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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개신교에서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할까?
글이 매우 깁니다. A4 용지로 30페이지가 훨씬 넘을 것입니다.
기독교(신교)와 카톨릭(구교)의 차이점:
다음 글과 자료는 본인이 작성한 것으로서 허락이 없이 아무 곳이나 인용 혹은 발췌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본인이 오랫동안 카톨릭인들과 직접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며, 아울러 많은 신학적인 문헌과 연구서적을 인용한 것입니다.
1. 마리아의 위상
카톨릭에서 마리아의 위상은 예수의 육신적인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거의 신격화 되어있으며 카톨릭 성도들은 마리아의 동상 앞에서 기도를 드린다.
카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신격화에 대한 개신교의 비난에 대해서 “단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최상의 존경을 드리자는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그러한 정도가 결코 아니다.
카톨릭에서 마리아에 대한 것은 우리가 상상하고 추측하는 정도뿐이 아니며, 매우 심각하고 지나치다. 이 실상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 보기로 한다.(필자주-마리아에 대한 카톨릭의 공식자료를 곧 별도의 글로 올릴 예정이다)
본인은 이 마리아에 대한 교리가 카톨릭의 가장 비성경적인 교리라고 생각한다.
한때, 이탈리아 남부지방에서 마리아 돌상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순례자가 들끓게 되고 큰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눈물의 성분을 조사하자 올리브기름으로 판명되었던 것이다.
십수년 전에 우리나라 나주에서는 마리아상이 피눈물을 흘린다고 하여서 테레비젼 방송국에서 조사팀이 이것을 보도하게 되었는데, 그 피를 손수건에 묻혀와서 성분조사를 하였더니, 두가지 이상의 짐승의 피라고 판명되었던 적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마리아 동상의 눈물 사건이 매스컴을 탔는데, 그럴 때마다 카톨릭 교인들에게 그 사건은 다시 그 신앙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어진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과학적인 성분조사를 하게되었을 경우에는 항상 인위적인 가짜로 판명되어지며, 그럴 경우 카톨릭 교황청은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발표한다.
물론 조사를 하지 않았거나, 조사를 거부하는 이유 등으로 과학적인 조사를 하지 않았던 사건들은 아직도 기적이라고 불리워 진다. 또한 전세계적으로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사건이 수없이 많았는데, 우리가 잊어서 안될 중요한 점은 마리아는 신(神)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자.
마리아의 현현은 기적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접행위와 초혼과 같은 박수, 무당적인 행위는 성경에서 절대 금하고 있다는 것임도 잊어서는 안된다.(레19:31, 20:6, 20:27, 신18:11, 왕하21:6, 23:24, 대하33:6, 사8:19) 성경은 그러한 신접, 초혼, 박수와 무당행위에 대해서 죽이라고 까지 기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카톨릭은 가장 비성경적이며, 가장 비기독교적인 초혼, 신접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카톨릭에서 변명하듯이 마리아가 다만 예수의 육신적인 어머니라고 받아들인다면, 마리아는 인간임이 분명하며, 그녀는 단지 부활을 기다리는 죽은 여인이며, 그렇다면 마리아의 돌상이 눈물을 흘리거나, 특히 마리아가 다시 나타나는 사건은 반기독교적이며 비성경적인 사건이 분명하지 않는가?
만일 베드로나 요한을 신격화하거나 신앙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단체가 있다면 그들은 당연히 이단이 될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의 육신적인 모친이였지만, 그녀는 단지 죽은 여인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카톨릭은 특히 이러한 기적을 조장하는 미신적인 행위가 유난히 많은데, 극단적인 경우를 살펴보자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모든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 교황 피오12세는 태양이 몇분간 춤추는 기적을 보았다고 간증하며 매스컴과 신문등에서 이것을 대서특필하게 되므로 카톨릭은 많은 호사가들의 관심의 집중을 받는다.
그러나 그 춤추는 태양을 본 목격자는 불행하게도 피오 12세 혼자였으며, 아무도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태양이 만일 그렇게 흔들린다면 지구는 심한 통신두절과 전자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며, 지구는 인력의 영향으로 멸망에 빠지게 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카톨릭교회에 가보면 많은 성도들이 마리아 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마리아는 카톨릭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다. 교인들은 실제로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자비로운 마리아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와 간구를 들어줄 것으로 믿고 있다.
카톨릭교회의 공식적인 마리아론, 즉 현재 카톨릭교회가 그들의 교리서를 통해 직접 가르치고 있는 마리아론의 핵심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첫째,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지냈다.
둘째,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 없는 삶을 살았다.(무염시태론: 마리아를 잉태한 태도 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주장)
셋째, 마리아는 육체를 갖고 하늘로 승천했다.
넷째,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며, 하늘의 황후로서 공경받아야 한다.
다섯째, 죄사함과 심판, 구원의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마리아는 주님과 공동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인간과 예수님 사이에 중보적인 역할을 하게되며, 사단이 가장 무서워 하는 원수가 된다.
첫번째 주장을 살펴보자.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을까?
카톨릭교회의 마리아에 대한 기도문에 보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여"로 시작하고 있는데, 성경은 예수님에게 형제와 누이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가 동정녀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이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마13:55, 참고: 막3:32, 막6:3, 요2:12, 요7:5등)
요셉은 목수였다. 즉 목수인 요셉과 모친이었던 마리아의 사이에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된 아들들(최소한 4명)과 누이들(복수형)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예수를 잉태할 때에 마리아는 동정녀가 분명하며, 이것은 성경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다는 카톨릭의 주장은 명백한 비성경적이다.
“비성경적”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언급되어지지 않은 것을 임의로 사실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만일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다면, 예수에게 형재와 자매는 없어야만 한다.
카톨릭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형제와 누이를 사촌이라고 주장하는데, 성경의 기록을 그렇게 변명하며 부정하는 것은 이단들의 상용수법이다.
위의 성경본문은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한 유대인들의 비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향에서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워하며, 그의 아버지와 어버니, 형제와 누이를 통하여 그의 그 가르치는 지혜가 어디서 왔는가 하면서 그를 비난하고 배척하는 의미로 언급되어진 것이다.
즉 예수의 직계가족인 부모형제를 통하여 그의 신분을 재확인하는 것이며, 사촌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특히 예수의 친동생인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다고 익히 알려져 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더라”(마1:25)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들을 낳은 후도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있었다는 성경적인 기록은 전혀 없다.
카톨릭은 위 본문이 아들을 낳은 후에는 동침하였다는 뜻이 아니라고 변명하는데, “까지”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헤오스라는 전치사는 till 혹은 until을 말한다.
그런데 왜 이러한 비성경적인 주장을 카톨릭이 하는가?
유일한 성경해석권을 가진 역대의 무오류한 교황이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카톨릭 교인들은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 무오류한 교황이 이렇게 공식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경의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는 사촌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카톨릭의 주장이다.
만일 마리아가 예수 외에 그 누이와 형제도 낳았다면, 마리아는 더 이상 하나님의 어머니가 되어지지 못하며, 평범한 인간의 어머니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주장인 마리아 무원죄설과 무염시태설과 셋째 주장인 마리아 승천설을 보자.
“이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었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니라 ”(롬5:12, 14)
아담의 범죄를 짓지 아니한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그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다는 것이 성경말씀이다. 마리아가 원죄가 없다면 마리아는 사람이 아니라 신적존재라는 것과 같다.
즉 마리아가 승천하였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마리아가 죄가 없어서 사망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여야만 된다.(누구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므로)
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가 없을 뿐이며 삼위하나님만이 죄가 없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인간은 누구에게나 죄가 있다. 성경은 매우 많은 곳에서 그것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8:36)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케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20:9)
“하나님 한분 외에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9)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롬3:8-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3:23)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카톨릭인들은 에녹과 엘리야도 승천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한다. 분명히 에녹과 엘리야는 승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사항이므로 마리아와 비교되어질 수 없다.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죄와 무관하게 에녹과 엘리야를 승천시킬 수도 있고, 모세와 같이 그 시체를 보이지 않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승천하였다는 기록은 어느 성경에도 없으며, 더욱이 마리아가 죄가 없다는 기록은 전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마리아가 죽은 후 사도들이 모여 관을 열자, 마리아의 시신이 없었다는 전혀 확인되지 않은 다소 황당한 전승에 의하여, 카톨릭은 마리아의 승천이라고 주장하고 동방정교는 마리아가 안식에 들어갔다고 주장을 한다고 전해진다.
만일 마리아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마리아를 신성시하는 것을 금지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마리아가 믿음이 신실한 여인이며 은혜를 받은 여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마리아는 사실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특히 예수가 돌아가신 후의 초대교회에서의 마리아에 대한 기록이나 영향력은 다른 사도들과 달리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즉 마리아는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된 적도 없으며, 사도들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 적도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믿음을 받는 신앙의 대상은 성삼위일체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된다.
이젠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마리아의 사역에 대한 카톨릭의 공식적인 견해를 알아보자.
다음의 카톨릭의 주장은 정말로 우리에게는 놀랄만한 일이다.
▶ [교회헌장] 66. 마리아께 드리는 특별 공경
4. 교회내의 마리아 공경
66.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성자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신 지극히 거룩한 천주의 모친>으로서 교회의 <특별한 예식으로 공경>받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복되신 동정녀는 오랜 옛적부터 <천주의 모친>이란 칭호로 공경받으시고 신도들은 온갖 위험과 아쉬움 중에 <그의 보호> 밑으로 들어가 도움을 청한다.(카톨릭 교회 헌장 중에서)
성자 다음의 위상을 가진 마리아는 카톨릭 교회에서 특별한 예식으로 공경받고 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신 지극히 거룩한 천주의 모친인 것으로 공경되어진다는 것이다.
성자 다음의 위상이며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다고 되어있으며, 모든 신도들이 그녀의 보호를 받으며 도움을 청한다.
물론 마리아는 은혜받은 여인이었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선택된 여인이었으며,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어머니이다.
다음의 카톨릭의 글을 보면 카톨릭에서 마리아가 어떻게 간주되는지 명백하게 밝혀진다.
다음 글을 보게되면, 카톨릭에서는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하여서 인류구원을 하시며,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시기를 원한다고 가르치며, 또 그리스도의 왕국도 마리아를 통하여 오신다고 카톨릭은 가르치며, 카톨릭 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마리아가 회개시킨다고 주장한다.
즉 마리아는 구원과 죄사함과 재림과 왕국의 사역을 담당하며 교인들의 기도를 받는 신적존재인 것이며,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가르친다.
▶ <성모님께 기도 드리는 이유>
우리가 성모님께 기도 드려야 하는 이유
1. 성모님의 역할
1) 하느님께서는 <인류 구원 사업을 마리아를 통하여 하시기>를 원하셨다.
- 천주 성자가 사람이 되어 오실 때 그랬고,
-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당하실 때 마리아도 함께 수난하셨다 (마리아께서 육체적으로 죽으신 것은 아니나 어머니로서 육신보다 더한 정신적 죽음을 당하셨다)
2)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신다. 기적을 시작하실 때도 마리아를 통해서 하셨다
-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유심히 관찰해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기적을 시작하기 원하셨음을 알게 된다 즉, 예수님께서는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을 마리아의 입을 통해 성자가 되게 하셨으니, 마리아가 말을 하자마자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요한은 성령을 받아 거룩해졌기 때문이다.이는 초자연계에 있어서 예수님의 첫 번째이며 가장 큰 기적이었다. 또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해서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와같이 세상 마칠 때까지 당신의 기적을 마리아를 통하여 행하실 것이다 (성 루도비꼬)
3) 그리스도의 왕국은 <마리아를 통하여> 오신다.
-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길이므로, <그의 재림에도 비록 방법은 다르겠지만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오실 것>이다.마리아는 세상 종말에 자비와 권능과 은총에 의하여 더욱 뚜렷이 나타날 것이다.마리아는 자비로써 천주의 가련한 죄인들과 길 잃은 자를 카톨릭 교회로 회개시켜 맞아들일 것이다. 유혹과 협박으로 사람들을 유인하고 멸망하게 하며 반역하는 천주의 원수들에 대해서 마리아의 위대한 힘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악마들에게 맺어준 <가장 무서운 원수>이시다. (성루도비꼬)
-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신가? (레지오의 까떼나 - 성모 신심 봉사회에서 발행)
예수님께서는 아주 효성이 지극하셔서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청을 올리면 예수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주님 앞에 가서 기도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것도 어머니 마리아에게 부탁을 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대신 들어주실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와 같은 예를 카톨릭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의 부탁으로 예수가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로마의 백부장의 부탁을 들어주어 그 하인의 병을 낫게 해주었으니, 우리는 로마의 백부장에게도 기도해야 하는가?
또한 성경을 잘 읽어보면 알겠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다만 포도주가 잔치도중 떨어졌음을 말했을 뿐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여자여”라는 칭호로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카톨릭에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오직 한분 예수님이라는 성경구절을 무시하고,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적인 기능을 하는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의 모친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오직 한분의 중보자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도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라"(딤전2:5)
마리아의 교리를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에게 나아가면 용서되지 않는 사건이 마리아에게 나아가면 용서를 받게된다는 것이다. 즉 카톨릭인들에게 마리아는 “사랑과 자비로써 용서하여 주는 어머니”이며 “예수께 간구하여 주시는 어머니”가 되어진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만이 진리요 생명이며 길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카톨릭의 이러한 주장들은 성경의 기록과 전혀 반대적인 입장을 갖고 있을 뿐이다.
만일 하늘로 가는 길이 예수가 아니고 마리아가 된다면, 이것은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비성경적인 주장이 되고 만다는 것을 카톨릭인들은 왜 모를까?
카톨릭인에게 과연 진리란 성경말씀인가?
다음의 글도 카톨릭 교회의 홈페이지에 있는 공식주장이다.
▶ 성모님은 은총의 중재자이시다. 우리는 모든 참된 속죄의 기도가 성모님을 통해서도 주님께 전달됨을 믿는다. 교황 분도 15세는 1917년 5월에 '모든 은총은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처한 이 시련의 시기에, 그 어느 때보다 큰 고통을 받는 성모님의 자녀들이 생생한 신념을 가지고 위대하신 천주의 모친께 간절히 호소의 기도를 올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에 8일 후에 파티마에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파티마는 모하멧의 딸의 이름이며 포르투칼에 있는 작은 도시의 이름이다.
그당시 이스람교들이 그 세력을 떨치기 시작할 때에, 카톨릭과 회교는 평화중재협상을 갖게 된다. 즉 회교들은 터어키를 카톨릭에게 양보하고, 카톨릭은 레바논이 아랍영토에 속하도록 협정을 맺은 것이다. 그 후 카톨릭은 터어키와 포르투칼, 스페인지역에 회교도들의 간섭이 없이 카톨릭의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10년경, 포르투칼에서 갑자기 사회주의의 세력이 강하여지기 시작하였다.
그 사회주의의 출현은 카톨릭을 매우 당혹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음에 분명하며 사회주의는 카톨릭을 정면으로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카톨릭은 난국에 봉착하게 된다. 이스람교와 협상을 하여 레바논을 포기하면서 얻은 포르투칼이 사회주의의 드센 영향으로 말미암아 카톨릭의 영향력이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 1917년 성모마리아가 파티마라는 마을에 발현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많은 군중들이 파티마에 몰려들었고, 그 사건은 온 세계에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파티마는 성지순례자들의 발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주의는 실패를 겪고 말았다.
그러나 그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한 사람은 단 세 사람의 카톨릭의 여인뿐이었다.
훗날 쉰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그 사건을 회상하였다.
파티마의 성모마리아의 출현은 모든 종교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어려운 회교도들 3억4천7백만명에게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 뒤로부터 죽은 여인 마리아는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게 되었고, 그 효과는 항상 기대이상이 되었던 것이다.
카톨릭교회 안에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 발전된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원시 종교에 여신 숭배 정신이 있었는데, 여신 숭배 정신이 카톨릭교회 안에 여신이 없기 때문에 마리아 숭배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마리아 숭배는 기원을 찾아 들어가면 원시 종교의 여신 숭배에 기원이 있다는 것이며, 실제로 초대교회 시절에 데메터(Demeter)라고 불리는 이방여신이 있었는데 “신의 어머니”라고 불려졌다.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인 데오토코스(theotokos)라고 부른다.
비록 거부되었지만, 최근에 카톨릭 내부에서는 마리아를 차라리 신으로 추앙하자는 과격한 견해도 있었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카톨릭은 칼케톤신조를 개신교인들도 인정하지 않는가하고 묻는다.
"그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독생하셨고, 그리고 지금 마지막 날에 와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니, 그의 인성(anthropoteta)면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이시다."(칼케톤신조)
칼케톤신조를 개신교가 인정하는 것은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대한 것이다.
어쨋든 마리아가 인성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한 것은 칼케톤회의이며, 그러나 칼케톤회의는 예수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분명히 언급되었다. 즉 마리아는 예수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에서의 육신적인 어머니”일 뿐이다.
그후 마리아의 무염시태론은 1854년 프란시스회와 도미니크회의 결렬한 논쟁 끝에 공표되었으며, 성모승천교리는 20세기 중엽이후에야 발표된 내용이다.
마리아는 예수의 육신적인 모친이었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전승에 의거하여 원죄없는 여인이 되었고, 20세기가 되어 하늘로 승천한 것이다.
마리아의 위상에 대한 카톨릭의 교리는 점점 발전되어지며 만들어지고 있다.
포오드가 어느 날 카톨릭신자와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왜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지를 물었다. 그 카톨릭신자는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와 가까운 국무총리나 비서실장 같은 고위층 관리를 통해서 부탁하는 것이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예수님과 가장 가깝기 때문에 그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러자 포오드는 “대통령의 자녀도 국무총리나 비서실장을 통해서 만납니까”라고 묻자 카톨릭신자는 답변을 못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과연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많은 이단들과 사이비집단들이 그들의 교주나 지도자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또다른 중보자 혹은 예수와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카톨릭은 예수와 인간 사이의 또다른 중보자를 마리아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 칠성사
카톨릭은 7가지 성사를 갖고 있으며,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식 두가지만 인정한다.
카톨릭이 인정하는 7성사는 세례, 성체(성찬), 신품(성품), 고백(고해), 견진, 혼인, 종부(병자)성사인데, 세례와 일단 개신교회에도 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성찬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루어 볼 것이며, 또 신품(神品)성사라는 것은 신부가 되는 예식을 말하며, 혼인성사는 결혼식을 말하는데 신부가 되면 혼인을 할 수가 없고, 또 혼인을 한 자는 신부가 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카톨릭의 7성사는 죄를 사하여주는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고백성사라는 것이 있다.
고해성사라고도 하는데 신부에게 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말하며, 카톨릭교회에 교리에 의하면 세례에 의해서 원죄가 사해진다고 하며, 성찬식을 통하거나, 또 이런 고해성사를 통해서 자범죄가 사해진다고 기록되어있다.
카톨릭의 교리서를 보면, 대죄는 반드시 고해를 해야만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카톨릭교회는 죄에 대해서 대죄와 소죄로 구별하는데,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죄를 일컬어서 대죄라고 하고, 소죄는 조금 가벼운 죄를 말한다. 예를 들면 살인, 간음, 거짓말, 도둑질, 미사불참 이런 것들은 대죄에 해당되는데, 이런 대죄를 행한 사람들은 반드시 신부에게 가서 고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고해성사는 유럽에서 켈트족을 선교할 때에 한 방편으로서, 그들의 도덕생활이 저속하고 문란하므로, 비밀고해를 대중화시킨 제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레오1세(440-461)이후에는 사제앞에서의 개인고백이라는 제도가 있었지만, 좋지 못한 윤리적인 소문으로 인하여 강요되지 않았으며, 763년 메츠주교에 의하여 처음으로 제도화되었다. 지금은 이러한 대죄는 반드시 고해를 해야만 한다고 카톨릭은 가르친다. 즉 반드시 신부를 통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신심이 깊을수록 고해성사를 안 할 수가 없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되므로, 당사자는 구원에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며, 실제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즉 카톨릭교회는 사제를 통해서만이 죄가 용서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세례를 통해 사제가 원죄를 사하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신부가 대죄를 사하는 것이 된다.
또 미사를 드리며 성찬을 할 때, 떡을 받아먹는 순간이 죄가 용서되는 순간이 되어지는 것이다.
비록 신부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사하노라”고 대리선언한다고 하여도, 신부를 통하여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면 죄는 용서받지 못하며, 신부의 "네 죄를 사하노라" 라고 말할 때에 죄가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이론적으로 카톨릭교회는 면죄부를 취소한 적이 없다.
중세 때 카톨릭이 면죄부를 팔아서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는데, 물론 지금은 카톨릭교회가 면죄부를 더 이상 팔지는 않고 있다. 단 면죄부란 말은 원래 보상 혹은 대사(Indulgence)라고 하는데, 그것은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가 죄의 대가로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 하는 일종의 보상적인 행위를 가르킨다.
다음은 “대사”에 관한 카톨릭의 공식적인 주장이며, 그러므로 면죄부는 판매는 하지 않고 있더라도 지금도 가능하다.
# 대사(大赦, Indulge): 환자가 수술을 했어도 상처에 따르는 고통을 치루듯이 우리 영신에도 죄사함을 받았지만 그에 해당하는 보속(補贖)을 치워야 한다. 이 보속은 극기, 기도, 희생으로 할 수 있으나, 교회가 공식으로 베푸는 대사를 받으면 그에 해당되는 만큼의 보속이 면제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범죄했을 때 고백 성사로 죄의 사함을 받았어도 보속을 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공로와 성인 성녀의 공로로 보속의 일부, 혹은 전부를 면제해 주는 은사(恩赦)를 대사라고 한다. 보속(잠벌 : 暫罰)의 전부를 없애준 것을 전대사, 그 일부를 없애주는 은사를 한대사(限大赦)라 한다. 예를 들어, 전대사(全大赦)는 카톨릭 기도서에 있는 대사를 얻기 위한 기도를 미사 영성체 후 바치고, 교황의 뜻대로 주모경, 영광송을 바치면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대사 중에 70일 대사라면 이는 초대교회에서 범죄한 자에게 공적으로 정해준 보속기간이었는데, 그들이 공적으로 70일간 보속했던 것에 해당하는 만큼 감면받는 은혜를 말한다. 대사는 <죽은자를 위해서 양도할 수 있고> 1일 1회에 한한다. 만일 세상에서 보속을 다하지 못했을 때에는 <연옥에서 해야 한다>.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성베드로의 성당의 건축비 모금과 자신의 호사스러운 귀족적 취미를 위하여 면죄부를 확대하기로 결심하는데, 면죄부가 잘팔려지지 않자 면죄부 전담상인을 두었다.
도미니크의 테첼이라는 독일의 수도사가 비텐베르크 근방에서 면죄부를 팔게 되었는데, 면죄부를 사게되면 천국에 가게 된다고 주장하다가 마틴루터가 마침내 그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것이 마틴루터에게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는 사건은 너무나 잘알려진 이야기이다.
중세때의 십자군 때에도, 십자군에 참여하면 죄사함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된다고 하였는데, 면죄부 역시 그러한 것과 동일하다.
즉 결론은 면죄부를 사게되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사함은 교황이나 신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받으며, 우리는 행위가 아닌 오직 내면적인 믿음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는다.
그렇다면 면죄부의 개념은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효력을 갖고 있으며, 현재는 비록 돈을 받고 팔지는 않지만 논리적으로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보자. 죄를 지어서 자신의 죄를 고하는 교인은 신부가 그냥 용서를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예를 들자면 카톨릭의 고아원, 장애인 시설등에 보내서 그곳에서 1주일 정도를 봉사하하는 소위 “사회봉사명령”과 같은 일이 지금도 존재한다.
그런데 아주 건강이 나쁜 나이가 많은 교인이면서 재력이 있는 분이 고해를 했고, 죄가 대단히 중할 때 "당신은 장애인 시설에서 가서 일할 수가 없으므로, 대신 카톨릭의 장애인 시설을 위하여 돈을 헌금하시오"라고 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하는, 중세에 있었던 면죄부를 파는 것과 아주 유사한 결과가 된다는 것에 주목하자.
이것은 어떤 보상적인 행위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는 결과가 되어지며, 그러한 보속행위가 헌금이 되어지는 경우는 실제로 있다.
이러한 것의 첫째 원인은 교회와 신부가 직접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카톨릭은 종교개혁의 대책을 토의하기 위하여 트랜트공의회를 열게 되는데, 면죄부에 대한 비판과 토론이 있자 “면죄부의 남용과 오용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교회의 권위가 추락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는 결정이 있었고 그 효력은 아직도 유지된다.
즉 면죄부는 아직 취소된 적이 없으며, 고해성사의 대사제도는 아직도 있는 것이며 아직도 보상적 행위나 헌금등으로 죄사함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묵주를 돌리며 사도신경을 1000번 외우라는 행위나 교회를 청소하라는 행위로 죄사함이 되어질수 없다. 결론적으로 면죄부 사건은 신부가 직접 죄를 사하여 준다는 비성경적인 논리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점을 마틴 루터는 그의 95개 항의문에서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카톨릭에서 말하는 루터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이다.(인터넷 카톨릭 동호회의 자료실에서 직접 발췌한 글이다)
12.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1505년 수도회에 들어간 루터는 수도회 신학원 교수의 권고로 새로운 방법으로 등장한 유명론신학(唯名論神學)을 탐구하였다. 유명론의 교의신학에 의하면 계시된 성서만이 신앙의 원천을 이루고, 인간의 이성은 무력하여 사람은 신앙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고 구원될 수 있으며 인간의 본능은 무능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만이 만물의 근거가 된다.루터는 이렇게 오도(誤導)된 신사조(新思潮)를 받아들여 나중에 자기 나름대로 '성서만' '은총만' '신앙만'이라는 '3유일사상'을 내세웠다. 아울러 유명론의 구원관은 인간노력을 강조하며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도 의화될 수 있고 선행을 통해 쌓은 공로로써 구원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엄청난 왜곡이다.
루터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의지 대신에 노예의지를 주장한 사람이다.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을 주장한 것이 무엇이 “오도된” 신사조라는 말인가? 오히려 그들 카톨릭이 “선행에 의한 공로주의”를 주장하면서, 루터가 하나님의 은총을 부정하고 인간노력을 주장하더라고 모함하고 있다.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절에서 이신칭의를 주장하였다.
다음은 루터가 면죄부에 대해서 잘못 알았다는 카톨릭의 공식주장이다.
# 루터는 성(聖) 베드로대성전의 재건을 위해 교회 관습대로 반포된 대사의 시행에 있어서 신자들이 대사의 참된 의미를 잊고 면죄(免罪)의 효과를 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그는 대사를 시행한 대주교와 교구장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자들이 대사를 오용(誤用)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대사에 관한 학술토론회를 요청하였다.
카톨릭의 주장대로 보면, 면죄부는 단지 교회 관습대로 반포된 대사의 시행이었고(이들은 면죄부를 ‘대사’라고 번역함) 신자들이 대사의 참된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다고, 루터에게 뒤짚어 씌우고 있는 것이다.
즉 교회의 잘못이 아니라 루터와 신자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지금도 카톨릭에서는 개신교의 목사들이 카톨릭과 면죄부를 오해하여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카톨릭은 면죄부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교과서도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루터의 95개 조항 중에서 면죄부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몇몇 항목만을 간추려 발췌한 것이다.
1.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전생애가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전적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고백과 속죄로서 이해할 수는 없다.
10. 임종(死)에 처한 자에게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종교상의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11. 종교상의 벌을 연옥의 벌로 변경시키는 “가라지”는 확실히 감독들이 잠자는 동안에 심어진 것이라고 보인다.(마13:25)
21.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증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27.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28.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동시에 성직자의 대도(代禱)의 응답 여부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는 것이다.
32.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교황의 사면을 가리켜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34. 왜냐하면 이 사면의 은총은 인간에 의하여 정해진 예정적인 사죄 행위의 형벌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35. 연옥으로부터 영혼을 속량한다거나 고백장(즉 참회사-고백을 받는 신부)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있다는 허가:역자주)을 사는 사람은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비기독교적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36. 어떠한 크리스챤이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
37. 참다운 크리스챤은 죽은 자나 산 자나 면죄증이 없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51.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까지라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주려고(당연하기는하나) 한다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2. 면죄증서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비록 판매 위탁자, 아니 교황 자신이 그 증서에 대해서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82. 예로써 만일 교황이 베드로 성당에 소비될 썩어질 금전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고 할 것이면(이것도 구실에 불과하지만) 어찌하여 가장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 즉 거룩한 사랑과 영혼들의 최고의 필요를 위하여 연옥을 비우지 않는가?
즉 면죄부(대사) 사건은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의 동기가 되었으며, 카톨릭의 면죄부(대사)에 의한 카톨릭의 교리적인 제반문제는 아직 취소된 적도 변경되어진 적도 없다는 것이다.
또 칠성사 중에는 견진성사라는 것이 있는데, 유아세례를 받았던 아이들이 성장하게 되면 신부가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는 의식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부모의 도움으로 자랐지만 이제부터는 성인이 되어서 자기의 힘으로 죄를 극복하고 마귀와 싸우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된다는 의식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제부터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견진성사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의 능력을 신부가 주입시켜 주는 것이다. 신부가 기도하는 순간 성령의 능력이 주입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해성사를 신부가 죄사함을 주는 행위라면, 견진성사는 성령의 능력을 신부가 전해주는 주입의식이 되어지는 것이다.
즉 죄사함과 성령의 능력이 모두 사제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되어진다는 뜻이다.
또한 종부성사라는 것도 있다. 요즘은 이것을 병자성사라고도 지칭을 하는데, 사람이 죽을 때에 신부가 눈과 코와 귀와 손과 발에 기름을 부으시고 기도를 해주는 예식인데, 이것은 일생토록 눈으로 지은 죄, 귀로 지은 죄, 입으로 지은 죄, 손, 발로 지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의 의식이다. 이렇게 신부가 기도하면 그 죄가 모두 사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카톨릭은 죄사함의 핵심이 성사제도에 있는데, 이러한 성사가 모두 죄의 용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죄를 용서하는 제도가 사제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카톨릭교회 이론에 의하면, 사제와 신부가 없으면 참된 의미에서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이 없게 된다.
카톨릭의 칠성사는 모두 사제를 통하여 죄사함이나 성령의 능력을 주는 것이 되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제사장을 통하여 제물을 드림으로서 죄사함을 받는 구약의 제사제도와 동일하다.
과연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누가복음18장 9절에서 14절 사이에 보면 세리의 기도가 나온다. "하나님이여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그와 같이 기도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누구를 통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세리는 오직 스스로 자기 죄를 인정하였으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고하였을 뿐이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의 사건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삭개오는 누구를 통하여 죄를 회개하지 않았으며, 자발적인 회개를 하였으며 주님은 그 집에 구원에 이르렀다고 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이것은 평신도가 모두 만인제사장이라는 의미를 말한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우리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히10:19-22)
이것은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에 이르러 매우 중요한 일이 되어진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만인제사장이 되었으며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복음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더 이상 죄를 위한 반복적인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다만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뿐이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8)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7)
3. 미사제도와 화체설
카톨릭과 개신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카톨릭은 제사의 종교이며, 우리 개신교회는 예배의 종교라는 것이다. 카톨릭이 제사의 종교라는 뜻은 카톨릭은 미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그 미사란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곧 제사를 의미한다.
그 제사의 핵심은 죄의 용서에 있다. 그래서 카톨릭의 미사의 가장 핵심적인 순간은 신부님께서 떡을 주시고 그 떡을 받아먹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죄의 용서가 일어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사를 드리는 핵심은, 죄의 용서를 받는 제사를 매주마다 반복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는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거나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카톨릭은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실제로 변화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을 화체설이라고 한다. 만일 그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과 살과 피로 변화된다면, 카톨릭이 드리는 미사는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실제로 매주마다 반복하여 드리는 것이 되고만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희생제사(피와 살)는 단 한번의 온전한 제사가 아니고, 매주마다 반복해야만 하는 온전하지 못한 제사가 되어버리는데, 이러한 문제점이 종교개혁자들의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카톨릭의 공식미사에서 떡은 매주 평신도에게 주는데, 포도주는 주지 않으며 신부들만이 마신다. 그 이유에 대해서 포도주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개신교의 경우에는 아무리 큰 교회라고 하여도 아주 적은 량의 포도주를 주거나 떡을 포도주에 적시는 방법을 사용하므로 결코 모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피로 변화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하기 때문에, 포도주를 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를 들기도 하는데, 왜 사제들만 예수님의 피로 변한 포도주를 마시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4. 성경
카톨릭교회는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전에는 성경을 번역하는 성서공회를 마귀들의 집단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으며, 카톨릭에선 일반 성도들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으며, 일반평신도의 성서 소유마저 금지시켰다(1229년, 툴루스회의).
지금도 성경에 대한 해석은 오직 교황권에만 있다는 것이 카톨릭의 공식견해이다. 이것을 비판하면 카톨릭은 오히려 개신교는 성경해석을 맘대로 하기 때문에 분열과 종파가 일어났지 않느냐고 오히려 역설적인 궤변을 주장한다.
그러나 분열과 종파가 일어나지 않아야만 한다는 주장은, 통일교, 정명석집단, 여호와의 증인안식교같은 이단들이 오직 교주나 지도자의 일률적인 성경해석을 맹종함으로 인하여 분열과 종파가 없으므로 절대적 진리라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즉 분열이 있는가 없는가가 진리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누가 뭐라해도 성경을 일반 교인들에게 읽지 못하고, 오직 교황만이 성경해석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며, 카톨릭의 교리는 분명한 비성경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또한 카톨릭은 성경 66권 외에 외경을 사용한다. 이것은 카톨릭의 연옥, 죽은 자에게 하는 기도등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또한 카톨릭은 전승도 성경과 같은 권위를 준다. 이러한 카톨릭의 주장은 트랜트공의회 이후부터 제도화된 공식견해인데, 어떤 전승은 인정하고 어떤 전승은 인정받지 못하는가?
그 객관적인 해석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전체 25회기를 갖는 트랜트공의회는 예수회 중심의 바울3세의 소집으로 반종교개혁, 반개신교의 대책회의로서, 제4회에서 성서와 성문화되지 않은 유전과 전승을 대등한 위치에 두도록 결정하였으며, 결정문 14장에서는 고해의 4단계, 즉 참회, 고백, 사죄선언, 보상의 단계를 하여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제7회에서 일곱성례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구원에 필수적임을 결정하였고, 제23회에서 교회의 일곱성직제를 확인하며 만인제사장을 부정하였고 제25회에서 연옥, 성인 기원, 성인숭배, 유물, 성상, 면죄부에 대해 이러한 것들을 폐기시킬 것이 아니라 다만 신중하게 사용할 것을 논의하였고, 특히 면죄부에 대해서는 그 비판 때문에 교회의 규율이 약화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즉 종교개혁에 의하여 일부 동요하는 카톨릭 신자의 위치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해준 공의회가 트랜트공의회이다.
5. 교황제도
그리스도인의 “감독”은 반드시 한 가정의 가장이어야 하고(딤전 3:2), 구원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양떼를 돌보아야 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여야 한다(요 21:16, 행 20:28,32).
교황의 호칭은 “아버지”(마 23:9)나 “거룩하신 아버지”(요 17:11)여서는 안되고, “감독”(딤전 3:1)이나 “형제”가 된다.
카톨릭은 앞서 말하였듯이 교황만의 성경해석권을 주장하며, 게다가 교황의 무류권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여 교황은 절대 무오류하다는 것이다.
그 내면적인 의미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도권을 계승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바울 3세가 개최한 트랜트 공의회에서 참가했던 모든 성직자들은 아래와 같은 조항을 암송하며 서약하게 된다.
"나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로마교회를 모든 교회의 어머니와 여왕으로 인정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도들의 대표자인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의 주교에게 진정한 복종을 약속하고 맹세합니다."
레오대제(390-461)로 알려져 있는 레오 1세는 칼케톤회의(451년)에서 처음으로 교황이라는 용어의 체제를 주장한다. 그는 로마의 감독을 전세계의 감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베드로의 지상권(마 16:8)에 대한 주장을 한 자도 레오 1세이며, 그는 서방교회의 지지를 받았으며 "교황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국가에 대해 거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베드로는 자신이 부여받은 교회의 지도권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폈지만 오히려 거부되었던 것이다.
로마교회의 감독을 전세계의 감독으로 인정받게 하려고 노력을 하였던 레오1세는 마태복음 16장 18절을 내세우며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그가 큰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칼케톤회의마저 그러한 것을 거절하고 말았다. 단지 451년의 칼케톤 회의는 "교황"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적용하기로 합의를 하였던 것이다. 교황의 전세계 감독권과 지상권을 극단적으로 반대한 것은 당연하게 동방교회(동방정교)측이었다.
그후 그레고리에 의해 다시 교황의 지상권에 대한 요구가 재개되고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와 "베드로의 계승자"로 주장됨에 따라 동방교회만을 제외한 모든 서방교회가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강력한 교황의 위상을 세움으로 전유럽을 선교해야만 한다는 미명의 깃발아래 절대권력과 전후무후한 세력의 로마교회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한 주장이 인정되어진 배경은 그 당시 유럽의 삼분지 이가 이교도였기 때문이다. 그는 강력한 통치력을 빌미로 레오 1세가 주장했던 것을 다시 재개시킨 것이다.
그리고 588년 콘스탄티노플의 요한 대주교에 의해 "전세계적 감독"이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예수를 아무리 열심히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황을 비난하거나 교황권에 도전하는 일이 있으면 그는 파문을 당하였고 끝내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예수를 아무리 열심히 믿고 군종하는 사람일지라도, 교회를 거스리거나 죄사함을 받을 수가 없다면 그는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황권의 입장으로서는, 무오류하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베드로의 계승자인 교황권을 비난하거나 반역하는 일은 곧 반그리스도이며 사탄이 되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비난할 수가 없는 이유는 오직 교황권만이 성경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교회내에서 인정받는 전승도 오직 교황권의 선택에만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숱한 중세의 반인륜적이며 반도덕적인, 타락하고 범죄한 카톨릭의 교황들이 무류했었다는 주장은 코메디일 뿐이다.
그러면 여기서 역대 교황들의 어록에서 참람된 말과 그에 대한 참람된 말들을 조사해서 발표한 아일랜드의 알렌 켐블의 저서의 내용을 보자(발췌 인용)
1)Ferraris의 말
"교황은 아주 존엄하고 위대하기 때문에 그는 단지 사람만이 아니고 하나님이다....그러므로 만약 천사들이 잘못을 범하게 된다면 교황이 그들을 판단하고 서로 교통시킬 수 있다."
2)Gregory XI의 말
"그 사람 교황은 하늘의 힘을 가졌으며 자연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불의를 정의로 바꿀 수 있고 그는 모든 힘에 가득차 있다."
3)교황 대관식에서 교황에게 하는 말
"이 세상를 다스리는 통치자와 왕과 왕자들의 아버지임을 잊지 말고 이 삼중관을 받으시오." (삼중관이란 교황 머리에 쓰는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3층으로 된 왕관)
4)교황 Innocent X의 대관식에서의 말
"가장 성스럽고 축복스런 아버지시여 교회의 우두머리이시고 세상의 통치자이며 하늘의 모든 열쇠를 가지고 있는 자시며 천사들이 하늘에서 숭배하고 두려운 지옥의 문들과 모든 세상들이 경배하고 특별히 저희들이 당신을 존경하고 숭배하나이다."
5)교황 Boniface의 말
"로마 교황은 모두를 판단할 수 있으나 누구에게도 판단받지 아니하고 그 로마 교황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물들은 다 함께 구원 받을 필요가 있다."
6)교황 Julius II의 말
"세상에 있는 다른 또 하나의 하나님"
7)교황 Pius X의 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8)교황 Leo XIII의 말(1895년 7월)
"우리는 전능한 하나님의 지상 장소에 살고 있다."
9)베이룬 추기경이 교황을 두고 한 말
"하나님의 영이 볼 수 있도록 변한 인간이다."
10)1949년 아일랜드 카톨릭 성직자들이 교황 레오 12세를 두고 한 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이신 다른 예수이다."
11)데시우스의 말
"교황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주장임에 분명하다.
1997년 11월 초, 각신문에서는 교황의 고해성사에 대한 기사를 올렸는데, 이 기사를 한 신문사의 기사를 통하여 직접 확인하자.
지난 2월 바티칸에서는 70명의 신학자와 성직자가 참가하여 비밀회의를 가짐으로 아래와 같은 사항을 결정하였다. 카톨릭의 교황은 그간에 카톨릭에서 저지러졌던 과거사에 대해 2000년 대회년을 맞이하여 교황이 직접 고해성사를 공개적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그 과거사란 종교전쟁 등을 통한 비카톨릭 신도들의 박해. 개신교와 동방정교의 분열에 대한 카톨릭의 책임. 여성의 차별과 자연과학에 대한 편견을 견지해 온 일. 카톨릭의 나치 협조와 방관에 대한 교회 수뇌부의 적극적 가담등의 내용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카톨릭의 내부에서 반대견해가 많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교황권의 신학적인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참조: 1997년 11월 5일자 경향신문 보도)
로마 교황은 2000년을 1300년 교황 Boniface VII이후 700년 동안의 죄에 대한 대사면과 죄의 용서를 위한 '거룩하고 특별한 해'로 선포했었다.
이러한 은혜는 반듯이 로마와 전세계의 성지 여러 곳을 방문하거나, 교도소의 피수용자들을 방문하거나 자신을 희생함, 담배나 음주를 끊음 등 선행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교황이 선포했었다.
그래서 베드로 성전 정문의 우측에 있는 거룩한 문이 2000년도에 열렸는데,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250만명의 카톨릭인이 로마 베드로 성전을 찾았다고 한다.
카톨릭인들은 그 거룩한 문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정한 연도에만 죄사함을 주시지 않으며, 어느 성당의 특정한 문을 지난다든지, 혹은 선행을 통하여서 죄사함을 주시지 않음이 분명하다. 성지를 방문하는 것이 대사를 얻는 한 방법에 속한다는 것이 기이하다.
다음은 안양평촌의 12사도 성당의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인데,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전대사를 얻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이 사죄함을 받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러한 방법이 하나님께 직접 고하는 내면적인 회개에 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2000년 대희년 전대사를 얻는 방법
1) 고해성사를 통하여 은총지위(속죄에 대한 애착까지 완전히 떠나 생활이 변화되어야)에 있어야 한다.(1번 고해성사는 8일간 유효)
2) 희년 대사 조건중 하나를 채워야 한다.
# 지정 성당, 성지의 미사, 아침 저녁 성무일도와 십자가의 길,묵주기도, 아카키 토스 찬미가등의 신심행사에 참여한다.
# 지정성당, 성지를 방문하여 성체조배 및 묵상을 하고 사도신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바친다.
# 곤경이나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병자, 수인, 독거노인, 장애인등)을 방문하며 영신적이고 성사적인 조건을 채우며 일상기도를 바친다.
# 불필요한 소비 억제(금연, 금주, 단식, 금육-절제)와 자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인 희생 봉사(시간)을 한다.
3) 위의 조건 중 하나를 채우는 날에 영성체를 한다.
(안양 평촌의 12사도의 성당, 홈페이지에서 발췌함)
6. 연옥 사상, 성인 숭배, 제사 인정, 사제의 혼인금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선행등 비성경적인 제도
카톨릭의 교리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완전한 자들은 천국에 가며,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대부분의 신자들은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밟아야만 한다. 또 이 기간이 신실한 자들의 기도와 선행에 의하여 단축되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교리의 근거는 외경인 마카비2서 12:42-45에 두고 있는데 외경을 성경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트랜트공의회 이후이다.
그러한 연옥신앙은 결국 면죄부의 폐단을 가져왔고, 죽은 자나 성인들에 대한 기도가 행하여지게 되었던 이방종교적인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받을 수 있으며, 부자와 나사로에서 보듯이 사람이 죽으면 시간과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는 낙원이나 음부로 가게 되는 것이며, 다른 장소에서 정화의 과정을 밟는다는 성경적인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고통받는 부자는 즉시 음부로 들어갔으며,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어 회개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눅16:28-31)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 연옥에 대한 카톨릭의 교리는 1439년 플로렌스회의(Council of Florence) 이전까지는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신앙조항에 속한 적이 없었다.
또한 카톨릭에서 사제는 혼인을 할 수가 없으며 카톨릭의 이러한 제도도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3)
육식을 못하게 하는 안식교와 혼인을 금하게 하는 카톨릭은 위의 성경본문을 그대로 적용하면,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 되어진다
베드로는 그가 살아 생전에 교황이었음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카톨릭이 1대 교황이라 일컫는 베드로에게 장모가 있었다는 성경적인 기록은 베드로가 결혼을 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어질 뿐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마8:14. 참고: 막1:30, 눅4:18)
또 카톨릭은 선행과 공로를 매우 강조하는데, 우리의 구원은 은혜이며 만일 행위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은 값없는 은혜가 되어지지 않는다.
물론 선행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행같은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되어지지는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6)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또한 이들은 믿음외에 선행도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키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비난하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며 변명을 하면서, 한편 “야고보서도 성경인데 행위를 강조하지 않는가?”라고 반문을 한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건으로서 행위를 강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야고보서의 행함은 믿음없는 행함도 무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없는 믿음을 책망하고 강조하기 위함이다.
오히려 야고보서 1장6절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행함은 믿음의 조건이 되어질 뿐이며, 구원의 조건이 되어지지 않는다.
카톨릭에서는 선행을 하는 타종교인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으며, 타종교에도 진리와 조명의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 카톨릭은 미신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베드로 성전에 가보면 베드로의 동상은 발이 움푹 패여 있는데, 수많은 순례객들이 줄을 길게 서서 그들의 복을 간구하며 베드로 동상의 발등에 입맞춤을 하고 있다.
이는 1857년 3월 15일, 교황 비오 9세가 특별한 회칙을 통해 이날부터 50일간을 임시 성년으로 반포하며, 베드로 대성당에 와서 이 동상의 발에 입맞춤 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럽 전역의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기간 동안 한꺼번에 몰려들어 사도의 오른쪽 발 등에 입맞춤하는 바람에 발등이 심하게 닳았다고 한다.
베드로 성당의 지하실에는 베드로의 시신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으며,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에 묶여있었다고 하는 쇠사슬이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 쇠사슬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여, 카톨릭 교인들이 그것을 자꾸 긁어가서 엄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또 베드로 성당에는 정문 우측에 벽돌로 쌓아 패쇄시킨 거룩한 문이라는 것이 있어 2000년 전대사의 해에 열린다고 하는데 그 문을 통과하면 죄사함을 받기 때문에 약250만명의 카톨릭인들이 그곳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유럽지역의 많은 성당들도 천국의 문이라고 불리는 문을 갖고 있어, 100년에 한번 혹은 정기적으로 한번씩 그 문을 개봉한다고 하는데, 유명한 천국의 문은 피렌체(플로렌스)에 있는 두오모성당이다.
또 독일 쾰른에 가면 쾰른성당이 있는데 그곳에는 순금으로 된 황금관을 놓고 그곳에 동방박사 한 사람의 시신이 있다고 한다.
방부제가 발라져 썩지도 못하는 그 시신이 동방박사인지 아닌지 객관적인 검증도 믿을 수 없지만, 왜 페르시야의 점성술가의 시신을 황금관에 보관하는지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일, 그 숱한 조각, 동상과 성화등에 대해서는 금하여야 하는 일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설명을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가 행하여지는 일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787년 제2차 니케야회의부터 였다.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대상이 비록 그것이 하나님을 상징한다 하더라도, 그 형상에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고 하였을 때에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삼천명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출32:28)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출32:4, 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7.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카톨릭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바티칸 2차 공의회가 있었는데, 이 회의가 카톨릭의 새로운 전기로 불려진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교황은 타 종교에서도 길이 제시되고 있으며, 불교에서도 최고조명이 있다는 포괄주의와 다원주의적인 주장을 한다.
물론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입장만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유일주의마저 부정하는 이러한 주장은, 정체된 카톨릭의 입장에서 선교를 표방하는 다분히 정책적인 발언이라고 보여지며 비성경적인 주장임에 분명하다.
에큐메니컬운동(교회 연합운동)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 가장 그것을 외면하던 곳이 바로 카톨릭이었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 2항)
........또 불교에 있어서는 여러 학파에 따라 무상한 현세의 근본적 불완전성을 긍정하는 동시에 열심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완전한 해탈 상태에 이르든지 혹은 자신의 노력이나 위로부터의 도움에 의하여 최고 조명(照明)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 그 밖에 전세계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종교들도 교리와 생활 규범과 성스러운 예식 등을 가르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이 느끼는 불안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그 길을 제시한다......
칼 라너라는 유명한 카톨릭 신학자는 "교회 밖의 구원"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장을 통하여 힌두교의 간디같은 이도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을 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타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이 예수를 오직 믿음이 아니라 선행적인 행위에 있으므로, 다원적인 여러 가지 길 중에 하나의 길이 되어지는 입장으로 산 정상을 오르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듯이 설명되어진다는 것이다.
이미 칼 라너의 주장은 보편적인 카톨릭의 주장이다,
이제 카톨릭은 오직 예수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로 전락하고 만다.
만일 타종교도 진리며 길이라고 주장한다면, 심각한 모순이 발생되어진다.
성경은 오직 예수만이 진리이며 생명이요 길이요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준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행4:12, No Other Name)
유대교에 의하면 예수와 사도들은 나사렛이단이 되며, 이스람교에 의하면 예수는 한명의 선지자가 될 뿐이며, 힌두교에 의하면 예수는 3억3천명의 신들중 한 명이 되고 말지만, 기독교에 의하면 예수는 삼위 하나님이 되신다.
어떻게 이 서로 다른 주장들이 하나의 진리가 될 수 있으며,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있는가?
로마 교황은 2000년을 1300년 교황 Boniface VII이후 700년 동안의 죄에 대한 대사면과 죄의 용서를 위한 '거룩하고 특별한 해'로 선포했었다.
이러한 은혜는 반듯이 로마와 전세계의 성지 여러 곳을 방문하거나, 교도소의 피수용자들을 방문하거나 자신을 희생함, 매일의 애연(담배)를 끊음 등 선행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교황이 선포했었다. 이러한 대 사면의 은혜는 카톨릭과 개신교를 갈라 놓는 작용을 하고 있다. 16세기 개혁가 마틴 루터가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대사면의 판매를 반박했으며, 개신교는 죄는 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와 사죄함의 확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대 사면은 비성경적이라고 반박하고 있다.(Religious Today)
다음은 카톨릭이 2차바티칸공의회에서 공표한 마리아에 대한 교의헌장이다.
마리아는 거의 신격화 되어있음을 알 수가 있다.
마리아는 피조물을 멀리 초월하는 존재이며, 구원과 죄사함에 있어서 주님과 공동사역을 하는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마리아는 예수 다음의 위상을 갖으며, 모든 천사와 성인의 위에 있는 존재로서 하늘과 땅의 모후가 되며, 교회의 예식으로 공경을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위상을 높이자는 것이 카톨릭교인들의 청원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2항
지극히 자비로우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세상 구원을 완수하시려고 "기한이 찼을 때에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여인에게 태어나시게 하셨으니…그것은 우리에게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갈라 4,4-5).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셨다". 이러한 구원의 신비가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고 계속되는 것이며, 주께서 당신 몸이 되도록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 안에서 신도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 성도들과 교류하는 것이니, "먼저 우리 주 천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생각하며 공경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3항
동정 마리아는 천사의 아룀을 들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성자)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의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참 모친으로 인정받으시고 공경받으시는 것이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구원되고 아드님과 불가분의 관계로 긴밀히 결합되었으며 천주 성자의 모친이 되는 직무와 품위를 갖추시었다. 그러므로 성부의 가장 사랑하시는 딸이 되셨고 성령의 궁전이 되셨으며 이렇게 탁월한 은총 때문에 마리아는 천상 천하의 다른 모든 피조물을 멀리 초월하신다. 그러나 마리아도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아담 혈통(血統)에 결합되어 계실 뿐더러 "참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어머니이시다…왜냐하면 마리아는 사랑으로써 교회 안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신도들이 태어나도록 협력하셨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독특한 지체이시며 신앙과 명백한 전형과 모범으로서 찬사를 받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마리아를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로 받들며 그에게 자녀다운 효성을 바치는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4항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교회에 관한 교의(敎義)를 설명하면서, 혈육을 취하신 말씀과 그 신비체의 신비 안에서의 복되신 동정녀의 역할과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사람들, 특히 믿는 사람들의 모친이신 천주의 모친께 대한 구원된 사람들의 의무를 성실하게 밝히고자 하는 바이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관한 교리를 전부 설명하거나 신학자들의 노력으로도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다음으로 가장 높고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시는 마리아에게 대하여 여러 가톨릭 학파에서 자유로이 논의되는 학설들은 그 권리를 보장받고 있을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5항
신구약(新舊約) 성서와 존귀한 성전(聖傳)은 구원 계획에 있어서 구세주의 모친이 맡으신 역할을 점차로 보다 명백히 드러내어 우리 눈앞에 제시해 주고 있다. 구약이 서술하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세상에 모실 그리스도의 내림이 천천히 준비되고 있다. 이 초기의 문서들은 교회 안에서 낭독되고 보다 상세하고 완전한 계시의 빛으로 이해되는 바와 같이 그 문서들은 구세주의 모친인 한 여인의 모습을 점차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이 빛 속에서 본다면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약속된 뱀에 대한 승리(창세 3,15) 속에 이미 예언적으로 그 여인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다. 비슷한 예언으로서, 그 여인은 아들을 잉태하여 낳을 동정녀이며 그 아들의 이름은 엠마누엘이라 불릴 것이었다(이사 7,14; 미케 5,23; 마태 1,22-23). 그 여인은 신뢰로써 주님께로부터 구원을 기다리고 받은 주님의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분이다. 시온의 훌륭한 딸인 이 여인이 나타날 때에 오래 기다리던 약속의 때가 가고 새로운 계획이 시작되었으며, 그 때에 천주 성자께서 이 여인에게서 혈육을 취하시고 당신 육신의 신비로써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신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6항
자비하신 성부께서는 여인이 죽음에 이바지한 것처럼 여인이 생명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예정된 어머니의 승낙이 화신(化身)에 선행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각별히 예수의 모친에게 해당되는 것이니, 마리아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생명 자체를 세상에 낳아 주셨고 하느님께로부터 이 위대한 임무에 합당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부(敎父)들이 흔히 천주의 성모는 마치 성령께 형성된 새로운 조물같이 온전히 거룩하시고 아무런 죄에도 물들지 않으셨다고 부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특수한 성덕의 빛으로 꾸며진 나자렛의 동정녀는 하느님의 명을 받은 천사로부터 "은총이 가득하시다"는 인사를 받으셨고 (루가 1,28) 동정녀는 천사에게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루가 1,38)하고 대답하셨다. 이렇게 아담의 딸인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에 동의함으로써 예수의 모친이 되셨고, 아무런 죄의 거리낌도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이시고,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당신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 사업에 봉사하기 위하여, 아드님의 인격과 사업에 당신 자신을 주의 종으로 온전히 바치셨다. 그러므로 교부들은 마리아가 순전히 피동적으로 하느님께 이용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리아는 이레네오의 말씀대로 "순명함으로써 자신과 인류 전체를 위한 구원의 원인이 되신 것이다". 그러기에 적지 않은 예 교부들이 설교 중에 이레네오와 함께 "에바의 불순명이 묶어 놓은 매듭을 마리아의 순명이 풀어 주었고, 처녀 에바가 불신으로 맺어 놓은 것을 동정 마리아가 믿음으로 풀었다"고 즐겨 주장하였다. 그리고 에바와 비교하여 마리아를 "산 사람들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가끔 "에바를 통하여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이 왔다"고 주장한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7항
구원사업에 있어서의 성모와 성자의 이 결합은 동정녀로서 그리스도를 잉태하실 때부터 그리스도 죽으실 때까지 나타난다. 우선 마리아는 일어나 급히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약속된 구원을 굳이 믿었기에 엘리사벳으로부터 복되다는 인사를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태중에서 즐겨 용약하였을 때(루가 1,41-45), 또 어머니의 완전한 동정성을 감소시키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성화하신 당신 맏아들을 목동들과 박사들에게 기꺼이 보여 주시던 성탄 때에 그 결합이 나타났다. 성전에서 가난한 이들이 바치던 예물을 바치시고 당신 아들을 주께 봉헌하실 때에는, 성자는 반대의 표적(標的)이 되실 것이요, 어머니의 마음은 칼에 찔릴 것이며 많은 사람 마음에서 숨은 생각이 드러나리라는 시메온의 예언을 들으셨다(루가 2,34-35). 어린 예수를 잃고 슬퍼하며 찾던 양친은 성전에서 성부의 일로 골몰하신 그를 발견하고서도 그의 말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모는 이 모든 것을 묵상 재료로 마음에 간직하셨다(루가 2,41-51).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8항
예수의 공생활(公生活)에 있어서 성모는 시초부터 뚜렷이 나타나신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동정심을 억제하지 못하시고 구세주 예수의 첫 기적을 당신 전구로써 행하시게 하셨다(요한 2,1-1l). 예수의 설교 과정에 있어서는 성자께서 천국은 혈육의 인연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성모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듣고 지키는 사람은(루가 2,l9와 51) 복되다고 선언하시는(마르 3,35; 루가 11,27-28) 그 말씀을 충실히 받아들이셨다. 이렇게 복되신 동정녀께서도 신앙의 나그네길을 걸으셨고 아드님과의 일치를 십자 정사(釘死)에 이르기까지 충실히 보존하셨으며, 하느님의 섭리대로 그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것이다(요한 19,25). 거기서 성모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母性愛)로써 함께 바치셨으며 당신이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머니, 곁에 당신 아들이 있습니다"(요한 19,26-27) 하신 그 말씀으로써 성모는 제자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9항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언약하신 성령을 보내시기 전에는 인류 구원의 신비를 장엄하게 나타내시기를 원치 않으셨으므로 성령 강림 전에는 사도들이 "여인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과 함께 마음을 합하여 기도에만 힘썼고"(사도 1,14) 마리아도 이미 천사의 아룀을 받으실 때에 당신을 덮어 그느르신 그 성령의 은혜를 당신 기도로써 간구하신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침내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에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받으셨다. 이로써 마리아는 다스리는 자들의 주님이시며(묵시 19,16)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을 더욱 완전히 닮게 되셨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0항
"하느님이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이시니;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값으로 당신 자산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디모 2,5-6)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우리 중재자는 한 분뿐이시다. 사람들에게 대한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은 그리스도의 이 유일(唯一) 중재성을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실 인간 구원에 유익한 복되신 동정녀의 온갖 영향은 어떤 필연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호의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중재 역할에 근거를 두고 거기 속하며 거기서 전적으로 힘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과 그리스도와의 직접 결합을 절대로 방해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도와 주는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1항
하느님의 말씀의 화신(化身)과 함께 하느님의 모친으로 예정된 복되신 동정녀는 하느님 섭리(攝理)의 계획을 따라 세상에서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좋은 어머니로서 남보다 각별히 친절한 주님의 동반자(同伴者)요 겸손한 종이시었다.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고 낳으시고 성전에서 성부께 바치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며 순명과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써 영혼들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온전히 독자적인 방법으로 구세주의 구세 사업을 도와드리셨다. 이 때문에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모친이 되시었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2항
은총의 계획 속의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하신 그 순간부터 - 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 없이 지속되었다 -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 주신다. 당신 모성애로써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이 지상 여정(旅程)에서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돌보시어 행복된 고향으로 인도해 주신다. 그 때문에 교회에서는 복되신 동정녀를 변호자, 보조자, 협조자, 중재자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유일한 중재자 그리스도의 지위와 효능(效能)을 조금도 감하기도 가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 혈육을 취하신 말씀인 구세주와는, 어떠한 피조물도 절대로 대등(對等)한 위치에 설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는 성직자나 평신도가 여러 모양으로 참여하는 것처럼, 또 하느님의 유일한 선이 피조물들에게 서로 다른 모양으로 널리 퍼지듯이, 구세주의 중재도 유일한 것이지만 그 유일한 원천에 참여하는 피조물들의 협력을 배제(排除)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요구하는 것이다. 교회는 주저함이 없이 이와 같은 마리아의 종속적 역할을 선언하고, 끊임없이 체험하며, 신도들의 마음도 이러한 모성적 보호로 중재자이신 구세주께 보다 깊이 결합되도록 권고하는 바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3항
복되신 동정녀는 하느님의 모친이라는 은혜와 역할로써 아드님 구세주와 결합되신 그만큼 당신의 특수한 은총과 임무로써 교회와도 밀접히 결합되어 계신다. 이미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대로 신앙과 사랑과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에 있어서 천주의 모친은 교회의 전형(典型)이다. 교회 자체도 당연히 어머니라 또는 동정녀라 불리느니만큼 교회의 신비 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탁월하고 독자적인 어머니와 동정녀로서의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뛰어난 위치를 차지한다. 마리아는 믿음과 순명으로 바로 성부의 아들을 세상에 낳아 드렸다. 남자를 몰랐지만 성령의 부르심을 받고 새 에바로서 옛뱀에게 속하지 않고 하느님의 천사를 믿어 조금도 의심치 않으셨다. 마리아가 낳으신 아들을 하느님은 그 형제들인 많은 신도들 가운데의 맏이로 삼으셨다(로마 8,29). 마리아는 이 신도들을 낳아 기르시는 데에 모성애로 협력하신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4항
그런데 교회는 마리아의 깊은 성덕을 바라보고 그 사랑을 본받으며 성부의 뜻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스스로도 어머니가 된다. 과연 교회는 복음 전도와 성세성사로써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자녀들을 낳아 줌으로써 그들에게 불사의 새 생명을 준다. 교회는 또한 동정녀로서 사람에게 바친 완전한 신의를 깨끗이 지키며, 주님의 어머니를 본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답게 완전 무결한 신앙과 굳은 희망과 진실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5항
교회는 복되신 동정녀로 말미암아 이미 완덕에 도달하여 티나 주름이 없는 교회가 되었지만(에페 5,27), 그리스도 신도들은 아직도 죄를 극복하고 성덕에 자라도록 더욱 노력한다. 따라서 신도들은 뽑힌 이들 공동체 전체에서 덕행의 모델로 빛나고 계신 마리아를 바라본다. 교회는 자녀다운 효심으로 마리아를 생각하고 사람이 되신 말씀(성자)의 빛을 받아 마리아를 직관하며 존경심으로 화신(化身)의 최고 신비(神秘)를 파고 듦으로써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보다 완전히 닮아 가는 것이다. 과연 마리아는 구원의 역사 속에 깊이 참여하시므로 신앙의 최대 요소(要素)들을 어떤 의미로 자기 안에 종합하여 반영하시는 것이며, 따라서 마리아를 설교하고 공경할 때에 마리아는 당신 아들과 아들의 희생과 성부의 사랑에로 신도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는 교회는 계속적으로 신앙과 희망과 사랑에 진보하며 만사에 하느님의 뜻을 찾아 따름으로써 그 탁월한 전형(典型)인 마리아와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사도적 활동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낳으신 마리아를 쳐다보며,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그분이 교회를 통하며 신도들 마음속에도 탄생하시어 성장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과연 마리아는 그 생애를 통하여 교회의 사도적 사명으로 사람들을 재생시키는 데에 협력하는 모든 이가 지녀야 할 모성애의 모범이 되셨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6항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성자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신 지극히 거룩한 천주의 모친으로서 교회의 특별한 예식으로 공경받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복되신 동정녀는 오랜 옛적부터 "천주의 모친"이란 칭호로 공경받으시고 신도들은 온갖 위험과 아쉬움 중에 그의 보호 밑으로 들어가 도움을 청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 일을 내게 하셨음이로다"(루가 1,48) 하신 마리아의 예언대로 특히 에페소 공의회 이후로 하느님 백성의 마리아 공경은 존경과 사랑과 기도와 모방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였다. 교회 안에 언제나 있었던 이같은 마리아 공경이 비록 온전히 독특(獨特)한 것이기는 하나, 혈육을 취하신 말씀인 성자가 성부와 성령과 함께 받으시는 흠숭(欽崇)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그 흠숭에 오히려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건전한 정통(正統)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시대와 장소의 조건이나 신도들의 기질(氣質)과 품성(品性)에 따라 교회가 인준(認准)한 성모 신심의 여러 형태는 성모가 공경을 받으심으로써 성자가 옳게 이해되시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며 성자의 계명이 준수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부께서 성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골로 1,15-16) "성자 안에 모든 충만함이 머물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골로 1,19)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7항
거룩한 공의회는 이러한 가톨릭 교리를 의식적으로 가르치며, 동시에 복되신 동정녀 공경, 특히 전례적(典禮的) 공경을 충분히 촉진하고, 세기를 통하여 교도권이 권장해 온 신심 행위의 풍습을 중히 여기며, 과거에 그리스도와 복되신 동정녀와 성인들의 성상(聖像)에 대하여 결정한 것을 엄수하도록, 교회의 모든 자녀들에게 권고하는 바이다. 신학자들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성모의 고유한 품위를 존중하는 데에 있어서 지나친 마음의 협소함과 마찬가지로 온갖 거짓 과장도 힘써 피하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교도권의 가르침을 따라 성서와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과 교회의 전례를 연구함으로써 복되신 동정녀의 역할과 특권을 올바로 밝혀 줄 것이니, 그것은 언제나 모든 진리와 성덕과 신심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로 향한 것이다. 또한 말이나 행동으로 갈라진 형제나 다른 그 누구도 교회의 참된 교리에 대하여 오해를 품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힘써 피할 것이다. 참된 신심은 결실없이 지나가는 일시적 감정이나 허황한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된 신앙에 있다는 것을 신도들은 알아야 하겠다. 참된 신앙이 있어야만 우리가 성모의 탁월성을 인정할 수 있고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께 자녀다운 사랑을 드리며 그의 덕행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8항
예수의 모친은 천상에서 이미 영혼과 육신으로 영광을 누리고 계심으로써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이 되심 것처럼 이 지상에서는 주의 날이 올 때까지(2베드 3,10)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시로서 빛나고 계신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9항
갈라진 형제들 사이에도 구세주의 모친을 합당하게 공경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는 사실과 특히 동방 교회 신도들이 평생 동정녀이신 천주의 모친을 신심 가득한 마음으로 열심히 공경한다는 사실은 이 거룩한 공의회의 큰 기쁨과 위로가 아닐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 신도들은 천주의 모친이시며 사람들의 어머니이신 성모께 간절한 기도를 바쳐야 하겠다. 당신 기도로써 초기 교회를 도와 주신 성모께서 모든 성인들과 천사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오늘도 모든 성인의 통공 중에서 그리스도 신도의 이름을 가졌거나 아직 자기 구세주를 알아 모시지 못하는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평화와 화목 속에서 행복하게 유일한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고 지극히 거룩하신 불가분(不可分)의 성삼께 영광을 드리게 되도록 성자께 전구하시기를 간구해야 하겠다
카톨릭의 중요 교리. 전례 용어해설 - 이기정 편저
카톨릭 출판사
성모마리아 1
5월은 성모 성월, 인자하시고 꺠끗한 우리 어머님의 달이다. 갓 피어난 꽃잎보다 더 맑고 다정하심이 얼마나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셨던지, 성모님은 모자라고, 욕심 많고, 죄 많은 우리를 그래도 사랑하셨고 당신의 인자하신 손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셨고 항상 우리 편이셨다.
이런 성모님에 대해 '루이 마리'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무도 성모님을 찾지 않고서는 성모님을 얻지 못할 것이요, 또 성모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성모님을 찾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 성삼께 대한 보다 큰 인식과 큰 영광을 위해서는 성모 마리아께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잘 알려지심이 필요하다>고.
'루이 마리 드 몽포르' 신부님은 1672년 프랑스의 브리따니주의 작은 마을에 7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나 1700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는 언제나 강론을 통해 성모께 대한 신심을 가르쳤고, 특히 성모님이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드디어 1947년 6월 20일에 그는 성인품에 올랐다. 그분은 '동정 성모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 과 '성모 마리아의 비밀'을 쓰면서, <만일 나의 이 가련한 피가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쓰는 이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는데 얼마간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즐겁게 잉크 대신 나의 피로써 이 글을 쓰곘다.> 고 말씀하셨다.
<성모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그 자비와 권능과 은총에 있어 더욱 빛나시지 않으면 안된다. 자비는 길 잃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그분의 권능은 하나님을 거스려 반대하는 원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그리고 은총은 하느님을 위해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대와 종들을 위해.> 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어머니
1. 우린 어려서부터 성모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고 기도만 헀다 하면 성모님에 대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만큼 성모님을 정말 우리 어머님으로 모시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언제 어디서나 성모님을 우리 어머님으로 말할 수 있고 나의 어머니는 위대하신 분이라고 자랑할 수 있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어머님으로 진정 모시고 있는지요? 그런것은 뭐 비유해서 말하는 것이지 내 어머니라고 할 수 있나! 이렇게 생각되진 않는지? 그런데 성모님은 육신을 낳아준 어머니 외에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을 낳아 주신 또 한분의 어머니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중에 계실 때 성모님과 제자가 비통해 하는 것을 보시고<어머니, 이 사람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 <이분이 당신의 어머니요.>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9:26-27에 나오는 대목) 이 대목은 성모님이 우리 전인류의 어머님이라는 뚜렷한 증거이다.
2.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에와가 죄를 진 이후 우리 인간은 초자연적인(자연을 넘는) 생명을 잃어버렸는데, 이런 생명을 주님의 구속사업과 성세성사를 통해 되찾게 되었고 이는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을 낳으심으로써 가능케 된 것이다. 루가 1장 26절 이하 예수님 탄생의 예고편에 가브리엘 대천 사는 성 마리아 처녀에게 장차 천주님의 어머님이 되실 것을 알렸고 마리아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인류의 조상인 여인 '에와'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린 불순명으로 하느님의 말씀 대신 악마의 화신인 뱀의 말을 그 태중에 맞아 불순과 죽음을 이 세상에 낳아 준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중개로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신앙과기쁨으로 맞아 이 말씀 자신을 잉태하여 마침내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 주신 것이다.
에와는 아직 처녀였을때 불순종하여 자신과 전인류에게 죽음의 원인이 되었으며, 순종하는 처녀 마리아는 자신과 인류를 위해 구원의 원인이 되셨던 것이다. 즉 묶인 것을 풀어 헤치려면 매듭이 동여 매진 것을 거꾸로 되풀어 나가야 되듯이 에와의 불순명은 이렇게 마리아의 순명과 신앙으로 풀어 헤쳤기 때문에 새로운 아담인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탄생한 교회는 산자들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3. 성모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조금도 눈을 돌리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큰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잃었을 때 성모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다시 회복해 주실 은혜를 얻어주신다. 물론 당신이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구원하심과 같이 우리 또한 성모님께 순종함으로써 은혜를 받는 것이다.
은총은 성모님을 통해 받는다
1. 최근에 이르러 성모님의 여러 기적, 발현으로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신 성모님께 특별한 관심과 기대를 기울이게 됐다. 우리의 모든 청원과 속죄의 기도가 성모님을 통해서 주님께 전달되며, 하느님의 모든 은총이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은총을 성모 마리아의 '하자없으신 성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청을 성모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파띠마의 히야신따가 루치아에게 한 말은 이런 하느님과 성모님,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말이라 하겠다.
2. 교황 베네딕또 15세 성하께서는, 성모 마리아께서 모든 은총의 중재자라는 것을 확실히 믿어 1917년 5월 <모든 은총은 성모 마리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맞는 이 시련의 시간에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고통을 받는 성모님의 자녀들이 생생한 시념을 가지고 위대하신 천주의 모친께서 간절히 호소의 기도를 올리기를 바랍니다.> 고 말씀하신지 8일 후에 성모님은 파띠마에서 발현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여러가지로 고통을 받고 있는 시기입니다. 우리 앞에 가로 놓여 있는 이 시련을 올바르게 극복하며 또한 정의롭게 피기 위해선 이사의 말씀을 상기할 때라고 생각한다.
3. 성 알퐁소 리구리께서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공로에 의해 우리에게 은총과 구원을 얻어 주실 수 있는 중재자시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당신 아들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중재자가 되신다. 비록 성모님은 예수님의 공로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어 기도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어 내실 수 없지만, 실재에 있어서는 우리가 청하는 모든 은총은 성모님의 손을 거쳐서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는 어린아이가 아닌 왕으로, 힘세고 권력을 쥔 장수로서 오실 수 있었고, 또한 오심에 성모 마리아가 필요했던 것은 아닌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어 주심에 성모님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성모님을 통해서 당신의 은총을 나누어 주시길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4.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평화롭지 못하다. 이 세상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성모님을 인류의 어머니로 공경하며 은총의 중재자이신 그분께 평화를 기도할 때에 세계는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될 것이며 작게는 내 안에 내 가정에 평화를 얻게 될 거라 확신한다. 또한 이렇게 될 때, 인자하신 어머님이 우리를 지켜 주심에 큰 위안이 받게 될 것이다.
우리 여왕이신 어머님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흔히 세 가지로 구분해서 이해했다. 그 하나는 말씀으로서 성부에게서의 영원한 탄생이었고, 그 둘째는 나자렛의 예수로서 마리아에게서의 시간과 역사 안에서의 탄생이었으며 끝으로 영세한 교우 여러분의 영혼 안에 신앙으로 탄생하시고 성장하시는 인격성 내의 말씀의 탄생이다. 이 세가지 탄생 중 힘 없고 나약하기만 한 어린이로서 지상의 시간 안에 마리아로부터의 탄생은 당신의 겸손의 가르치심이며 또한 인간인 마리아를 취하셨다는데 성모 마리아는 우리의 여왕이시라는 것이다.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성모 몽소 승천 교리를 선언하실 때 성모님은 영혼과 육신이 그대로 천국에 계시다고 말씀하셨고 따라서 간접적으로 성모님이 천국에서 여왕으로 계심을 세상에 상기시키셨다.
영화로우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왕중 왕의 어머니시기에 교회가 성모 어머님께 공경을 드리심은 당연하며 여왕이라 영광스러운 칭호로써 마리아께 영광을 드리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성 알퐁소께서는 말씀하셨다.
순명하신 마리아 처녀에 대한 앞서 말씀 드렸듯이,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모친이 되실 것에 동의하는 그 순간에 우리의 어머님이 되셨고 우리의 여왕도 되신 것이다.
성모 마리아께서 죽음과 몽소 승천으로 하늘에 올라가셨을때 우리 주님께서는 여왕으로서의 당신의 어머니 머리 위에 관을 씌우셨다. 그러나 관을 받으셨기에 여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여왕이시기 때문에 관을 받으신 것이다.
이처럼 여왕이신 성모 마리아께 봉사함에 있어 일시적 패배나 실망이 있을지 모르나 영원한 패배란 있을 수 없다.
성모 마리아 II
1. 아름다운 꽃잎이 활짝 핀 들녘에 서서 작은 꽃가지에 눈을 준다. 다소곳한 연한 모습에서의 그의 고통과 인내를 읽어 본다.
지난 겨울 찬서리가 치고 북풍이 불던 날, 그래서 몸은 마냥 움츠러 들고 고통이 피맺혀 가련한 몸매를 한없이 떨었지만,그래도 입술을 깨물고 얼마나 많은 고통의 날을 참아 왔던고? 또한 희망과 꿈을 펴 보이기 위해 망울이 터지는 아픔을 참으며 이제 아름다운 꽃을 피워 본 것이가고, 이처럼 아름다움 뒤엔 피눈물 나는 쓰라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2. 성모님을 복되시고 영광스러운, 영광이신 어머님이라 하며 영혼과 육신 모두 천상에 올림을 받으신 어머니라고 하는 점에 틀림이 없지만 한편 한없는 고통이 가슴에 피맺혀 속은 송두리째 고통으로 가득하셨던 분이기도 합니다.
처녀로서 임신한 부끄러움과 괴로움, 요셉인 남편과 부부아닌 부부생활의 어려움 .갓 태어난 아기을 안고 창칼을 피해 남몰래 외국으로 도망해야 했던 두려움 .사랑 스럽고 대견 스럽기만 했던 아들이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 아들을 올려놓고 손과발에 목박히는 것을 보셔야만 했던 어머니의 고통 스러움. 당신 가슴에 못박는 이상으로 처절했고 몸부림 치던 아픔을 당했던 어머니. 이제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는 이 세상에 홀로 남아 지난날을 생각하며 눈물짖는 어머니 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디 그것 뿐이랴? 당신 아들인 주님께서 온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처참하게 돌아가셨는데도 인간들은 부정을 일삼고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니 성모님의 마음은 아프시기만 하고, 하느님께 그저 용서해 주시라고 부탁 드리기에 바쁘시니 이런 어머님이 어디 영광스럽고 복되기만 한가? 오히려 불쌍하고 가련한 어머님이 아니겠는가?
이제 이런 어머님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머님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머님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어떤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어머님께 봉헌을
1. 옛날에는 마귀가 직접 사람들의 눈에 띄기도 하고 어리석었지만 오늘의 마귀는 인간의 지식이 고도화도미에 따라 약삭 빠르게 교묘히 숨어 있어 더욱 골탕을 먹이는가 보다. 기계가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함에 마귀도 또한 기계라는 마귀, 문명의 뒤에 숨은 마귀, 돈이란 마귀가 있어, 기계나 문명이나 돈(화폐)등을 인간생활을 편리하게, 이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터이지만 마귀의 장난으로 오늘의 인간은 그것으로 인해 괴로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마귀도 동정이신 성모님 앞에서는 꼼짝을 못한다. 우리는 복되신 동정녀의 자식으로 이 원수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 당신이 여러 차례의 발현을 통해서 말씀하신 묵주의 기도, 희생, 마리아의 하자 없으신 성심께 대한 신심에 충실히 실천함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따름에 탈선하지 않을 것이며, 그분에게 호소하여 절대 실망하는 법이 없을 것이며, 어머님을 사랑함에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며, 그분의 보호에 두려워함이 없고 그분 품안에 있으면 하늘나라를 얻을 것이다. 그분의 손은 인자하시고 사랑이 크옵시기에 그리스도의 채찍을 멈추게 하시며, 은총을 얻게 하신다고 성 보나벤 뚜라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따름' 이란 우리가 전적으로 어머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을 바치는 데 있는 것이다.
2. 마리아께 큰 존경을 바치는 것이 하느님께 드릴 존경을 감소케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루이 리 성인은 "하느님에 대한 사모의 정이 없이 여러분은 결코 마리아를 사모할 수 없다. 여러분이 마리아를 칭송하고 마리아는 당신이 받으신 그 칭송과 존경을 반드시 하느님께 바친다." 이 말은 어머님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로만이 생활하시며, 하느님 옆에 계시기에 하느님만을 말씀하시는고로 여러분이 마리아를 부르면 어머님은 꼭 하느님을 부르신다 하는 말인 것이다.
이렇듯 우리를 위하시는 어머님께 우리 스스로가 완전한 봉헌을 올리기 위해서는,
1) 우리의 몸을 바쳐야 되고,
2)우리의 영혼을 그의 모든 능력 즉 지혜, 자유 의지 등을 마리아께 대한 봉사를 위해 바쳐야 되며.
3)당신께 우리는 세속의 모든 사물을 바치고,
4)우리 내적 및 영신적인 재물은 즉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의 공로, 덕행, 선행 등을 바쳐야 한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쳐 자신을 완전히 없이 하는 봉헌인 것이다. 끝으로 조심할 것은 때때로 우울해지거나 권태로우며 유혹이 나를 괴롭히더라도 용기를 가지고 이를 잘 실천해 나가는데 어머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으며 또한 나도 행복감에 젖게 된다는 것이다.
묵주의 기도와 희생
1. 로사리오 :교황 비오 11세께서는 1937년 묵주기도에 대한 회칙에, <옛날 무서운 알비젠시스 이단을 몰아내신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는 위들의 간청에 감명되시어 오늘의 오류들, 특히 공산주의 오류도 없이 하실 것이다. 우리들 모두가 합당한 위탁과 커다란 신앙과 열렬한 경건을 가지고 복되신 어머님께 간청한다면 그분께서는 주 예수님께 기도하며, 현재의 거친 물결들을 잠잠케 하실 것이며 크리스찬의 반대 세력을 기도 속에 빛나는 왕관으로 덮어 버리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만일 여러분이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국가의 평화를 원하신다면, 매일 저녁 모여 주구의 기도를 바치시오. 가정의 로사리오를 바치심은 아름답고 칭찬할만한 습관이라>고 하셨다. 이상 말씀 드림은 교황 성하의 묵주에 대한 신념과 우리에게 사랑의 권고를 하셧음을 마음 속 깊이 받아야 하겠다.
2. 희생 : 우리는 주주 희생이란 말을 쓰고 있다. 희생이란 말 자체는 쓰기 쉽고 말하기도 멋 있는 단어일는지 모르지만 희생이란 뜻은 그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희생을 해야만 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크리스찬 생활에서 희생의 새활은 또 하나의 필수 조건인 것이기에 희생 없는 생활은 값이 없는 생활이다. 우리의 대사제이신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모든 이를 구하기 위해서 십자가상에 피흘려 돌아가신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피의 보속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구할 수 있었고 당신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닌가? 사랑한다는 뜻 속에 이처럼 값진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찬 신앙으로의 값진 생활은 사랑의 생활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이다. 즉 용서하는 것, 겸손한 것, 친절한 것, 베풀 줄 알며 교만하지 않는 것, 시기하지 않는 것등, 이런 것에 기쁘게 지불함으로써 주님이 희생에 답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희생할 줄 모르는 생활은 아무리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졌다고 큰 소리쳐도 그 십자가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 십자가여서 고달프기만 하고 귀찮기만 한 십자가로 아무 쓸 데가 없다. 생활 속에서 어렵더라도 기쁘게,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즐거움을 줄 때 주님이 계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희생을 성모님께서는 값지게 사신다는 것이다.
파띠마에서 성모님은, 죄인들을 위해 너희들 자신을 희생하라. 그리고 희생할 때 "오 예수여 이는 당신께 대한 사랑과 죄인들의 회개와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성심을 거스려 범하는 죄의 보속을 위하여 드립니다."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하면 성모님은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