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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예세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21~26)
예정론이라고 들어보셨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받도록, 어떤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 하셨다 라고 하는 것인데 구원론에 대한 것이예요. 오늘 저는 그 얘기를 좀 하려고 하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무한하시죠. 우리는? 유한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때 (동그라미를 그리시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동그라시다면 우리는 항상 한 쪽만 보게 되요. 이 쪽을 보면 저 쪽을 놓치고, 저 쪽을 보면 이 쪽을 놓쳐요. 이 쪽을 얘기할 때 저 쪽은 틀려요. 그런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저 쪽을 맞게 얘기하면 이쪽은 틀려요. 그래서 우리는 무슨 ‘론’이라고 얘기할 때 한계를 알아야 돼요. 이건 그냥 우리가 이쪽 면에서 한 번 생각한 것이지 이게 다 완전한 신학이나 논리는 있을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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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해. 그건 하나님의 권한이야.” 그러면 어느 게 맞아요? 이게 신학적인 논쟁이 되거든요.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칼빈쪽의 주장이 있고요. 그 당시에 알미니우스나 그런 사람은 인간의 자유의지도 있고, 권한도 있는데 어떻게 전적으로 무능력하다고 할 수 있느냐. 그분들도 하나님의 십자가나 하나님의 권한을 부인하는 게 아니예요. “대부분 인정하는데 전적은 아닌데, 우리도 이만큼이래도 있는 건데...” 이 두 조류가 있는 거예요. 이게 재미있는 논쟁이예요. 그런데 분명히 제가 보는 쪽은 제가 장로교 목사가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성경이 얘기하는 것은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이제 어떤 일이 되는가 하면 저 같은 칼빈주의자들, 장로교 목사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거니까 인간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다 그래서 이것(선택)을 아예 부인해버려요. 그러니까 이것(자유의지)도 부인해버려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어. 전에는 있었는데 타락하면서 그게 없어졌어.” 그래서 무슨 의지가 되었다고 하냐면 노예의지가 되었다고 해요. 근데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택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구원을 받았다는 논리로 지금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선택은 없어지고 누구만이 선택해요?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니까 거기서 무엇이 나왔겠어요? 예정론이 나왔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 얻도록, 어떤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하셨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그러면 그런 게 어딨어요? 그럴 때 “그게 하나님 마음이지. 토기장이가 이 그릇 만들고 저 그릇 만드는 거 당연한 건데 질그릇이 토기장이한테 나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 그럴 수 없지 않느냐?” 이런 논리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 비유가 이 예정론이나 구원론에 있어서 굉장히 쟁점이 되는 본문의 말씀이예요.
패널질문: “그런데 예정론에서 그냥 이 토기장이처럼 어떤 용도로 쓰이는 것에서는 공감을 하지만 결정적으로 멸망에 비유가 된다는 내가 아는 하나님이 너무 힘들지 않아요? 예수를 안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 아닐까요?”
대부분 토기장이 비유를 그렇게 해석했어요. 구원과 멸망으로. 그런데 내가 똑같은 얘기를 했어요. 이거는 구원에 대한 본문의 말씀이 아니다. 자, 다시 한 번 정리하려고 해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이다. 이거는 맞아요, 제가 볼 때. 맞는데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믿음이든 행함이든 선택할 권리는 없어.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했다고 할 때 인간에게도 권한이 있다고 자꾸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선택은 없어. 하나님의 주권이야.” 선택이 없으니까 뭐도 없어야 돼요? 자유의지도 없잖아요. 그런데 본래 있었던 거거든요. 하나님이 주신 거거든요. “그런데 왜 없어?” “타락해서 없어.” 그러니까 다 논리적으로 맞춰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노예의지야.” 그러니까 구원은 예정. 그런데 보니까 하나님이 선택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어떤 사람은 구원 얻고, 어떤 사람은 구원 못 얻잖아요. 어떤 사람은 천당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가잖아요. 그런 그걸 어떻게 설명할거냐? 그럼 할 수 없지. 당연히 나오지. “어떤 사람은 구원 받도록, 어떤 사람은 멸망 받도록 하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이야.” “그런 게 어딨어?” “그거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야.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못해?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나는 왜 구원했느냐, 안했느냐 물어볼 수 있어?” 이게 예정론의 문제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예정론이 되면 하나님이 좀 곤란해지셔요. 구원의 권한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은 예정론의 굉장히 큰 장점인데 뭘 뒤집어 쓰셔야 될까요? (좀 잔인하시죠.) 멸망 받은 사람은 무슨 책임이 있어요? 그러면 구원에 대한 권한도 하나님에게 있으시지만 멸망에 대한 책임도 하나님에게 있어요. “하나님 난 죄 없어요. 하나님, 내가 뭐 항의는 못하겠지만 하나님 앞에 내가 따질 군번도 아니지만 난 그냥 재수 없어서 찍혀가지고 뭐 이렇게 된 거 아니겠는가.” 하나님에게 전적인 권한을 드리려다가 하나님 좀 불편하시게 하고, 인간에게도 뭔가 엉뚱한 변명하게 하고, 하나님이 지금 또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잔인하시고, 하나님 마음대로 막 하시나 이런 문제가 생긴다 이거죠. 그런데 왜 예정론과 같은 문제가 생겼는가 하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데, 여러분 자유의지를 이분들(칼빈주의자들)은 능력으로 봤어요. 자유의지가 있으니까 선택하고, 선택하니까 나에게도 능력이 있다 이런 주장을 하잖아요. 능력은 없어. 그러니까 자유의지도 없어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논리의 문제는 뭔가 하면 이걸(자유의지=능력) 같이 봤기 때문이에요. 자유의지를, 인간이 선택하는 일을 능력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겨요. 그런데 이걸 한 번 더 점검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연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와 선택이 능력일까? 이게 구원에 관한 권한일까?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있잖아요. 누가복음 15장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죄를 지어도 그런 죄는 있을 수 없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죽으실거죠? 죽으시면 나 주실 것이죠? 미리 주세요.” 그거는 아버지 죽으라는 말과 같잖아요. 그건 아버지 생매장 한 거와 같아요. 그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돈만 들고 가서 허랑방탕하게 돼서 죽게 됐어요. 그게 뭔가 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에요. 사망의 자리에 있을 때 살아나는 게 구원이잖아요. 구원인데 구원이 어떻게 시작됐는가 하면 ‘아, 내가 이대로 있으면 죽겠구나.’하는 깨달음에서 시작돼요. 이거 굉장히 중요해요. ‘아, 내가 아버지 떠나서 죄짓고 살면 나는 죽어. 나는 멸망 받겠구나.’ 살아나야 되겠는데, 그 때 깨달아요.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자기 죽음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알아요. ‘아버지 떠나서 나는 죽은거야. 아버지께로 돌아가자.’하고 생각만 했어요, 아니면 진짜 돌아갔어요? 돌아갔어요. 가서 아버지 통해서 구원을 얻었어요. 자, 구원을 얻었는데, 아들이 깨닫지 못하고 돌아가지 않았으면 구원을 얻었을까요, 못 얻었을까요? 그러니까 아들이 깨닫고 돌아간 것이 구원의 능력이 될까요, 안 될까요? (능력이라기보다는 선택했네요.) 네, 그렇게 선택하지 않았고, 돌아가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예요. 그러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어요? 아들에게 있지요. 멸망의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어요, 아들에게 있어요? 아들에게 있어요. 그건 분명해요. 그러니까 멸망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어요? 아들에게 있어요. 왜? 그걸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 자기 때문이거든요. 만약 아들에게 그런 자유의지가 없어서 그냥 운명적으로 그 쪽으로 가야만 했었다면 아들에게 책임이 없어요. 근데 그걸 선택한 게 자기라고요. 그러니까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누가 져야 돼요? 아버지가 원한 게 아니었잖아요. 그러니까 책임은 아들에게 있어요. 그런데 돌아갔다고 그것이 능력이 되는가 하면 그렇진 않아요. 돌아간 것은 책임을 다한 것뿐이고, 구원은 어디서 이루어졌는가 하면 아버지가 용서하고 끌어안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거예요.
암만 돌아갔어도 안아주지 않으면 안돼요. 안 받아주시면 안돼요. 그리고 죄 짓고 아버지 떠났던 사람이 다시 돌아간 것이 의가 될 수 없어요.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에요. 수학으로 얘기하면. 그렇지요? 그걸 가지고 ‘내가 안 돌아갔으면 우리 아버지가 나 구원할 수 있어?’ 이건 아주 웃기는 일이라고요. 그러니까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 ‘내가 회개 안했으면 하나님이 용서 못해.’ 이거 아주 이렇게 된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착각을 해요.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 자기가 회개한 게 무슨 의가 되겠어요? 우리 할 일을 한 거 뿐이지, 그건 능력이 될 수 없어요. 우리가 회개했을 때 ‘그래, 고맙다.’하고 끌어안아주시는 분의 능력과 권한 때문에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이지. 그래서 책임과 능력이 다르다는 거예요, 제 말은. 그런데 우리 인간의 논리는 ‘책임이 있다면 능력도 있는 것이지. 이렇게 붙어 다니는데 책임은 있지만 능력은 없어.’ 이걸(책임과 능력을) 떼놓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칼빈주의나 예정주의들이 다 뭔가 하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니까 책임을 져야 해. 책임이 있다면 능력도 있어. 그래서 자유의지를 능력으로 풀었는데 저는 자유의지는 책임을 위한 것이지, 능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푸는가 하면, 구원의 능력은 누구에게 있어요? 하나님께 있어요.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게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멸망 받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에요, 우리 책임이에요? 우리 책임이에요. 이거 정말 중간에서 이 얘기만 딱 들으면 ‘이야, 하나님 편리하게만 해석하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잘 생각하면 이게 맞는 거예요. 멸망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어요. 그걸 하나님께 돌릴 수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게 뭐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기를 하셨어요? 우리가 회개하고 오는데 안 받아주시기를 하셨어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까지 지신 분에게 멸망의 책임을 돌릴 수는 없어요.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라고 하고, 악하다고 해도 멸망 받게 된 게 우리 때문이지, 하나님 때문이 아니잖아요. 가끔 뭐 어려워지거나 할 때 하나님 원망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하나님,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가만히 생각하면 하나님이 되게 억울하실 거 같아요. “내가 뭐? 지가 그래놓고는,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해놓고는 밤낮 와서 ‘하나님,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난 언제나 있었지.” 하나님 되게 억울하실 거 같아요. 여러분, 어떤 일을 당해도 이 땅에서 인간이 고난당하고, 죽게 되고, 망하게 되고, 상처받는 일은 우리 때문이지, 나 때문이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일에 책임을 질 만한 선택을 우리가 하잖아요. 하나님도 우리가 물론 선택은 해요. 그러나 그건 우리의 도리이지, 그것가지고 ‘그러니까 내가 구원 얻는 데 한 몫 했어.’ 그거는 조건은 되는데 그것이 권한과 능력은 안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풀면 자유의지를 능력과 책임을 구별해서 하면 구지 자유의지가 없다고 부인할 필요가 없겠죠? 그렇죠? 그러면 자유의지를 살려주면 선택이 살아나기 때문에 인간의 선택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예정론처럼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 얻도록, 어떤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하셨다는 그런 논리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자유라는 게 제가 전에 영락교회에 좀 있었는데요. 그때 지금 우리 모셉골 목회하시는 이명수 목사님, 그때 담임목사님이셨는데 어느 잡지사에서 여자 기자가 와서 인터뷰를 했어요. 기자 이름은 제가 기억을 못하는데 인터뷰 하는 내용이 탁월했어요. 기자들이 질문하는 걸 보면 얼마나 탁월한가를 알 수가 있어요. 그리고 정말 성실한 기자들은 정말 공부를 많이 하고 와서 인터뷰를 해요. 그러니까 저에 대해서 인터뷰를 한다고 하면 저에 대해서 쫙 공부를 하고 와서 딱 물을 걸 물어요. 나한테 다 알고 물어요. 서툰 기자는 내가 누구냐고 물어요. 그러면 “예~”하고 마는데, 알고 물어야 답을 시작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인터뷰 가지고는 안 되지요. 세미나를 해야지. 그런데 그 기자가 여러 가지 기가 막힌 질문을 하다가 마지막 질문을 참 내가 볼 때 기가 막힌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은 왜 예수를 믿으세요?” 이게 내가 볼 때 어느 기자도 목사에게 그런 거 안 물어요. ‘왜 목사가 되셨어요?’ 대개 이 정도 묻거든요. “목사님은 왜 예수를 믿으세요?” 굉장히 심플하지만 내가 볼 때 ‘이야, 참 질문 잘한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힌 질문에 기가 막힌 답이 나왔어요.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자유하는 사람이 되려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소름이 쫙 끼치더라고요. 예수는 자유를 의미해요. 예수를 믿으면 자유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싶어 하세요. 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면 구속해요. 종처럼 내 마음대로 “가. 있어. 안 돼.”이러면 얼마나 편해요? 여러분, 사랑하고 자유를 주면 골치 아파요. 말 안 들어요. 속 다 썩으면서도 함부로 하지 않아요. 왜? 사랑하기 때문에. 저는 개를 거의 사랑하거든요. 좋아하는 단계를 조금 지나서. 그런데 지나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래도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이죠. 그런데 개도 좋아하는 단계에서 조금 넘어가게 되면 묶고 다니고 싶지 않아요. 개 목 묶고 다니면 개한테 너무 미안해요. 그래서 사이좋게 지내서 오라면 오고 싶은 그런 자유를 주고 싶지, 어떤 때 보면 개가 안 가겠다는데 억지로 끌고 가는데 그런 건 싫어요. 그런데 사랑하면 절대 인간을 구속하지 않아요. 말 잘 들을 때만 자유를 주는 게 아니라, 안 듣는데도 구속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자유주시거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씀 중 하나 요한계시록 3장 20절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이 문을 두드리셔요. 의지가 없다면 “네가 열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내가 두드렸으니까.” 두드리지도 않지요. 그냥 들어가서 “넌 내거야. 들어가.” 그러면 되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권한이니까요. 그런데 그러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꼭 두드리셔요. 열면, 두드린다는게 나한테 물어보신다는 뜻이잖아요. ‘나 들어가고 싶어. 들어가도 되냐?’ ‘예.’라고 해야 들어오시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거 할 동안 나 기다릴 수 있어.’ 하나님이 인간을 기다리신다고요. 그 동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거부당하는 거잖아요. 그 초라함, 하나님의 초라하심, 죄송하지만 하나님의 바보같으심, 그게 다 뭔가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어요. 여러분, 이거(자유의지)를 부인한다는 거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한다는 것과 똑같아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을 거부할 자유까지도 주셨어요. 그리고는 조마조마하시는 거예요. ‘얘야, 나 좀 선택해줘. 나 좀 사랑해줘. 나 좀 받아줘.’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바보가 아니시잖아요. 왜? 그만한 가치를 아시기 때문이에요. 선택의 자유가 없는 사람에게 선택받았다는 게 뭐 자유에요? 결혼할 때 노예가 있어서 내가 말하면 싫어도 거부 못할 사람과 결혼한다. 순간은 모르겠지만 어떻게 그게 행복하겠어요? 정말 나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인데 내가 좋아서 ‘나 너 사랑해서 당신 선택했어.’ ‘나도 당신 선택했어.’ 이럴 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나님도 그 선택과 사랑을 우리에게 받고 싶으신 것이지, 명령하면 그냥 무조건 따라오는 그런 게 아니예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장에 있잖아요.(4절) 그래서 예수는 자유를 의미하고요. 이명수 목사님 얘기하신 것처럼 “왜 예수 믿으세요?” “자유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셔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전적인 능력, 구원의 권한을 강조하려고 하다가 인위적으로 무리하게 이것(자유의지)을 부인하려고 예정론까지 가는 것은 제 견해로 보면 지나치셨다. 그러나 그 분들, 그와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핵심을 알아야 돼요. 예정론을 주장하려고 한 게 아니라, “인간에게는 권한이 없어. 하나님께 권한이 있어.” 이거는 저하고 똑같은 거잖아요. 그리고 그게 로마서가 얘기하려고 하는 것인데 다만 자유의지를, 책임과 능력을 붙여서 생각했기 때문에 논리적 오류가 온 것 뿐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생략)------ 토기장이 비유, 그러니까 예정론을 주장하는 분들이 성경적인 근거들을 얘기해야 하잖아요. 1등가는 예정론의 근거가 토기장이 비유예요. ‘아, 토기장이 마음대로 귀한 그릇도 만들고 천한 그릇도 만들잖아. 그게 그릇한테 물어보고 하냐? 그릇이 나를 천하게 만들어 주세요, 나는 귀한 그릇 만들어 주세요, 선택하냐? 토기장이 마음이지. 그리고 만들었으면 그만이지. 쓰면 됐지, 왜 난 천한 그릇 만드셨어요, 따질 수 있냐?’ 이거잖아요. ‘그것 봐라. 하나님이 어떤 그릇은 천한 그릇으로 어떤 그릇은 귀한 그릇으로 만들었다고 하지 않냐? 그러니까 예정론 맞아.’ 이렇게 됐는데 대부분은 ‘어, 정말 그러네.’ 꼼짝없는 예정론의 뒷받침이 되는,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로 이해했는데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아까 (오)아랑 씨가 얘기한 것처럼, 그래서 ‘이야, 저 분 되게 머리 좋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굉장히 좋아요. 그거 구별하는 게 ‘이게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느냐.’ 토기장이 비유가 예정론에 대한 근거가 되려면 이렇게 돼야 되요. ‘귀한 그릇은 구원, 천한 그릇은 멸망.’ 이렇게 되야 예정론이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귀한 그릇은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천한 그릇을 만드셨다는 것은 멸망 받는 그릇이다라고 한거냐? 아니라는 말이죠. 오늘 이제 성경을 한 번 보세요. 아까 9장 읽었는데, 24절. 귀한 그릇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천한 그릇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하는 설명이 24절에 나와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그러니까 바울이 이 토기장이의 비유를 이야기하면서 설명을 하고 있어요. 귀한 그릇은 누구를 얘기한다는 거예요? 유대인을 얘기한다는 거예요. 천한 그릇은 누구를 얘기한다는 거예요? 이방인을 얘기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보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을 얘기하는데 이건 귀한 그릇이고 이건 천한 그릇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활 방식으로 얘기하면 유대인들은 구원 얻은 사람이고, 선민이고, 이방인은 버림받은 사람이고, 그러니까 딱 맞아요. ‘그럼 맞네, 뭐. 귀한 그릇은 유대인이라 하면 그건 구원에 대한 얘기고, 이방인은 천한 그릇에 대한 거라면 그건 멸망에 대한 것이니까 예정은 딱 맞네.’ 이렇게 나올 수 있는데 아니에요. 자, 25절 봅니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24, 25절) 이게 뒤집어져요.
이 토기장이의 비유에 있어서 포커스는 귀한 그릇에 있지 않아요. 천한 그릇에 있어요. 그 당시에 구원 없다고 하는, 여러분 아시죠, 바울은 유대인을 위한 사도에요, 이방인을 위한 사도에요? 이방인을 위한 사도예요. 바울에 의해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되고, 사도행전에 보면 그래서 예루살렘 총회에까지 올라가서 이방인도 세례 받았다, 성령 받았다, 어, 그러면 이방인들도 구원이 있지. 이렇게 뒤집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잖아요. 그러니까 이방인도 구원 얻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그러니까 포커스가 이방인이 멸망 받았다는 거예요, 구원 얻었다는 거예요? 여기에는 멸망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그냥 이방인과 유대인의 그런 선택은 있지만, 그런 정도의 선택이지, 그게 구원의 선택은 아니라는 거예요. 유대인을 선택한 게 유대인만 구원하려고 선택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 또 야곱과 에서가 있을 때 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셨잖아요. 이것도 예정론에 대한 얘기가 되는데 똑같은 얘기예요.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신 것이 야곱은 구원을 얻도록 선택하신 것이고, 에서는 멸망 받도록 선택하신 것이냐? 그게 아니에요. 누가 누구를 섬길 것이냐에 대한 선택까지였지. 에서 지옥 갔을까요? 그건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야곱을 사랑하시고, 장자권은 축복권에 대한 얘기였지, 구원권에 대한 얘기까지는 너무 확대 해석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선택은 하시지만 그냥 복 중에 있는데 ‘너는 지옥, 너는 천당’ 그런 논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과 에서를 선택하신 것에 대한 것도 물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설명하면서는 얘기가 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 얻도록, 멸망 받도록 예정한 것에 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로마서 9장을 얘기할 때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그것이 굉장히 핵심이에요. 핵심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예정론까지 가면 안 된다.
(그럼 가룟 유다에 관해서는요. 예정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는 것 같던데...)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아까 논리대로 얘기하면 자, 예정론적으로 얘기하면 가룟 유다도 책임 없어요. 다 그렇게 각본이 짜여져 있는 거니까. 그리고 ‘가룟 유다가 그렇게 안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못 지셨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 안 지셨으면 우리가 구원 못 얻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가룟 유다도 한 몫 한 거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는 머리가 나쁘니까 헷갈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지러워요. 아까 얘기했잖아요, 우리는 한 쪽밖에 생각하지 못한다고. 그런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어요, 유다에게 있어요? (유다에게) 왜요? 유다에게 선택할 권한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가룟 유다가 배반한 것은 가룟 유다 책임이에요. 멸망의 책임은 유다에게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정론적으로 생각하면 유다도 살리고, 그러면 뭐 다 하나님만 나쁘신 분 될 수 있지요. 우리는 아무런 죄가 없어도 ‘난 재수가 없어서 지옥 가.’ 지옥에 가는 것은 재수가 없어서 가는 거지요, 뭐. 하나님 눈 밖에 나서.
패널 질문: (목사님, 구원을 받았다가 안 받게 될 수도 있나요?) // 김동호 목사님 대답:네. 좋은 질문이에요. 상훈 씨도 머리 너무 좋아요. 그런데 그런 게 재미있는 거예요. 에스겔 33장에 보면, 그러니까 예정론에 보면 하나님이 결정한 것은 뒤바뀔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에스겔 33장에 가서 한 번 읽어보세요. 이런 거예요. 기독교에는 운명론이 없어요. 가령 너는 구원을 얻었다고 하자 그런데 네가 그 말을 믿고 다시 가서 죄를 지으면 정녕 죽으리라. 또 가령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뉘우쳐 회개하면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정녕 살리라.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게 실제로 어디서 입증이 되는가 하면 요나에게서 입증이 되잖아요. 요나서에 니느웨 성에 가서 40일 후에 망하리라 했어요. 그런데 안 망했어요. 그러니까 요나가 뿔 났어요. ‘거 보십시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그러니까 요나가 머리가 나쁜 거예요. 하나님이 왜 40일 후에 망하리라고 가서 얘기하게 하셨을까? 망할 거 같으면 그냥 쳐버리지. 40일 후면 망하리라, 무슨 얘기에요? ‘40일 안에 회개 좀 하고 살아라.’ 그런 뜻이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결정된 것이 없어요.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우리는 얼마든지 멸망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한 번 구원받았다고 까불거리면 안돼요. 하나님이 웬만해선 놓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뭐 조금 실수하고 그랬다고 해서 금방 지옥에 떨어지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견인, 이끌어주시는 것이 있어요. 그러나 그거 너무 믿고 ‘아, 난 한 번 구원받았으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이젠 괜찮아. 나는 끝났어.’ 이거 아주 위험한 생각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것을 또 이루기 위하여서 노력하고 가야 되는 것이에요.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예요. 그런데 내가 상당히 겁내고 왔는데요. 굉장히 신학적인 작업이었거든요. 신학교 강의해야 할 내용이었고, 저도 이거 30년 전에 논문을 썼었어요. 그래서 30년 지난 거라서 나도 가물가물하고, 이걸 내가 잘 풀어낼 수 있을까 그랬는데, 여러분이 도와줘서 잘 됐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