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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행복 누릴 권리
# 날마다 행복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평상 있는 곳에 나갔다가 문득, 언덕 아래 옥수수 밭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집 것들은 다 따 먹고, 옥수수 대를 뽑아낸 다음 다른 작물을 심고 있는데... 왜, 내가 심은 것들은... 저 모양이라지?' 하면서, '도대체 저것들은, 익기라도 했는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아무리 늦게 심었다고는 하나, 이제 여름도 다 가는 시점인데,
'어째, 익을 생각도 하지 않는단 말야?' 하는, 은근히 부아까지 나드라구요.
키큰아저씨가 살아계실 엊그제만 해도, 여전히 생생하기만 한 수염을 보면서는,
"다른 집들 옥수수는 뽑아버릴 때가 되었는디, 저 놈들은 언제나 익지?" 하셨던 기억도 났구요.
그런데 오늘 보니, 수염이 꼬부라져 있는 것들도 몇 개는 있었습니다.
'글쎄, 수염이 말라비틀어지면 여물었다는 신호라 했는데......' 하면서, 바로 언덕을 내려가... 하나를 따서 껍질을 벗겨보았더니,
어?
그런대로 익어 있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씨알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알이 통통한 게, 제법 옥수수다운 모양이드라구요.
그래서 게 중 굵은 것 몇 자루를 따기에 이르렀고,
한 겹의 껍질만을 남겨놓고 벗긴 뒤, 통나무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큰 냄비를 찾아 소금을 조금 넣고는 삶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격이를 데리고 배를 탔습니다.
아직 해가 서산의 나무에 걸려있어서 마을 쪽은 그늘이었지만, 호수 중간엔 햇빛이 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호수로 나가니, 바람이 상큼하고 좋았습니다.
키큰아저씨 집 앞에 차 몇 대가 있는 걸로 보면, 장례를 마친 그 집 식구들이 모여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그 분이 떠나시니, 이제... 그 집도 비워지거나 팔릴 거라더군요.
그런데 그 집에서 나오는 웃음소리가, 언뜻... 호수까지 들려오더라구요.
그렇지요.
아무리 사람이 죽어나갔다고는 해도, 산 사람들은 사는 것처럼 살아가야겠지요......
그러다가 문득, 가버린 사람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질 때도 있을 겁니다.
나 역시도 지금, 옥수수를 삶아 먹을 생각을 하며... 또 배를 타고 있잖습니까?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으로 들 돌아가 살아가겠지요......
오늘은 하모니카를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낮에도 그물침대에 누워있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오늘만큼은(장례식 날이라)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렇게 무심한 듯 배를 호수에 띄워놓고 앉아 있었더니, 동쪽에서 부는 바람에... 배가 산장 쪽으로 저절로 흘러내려갔습니다.
그러면 조금 위로 노를 저어오고,
다시 노를 놓고 앉아있으면,
배는 다시 산장 쪽으로 떠가고......
나도 물결처럼 바람결처럼, 아무 저항(생각) 없이... 배를 내버려두었지요......
그렇게 반 시간여 배를 탔는데, 해가 넘어가면서... 호수에서 일어나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하던지요.
물 위에 있으면 바람이 더 시원하거든요.
돌아왔더니, 옥수수가 익어있었습니다.
하나를 꺼내 한 입 물어 먹어보니, 썩 맛이 좋았습니다.
문득,
'답답한 실내보다는, 바깥으로 나가서 먹어보자.'며, '夢想?' 쉼터에 나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음악이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방안에 들어가 음악을 틀어놓고, 볼륨도 조금 크게 올려놓고...
나는 쉼터에 앉아 천천히 옥수수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사람 가슴 높이까지 자란 코스모스가, 이제는... 저절로 담장의 역할을 해서,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마치 그 속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아늑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옥수수를 먹는 것도 썩 괜찮드라구요.
옆에 누워있는 격에게도 좀 떼어주고......
평화로웠고 한가로웠고......
게다가 옥수수가 맛도 있드라구요.
아무래도, 내가 심어 가꾼 옥수수라... 그 맛에도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었구요.
또 하나의 작고 조용한 행복이었습니다.
날마다 행복.
나는 날마다 행복합니다.
여기 살면서 날마다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순간이나 날도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겠지만...
그리고 멀리 갈 것도 없이, 가깝게 지내던 분이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는 지금이기도 하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지금은 다 잊혀져... 좋았던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는 것 같드라구요.
아,
살아있는 만큼은...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행복을 누릴 권리도 있을 거구요.
그리고 우리는 어느 순간에는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엔 만끽하면 되지 않을까요?
근데, 나만 이토록 행복해도 될까요?
8 . 14
며칠 해가 반짝 나면서 가을의 기운을 선사해주는 것 같아 반색을 하며 좋아했던 기로는,
'이젠 정말 가을이 오겠지?' 하고 의심을 하면서도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다시, 흐리고 비를 뿌리는 우중충한 날씨로 바뀌어 사나흘 이어지고 있었다.
"에이, 빌어먹을 비!"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기로는 그런 푸념을 내뱉기도 했다.
광복절을(금요일) 낀 연휴가 이어져 다시 서울에서 손님이 왔고, 그들과 함께하느라... 그리고 막바지엔 군산에서 정 원장 등이 와서, 또 며칠 기로는 정신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반복된 일이긴 하지만, 그런 며칠의 기록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며칠 뒤,
'이렇게 8 월을 다 보내려나? 연거푸 손님을 맞다 보니, 이제 지친다. 생활의 리듬이 깨져버린 건 물론, 입맛까지도 잃어버린 느낌이다......'
그런 조금은 까칠하고도 심드렁한 생각으로 기로는 배를 젓고 있었다.
어제 오늘 사이에, 격의 행동이 더 이상해 져 있었기에, 기로의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산장 집으로 가서 박 만석에게 그 얘길 물어보려고 가고 있는데, 조금 전까지 밭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아마 쉬고 있거나, 점심을 먹으러 안으로 들어갔을 터라,
'지금 가면, 또... 밥먹으라고 하겠는데......' 하면서,
노를 천천히 저어 산장 집 언덕 아래에 배를 댔다.
그리고 거기 나무 기둥에 배끈을 묶은 뒤,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데...
쒀- 하는 소리와 함께, 무슨 물줄기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응? 이게 뭐야?' 하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는데,
거기 올라가는 길에서는 그 위가 잘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서도 각도가 애매해서 바로 아래가 잘 보이지 않는 약간 도톰한 곳이긴 한데... 박 만석이 막 서서 오줌을 눗고 있는 것이었다.
"어?" 하고 기로가 놀랐지만, 뻔한 일이었다.
가끔 '夢想?'에서도 박 만석이 언덕 위에서 오줌을 눗고 있는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러면서 기로가 그 오줌 줄기를 피해 옆으로 급하게 몸을 돌리면서야, 겨우 둘의 눈이 마주쳤던 것인데,
"뭐여?" 박 만석도 놀란 모양이었다.
"에이!" 하면서 기로가 방향을 바꿨고(어차피 볼 건 다 본 상태고), 그 양반도 잠시 움찔하는 것 같긴 했는데...
역시 짧은 순간이었는데도 박 만석은,
"에이, 오줌이나 받아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오줌 줄기를 아예 기로 쪽을 향해서 뿌리는 것이었다.
"아니,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앱니까?" 기로는 약간 당황하면서 오줌을 피한답시고 허리를 굽히며 소릴 질렀는데,
스스로 민망해할 거라고 기로가 생각했던 박 만석은,
"어쩔 것여? 기왕에 다 들킨 거.. 히 히 히..." 하면서 오줌을 멈추려들지 않는 것이었다.
"참, 별일도 다 있네!" 하다가, 기로는 또, "정말, 그러시깁니까? 에이!" 하면서 그 옆의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는, "정말, 계속 그럴 겁니까? 어서, 안 치워욧?" 하면서 덜질 자세를 취하자,
"그러믄... 항복여! 항복!" 하면서도, "아니, 싸던 오줌은... 다 싸야 헐 거 아녀? 쫌만 기둘려!" 그러면서 오줌 방향을 약간 틀긴 했고, 이제는 오줌을 다 눈듯...
"어이, 시원허다!" 하면서 자신의 거기를 털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허기야, 아무래도 그 상태로는 도망칠 수도 없었을 테고, 또 뒤로 돌아설 수도 없을 터였다. 그 반대편엔 누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너무 순간적이기도 의외이기도 했지만, 기로는,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박 만석은 골마루를 훔치더니, 그제야... 또 무슨 일인지, 후다닥 뒤쪽으로 도망치기까지 하던 것이다.
'뭐야? 이미 다 끝난 일이고, 또 볼 건 다 본 뒨데... 풋!' 하고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기로는 박 만석이 이럴 땐 정말 아이와 전혀 다름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환갑도 넘은 양반이......' 했는데,
애당초 박 만석이 자신이 오는 걸 알고서,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닐 터라...
'좌우지간 저 양반, 어떨 땐... 완전히, 천진난만한 애라니까!' 하면서 산장가든 마당에 오르니, 저쪽에서 박 만석은,
"어이! 기왕에 왔응 게... 밥이나 함께 먹자고..." 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가 쪽에서 나오면서 기로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니 기로 역시, 그저 지나가는 일처럼...
'아니요. 전, 조금 전에 밥을 먹고 왔는데요. 뭐 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 하니,
"그려? 그려도 한 술 뜨지?" 하더니, "어이! 혜숙 엄마... 상 좀 차려! 여기 장씨 왔응 게." 하며 주방에 있던 순임을 불렀다.
"아니, 전.. 먹고 왔다니까요!"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 "아주머니! 저, 밥 먹고 왔으니... 밥상은 차리지 마세요." 하고 큰소리로 말하면서 원두막 쪽으로 갔다.
어쨌든 기로는 이미 점심을 먹은 뒤라 밥을 또 다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박 만석은 제일 가까운 원두막에서 쟁반으로만 차린 밥상으로 후다닥 점심을 뜨기 시작했는데, 기로가 원두막에 앉자... 그제야 다소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기로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기로는,
"근데, 산장 아저씨! 우리 개가 뭔가 이상합니다. 아마 새끼를 배서 그런 것 같은데......" 하고, "아시다시피 우리 개가 새끼낳을 때가 다 된 모양인데, 요 며칠 또... 손님들이 왔다가는 바람에, 고기 같은 것도 주고 해서 그런지... 통 제가 주는 먹이는 먹지 않으려 하네요......" 하고 격의 상태에 대한 얘길 시작했다.
"그려? ... 아무려도 개도 지 새끼를 배믄, 조금 까칠까칠혀지는 벱여..." 하던 박 만석의 얘기를 들었지만,
뭐 특별한 건 없었다. 개도 예민해진다니까.
다만, 한 가지 소득(?)이라면, 개가 밥을 잘 먹지 않았던 건... 개도 새끼를 뱄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입덧’을 했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러니,
'참내, 내가 그런 걸 알았어야지...... 나는 개가 밥을 안 먹는다고 내내, "밥도 안 먹는 것이!" 하면서 나무라기만 했었는데...... 허기야 내가 암컷의 생리 상태까지 어찌 알겠느냐고......' 하고는 있었지만,
그런 얘기까지를 하면, 나중에... 박 만석에게 놀림을 당할 것 같아, 속으로만 생각했다.
허긴 기로도 두 아이의 아비이긴 하지만, 송 선희가 임신을 했을 때도 그런 기색 없이 애들을 낳았기 때문에 잘 모르긴 했는데,
기로가 그런 쪽에 신경이 둔한 건 사실이었다.
그 다음 날이었다.
혼자 멀거니 마루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기로는 오늘은 ‘정비의 날’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옛날 군대시절 때, 고된 훈련을 마치면 늘 ‘정비의 날’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기로는 일을 마치고, 어딘가 조용한 곳에 혼자 가서 앉아... 그저 느긋하게(멍하니 앉아있기만) 머리를 식히기도 했었는데, 오늘이 그런 느낌의 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낮을 보내는데, 통나무집에 범상과 처갓집 식구들이 몰려들었다.
휴가의 막바지에 '고기라도 구어 먹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범상만 왔다면 그럴 일도 없었겠지만, 처갓집 식구들과 온 터라... 기로는 자리를 비켜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미 점심을 먹있던 기로는, 그들을 피해 다시 산장집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어찌나 손님이 많은지, 바쁜 일손을 조금 거들어주었고...
돌아와 보니, 통나무집 쪽에서는 여전히 범상과 처갓집 식구들이 떠들썩하기에... 살짝 '夢想?'으로 들어가 누워버렸다. 어차피 너무 피곤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잠이 들었나 보았다.
핸드폰 소리가 울려 받아보니, 박 만석이었다.
"장씨! 지금 어디여?"
"집인데요..."
"근디, 왜 유씨가 여까지 와서 장씨를 찾어?.. 뭐 허고 있어?"
"예, 조금 누워있었어요..."
"자는 거 아니고?" 또 다시 박 만석은 그렇게 물어왔다.
그저 자다 일어난 상태로 무심하게 했던 대답이, 또 그런 식으로 이어지자... 기로 역시, 그 순간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이었다.
범상은 기로가 돌아와 방으로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던 모양이라, 돌아간다는 말을 하려고 그 집으로 갔을 터였다.
그리고 저녁부터 밤까지, 박 만석의 전화가 몇 번 울렸다.
기로에게 오라는 것이었다.
"허다 못해, 막걸리라도 한 잔 혀야 허지 않긌어?" 하는 모양새가,
기로가 오후에 산장의 일을 조금 도와준 것에 따른 반응 행동이었을 터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조금 성가신 것 같아...
"비가 오는데......" 하고 기로가 머뭇거리자,
"그럼, 오기 싫다는 말여?" 하는 말 속엔 섭섭함이 들어 있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고... 알았습니다. 하던 일 좀 마무리 하고 가겠습니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로가 나가는 길에 우산을 챙겨들면서, 요 며칠 사이에 손님들이 오면서 가져왔던(오늘도 범상의 처가 식구들이 또 과일을 가져왔기에) 과일 중에서, 포도 상자를 들고 갔다.
어제 옆집 할머니 한테도 탐스러운 두 송이를 주었는데도, 아직 종류가 다른 포도가 남아 있는 등...
요즘이 포도철인가 보았다.
아무튼 기로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기에, 통째로 한 상자를 가져갔던 것인데,
"무슨 포도를 이렇게 많이 가져오셔요?" 하며 김 순임은 깜짝 놀랐다.
"맨날 저만 얻어먹을 수 있나요? 그리고, 나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아서요......" 하면서,
박 만석과 원두막에 앉아서 막걸리 한 병을 비웠다.
그렇게 밤 마실을 갔다가 우산을 받고 돌아왔다.
막걸리 두어 잔 마신 것이, 알달딸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다음 날이었다.
지난 밤에는 약간의 바람이 불기도 하기에, 기로는 비가 멈출 줄 알았다.
그런데 새벽엔 상당히 많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더니 아침이 되어도 그칠 줄을 모르니,
어제 해 널어놓았던 빨래가 마르지 않아 눅눅하기에,
"이놈의 비는 그칠 줄을 모르네......" 하고 오늘도 불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는,
'에이! 이런 비에 농사가 잘 될 리가 없지. 근데, 이렇게 비가 올 때마다 마당의 코스모스는 넘어지거나 가지가 찢어져... 나를 안타깝게 하는데, 그 것들을... 다시 세워주거나 끈으로 묶어주는 것도 때가 있나 보다. 이제 자랄 대로 자란 코스모스는, 내가 자리를 잡아주려는 사이에도, 줄기가 두둑!... 끊어져버리니, 차라리 건들지 않고 내버려두는 게 낫겠다. 아, 내가 코스모스를 보려고 심어놓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가을이 되기도 전에 만신창이가 돼버리는구나......' 우두커니 마루에 앉아 그런 생각을 하다,
최근에 찍었던 사진을 정리해 두기로 했다.
사실 어제부터 시작했던 일인데, 그게 생각처럼 바로 되질 않아... 오늘은 오전부터 시작해, 이제... 거의 마무리를 지어 놓은 상태이긴 했다.
'그래, 내가 여기서 살아온 역사가... 이미지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이다...... 사진 사이즈가 작아서 조금 불만이긴 하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정리되어 가는 게... 그런대로 재미도 있다. 이런 것도 뭔가 정리가 되어야, 내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니까......' 하면서,
기로는 이것도 야무지게 정리를 해두고 싶다는 생각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점심 무렵이 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역시 박 만석이었다.
"우리, 전을 붙여먹을라고 허는디... 오지 않을 텨?" 했지만,
기로는 귀찮아서,
"아직 씻지도 않은 상탠데요?" 하고 한 발짝을 뺐다.
그러자 박 만석은,
"그럼 씻고 오믄 되잖여?"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 산장으로 가기 위해, 찬 물에 샤워를 할 수밖에 없었다.
비가 내려 밖에 나가 일을 하지 못해선지, 박 만석은 따분해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또, 졸립다기에 기로는 돌아와 버렸다.
허기야 산장에 가서 기로는 전에다 누룽지 밥 까지, 그러니까 점심을 배불리 얻어먹고 온 것이긴 하지만.
잠깐 비가 멈추나 싶어서, 기로는 마당에 쓰러진 코스모스를 세워주려고 나갔다.
그렇게 일을 하는데, 박 만석이 걸어오고 있었다.
기로를 보자 박 만석은,
"여태까지 자고, 쬐깨 전에 일어나서... 오는 길여." 하고, 스스로 보고 하듯 말을 했다.
'누가 물어보기를 했나?' 하면서 기로가 보니, 박 만석의 얼굴이 푸석푸석하긴 했다.
그렇지만 기로는,
"아, 그러셨어요? 나는 잠을 주무신 게 아니고, 그저 누워있다가 오시는 줄 알았는데요?" 하고 슬쩍 한 마디 해 주었다.
그런데 기로의 장난을 청하는 말에도 박 만석은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날씨가 궂으니, 더욱 마음 둘 곳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월요일인 데다가 이제 휴가철도 끝나 식당에 손님이 뚝 끊어졌기 때문에... 한가한 집에만 있기도 싫었을 것이라서,
기로는,
'이건 흥미를 느낄까?' 하면서,
"그럼,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하고는 남아있던 포도 한 송이를 꺼내왔다.
그런 뒤, 박 만석에게 오전에 자신이 정리해 놓았던 사진첩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 안에는 박 만석에 관련된 사진과 당연히 산장 집의 사진도 상당하다 보니,
그걸 하나하나 넘기면서는... 상당히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긴 했다.
그렇게 사진첩을 다 넘기면서는,
"우리 개의 배가 나날이 불러오는데, 새끼를 낳는 집을... 어떻게 해 줘야 하나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박 만석은,
"비가 개믄, 지금 집으로 쓰고 있는 커다란 통에 구멍을 내서... 세워주면 좋을 것 같은디?"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방밖의 개를 보더니,
"너덧 마리의 새끼는 들어있을 것 같은디..." 하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또,
"앞으로,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에... 새끼를 낳을 것 같은디..."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 박 만석이 돌아가는데, 이번엔 기로가 산장 입구까지 따라갔더니... 아예 산장으로 가자고 기로의 팔을 끄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또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할 것이 분명해서,
"저녁엔 안 가겠습니다." 하며 휙 돌아서 뛰어왔다.
점심도 먹고 왔는데, 저녁까지 그 집에서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산장할머니를 만났는데,
"아이고, 비가 내려서... 수수가 많이 넘어졌어. 어떡헌디야?" 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는, "오늘도 몇 차례 쓰러진 수수를 묶어주러 나갔는디, 비가 오는 바람에... 이렇게 돌아올 수밖에 없어..." 하시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이 놈의 비 때문에... 심란해 죽겠는데, 할머니야... 오죽하시겠어요?" 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말이 할머니의 마음을 어느 정도 위로를 해드린 것인지에 대한 확신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그놈의 수수는 얼마 전에는 호수 물이 불어 물에 잠기더니, 이제는 목이 패었는데 비바람에 꺾이는 상황이니... 그런 일을 기로 눈으로 직접 보며, 농사가 그리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새삼 느끼기도 했다.
'그러니, 할머니는 얼마나 마음이 탈까?' 하면서, '이 놈의 지겨운 비는, 그칠 줄을 모르네......' 하면서 돌아왔다.
그런데 개밥을 주기위해 밥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통나무집에서 밥을 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두 번 정도 신호음이 울리더니, 뚝 끊기던데...
기로는 그 전화가 박 만석한테 온 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전화를 걸었을 것 같았다.
집으로 전화를 했을 텐데 받지를 않으니 핸드폰으로 했을 터였다.
그러는데, 옆에서... 김 순임이 말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로를 좀 내버려 두라고......
기로 생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럴 것만 같았다.
# 심심해 하지 않는 사람
8월 들어 내내 손님을 치르고 났더니, 이제... 단순한 생활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날마다 산장 집과 '夢想?'을 왔다갔다하는 게 일상이 돼 버린 것이다.
그만큼 이 마을에서의 삶의 폭이 좁다는 것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 온 사람이 산장아저씨이니, 바지런하고 성질 급한 분이... 친구 하나를 잃고, 따분한 것을 못 견뎌 할만도 하다.
그 양반, 오늘도 날더러는,
"혼자 있응 게, 심심허지 않여?" 하고, 마치 날 위로하는 것처럼 물었지만,
난 그런 걸 잊은지 이미 오래다.
그렇다면, 난 왜... 심심해 하지 않을까?
글쎄, 그건 내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다.
나는 결혼생활을 하긴 했어도, 혼자 있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고... 혼자 있을 때도, 별로 심심해 하지 않은 생을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혼자 사는 것인가?
그래서, 혼자 살라고... 그 년도 바람나서 나를 떠났던 것인가?
어쨌거나 나는, 혼자 살 팔자였나 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혼자 웃고 말았다.
8 . 18
그렇지만 이 편지글은 홈페이지에 올리지 않았다. 어차피 존칭으로 쓰지 않았기도 했고, 그럴 마음도 없어서였다.
다만, 자유롭게... 누군가에게 편지글로 쓰고싶은 생각에 끼적이긴 했지만,
기로가 '송 선희'가 바람나서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편지글에서... 웃어넘길 만큼, 이제는 그 일로부터도 자유로워져 있었던 것일까?
글쎄......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느 정도... 그 일에서는 마음이 편해져 있는 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