 다 회복했다 병력이 천명으로 줄어 든 반란군은 모두 지리산으로 거점을 옮겨 공비가 된 것이다
이 지리산공비가 마천 백무동에 아지트를 차리고 섬말 강청 실덕 삼정 등지로 민가에 들어가 식량을 강탈해 갔다 이장을 지낸 강차춘을 지주 반동으로 몰아부친 공비들은 어느날 낮에 와서 강차춘집 살림을 다 빼앗아 갔다 소도 돼지도 다 잡아 갔다 시계 재봉틀도 가져 갔다 공비가 다녀가면 지서에 의무적으로 신고를 했다
곰달래산 산자락 끝에 천안에서 내려와 마천에 복음을 씨뿌리는 지리산교회김목사 부부는 30여년간 오직 전도에 힘써 왔다 곰달래산 기슭이 되는 바우네 옛날 고모댁 자리에 터 잡은 지리산교회는 성도가 많지 않다 그래도 국내는 물론 세계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해 가고 있다 곰달래산으로 오르는 길은 지금 풀이 우거져 있다 백무동에 아지트가 있는 공비가 바로 그때 이 곰달래산에 진을 치고 국군을 노리고 경찰을 노렸다 부모산소에 오면 바우는 으레 김목사 부부가 고생하고 있는 지리산교회를 방문하곤 했다 올해도 뜨락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지리산교회 앞 평상에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다 수박무늬가 푸른 윗옷과 검소한 검정바지를 차려 입은 아내가
“아직도 강씨네 애기장군이 타려던 백마가 송알소에서 나온 이후 지금도 이 곰달래 산속에 살고 있을까요?
흥미롭게 의문을 제시하며 고운 얼굴에 웃음을 띠고 바우에게 묻는다
“비운의 애기장군을 잃은 백마는 나라의 큰 인물을 함부로 죽이는 옛조상들을 미워하며 산속 깊이 살고 있겠지! 오늘은 공비와 국군이 싸웠던
곰달래산 전투에 대해 이야기 하겠소“
바우는 자기가 들은대로 건너 창암산이 내려 보는 지리산교회 평상에
걸쳐 앉은 채 이야길 꺼냈다 백무동에 아지트를 둔 공비는 곰달래산에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수순천 반란사건 이후 지리산 공비가 된 이
공비 일부가 마천일대를 지극히 괴롭혔다
어느날 밤 바우네 집에 공비 하나가 에므원 총을 메고 군화를 신은채 방안에 들어 섰다 줄에 걸린 아버지 홑바지를 총으로 건드리며 어머니를 바라 본 공비가
“우리가 누군 줄 아시오?”
하고 물었다 어린 누이동생 정자를 안고 앉은 어머니는 두려운 마음에도
“ 누군지 어찌 알겠는기요?” 라고 대답하자 공비는
“반란군이요,반란군”
이렇게 대답했다 그 공비는 별로 가져 갈 것이 없는 빈농 가정임을 알고 곧 나가 버렸다 그때 바우는 반란군이 어른들이 말하는 뺄갱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도 공비는 자주 섬말에 나타났다 이장을 지내던 강차춘집 모든 재산도 다 뺏기고 아예 마천지서 근처 어느 여관 과부 주인을 아내 삼은 강차춘은 공비를 안전하게 피했다 반동으로 주목 받는 강주옥은 그저 자기 집에서 간간이 오는 공비를 피했다 그래서 끝내 강차춘은 죽음을 면했고 강주옥은 공비한테 죽음을 당햇다
바우는 일제시대 초등학교 1학년때 아홉 살 위인 고모와 그의 친구가 게발딱주 산나물을 뜯으러 갈 때 곰달래산에 올랐던 일이 있다 칡넝쿨이 우거진
산의 돌밭에서 숨어 흐르는 산골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근처 머루도 땄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중에 광복 후 중학생시절에 곰달래산에서 고모와 그 친구가 부르던 노랫말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일었다 “산차지 물차지 총독부 차진데 요 내 몸은 정든 우런님 차지로구나” 이 노래말에 아름다운 곰달래산과 맑은 산속 물이 총독부 차지라는데 분노가 솟구쳤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우리 한국 강토를 다 차지했다는 말이 아닌가 일제 35년간의 식민지 지배로 하여금 광복이 되어도 남북분단의 비극을 겪으며 대한민국 자유민주 정부가 섰는데도 공산당인 남로당이 설치고 남로당이 많이 숨어든 14연대가
제주 4.3폭동 진압 출동명령을 불복종하고 여수순천 반란을 일으켜 지리산 공비가 생겼고 마천에도 그 공비가 설쳐 민간피해가 너무 컸던 것이다
백무동에 아지트를 차리고 날뛰는 공비가 곰달래산에 진을 치고 우리 국군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3연대 5연대 일부 병력으로 1948년 12월 16일 곰달래산 전투가 벌어졌다 일명 800고지전투라고도 한다 박계원,동순오,표태병,
이동근 등 지리에 밝은 향토방위대를 앞세워 전투경찰 일부와 중대 병력 정도로 곰달래산 정상을 향하여 돌격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작전 실패였다 공비는 정상에 방어벽을 이루고 유효사거리에 접근한 우리 국군을 향하여 기관총을 휘둘러 댄 것이다 초전 피해가 컸다 전영을 가다듬고 도망가는 공비를 향해
뒤를 쫓았다 아지트로 써 오던 백무동 민가는 다 불질러 버렸다 일단 백무동과 곰달래산 공비는 물리쳤으나 국군의 피해도 컸다 윗동네인 바우네 집 앞에 군인시체가 여럿이 놓이고 소대장을 비롯한 군인 몇이서 모닥불을 쬐던 모습을 곁에서 지켜 봤다 볼에 총맞은 군인은 물한모금 달라고 간청했다 소대장이 곧 송알에 와 있는 추럭으로 후송후 치료를 받고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다고 좀 참으라고 타 일렀다 전투 경찰 하나는 왼다리 총상을 입고 모닥불 곁에 서서 자기가 명당집 자손이어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 내려 왔다고 조상의 은덕을 고마워 했다 모닥불 청솔가지를 바라보는 바우는 소대장 지시에 따라 전우의 시체를 송알로 운반해 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 보았다 그날 논에 썰매를 타던 어린이 바우는 곰달래산에서 총소리가 콩 볶듯 들렸던 그날이 회상 된다
이듬해 1월 경 어느 날밤 섬말 기와집에서는 강주옥과 아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 말이 다 포위 됐네요”
“아니다 살 수 있다”
강주옥은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결국 아들에게 한판 바둑 싸움에서 졌다 다시 바둑판을 벌이려 했을 때 공비가 들이 닥쳤다 빨갱이로 나간 한동네 개비 형제가 찾아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곰달래산에 차가운 달이 걸려 있었다 얼겹결에 강주옥은 황급히 소마구간으로 나와 마천지서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지리산공비는 섬말 요소요소에 보초을 서 있었다 늘 잘 피하다가 이 날밤 잡혀 송알소 냇물을 건너 실덕마을 쪽으로 잡혀가는 모습이 동네 사람들 눈에 띠었다 분명히 죽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섬말 사람들이 인근 야산을
사흘간 찾아 봐도 시체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한주일쯤 지나서였다 마천 삼정리 해발 900미터의 산중턱에 통일신라시대 영원조사가 창건한 영원사가 있다 이절 스님 한분이 영원사 입구 바위 밑에서 시체 하나를 발견하고 섬말 동네로 기별했다 동네사람들이 우루루 급히 달려가 보았다 비참하게 죽은 강주옥 시체였다 바우 아버지 말을 빌면 한복을 입은 강주옥 안주머니의 돈 몇푼은 그대로 있고 강주옥의 양귀를 칼로 찔러 후볐고 팔다리를 물고기 배타듯 칼로 죽 잘라 최대의 고통을 가하여 살해한 것이라 했다 그 시체를 보고 온 바우 아버지는
“참 끔찍하게 칼로 생선 저미듯 죽였드마”
라 말하곤 혀를 찼다 강주옥 시체는 섬말 동네 앞 논바닥에서 장례를 치루고 섬말 뒷동산 그의 목화밭에 묻혔다 그의 이름은 1961년도에 마천면과 산내면 경게 비석거리에 선 충혼탑에 이름이 올라 있다
바우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지리산 호랑이가 한 마리 잡힌 일이 있다 멧돼지
덫에 걸려 펄펄 뛰는 호랑이를 포수가 총으로 잡은 것이다 현장에서 강주옥이 사서 자기 집으로 가져왔다 학교를 파하고 왔을 때 기와집인 강주옥집 처마에 거꾸로 그 호랑이가 매달려 축 늘어져 있었다 송아지만 했다 마천면민들이 호랑이 구경을 하기 위해서 기와집 마당에 빡빡하게 들어차 있었다 강주옥은 그 호랑이 고기를 섬말 집집마다 조금씩 나누어 주고 그 가죽을 팔기 위해 친구인 바우 할아버지와 서울에 올라 갔다 어느 가게 상인과 흥정했으나 시골 사람 물건이라고 해서 싸게 사려한다고 팔지 앉고 죽을 때까지 자기가 깔고 앉아 살겠다고 생각했던 강주옥은 공비의 칼에 비참하게 죽은 것이다 향토방위대원이 된 그의 큰조카가 큰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에 복수하기 위하여 공비만 잡히면 자신이 죽이겠다고 했으나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평화로운 곰달래산이 섬말동네를 내려다 보고 있다
한나절이 다 기울었다 어느새 최사모님이 열무김치에 점심을 차려왔다
“어머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차려 왔네요 잘 먹겠습니다”
바우 아내가 깍듯이 인사를 했다 지리산 등산로가 있는 백무동으로 정기버스가 심심찮게 자주 달려가고 당산 근처 냇물 가에 여름 더위를 피하는 천막도 몇 개 보인다 매미는 연방 쉬임없이 울고 있다 점심상을 물린 뒤 바우는 마천공비가 지서습격을 했던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리산교회 김목사의 설교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난 후 두달만인 1948년 12월 19일 마천지서가 지리산의 공비습격을 받았다 지창수,홍순석이 지휘하는 공비 20명 정도가 에므원 총에 태극기를 달고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군가를 부르며 마천지서를 향해 내려가다가 국군인 줄 알고 “수고하십니다” 환영인사 하는 한 순경의 팔을 뒤로 비틀어 근처 전봇대에 묶어버렸다 보초 교대차 오던 김 순경은 날 살려라 하고 뒤돌아 도망을 갔다 재빨리 공비가 뒤쫓아 왔으나 신작로 길가 변소에 깊이 빠져 위에 검불까지 쓴 김 순경을 찾지못하고 돌아 갔다
지서 난로 가에 있던 순경 3.4명이 즉사했다 함양 거창 연초조합 직원 6명이 지서 근처에서 일 보다가 다 즉사하고 말았다 민간인도 여럿이 총맞아 죽었다 바우의 친구 박용식도 길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 그리고 공비는 마천교 다리께 묶어 두었던 한 순경을 데리고 삼정리 산으로 올라 갔다 웬만큼 올라 가다가 공비 하나가 갑자기
“대장님,이 간나새끼는 제가 처형 하겠습니다 맡겨 주시오”
“그렇게 해”
허락 받은 공비는 이번에는 길가 소나무에 동여맸다 그리고
“이 반동 새끼 잘 가라”
크게 외치며 공중을 향하여 에므원 총을 한방 쏜 것이다 그런 후에
공비는 산으로 올라 갔다 한 순경 말에 의하면 그 공비는 일제시대
일본 어느 지방에서 한동네에 살았던 이웃으로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 아주 무서운 일이다 이념을 떠난 공비의 인간미가 한 순경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이다
신작로 길가 변소에 빠졌던 김 순경은 똥철벅이 된 모습으로 근처 임천 냇물에 풍덩 빠져 옷과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래도 옷이나 몸에서 계속 똥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김 순경은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듬해 서울 강문고교 일학년 때 바우는 숙부댁에서 숙부의 마천초등학교 동창인 허문오 아저씨를 만났다 일요일 오전에
삼선교 근처 목욕탕에 갔다 열탕에 마주 앉았다가 나가는 허문오 아저씨
엉덩이에 큰 흉터가 보였다 바우는 그 흉터에 대해
“아저씨 이 큰 흉터가 왜 생겼어요?”
하고 물어 보았다
“으음,바우야 말해 줄까”
몸에 비누질을 하며 허문오 아저씨는 자상하게 흉터의 연유를 밝혀 주었다
1948년 12월 19일 오전 마천지서가 공비 습격을 받을 때 자기는 팔에 완장을 두루고 면서기로서 인부를 동원하고 있을 때 공비습격이 일어나 엉겹결에 조그만 돌다리 밑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총알을 피했다 그러나 엉덩이가
뜨끈뜨끈하여 공비가 물러난 후 돌다리 밑을 나와 엉덩이를 만져 보니
손에 피가 흥건하게 묻더라 했다 순간
“내가 에므완 총 여덟발을 다 맞았구나”
아찔한 생각을 하고 “사람 살려”외치며 농부들 수건을 모아 지혈하고
곡식 실러 온 군청 추럭에 실려 함양읍내로 나간 것이다 읍내 한 병원에서
응급가료를 하고 마산으로 달려 마산 어느 병원에서 총상 입은 엉덩이 치료를 받았다 총구멍에 화약냄새를 제거한다고 의사와 간호사가 약묻은 붕대를
총맞아 뚫린 총구멍에 끼어 넣어 피스톤처럼 왔다 갔다 잡아당길 때 정말
죽을 지경으로 아팠다고 했다 마천지서 습격때 공비에게 총맞은 나라사랑의
상징인 허문오 아저씨 엉덩이 흉터 이야길 다 들은 바우는
“아저씨 참 천명입니다 에므완 여덟발 한게이스를 다 맞고도 사셨으니”
“그래 네 말이 맞는 기라 내사 죽을 뻔 안 했나”
바우는 아저씨가 오래 사실 것이라고 격려해 드렸다 고향에 부면장까지 지낸 허문오 아저씨는 바로 섬말동네 건너편에 있는 강청 출신이다 막내 숙부는 운전기사로 일했다 둘다 고향 흙으로 창암산 기슭이나 곰달래산 기슭에
흙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장로님 우리 이제 차나 한잔하면서 공비 이야길 들읍시다”
“아참 그래야겠군 장로님 권사님 우리집 응접실로 갑시다”
김목사 내외분 권유로 바우 내외는 목사사택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안내된 응접실 책상엔 성경 찬송가 책이 놓이고 벽에는 “오직 예수”
“믿음 소망 사랑” 액자가 걸려 있다 그리고 이사야 41장 10절 말씀
“두려워 하지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구약 성경 말씀이 바우의 마음에 은혜롭게 와 닿는다
책꽂이엔 많은 신학서적이 꽂혀 있다 “하늘하고 삽니다” 바우시집도 한권 보였다 섬말이 어린날 자란 마을이지만 바우 마음에 아픈 기억도 살아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 마천에 나온 시게루는 세 살 때 일본 이름도 고치기 전에 백일해를 앓다가 어머니가 왼손 무명지에 칼로 피를 내어 죽어가는 동생 시게루 입에 넣어 주는 어머니의 자식사랑 모습을 잘 지켜 보았다 집이 동산 아래 강차춘 이장집 근처 있을 때 동생과 초등학교 3학년 여름 작두에 풀썰기를 하다가 그만 두 살 아래인 동생 오른손 두 손가락을 한마디씩 날려버렸다 어머니는 엄청나게 놀라 방방 뛰었으나 의료시설이 없는 마천에서 별도리가 없었다 나는 동네가 떠나 갈 정도로 크게 울었다 지금 동생만 보면 죄 죄은 죄인의 심정을 떠날 수 없다 나를 오빠라 불러 주어 기뻤던 정자는
첫누이동생으로 참 예뻤다 명이 짧아 다섯 살에 하늘 나라로 갔다 동생 둘을 잃고 바로 밑에 아우의 손가락 잘리는 작두사건이 있는 마을이면서 추억이 정든 고향마을이기도 하나 어려서 겪은 인생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냉냉한 냉커피를 최사모님이 가져 왔다
“아.시원하다”
마시면서 나는 이 섬말에서 땅벌 마천초등학교까지 짚신을 신고 다닌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마천초등학교를 공비가 6.25를 앞둔 음력 설무렵 주둔 군대를 기습하고 학교에 불을 질렀다 마천면민이 모아 선물한 설음식을 먹고 군대가 잠든 틈을 타서 마천공비가 습격을 감행했다 잠깬 군인들의 반격에 달아난 공비는 학교에 불을 지르고 갔다 1929년에 선 역사 깊은 마천초등학교 목조건물이
잿더미가 된 것이다 불탄 학교에 가 보니 모두 숯이나 재요 유리가 녹아 있었다 교실이 없어 3개월간 학교는 휴교가 되었다 바우는 강청 서당에서 “자식은 쪽박을 차도 가르쳐야 한다”는 어머니의 교육열에 의해 천자문을 배웠다 바우는 천자문 한권을 다 배웠다 암기를 잘 하여 일등상을 받기도 했다
어진 염동석 교장 선생님은 면사무소,임업시험장,숯창고 등 여러 빈 공간을 마련하여 거기를 교실로 삼으며 전교생 학교 공부를 하게 했다 마천초등학교졸업과 함께 공비출몰지구인 마천을 벗어나 우리집은 함양읍내로 이사 나오고 바우는 함양중학으로 진학했다
백무동 공비가 자주 섬말에 내려와 식량을 빼앗아가고 지주라고 반동으로 몰아 기와집 주인 강주옥을 무참히 살해한 만행은 지금도 끔직하게 느껴진다
이장 강차춘은 지서근처에서 잘 피신하여 슬기롭게 살면서 뒤에 초대 마천 민선 면장까지 했다 본처 부인이 참 어진 분이였고 딸 질순이도 아주 순박한 처녀로 바우가 그의 동생 영호와 함께 누나로 부르며 따랐다 강차춘 부인의 요청으로 바우 어머니는 한글을 해득하여 편지도 대필해 주며 이웃간에 정다웠다 강차춘은 8사단이 지리산 공비 소탕을 할 때 6.25 사변 중에 마천면 인민위원장을 지낸 동생 강재천이 지리산 공비 활동을 하다가 생포되었다 5년 언도를 받고 대전감옥에 복역 중일 때 한때 적대 관계였던 형제가 다정한 형제애를 누린 것이다
“김목사님,곰달래산 전투나 마천지서 습격,마천초등학교가 불탈 때 죽은 영혼들이 잘 진혼이 되도록 기도를 잘해 주세요”
이렇게 말한 바우는 김목사 사택을 아내와 함께 나선다 작별 인사를 나무며
계단을 내려 설때 감나무 매미가 열심히 울어 댄다 옛친구가 하나 둘 떠나
곰달래산 기슭에 묻힌 오늘이 쓸쓸하다 마천에서 흙과 더불어 살다 가신
부모님 산소를 향해 바우는 아내의 손을 잡아 주며 산비탈길에 들어 섰다
한줄기 산들바람이 휙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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