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달까지 연구년이라 뉴욕에 체재하고 있다. 직업상 여러 역사유적지를 답사 다닐 뿐만 아니라 팔자에 역마살이 끼었는지 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남편이 매일 동네 도서관에서만 사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아내가 직장에서 4박5일 휴가를 내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뉴욕에서 6시간 떨어진 매릴랜드주에 사는 처제집을 이번주 초에 방문하였다. 처제집은 골프장 내의 큰 주택에 살아 우리는 별장처럼 여기고 일년에 한 두번 가서 쉬고 온다.
그 집의 거실 페치카 위에 그전에 없던 책이 가보처럼 진열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내가 70년대 중반 대학생 시절에 읽었던 "대망"이라는 소설 20권이다.
이 소설은 일본의 아마오까 소하찌(山岡莊八)가 1950년부터 17년간 북해도신문에 연재하여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대하소설이다. 우리나라에는 1975년에 박재희가 번역하여 동서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처제가 이민올 때 남편이 이 책을 가져오려고 하자 몰래 버렸는데, 최서방이 이번에 한국에 들어 갔을 시 청계천 등 헌책방을 뒤져서 겨우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최서방은 이 책을 네 번째 읽는 중이고,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고 한다.
요즈음은 가로글씨에 활자를 키워서 판매되고 있는데, 세로글씨로 된 옛날본이 친근감이 있다고 한다.
나도 젊었을 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1권을 읽는데 흥미가 진진하여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밥먹을 때도 화장실에서도 '대망' 매니아가 되어버려 휴가 내내 이 책만 읽고 올라 왔다.
또 내 직업이 조선시대 역사선생이니 우리 역사와 비교가 되면서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 책의 원제목은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인데 70년대 중반 이 책을 한국에 소개할 때 한국에서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이라 번역자가 '대망'이라 작명한 것 같다.
이 책은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일대기이지만 주 내용은 이에야스를 포함하여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데미 히데요시와의 정치적 군사적 경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의 인간의 탐욕 이기심 의리 충성 음모 배반 잔인함 등에 대한 심리묘사가 아주 섬세하고 뛰어난 작품이다. 그래서 15세기 중후반 50여년간의 시대 내용이지만 현대의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인간경영 처세에 대한 책으로 받아 들이기도 한다.
이 책이 흥미를 주는 또 하나는 남성들의 이야기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략결혼을 하는 여인들의 슬픈 애절한 그리고 절제하는 내면의 모습들이 연민으로 다가오는 점이다.
이에야스의 어머니 오다이가 작은 성의 영주와 정략결혼을 하고, 이에야스를 낳은 후 오다이의 친정이 오다가문 편에 서자, 이마가와가문의 휘하에 있는 이에야스의 아버지는 이와가문의 압력을 받자 충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오다이와 이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오다이는 또 친정에서의 압력으로 또 다른 오다가문의 영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과정의 치밀한 인간 내면의 묘사가 가슴을 치게도 하고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15세기 일본열도는 각 지역의 다이묘라고 불리는 봉건영주들이 패권다툼으로 전쟁이 끊어지지 않는 시기였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가 네델란드에서 조총을 수입하여 신무기를 바탕으로 전국을 하나로 통일시키기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부하 영주의 배반으로 포로로 잡히기 직전에 자결을 한다.
몇 년 전에 한국에 상영된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의 "카게무샤(影武者)"에서 노부나가의 최대 정적인 다카다 신겐이 죽자 그 아들이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군대와 싸웠으나, 이 조총의 전술에 패배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주 작은 가문의 영주 아들인 이에야스는 10대에 이마가와가문에 무려 17년간 인질로 있으면서 최선봉에서 전투를 하였다. 그 후 노부나가 휘하로 들어 가서 자신의 위치를 키워 간다.
노부나가의 갑작스런 죽음의 공백에 그의 부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국을 잡고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 때가 1589년이다. 임진왜란 3년전이다. 이 전국시대에 양성된 늘어난 무사들에게 전공에 대한 보상과 이들 무력집단을 해소하기 위하여 조선출병을 하게 된다.
이 때 히데요시의 강력한 라이벌로 성장한 이에야스는 조선출병을 반대하여 이에야스는 조선침략에 가담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1598년 죽자, 조선출병을 하지 않아 다른 가문에 비해 전력의 손실이 적은 이에야스는 서서히 히데요시측을 무너트리며 전국제패를 하여 17세기 초기부터 중앙집권적 지배형태인 막부체제를 만들어 250년간 전쟁이 없는 평화시기를 이루었다.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시측과 이에야스와의 전쟁에서 히데요시측이며 조선침략의 선봉에 섰던 가등청정 소서행장 등이 패배하여 이에야스 손에 죽는다.
이에야스는 조선 출병을 반대하고 참전하지 않았으므로 조선과는 큰 원한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왜란 후 이에야스가 집권하자 즉시 조선과 교섭을 하고 200여 년간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어 조선의 선진문물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
임란 후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서 납치된 조선인을 쇄환하고, 약탈된 유물들을 찾아오게 되는 것은 이에야스가 조선을 우호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에야스를 "난세(亂世)에 태어나서 난세에 인중(忍中)하여 평화를 이룬 인물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이 세 사람의 인물을 단적으로 비교하는 말이 일본에서 유명하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새가 아니므로 단칼에 베어죽이고, 히데요시는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때리며,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노부나가는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그럴 상황이 아니라도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경향이 이고, 히데요시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지략을 짜내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에 비해 이에야스는 오로지 기다리면서 자연적으로 상황이 형성될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무단’의 노부나가, ‘지모’의 히데요시, ‘인내’의 이에야스가 된다.
'대망'은 이 세 가지 인간형의 삶과 인간경영 그리고 국가경영을 실제 역사에 투영하여 재미있는 대하소설로 보여 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런 대하 역사소설이 없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러시아는 20세기 초반 러시아 혁명시기를 그린 노벨문학상을 받은 솔로호프의 "고요한 동강"이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떠오른다. 중국에는 "삼국지"가 있고.
우리 것으로는 박종화의 "자고가는 저 구름아"가 떠오른다. 60년대 중후반 동아일보인가에 연재되었는데, 당시 어머니가 이것을 읽고서 중학생인 나에게 광해군이 자기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내용들을 나에게 설명해 주곤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역사학을 전공하게 된 것이 대하 역사소설을 좋아하던 어머니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요즈음같이 정치가 어지러워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판단이 상식적으로 안되는 세태에 이 책을 한번 다시 읽고 삶의 지혜와 독서의 재미를 느껴 볼만 하다.
2009.06.20.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첫댓글 교수님건강하시지요?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글 잘 읽고 갑니다 건강 하시고 즐겁게 보내세요.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일본 책들은 그리 가까이 하지 않은 편이었는데 교수님의 글을 읽고 나니 하번 읽어 보고 싶어 지네요. 시간을 내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식 라이센스판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나와 있습니다. 저 초역본은 주석이 없어서 처음 읽는 사람들은 인물관계나 약력, 일본식 복식용어 등이 낯설어 읽는데 지장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략하나마 주석과 지도가 있어서 한국인들이 읽기에 알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