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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많은 하느님의 목소리 가운데 특별한 목소리,
사제를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여러분은 주변의 사제를 볼 때, 이런 생각을 하실 겁니다.
‘저분은 왜 저런 길을 택하셨을까!’
여러분은 사제를 직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목사는 가족이 있기에 직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이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대축일입니다.
저는 최양업신부님과 인연을 맺고 산지가 3년이 되었지만
김대건 신부님과는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부제품을 받고 얼마 안 있어서 허리디스크가 걸렸습니다.
오른쪽 다리가 마비가 되어서 거의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못 먹고, 후배들이 타주는 밥을 내방에서 누워서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늘 불안했지요.
‘과연 주교님이 허리가 망가진 나에게 사제품을 주실까!’
그런데 다행히 주신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저는 열심히 서품준비를 했습니다.
제의도 맞추고. 상본도 준비하고, 첫미사 드릴 곳도 예약했습니다.
사제 서품 바로 받기 전날 1월25일 밤, 주교님 옆방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 이 밤이 지나면 내일 아침 10시에 사제서품식장에 있겠구나!’
같은 방을 쓰던 친구가 네 명이었는데 그 친구들도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참 잘 됐다~ 같이 입학해서 너만 누락되면 얼마나 우리마음이 아프겠니?”
도란도란 이야기 하다가 새벽 2~3시 경에야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 5시쯤 되었을까? 누가 나를 깨웁디다.
잠결에 보니까 사목국장신부님이 나를 나오라는 거예요.
‘이 새벽에 왜 나만 깨울까!’
불안한 마음에 끌려 나갔습니다.
면담실에 앉자 그 신부님은 줄담배를 피우면서 ‘끙끙’ 말을 못하셨습니다.
“신부님, 얘기하십시오, 왜 저를 불러내신 겁니까?”
“주교님이 너 서품 못 주시겠대~ 새벽 두 시까지 고민고민 하시다가 나보고 가서 이
야기 하라고
하셨으니 순명해. 밖에 차가 있으니까 수원에 있는 빈센트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해라.”
“신부님, 나에게는 인권이 없습니까? 사제 서품 안 주시려면 미리 안 주신다고 하셨어
야지~
어떻게 이렇게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겁니까?”
주교님 방문 열려고 하니까
“너 이런다고 해결 안 되고, 어차피 결정이 난 거니까 그냥 병원으로 가!”
제가 수원에 있는 빈센트 병원에 도착한 그 시간이
사제서품 받는 그 시간이었어요.
맨 앞줄에 우리 부모님도 부모님석에 앉아 계셨지요.
새신부 될 사람들이 초를 들고 입장하는데 한 명이 안 보이는 거예요.
난리가 났었지요. 별의별 말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 부제 얼굴 반반해서 어떤 여자가 꿰차고 도망갔다는 둥~
그때는 제가 엄청 예뻤습니다. 내가 나를 봐도 반할 정도였으니까~
빈센트병원에서 두 달을 버텼는데, 주교님은 스스로 관두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에 절대 관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까짓 허리디스크 정도야 하느님이 능히 고쳐주실 수 있다!’
부제품을 받으면 일단은 성직자이기에 본인이 관두지 않는 한 내쫓을 수 없었지요.
관둔다는 말은 안하고 병원비는 자꾸 올라가고~
주교님이 몸이 달았는지 주교좌성당으로 발령을 냅디다.
‘거기 가서 시집살이 하면 관두겠지......!’
주교좌성당으로 갔더니 거기 보좌신부님은 내 동창신부님이었어요.
아침이면 동창신부 구두 닦아 놓고, 세차까지 하면서 견뎠습니다.
어떻게든 사제가 되겠다고 생각했기에~
매일 진통제 열 알씩을 먹으며 허리에는 쇠로된 코르셋을 차고
다리를 ‘질질~’ 끌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공소를 다니고...... 교리를 가르쳤어요.
‘내가 이러다 죽겠구나! 나도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
짐을 다 싸놓고 주교님을 뵈러가려고 하는 찰나에
그 주교좌성당에 교우들이 꽃가마를 만들어가지고 김대건신부님의
작은 뼈(유해)를 모시고 들어가는 거예요.
따라갔더니 유해를 제대에 모시고 기도를 했어요.
‘그래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말을 며칠 미뤄보자, 저 양반이랑 나랑 종씨고
부탁을 드리면 좀 도와주실 수도 있겠다!‘
그날 밤중에 성당에 들어가서 마룻바닥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유해를 바라보면서 제 나름대로 철야기도를 했어요.
차마 허리 낫게 해달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그저 유해 앞에서 푸념을 하면서
‘형님은 그래도 나보다 훨씬 나아~ 나는 미사 한 번이라도 해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는데.....허리가 이 모양이니 사제가 될 수도 없고~’
그런데 마지막 날, 새벽에 눈이 떠졌는데 허리가 안 아픈 거에요.
디스크 환자들은 앞으로 못 일어나서 한 바퀴 빙 둘러서 손을 딛고 일어나는데
그날은 앞으로 일어나지고 오른쪽 다리에도 감각이 왔어요.
그래서 일어나서 걸어봤지요.
걸을 때마다 신경이 눌려서 대꼬챙이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는데
그날은 아프지 않은 거예요.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아마 너무 낫고 싶은 마음 때문에 정신적으로 마취가 되었나보다!’
아무한테도 말을 못하고 진통제를 끊어보고, 1년 3개월 만에 코르셋을 풀어도
허리가 꺾어지지 않아요.
‘아, 뭔가 내 몸에 변화가 왔구나!’
병원을 찾아가 정밀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를 마친 주치의가
“부제님, 이해가 안 갑니다. 빠져나왔던 디스크가 제자리로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저는 그랬습니다. “대건이 형이 고쳐준 것 같아요.”
“대건이 형이 누구십니까?”
일주일 후에, 전 교구본당이 모여서 교구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날 나는 내가 나았다는 것을 주교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계주 마지막 주자로 바톤을 받아 뛰면서 주교님이 앉아 있는 연단 앞을 지날 때,
바톤을 막 흔들었습니다.
주교님이 처음에는 나라고 생각 못하셨지요.
“어, 저 김부제 아니야? 허리병신이 왜 저렇게 잘 뛰어?”
그 때, 뒤에 앉아 있던 주치의가
“주교님,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저 부제님 의학적으로는 완치가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주교님이 날 부릅디다.
“오늘 의사 말 들어보니 김부제 몸이 다 나았다며? 일주일 후에 서품을 주겠네.”
그날이 바로 5월 14일, 마티아 축일이었지요.
우리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셨어요.
다른 건 준비할 게 없었어요.
다만 한 가지, 날짜가 틀린 서품 상본!
서품상본에 1월 26일로 되어있는 서품일자를 일일이 두 줄로 긋고
그런 상본은 아마 전 세계에서 나하나 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는 날
성모님 성월인 5월 14일, 그날은 장미꽃이 만발했어요.
‘오늘 나는 절대 울지 않을 것이다~ 몇 달 동안 독한 마음먹고 살았는데~’
그런데 입장할 때, 교우들이 먼저 울기 시작했어요.
‘저 부제, 아파서 절뚝거리면서 다니더니 치유 받고 오늘 사제가 되시는 구나!’
할머니들이 뒷줄에서부터 울기 시작해서 눈물이 봇물처럼 터진 거예요.
어찌 그리도 많이 울었던지~
마지막 기념촬영 하는 그 순간 까지 얼굴에 골이 패일정도로 울었어요.
저는 그렇게 주교좌성당에서 서품을 받았지요.
그때 김대건 신부님 유해를 바라보며
‘형님 고마워요, 형님께 한 가지 약속을 할게요, 내가 성당을 짓게 된다면
첫성당을 김대건안드레아 성당으로 부르겠습니다.’
저는 그 약속을 지켰어요.
그 이후 그 주교님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느냐?
안 사라져요. 점점 더 미워져요.
주교좌성당으로 발령이 났으니까 주교님이 자주 오시잖아요.
‘어떻게 하면 저 주교님을 안 볼 수 있을까? ’
궁리해보니 그게 바로 군종신부로 나가는 거야~
군종신부로 있을 때, 동료신부들과 술을 마시면 컨트롤이 안 되는 거야.
그 미움 때문에, 그 분노 때문에~
술을 먹으면 기억도 안 나는데 내가 그렇게 주교님 욕을 한데요.
저를 염려하던 신부님이 데려다 준 곳은 성직자수도자 성령묵상회였어요.
올라가서 보니까 신부는 나 하나고 다 수녀님들이에요.
첫시간 끝나고 돈 받아서 갈려고 돈 달라고 하니까 못 돌려 주겠다는 거야~
죽으나 사나 그 세미나 받아야지요.
참 희한한 게 한 가지 있었는데 강의 시작하거나 끝날 때,
수녀님들이 심령기도를 하는데 천상에서 울리는 소리야.
‘어떻게 이런 화음이 나올까~’
나도 노래께나 하는 사람인데 아무리 따라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거예요.
앞에 앉은 뚱땡이수녀도 얼마나 영가를 잘하는지 끝내 줘요.
점심시간에 그 수녀님한테 가서 “수녀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수녀는 나를 노려보더니 “회개하세요!”
“뭘 회개해야 할까?"
생각해 보니 한가지 밖에 없어~ 주교님 미워하는 것!
세미나 마지막 날, 신부님들이 오셔서 안수를 해 주시며
손바닥을 내 온몸에 대고 기도하는데 저는 죽는 줄 알았어요.
쇠로 된 다리미로 다리는 듯, 너무 뜨거워 온 몸이 타들어가는 듯 했어요.
그러면서 갑자기 울음이 터지는데 통곡을 하고 울었어~
수녀들이 쳐다보건 말건 콧물 줄줄 흘리면서~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주교님이 안 미운거야~
‘아닌데~ 미워야 되는데~ 주교님이 안 미워!’
아, 그런데 신기하게~
이성이 가로막고 있었던 심령기도와 영가가 나와요.
영가가 터지면서 자유로워지는데~ 너무 아름다운거야!
그렇게 살기 시작해서 벌써 30년이 되었어요.
내 삶 가운데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감곡성지에서 일을 다 마치지도 못했는데 주교님이 이쪽으로 파견할 때
서운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이해를 합니다.
‘아, 김대건신부님이 이곳으로 보내신 거다!’
‘너, 나한테 30년 전에 신세 진 것 있지? 내 친구 시복시성 되는데 네가 앞장 서야 돼!‘
김대건 신부님한테 받은 은혜를 최양업 신부님께 갚는 거예요.
요즘 그걸 깨닫습니다.
이곳에서 죽을힘을 다해 최양업신부님의 영성을 알리고 삽니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이 망가진 허리 낫게 해주셔서
그 다음부터는 어느 곳보다도 허리가 튼튼합니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은 13개월 동안 사제생활을 했어요.
그것도 4개월은 감옥에 갇혀있었고, 2개월은 입국하느라 바다에서 헤매고
실제로 사목은 해보지도 못하셨어요.
그러나 그 젊은 나이에, 서슬이 시퍼런 그 와중에,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하느님을 증거 했던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이며 으뜸사제이십니다.
김대건신부님이 주춧돌을 놓으셨습니다.
김대건신부님과 최양업신부님 두 분이
저에게는 같은 모양으로 오버랩 될 때가 많아요.
김대건 신부님 생각하면 최양업신부님 떠오르고,
최양업신부님을 생각하면 김대건신부님이 같이 겹쳐져요.
두 분은 천국에서 서로 담소를 나누면서 얼마나 행복하게 사시겠습니까?
저도 언젠가는 그분들 곁에 가겠지요?
최양업신부님은 11년 6개월 동안 구만리 길을 걸어다니셨지만~
저도 할 이야기가 있어요.
이 김신부가 걸어 다닌 것은 얼마 안 되어도
차 타고, 비행기 타고, 돌아다닌 길이 구만리만 되겠습니까?
제게도 소망이 있다면 죽을힘을 다하여 살다가
이 세상 떠날 때 사제로 아름답게 떠나는 것이겠지요.
오늘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축일을 지내면서 한국에 있는 모든 사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들의 기도가 내려갈 수 있도록 전구를 청해야겠습니다.
이 환난의 시대에 사제가 올곧게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모든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때로는 약한 인간이하기에 다 보여줄 수가 없지요.
주변에 계신 신부님들에게서 예수님의 모습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신부님은 성인사제예요.
여러분 주변에 계신 신부님에게서 인간적으로 나약한 모습을 본다면
돌로 치지 말고 기도로 감싸 안으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기도는 그 사제에게 은총의 비가 되어 내려갈 것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