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천사와 함께 있는 피에타
안니발레 카라치
볼로냐 출신의 카라치 형제들은 스스로를 진보적인 미술가로 규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이란 뜻의 미술학교를 볼로냐에 개설했다.
그들이 추구했던 정신은 ‘자연’(Nature)을 통해
미술을 철학의 단계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퇴행적이며 형식주의에 빠진 매너리즘의 기대에서 벗어나겠다는 몸부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라치 형제들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화가들은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가 아니었다.
최소한 그들이 볼로냐에 진보적인 미술학교를 설립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스승은 베네치아의 거장들이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가 바로 그들이다.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자연’이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기초한 미학용어로,
묘사하고자 하는 인물이나 사물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식을 의미했다.
사실 이런 ‘자연’의 묘사는 미켈란젤로의 젊은 시절에 이미 절정에 달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이라는 미술 장르를 통해
플라톤에 이데아론에 충실한 자연스러운 인물의 본질을 구현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볼로냐의 카라치 형제들이 미켈란젤로가 아니라
채색주의를 강조하던 베네치아 화가들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카라치 형제들은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피렌체의 구도우선주의와
티치아노로 대표되는 베네치아의 채색주의를 절충시킴으로써
바로크라는 새로운 시대사조를 구현하게 되었다.
카라치 형제들은 1595년에 볼로냐에서 로마로 무대를 옮겼고,
주문자들의 요구에 의해 미켈란젤로 풍의 경건하고 간결하면서
동시에 조각과 같은 인물상을 수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는 1603-04년에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두 천사와 함께 있는 피에타>를 그렸다.
카라치는 이 작품을 통해서
아들을 잃고 비탄에 빠져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간결하지만 조각처럼 그렸다.
성모님은 아들에 시신을 무릎에 눕히고 실신해 있다.
얼굴엔 허망함이 가득하고 검푸른 입술엔 죽음보다 슬픈 어머니의 사랑이 서려있다.
성모님은 무덤에 기댄 채 손을 놓고 있다.
성모님이 입은 보라 빛 푸른 옷은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진다.
천사들은 비탄에 쓰러진 어머니를 붙들고 함께 울고 있다.
천사들의 코끝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아들을 잃고 기절한 어머니의 비탄을 자기들의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시신도 차가운 조각상을 보는 듯하다.
그분의 가슴과 복근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분의 옆구리와 손과 발에 상처는 있지만 그분의 몸은 너무나도 깨끗하다.
검푸른 빛이 묻어나는 얼굴과 손을 재외하면 마치 살아있는 몸 같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지만 살아 있는 것이다.
그분의 몸 안에는 죽음과 부활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석관 위에는 그분을 십자가에 목 박은 피 묻은 못들과
그분의 머리를 찌른 피 묻은 가시관이 있다.
우리는 그분의 수난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왼쪽 돌무덤 밖의 풍경은 너무나도 평온하다.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우리에게 인상적인 것은,
카라치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1604년 전후로 카라치는 심한 정신병을 앓게 된다.
베네치아의 색채로 피렌체의 구도를 융합하고자 했던
한 시대의 영웅은 이렇게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면서 영웅이 미술사적 소멸을 슬퍼하면서
비탄에 빠져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경쟁자였던 카라바조의 승승장구는
혼미해지는 정신의 자락을 붙들려고 발버둥 쳤던 카라치의 비탄을
더욱 심화시켰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