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차
반어, 주어진 상황을 비꼬자
3. 극적 반어
시가 진행되면서 내용이 역전 또는 반전되거나 주인공의 행위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경우입니다. 극적 반어는 연극의 주된 반어입니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가 되어 거지행색으로 춘향과 월매를 만나는 장면을 극적 반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극적 반전, 반어는 희곡에만 한정하여 쓰이는 것만은 아닙니다.
한창 이리 기다릴 제 흥부는 매에 취하여 비틀비틀 걸어오니 흥부 안해 마주나가며,
“아기 아버지, 다녀오시오. 동기간에 좋은 게로세. 큰댁에 가더니 술을 잔뜩 취해 오시는구려. 어서어서 들어가세. 쌀이거든 밥을 짓고 돈이거든 저 건너 김동지 집에 가서 한때라도 느루먹을 것을 팔아옵세”
흥부 듣고 기가 막히여,
“자네 말은 풍년일세”
―「흥부전」 부분
사실 흥부는 형인 놀부집에 갔다가 매만 실컷 맞고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부 마누라는 흥부가 술을 잘 얻어먹고 취해서 걸어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흥부가 매를 맞고 오는 것을 다 아는데, 등장인물만 모르는 것입니다. 흥부 아내의 기대와 그 결과에 큰 차이가 납니다. 바로 극적 반어법입니다.⁸⁹⁾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미 낯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김광규, 「영산」 전문
하나의 환상이 창조되었다가 그것이 급격히 파괴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를 낭만적 반어라고 합니다. 위 시는 낭만적 반어로 영산에 대한 오랫동안 동경과 믿음의 표출이 뒷부분에서 좌절과 허무로 연결됩니다. 영산은 시의 화자에게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삶의 요람이자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어왔던 것이 좌절과 허망으로 반전됩니다.
국민학교 때 나는 학교 화장실 뒤의 콘크리트 정화조 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개 한 마리를 보았었다.
지금도 나는 그 생각만 하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마 그 개는 그 정화조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똑같은 상황에서 어찌해볼 수도 없는 자신에 절망한다……
덥석 잡아서 끌어올려야 하는 건데……
그러나 개는 잡는 시늉만 해도 이빨부터 먼저 드러낸다……
으르렁……
나는 자본주의의 정화조에 빠진 한 마리의 개이다.
―박남철, 「목련에 대하여 Ⅱ」전문
박남철은 시 전문을 1과 2로 나누어 개의 처지와 화자의 처지를 서로 교환하면서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을 시킵니다. 화자는 1에서는 초등학교 시절 정화조 안에 빠진 개를 회상합니다. 그리고 화자 자신도 똑같은 상황이라고 진술합니다. 그러나 개는 잡는 시늉만 해도 으르렁 대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덥석 구출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것입니다. 구출이 필요하지만 구출해 주려는 손이 오면 막상 이빨을 드러내게 되는 반어적 상황인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볼프 비어만(1935~ )은 서독에서 태어났지만 동독을 선택하여 그쪽으로 건너갔습니다. 작곡을 하기도 했던 그는 1962년 서정시 낭독의 밤에 한 차례 출연하였으나, 즉시 출연금지를 당하여 통합사회당에서 축출당하였다고 합니다. 정치에서 출발한 그의 시는 도발적이고 쟁론적 음색과 서정적 톤을 접합하여 독보적인 시 세계를 형성했다고 합니다.
옛날에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발로
맨발로
똥무더기를 밟았다네
그는 몹시 구역질을 했다네
자기 한 발 앞에다
그는 이 발로는
조금도 더 걷고 싶지 않았네
그런데 거기 그 발
씻을 물이 없어
그 한쪽 발 씻을
물조차 없어
그래서 그 남자는 도끼를 들어
그 발을 잘랐다네
그 발을 잘랐다네
황급히 도끼로 잘라버렸다네
너무 서둘다가
그 사람은 그만 깨끗한 발을
그러니까 틀린 발을
황급히 잘라버렸다네
그러자 홧김에
그 사람은 결심을 해버렸네
다른 발도 마저
도끼로 자르겠다고
두 발이 거기 놓여 있었네
싸늘해진 발 두 개
그 앞에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그 남자가
주저앉아 있었네
엉덩이를 붙이고.
黨은 잘랐다
그렇게 많은 발을
그렇게 많은 좋은 발을
당은 잘라버렸다
그래도 위에 말한 저 남자와는
달라
당에서는 이따금씩
새 발이 다시 돋아나기도 한다.
볼프 비어만, 전영애 옮김, 「어느 남자에 대한 발라드」 전문
똥 묻은 발을 씻지 않고 잘라낸다는 우화를 시에 채용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설화에서 채용하였을 우화와 창작 당시의 정치 현실을 나란히 배치하여 두 이야기 사이에 일어나는 간극을 정서적으로 반응하게 합니다.
독자는 이 시가 무모한 당의 정책을 비아냥거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것입니다. 시행을 들쑥날쑥하게 한 것은 독자를 주목하게 해서 기억시키고자 하는 낯설게 하기 기법입니다. 그리스 수사학의 다섯 항목인 소재 선택, 구성, 문체, 기억, 연설 가운데 기억입니다. 낯선 형태를 통해 독자가 주목을 하게 하여 기억하게 하는 방식입니다.⁹⁰⁾
반어는 기지의 싸움입니다. 반어는 시인과 독자의 지성이 있어야만 공감이 가능합니다. 독자가 상충된 어조를 발견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현과 내용이 달라 이중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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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김욱동,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2, 152~153쪽 참조.
90) 박찬일, 『브레히트 시의 이해』, 연세대학교출판부, 2004, 10쪽,
2024. 3. 23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