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1960년 밀양 표충사로 출가했다. 그 후 부산 범어사, 김천 직지사, 경주 불국사, 보은 법주사 등의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으며, 197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불교신문 편집국장 주필 주간, 법보신문 주간 주필, 사장 직무대행, 불교방송
상무,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동국학원 감사, 치악산 구룡사 주지, 불교신문 사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구미 금오산 해운사 주지, 능인학원
이사,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법보신문 편집고문으로 있다.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선재의 천수천안>. <깨친 사람을 찾아서(전강평전)>, <슬플 때마다 우리 곁에 오는
초인>, <열반제>, <고승평전>, <종정법어집>, <무상속에 영원을 산 사람들>, <걸레
중광>, <적멸의 즐거움> 등.
1> 서운 대선사(瑞雲 大禪師)
미완(未完)의 자유(自由)
인간의 삶은
때로 역사를 통해서 전설이 되어 미화되기도 하고 오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풍부한 삶을 산 사람일수록 일화의 폭은 광활해진다. 일화는 그 사람에게
있어 삶의 편린이고 여백이다. 특히 탈속한 삶을 산 사람일수록 일화는 미화되어 초월적 삶이 된다.
운수(雲水)의 삶을 사는 사람의
삶 속에는 특히 떠돔과 한 군데 얽매이지 않으려는 바람과 구름으로 섞어서 만든 요소가 숨어있다. 이것을 ‘바람끼’라고 말할 수 있다. 운수는
집착을 거부한다. 모든 고통의 원인이 집착에서부터 시작된다면 집착을 버릴 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유구개고 무구개락(有求皆苦 無求皆樂),
구함이 있을 때 고통은 이루어지고 구함을 버릴 때 집착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
출가의 삶은 구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욕망을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자각과 증득(證得)을 요구한다. 번뇌와 욕망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실존적 자아(自我), 즉
무아(無我)로서 존재할 때 출가인의 삶은 평가받을 수 있다. 그래서 구도자는 구원 회귀의 열정을 갖고 원초적 본질에 접근하고자 몸부림친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을 무상(無常)으로 자각하고 세속적 번뇌와 야합하지 않는다.
욕망과 번뇌를 비어버린 마음으로 세상을 관조한다면
자기 자신이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 있음을 누구나 쉽게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번뇌를 버리고 싶다고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본능적
욕망일수록 더욱 그렇다. 버리는 데는 반드시 체험이 따라야 한다. 삶에 절망하지 않고 삶을 사랑할 수 없듯이 번뇌에 상처받아 본 사람만 그
번뇌를 사랑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에는 항상 지극한 슬픔과 고통이 개입되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체험해서 자기
것으로 슬기롭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지 않고 피하려고 한다. 고통을 자기 삶의 일부로 길들일 때에만 그 고통은 기쁨의 길을 열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절에서 공무원 생활
서운 스님은 다른 선사에 비해 다양한 이력을
갖고 계신다. 그만큼 체험의 영역이 광할하다. 그리고 그것은 노사의 깊고 넓은 체험의 축적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성취한 정각의
의미가 세간과 출세간을 다 포함시키고 있듯이 서운 노사는 세간에서 출세간의 삶을 살았고 나아가 오도적 정서를 갖고 있었다. 그는 거사(居士)의
신분으로 출가자가 받아야 할 구족계를 미리 받았다고 한다. 비록 몸은 세간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수행인이 지닌 덕목을 갈고 닦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제 시대부터 상당한 권좌를 누렸다. 그 당시 ‘전매 서장’이라면 상당한 직위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공무원 생활의 절반은 절에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노사는 출가의 삶을 미리 살아버려 그의 입산이 비록 늦게 이루어졌지만 속칭 늦깎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그리고 그의 속세적 다양한 경험의 축적이 비구 대처 정화를 할 때 유감 없이 발휘되었고 출가하고부터는 법랍이란 한계를 뛰어넘어
승려로서 높은 권좌에 오를 수 있었다.
종단의 골격을 세우는데 그의 탁월한 행정력과 고견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관운(官運)이 많은 편이었다. 조계종 총무부장을 비롯해서 최고의 권좌인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지냈고 감찰원장, 동대 이사장 등 종단의
화려한 이력을 두루 편력하였다. 그래서 노사는 권력의 속성과 무상(無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돌부처도
사람을 속인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상나화수(商那和修)를 연상하게 하는 분이 바로 서운 스님이다. 상나화수는 출가 전
많은 공덕행을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는 출생의 신화(神話)를 갖고 있다. 상나화수란 의미가 자연복(自然服), 즉 태내(胎內)에서부터 자연히
구비한 의복이란 뜻으로 해석됨을 볼 때 태의(胎衣)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것 같다. 바로 서운 노사가 그렇다. 그는 출가 전 거사
시절부터 마음의 승복을 입고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불교는 노사에게 이러한 평가를 하는데
인색하다.
필자가 노사의 이력과 삶을 확인하고자 해도 그는 스스로 입을 다물어 버리고 자신의 출가 동기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세상사 묻지 마라 할 말이 따로 없다
돌부처도 사람을 속인다
세상사 요령 요령 요령
그는
1903년 경북 칠곡군 칠곡면 읍내동에서 귀중한 생을 받아 훗날 황악산 직지사에서 참으로 세상 일을 마치고 출가하였다. 1991년 당시 노사의
세납 89세 였는데 그가 생존해 있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심회(心懷)를 피력한 바
있다.
貪花十年未見花(탐화십년미견화)
眼前紅花花芍芍(안전홍화화작작)
꽃을 탐해 십 년 동안 방황했으나 찾고 있는
꽃을 보지 못 했고
이제 눈앞에 붉은 꽃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보겠네
山門蕭靜天地開(산문숙정천지개)
毘盧遮那門外客(비로자나문외객)
산 속 깊은 고요 속에 다시 천지가
열리니
비로자나 법신불은 문 밖에 손님일세
그는 노유(老幼)를 초월해 저승의 삶을 앞당겨 살고자 했다. 스스로 조주 선사가
누린 120세라는 삶의 기록을 깨보겠다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해탈적 의지를 갖고 있던 노사가 입멸의 시기를 앞당겨 육신의 옷을 벗어버린 건
분명 안타까움이 크다. 그를 모시고 있는 손상좌 장윤(章允) 스님에게 날마다 다비장(茶毘場)이 준비되어 있느냐고 재촉하면서“오늘
가버릴까”
하고 입적의 여유를 보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노사는 그의 구성체인 흙과 바람, 물, 그리고 불빛을 스스로 해체하면서
사대(四大)가 흩어지고 났을 때 자신만이 소유할 주인공을 홀로 길들이고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이것은 서운 노사만이 갖고 있는 무서운
고독이자 적막이었다.
진흙 소가 바다 밑에서 북 치는 소식을.
<문>
우수(雨水)가 지나고부터 침묵에 잠겨 있던 숲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으며 봄의 섭리로 인해 해빙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빙의
무드가 곳곳에서 일어났으면 합니다.
<답>계절은 마치 순례자의 발길 같아요. 한철 여행을 떠난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봄이
벌써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85년째 맞는 봄이지만 자연의 섭리는 인간이 지닌 생사의 법칙처럼 사계(四季)를 질서있게 운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 자체에는 노유(老幼)가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인 진여자성(眞如自性)과 다를 바 없어서 비록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지만 우주 가운데 충만한 생명의 근원으로 인해 우리는 거듭 다시 태어나고 자연과 일여(一如)를 이루는 윤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전체가 조화의 미덕을 잃고 계층 간의 불화와 갈등이 심화되어 있지만, 각자 마음 속에 탐욕의
습기(習氣)를 버리고 무아(無我)의 지혜를 갖는다면 우리는 서로 평등해질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지나칠 만큼 지엽적이고 본능적인
것에만 집착되어 있어 사람이 가져야할 근본을 잃고 있습니다. 망원미류 파엽이망간(望原迷流 把葉而忘幹)이란 말을 깨달아야지, 나무 전체와 근원을
보지 못하고 잎만 붙들고 자기 집착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어요.
<문> 인류 사회가 다른 시대에 체험하지 못했던 문명사적
변혁이 일고 있으며 고도의 과학과 기술 혁신으로 인해 제2의 산업 혁명이 이루어지고 있어 기존 가치는 물론이고 인간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답>아무리 과학 문명이 발달하고 산업 혁명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독과 소외만 심화되어 비인간적 행위만 늘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영혼과 자성은 황폐되어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은 인간화 운동이며, 인간적 자각이 있을 때 사람에 대한 존엄성은 물론이고 이웃을 자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에 집착된 마음과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이웃을 발견할 수 없어요. 지금부터라도 우리들의 마음을 자비한
마음으로 혁신시켜야 하고 보살적인 인격으로 개조시켜야지요.
마음이란 일체 성자의 근원이며 이 세간을 뛰어넘고 해탈을 성취하는
근본임을 깨달아야 하는 데도 자기 마음을 올바르게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이란 많이 소유한다고 해서 풍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갖고 싶은 욕망을 버리면 자기 자신이 참으로 풍성해질 뿐만 아니라 넉넉해지는 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는데 그것을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생멸(生滅)과 진여(眞如)로 구분하여 하나는 열어야할 문이고 또 하나는 닫아야할 문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타락적 역사는 생멸문을 닫지 못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절망적인 미로에서 벗어나려면 불변하는 진여문을
열어가면서 자신을 법신으로 탄생시켜야 합니다. 법신이란 버림받은 이웃과 함께 하는 가장 낮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법신적 삶을 영위한다면
무연지비(無緣之悲) 인연에 얽매이지 않을 사랑으로 중생의 고통을 증언하고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요즈음 인권과
복지원 문제로 정국이 긴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종교인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처럼 우리에게 귀중하게 주어진
개헌 분위기가 여야의 극과 극의 대립으로 타협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답>정치란 복잡한 이해 관계를 조절하고 민의를
바탕으로 하여 모든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기술입니다. 여야의 목표가 위민(爲民)에 있다면 대화와 타협으로 중지를 모아 타협을 해야만 파국을
면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극한적 투쟁으로 쟁취하려고 하면 하나도 얻지 못하고 전부를 잃게 됩니다. 서로가 하나씩을 버리고
양보하는 미덕을 창출해 낼 때 민의에 도달할 수 있지만, 대립과 투쟁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고 당리당략만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위정자는 덕화(德化)와 인욕으로 국민을 위로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야당은 용서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정국을 풀어가야
합니다.
옛말에 산무도인 조무양신(山無道人 朝無良臣)이라고 했습니다. 산중에 도인이 없으면 배회하는 수행자가 많아지고 조정에 어진
신하가 없으면 백성은 시달림을 받는다는 뜻이지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보다 남을 용서하는 마음을 배양하는 인욕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인욕이란 단순히 참는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를 해롭게 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광활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내원해인(耐怨害忍)의 이치이지요. 그리고 안수고인(安受苦忍)하는 마음,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꺼이 스스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여야 지도자가 구족할
때 이 땅의 인권은 신장될 것이고, 중생을 여래시(如來視)하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된다면 복지 사회는 건설될 것입니다. 이 사회가 조금 맑아지고
중생이 신바람 나려면 지도자가 무외시(無畏施) 정신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무외시란 평화와 안전을 베풀어주고 바른 생각[正念] 바른 말을 할 수
있고 그 비판을 수용하는 대승적 덕량(德量)입니다.
이야기가 약간 다른 곳으로 빗나가는 것 같은데, 옛날에 가난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보배를 얻게 되어 그것을 그 고을 사또에게 바쳤어요. 그런데 사또는 그 보배를 받지 않으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보배를 주어서 좋고 나는
그것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배를 삼으니 우리가 모두 보배를 얻게 되었다며 가난한 농부의 마음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라는 고집에
사로잡힐 때, 자신이 자아에 속박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문>큰스님께서는 현재 원로 스님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시고 이(理)와 사(事)에 대한 풍부한 체험을 갖고 계십니다. 후배들에게 깨침에 이르는 첩경이 무엇인지 한 말씀 해
주시지요.
<답>나의 검소한 수행 가풍이 있다면 그것은 조주(趙州)를 위우(爲友)하고 육조 스님을 위사(爲師)하면서
살아온 것뿐입니다. (이 때 스님은 주먹을 쥐었다가 손바닥을 펴면서) 부처되는 일이 이와 같이 쉬운 일이지요. 즉심시불 비심비불(卽心是佛
非心非佛)이라고 했지만 번뇌를 버리지 못하면 부처도 중생이고 무명을 버리면 중생 그대로가 부처이지. 다만 한 가지 명심할 일은 부처를 구하더라도
부처에 속박되지 말아야 하고 법을 깨치려고 가부좌를 틀고 앉더라도 법에 결박당하지 않을 때 용무생사(用無生死)의 삶을 살 수
있어요.
생사에 집착되어 있으니 나고 죽는 일이 괴롭지, 그것을 버리면 일체 증오는 물론이고 생사 거래가 존재할 수 없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깨침에 있어서는 인간의 절대성에 대한 구체적 확신을 가지고 개오의 삶을 체득하고 내증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오조 홍인(五祖
弘忍)에게서 무상(無常)을 배웠고 육조에게서 심지(心地)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조사관(祖師關)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남들이 또 한번 나를 보고 저 늙은이가 진실로 부처는 건드리지 못하고 희롱만 하였다고 지적한다면 일월장중롱 산고수무적(一月掌中弄 山高水無跡)이라
할 것입니다. 일월을 손바닥 가운데 두고 희롱하는데 산은 높고 물은 흘러도 자취가 없다는 뜻입니다.
깨쳤다고 해서 못난 얼굴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중생 그 자체가 무량공덕장(無量功德藏)입니다. 해탈이란 따지고 보면 자기 본질로 귀환하는 일이며 구도란 진실이 아닌
것으로부터 진실에 이르는 순례에 불과합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중은 절에서 자고 살아야 한다는 말뿐입니다. 가정이 도덕의
학교라면 절은 생사 고뇌를 벗는 해탈의 도량이지요.
아랫마을 시주집 소로
태어날거나
<문>위대한 선사들은 항상 공안(公案)을 사용해서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었고 또 우리는 그
통렬한 고민 속에서 내심(內心)의 눈을 뜰 수 있게 하였습니다. 스님이 지금 참구하고 계신 화두는
무엇입니까?
<답>후신하여(後身何如)입니다. 지금 내가 죽고나면 내 몸이 어떤 모양으로 있을건가를 요사이 많이 생각하면서
오후 불식을 한 지가 3개월이 지났습니다. 서서히 불필요한 살점이 몸에서 빠져나가니 한층 생각이 맑아지고 고정된 관념의 틀이 내부에서 붕괴되고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사실 실상(實相)은 눈 앞에 있으며 그것을 직관으로 증득해야지 사변과 추리는 오히려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깨쳤다고 하고 한 소식을 했다는 선지식의 법문을 보면 한결같이 내증의 목소리가 아닌 조사들의 법어를 인용하고 있어요. 유행가를 부르는
가수도 그 나름으로 자기가 계발한 창법이 있고 독특한 음색이 있는데 자기 견처(見處)가 있다면서 자기 음성이 있어야지 사귀(死句)의 방망이를
피할 수가 있습니다.
<문>한국 불교가 달라져야 한다면 무엇부터 고쳐야 하겠습니까?
<답>오늘날
우리 불교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무엇보다 시급히 개혁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받는 불교에서 주는 불교, 베푸는
불교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신도들에게 받는 데만 급급했지 이웃을 위해 베푸는 데 너무 인색했어요.
베풀수록 풍요해 진다는
사상이 오늘의 사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구도자일수록 쌓지 않고 남을 위해 살면 살수록 그 삶이 풍요해 집니다. 우리가 간혹
육도(六道)란 말을 잘하는데 따지고 보면 육도는 무명에서 일어난 여섯 가지 한계 상황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육도에 머물
때 윤회하고 있음을 자신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때로는 지옥에서 허덕이고 때로는 천상의 기쁨을 맛보고 마귀와 같이 이기주의적이다가 또 때로는
수라와 같이 사납고 축생과 같이 미련한 현상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육도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자기 마음 속에
있습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통해서도 우리가 육도의 삶과 몸과 마음을 섞으며 살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호전적이고 특정적인 사람들은 수라와 인연이 깊은 사람들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진리파지(眞理把持) 운동을 전개하면서 비폭력을 주장한
것은 불교의 자비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문>스님께서 지금 입적하신다면 후생에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까?
<답>아랫마을 시주집에 한 마리 소로 태어나서 구세의 덕을 심으며 밭이나 한평생 갈까 하고 생각 중이야.
그러나 무일심이비불심(無一心而非佛心)이고 무일진이비불국(無一塵而非佛國)이라 했듯 한 생각 한 생각이 부처님 마음과 다름이 없고 티끌 하나 하나가
부처님 국토 아님이 없는데 어디 태어난들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쬃 자성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산에서 자유로이 배회하고 강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지. 자성 밖에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고 자네는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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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석주 대선사(昔珠 大禪師)
천진(天眞)이
부처이다
석주(昔珠) 스님은 순수한 결백 하나를 가지고 사시는 스님이시다. 자기 위치를 표현하려고 숱한 언어 기능을
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항상 존재하기를 바라는 스님이 석주 스님이다.
특히 스님을 대하고 있노라면 수식과 형식, 그리고 빛깔을 스스로
제거해 버리고 원형의 질로만 존재해 있음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선사다, 강사다, 포교다 하는 수식을 동원하여 스님을 접근해 보려고
하면 스님은 도망치듯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다.
밭에 씨를 뿌리고 그것을 가꾸어 나가는 농부처럼 적은 진실로 생활을 만들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을 확보하여 그 속에 안주하고 계신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맞는 수행의 공간을 일찍이 만들어 그 속에서 세상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스님을 대해 보고나면 아주 평범하다는 인상만을 얻을 수 있지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욕심내는 것은
하나의 무리이다. 그는 뛰어난 선사도 그렇다고 선을 모르고 있는 수행승도 아니다.
그러나 스님은 모세 혈관을 꾹꾹 쑤시는 바람처럼
우리들의 허위를 찔러대고 있다. 스님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마력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 수 없는 생활의 진실이다.
나는 이러한 스님을 딱
세 번 뵈올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 번은 자의에 의해서 스님이 계신 칠보사로 찾아가 종단의 어려운 현안 문제를 물었고 두번째는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였다.
그러니까 1980년 겨울이었다. 유난히 추운 날씨에 눈까지 내릴 때였다. 나는 많은 승려들이 오공(五共)을
출범시킨 군부의 타율적 정화에 의해 연행당하고 있을 무렵 서초동 호국사란 절에서 근신을 하면서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불면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살아온 삶에 처음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을 가하고 있을 때였다.
1980년 10월 27일, 나는 그 날 아침 서울에 있지 않고
불교신문사 직원과 함께 황악산 직지사에서 취재를 하고, 이튿날 아침 서울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침 열 시가 넘어 조계사 안에 있는
신문사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텅 빈 공허와 무거운 침묵이 쌓여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더듬거리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게
침울하고 살벌한가를 옆에 앉아 있는 기자에게 물었다.
기자는 눈알을 굴리며,“스님, 모르고 계세요?”
하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하였다. 기자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제 도착했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그때야 입을 열었다.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한 간부 스님들이 모두 연행
당했다고 기자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불길한 예감이 몸 전체로 엄습하였다. 나는 서둘러 여러 곳으로 전화를 하였다. 모두가
부재중이었다. 그리고 열한 시가 넘어서 라디오를 통해 그 정체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신군부(新軍部)에 의해 불교의 성역이 침해되고 교권이
유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때만큼 내 자신의 처절한 삶과 번뇌에 대해 질문을 던져본 일도 없을 것이다. 갑자기 나는 군중 속에서
동떨어진 낙오자, 아니 소외자가 된 것처럼 불길한 생각들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속히 한국 불교가 정상화의 궤도를 되찾기 바라면서 호국사로
일찍 퇴근하여 버렸다.
이 때 나는 참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과 만나고 있음을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발견하였다. 마치 먼 고도로
유배당한 것처럼 수많은 상념과 번민들이 쇠사슬이 되어 칭칭 나를 감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내면 속에 용기 있는 삶이 박혀 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소리쳐 비명을 지르듯 비겁한 자, 위선자라고 내 자신을 탄핵하면서 소주빛 같이 정갈한 울음을 토해내었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고 수없이 강조하면서 생사가 없는 삶과 용기를 열어 보이지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본래 생사가 없다고 강조한 그 당시 고승들이
왜 이처럼 무기력한가에 대한 실의와 좌절은 가슴속에서 분노를 만들었다.
이렇게 며칠 동안 내 자신에 대해 탄핵을 계속하였을 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 동안 역사적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살아있다는 것이 몹시 죄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일상의
일그러진 삶의 그림자가 깊게 배어 있음도 아울러 발견할 수 있었고, 고통을 피해 있는 자신이 처음으로 저주스러웠다.
10·27
사태는 서서히 날이 갈수록 진정되었다. 그리고 나를 에워싸고 있던 번민의 쇠사슬도 한겹 한겹 풀려가고 있음을 생활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생활이 일 주일쯤 되었을까. 아니 사태가 일어난 지 열흘이 되던 날이다. 호국사로 늦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나는 누구냐고 상대방을 확인하였다.
“스님, 저입니다. 조선일보 이준우입니다.”
친절한 목소리가 수화기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웬일로 전화를 했느냐고 사무적으로 물었다.
불교계를 위한 일이니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이부장과 약속 장소에 같이 대좌하였다. 항상 상대방에게 친절을 내보이고 있는 이부장.
“스님, 괴로운 일을 당하셨지요?”
괴로운
표정을 아무 가식 없이 지어 보였다.
“현대 불교사에 기록될 잊을 수 없는 상처입니다.”
나는 이부장에게 이번 사태를 잊을 수 없는
상처라고 표현하였다.
“우리 신문 일요일 아침 대담에 모실 스님 한 분을 추천해 주십시오. 운허 스님은 병환 중이고 탄허 스님은
여러 번 모셨고 아주 참신한 스님이 좋겠는데……”그는 걱정스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약간 걱정스럽고 고통스런 표정이 이부장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원래 신문사가 원하는 스님은 이름이 좀 알려져 있고, 수행에 규범이 될 말한 고승(高僧)이었다.
운허 스님, 탄허
스님을 제하고 나면 서울에서는 그렇게 신문사가 원하는 스님이 없을 것 같았다.
“고송 스님이 좋은데……”
나는 파계사에 계신
고송(古松) 스님을 떠올렸다. 아직 한 번도 세정과 야합하지도 않았고 항상 종단 일에는 무관심한 스님이었다.
고송 스님에 대한
설명을 하자 이부장도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스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는 대구 팔공산으로 가야 되기 때문에 시각이
촉박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이런 문제로 고송 스님은 보류하고 서울에서, 그리고 근교에서
찾아보았다.
나의 뇌리에 전광석화처럼 관응(觀應) 스님이 떠올랐다.
“관응 스님은 어때요?”
“전화를 했더니 일체 응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부장이 또 한 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석주 스님이 좋겠군요.”
이부장도 동의하였다. 그리고
만족한 빛이 그의 얼굴에 퍼지고 있었다.
“스님 오랫동안 종단을 출입하면서 석주 스님을 뵈올 기회를 가졌으나 수행력은 모르고
있었습니다.”조선일보 취재 차에 오르고 나서 그가 한 말이었다.
“중국 남악회양 선사와 마조도일 선사(馬祖道一 禪師)의 특징만을
합해 놓은 스님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이부장에게 말을 해놓고 보니 그것은 순전히 나의 상상력에 의해 급조된 스님의 삶이었다. 사실 나는 스님의
내면적 모습을 본 일도 없고 수행력을 실험해 본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스님을 두 번째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님을 만날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남악회양과 마조도일을 떠올렸으며, 이 두 사람의 특징을 합해 가지고 스님의 구체적 삶을 재조직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난 것은 바로 이 글을 쓰기 위해 1981년 6월 29일 아침, 스님을 방문했을 때이다.
삼청동으로 가는 택시를 타고 칠보사 앞에서
내렸을 때 찬란한 6월의 햇빛이 검푸른 녹음 위에서 순금을 만들고 있었다.
도심 속 절 마당에는 무성한 수목들이 많은 잎들을 땅
밑으로 내려놓고 있었고, 가끔 풍경 소리가 산사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스님은 침대 위에서 책을 보다가 반갑게 나를
맞이하였다.
검소한 방이었다. 별로 그렇게 요란스러운 치장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속으로 왜 이렇게 스님은 원형의 질로 존재하고
있을까. 좀 스님의 인격에 어울리지 않더라도 거짓말과 수식 같은 미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천성적으로 자기
생활에 수식을 가하지 않았다. 아무리 두드리고 벗겨도 보이지 않을 성역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스님만이 소유하고 있는 삶의 비밀이었다. 또 이
비밀은 스님의 정체이고 수행력이라고 단정하였다.
겉으로는 선(禪)의 야성적 면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안으로는 무서운 오도적 힘이
있었고, 잔잔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사물의 근원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마조도일, 남악회양, 그리고 운문(雲門)의
세계를 집합하여 스님을 재구성하면 스님이 지니고 있는 소박한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탈로 가는
길
내가 많은 선사들을 만나보고 대충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유형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온건한 면과 격렬한 면을 가진 것이 특징이었다.
특히 선종 오가(五家) 개산조(開山祖)들 중에서 말한다면 위산(僞山)과
동산(洞山), 그리고 법안(法眼)은 전자에 속하고 임제와 운문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후자들 중 임제는 사상적으로도 그렇지만
선행위(禪行爲)에 있어서는 충격적이고 야성적인 기질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운문만큼은 덜하다.
임제의 교수 방법은 번개가 내려치는
것같이 전광석화적이고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울림이 있다.
옛부터 전해 오지만 사자가 한 번 포효를 하면 다른 짐승들은 몸을
움추리듯, 그의 할(喝)소리에 상대방은 기를 펴지 못하고 완전히 압도당하고 만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를 만나는 사람치고 무참하게 난도질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무지와 무명을 상처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의지가 석주 스님의 내면 깊이 깔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비록 겉으로는 인자하지만 한 번 전미개오(轉迷開悟)를 위해 칼을 빼면 생사를 양단하리라고 믿었다.
사실
임제가 그랬다. 그 앞에 부처와 보살, 그리고 조사를 만났다 하면 사정없이 후려쳤을 것이고 사자처럼 포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지독한
사람은 운문 스님이다.
임제가 만나는 사람에게만 할(喝)과 봉(棒)을 씌운다면 운문은 모든 사람을, 심지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횡포를 앞세워 기세를 꺽어버린다. 그래서 그는 할이나 봉을 쓰지 않고 험담가처럼 악담을 주제로 하여 상대방의 무지를 타도해 버린다.
한 마디로 그는 중국 불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설가이며 소피스트 같은 달변가이다.
그러나 석주 스님에게는 이런 독설이나 달변은
없다. 다만 그 의지를 안으로 갖추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운문과 같이 관념과 우상을 파괴하는 데는 동일한 점이
있다.
격외도리(格外道理)를 사용하여 남을 속이거나 화두, 즉 오도적 도구를 던져 관념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한다. 그래서 스님에게
중국 불교에서 가장 인상적인 스님이 누구냐고 하면 서슴없이 운문이라고 답변한다.
그는 운문의 삶을 안으로 재조직하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그것을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려 한다.
사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운문만큼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개오한 삶을 격렬하게 표현한
사람도 없다. 대표적인 예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될 것이다.
그는 어떤 법회에서 설법을 하던 중 갑자기 부처님을 끌어 들여
말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다시 내 앞에서 외친다면 일격에 그를 죽여 육신을 개먹이로 주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데
조금이나마 공헌하였을 것이다.”감히 누구도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부처를 부정하는 논리는 곧 자기가 부처임을 강조하는 선의 변증법이다. 운문은
이렇게 자기 눈 앞에 있는 사물을 부정해 놓고 대긍정의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운문은 유마거사(維摩居士) 같은 동정적인 사유를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공자라는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심지어 속인조차 그러하거늘 하물며 우리 수행인이 온종일 무슨 일이고
함에 있어서 크게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노력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세계를 말하면서, 나는 그대들을 언어로서 속이지 않는다.
그대들 자신이 영구불변한 부처이다. 이것이 바로 진아(眞我)이다. 이 진아는 아무런 결핍이 없는 완전한 인격체이다.
격렬한 의지를
가진 운문에게 너무 논리적인 이론 같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일상 의식과는 항상 다른 방향에서 사고를 진행하면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의
행장에 나타난 재미난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는데 그는 어느 날 나무로 만든 사자의 입에 자기 손을 집어 넣고,“살려줘요! 물려
죽겠어요!”
라고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참으로 우리의 의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인 것 같다.
석주 스님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자네도 운문의 함정에서 벗어나야지.”
하고 껄껄 웃으셨다.
스님은 나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스님의 사상은 운문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운문에서 이탈하여 스님이 차지하고 있는 평면적 공간에 들어서기로 작정하였다.
왜냐하면 일상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벗겨 나아갈 때 피를 흘리며 펄펄 뛸 스님의 거짓 없는 육성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님, 몇 살 때 입산을 하셨나요?”
“열다섯 살에 입산을 하였지. 특별한 이유는 없어. 처음으로 출가한 곳이
산사가 아니고 서울 시내에 있는 선학원이야. 마침 그때 외삼촌 아저씨가 붓 장사를 하였는데 자주 선학원에 들렀던 모양이야.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곳 남전 스님에게 가서 삭발을 하였지.”고해성사를 하는 것같이 숨김없이 지난날을 털어 내어 보였다.
입산 자체가 어떤 이유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숙명적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하였다.
사랑과 절망의 함정
그 때
선학원이라면 스님의 스승 남전 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이고 또 남전 스님은 서도(書道)로 이름을 날리던 스님이기도 하다.
“선학원에
있다가 스무 살 때 범어사로 옮겨 경전을 보았어. 그리고 29세에 금강산 마하연에 가서 참선을 했지. 그리고 그 후 오대산에서 방한암 스님을
모시고 참선을 하였지만 아직도 마음에는 불안한 그늘이 서식하고 있는 것 같아. 또 하나, 지난 일을 말할 수 있는데 그 당시 많은 승려들이
다투어 장가를 갔어. 나도 선학원에 있으면서 장가든 친구 집에 가서 밤을 새운 일이 있지.”
“혹시 여자에게 유혹을 당해본 일은
없습니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뛰어난 인재들은 여자를 선택하더군. 가정을 가지고, 수행하는 것보다 본능의 즐거움을 만끽하는데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어. 그런데 말이야, 솔직한 심정인데 나는 태어날 때부터 목석인 모양이야. 여자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계율에 대한
선입감이 항상 나를 지배하였어. 이러한 나를 보고 친구들은 불구자라고 놀려대기도 하였지만 30대였을 때는 밤에 몽정(夢精)을 하기도 했지.”사실
계율에 대한 불타의 말씀은 검사의 논고만큼 준엄하다.
부처님은 사분율(四分律)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서 중생들이 음란한
마음만 없다면 생사에서 바로 해탈할 것이다. 너희가 수행하는 것은 번뇌를 없애려는 것인데, 만약 음란한 마음을 끊지 않는다면 절대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사 근기가 뛰어나 선정(禪定)이나 지혜가 생겼다 할지라도 음행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마군의 길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내가
열반에 든 뒤 말세는 그러한 마군의 무리들이 성행하여 음행을 탐하면서도 선지식 노릇을 하며 어리석은 중생들을 애욕과 어리석은 소견의 구렁에
빠뜨릴 것이다. 너희들이 삼매를 닦으려면 먼저 음욕부터 끊도록 하여라. 이것이 모든 여래의 첫째 결정인 청정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음욕을 끊지
않고 수도한다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 모래를 가지고는 백 천 겁을 찐다 할지라도 밥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음행 하는
몸으로 불과(佛果)를 얻으려 하면 아무리 미묘하게 깨닫는다 하여도 그것은 모두 음욕의 근본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다.
“스님께서는 일생을 사시면서 원한 같은 인과는 갖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인욕이 부족한 것 같아.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러는지 아니면 몰라서 그러는지 인욕 부족으로 사고가 일어날 때가 많아. 원한이란 남으로부터 해를 입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감정이어서 피해 의식과 복수 사이에 가로 놓인 정감적 측면이라고 해석하면 틀리지 않겠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남들과 무수히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하며 의지와 의지가 무수히 교차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어. 그런데 당사자인 우리가 모두 성인이라면 모르거니와 가끔 선악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범부이기 때문에 남을 해치기도 하고 나아가서 자신도 해를 입을 때가 있어. 그러나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아.”“현재 스님의 마음에는 죄의식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죄 지은 자는 이 세상에서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괴로워하게 돼. 기독교에서도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되었다고 하지 않아?
이것을 그들은 원죄라고 부르고 있지.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죄악의 뿌리가 우리 모두의 내면에 가득해 있어. 오직 신의 은총에
의해 구제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약간 그 해석이 달라. 사람이 지닌 본성은 원래 청정한데 그것을 더럽히는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보고 있어.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독(三毒)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죄는 삼독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지. 그러나
무엇에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므로 죄악에도 죄악 자체의 모습이나 죄악의 본질 같은 것은 존재치 않는다고 보지.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란 원래 없지만 마음을 쫓아 일어날 뿐이야. 나라고 일생을 살면서 잘못된 일이 없겠어? 다만 참회를 통해서
자기 회복을 할 뿐이지.”
“스님은 죽어서도 영혼이 존재하고 또 윤회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윤회란 생사를 되풀이한다는
의미야. 즉 생전에 지은 업(業) 때문에 죽어서 다시 태어나 그 보(報)를 받는다는 인과법칙(因果法則)인데, 인과를 믿으면 윤회를 믿지 않을 수
없지.”“수행인은 아무것도 갖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스님은 오늘의 수행인이 법의를 입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님네가 입는 법의를 원래 팔리어에서는 가사(袈裟)라고 해요. 그런데 원래 이 가사는 사낭꾼이 입는 누더기 옷을
뜻하는 말인데, 불교 승단이 성립하자 스님들에게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할 것이 요구되어서 의복의 사치가 금지되었어. 그리하여
그들은 남이 버린 옷조각을 모아서 꿰매어 입었던 것이야. 가사를 분소의(糞掃衣)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밑을 씻는 옷조각으로 만든 옷이란 뜻이 담겨 있어. 또 <사분률>에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묘지에 버려진 것, 시체를
씻던 것, 쥐가 쏠아 못 쓰게 된 것 등 열 가지로 규정돼 있어. 이 모두 무소유를 마음 속에 갖도록 한 부처님의 자비스런 배려이지. 그러나
나부터 일류 모직으로 옷을 해 입고 있으니 더 할 말이 없지.”
“스님께서는 스승 남전 스님 이후로 가장 오래 선학원에 계셨습니다.
특히 해방되기 전에도 계셨으니까, 만해(萬海) 한용운 스님에 대한 인상 같은 것이 남아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만해 스님은
승려라기보다 독립 운동가요, 문장가인 것 같아. 내가 만해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화엄경> <십현담(十玄談)>을 번역하고
주해(注解)를 달아 가지고 올 때 만났는데 참으로 용기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그 때 <님의 침묵>이 처음으로
발표되었는데 그렇게 요즈음처럼 각광을 받지는 못했고, 또 소설은 더 더욱 칭찬 받지 못했어. 인상에 남는 것이 있다면 일체 불의와는 타협을 하지
않았고,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행동으로 옮겼어. 그런데 그 당시 수행승들 하고는 자리를 같이 안 하더군.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기 고독을 극복하지 못하고 법의를 벗고 여자하고 결혼한 것은 불만이야. 그것은 만해의 불명예 같아.”
“스님에게 오도송이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불행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오도송이 없어. 남들처럼 뱃심 좋게 한시(漢詩) 한 구절 지어 놓고 오도송이라고
주장할 만한 배짱도 없고 보는 대로 내 모양은 이것 뿐이야.”
스님에게 비록 오도송은 없었지만 역경원장으로 계시면서 <금강경>
<열반경> <법화경> <유마경> 등을 자비로 출판하셨고 남달리 뛰어난 서도와 문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스님은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셨고, 포교원장, 감찰원장 등 종단에 크고 작은 감투를 다 거치기도 하셨다.
“스님께서 일생 동안
드는 화두가 무엇입니까?”
“마삼근(麻三斤)이야.”
마삼근(麻三斤)이라고 하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천 칠백 공안(千 七百 公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화두이다. 중국에 어떤 스님이 동산사 수초 선사(洞山寺 首初 禪師)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동산이
마삼근이라고 대답한 데서 생겨난 화두이다. 이러한 질문은 선종의 문답에서만이 볼 수 있는 희귀한 답변이다.
일상적 논리를
무시함으로써 사변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고 마음의 통로를 따라 자기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화두를 오도적 도구라고 한
것이다.
“지금 열반하신다면 스님께서는 후회하시겠습니까?”
“아무것도 후회하는 것이 없어. 죽은 후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서 입산을
하고 싶어.”70이 넘은 스님의 이마에는 아직 젊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친하게 지내던 청담(靑潭) 스님과 경산(慶山) 스님을 잃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고 하였다.
나는 이야기를 마치고 절문 밖으로 나오면서 나도 얼마 있지 않아 저처럼 깊은 고독 속에서 임종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갑자기 온 전신에 외로움이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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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월산 대선사(月山 大禪師) 상
걸림 없는 자유 버림의
미덕(美德)
월산(月山) 큰스님을 뵙고 있으면 머리 속은 이른 봄 맑은 햇살이 스며든 것같이 자성(自性)과 영혼은
새롭게 빛난다. 자상하시면서 인자하시고 근엄과 권위를 지녔으면서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상대의 무지를 깨트려 버려 누구든 그의 앞에서
조복(調伏)당하고 만다. 걸인이 왔을 때는 상대가 지니고 있는 그릇에 알맞게 허기를 채워주고 기쁨을 만들게 한다.
거친
납자(衲者)가 찾아오면 ‘오늘은 아수라(阿修羅)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겠구나?’ 먼저 말을 던지고나서 그의 어리석음을 때로는 봉(棒)으로 또
할(喝)로써 번뇌의 가슴을 찢어버린다. 임제(臨濟)의 선기(禪機)를 알면서도 임제에 얽매이지 않고 덕산(德山)의 야성적 (野性的) 기질을
체득하였으면서도 함부로 봉(棒)을 쓰지 않는다. 스님에게 있어 봉(棒)은 중생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지극한 애정이 된다. 큰스님은 만물(萬物)의
섭리와 숨소리를 듣고 만산만수(萬山萬水)를 그대로 부처로 돈오(頓悟)해 버리는 안목을 갖고 계신다.
그렇다고 옛 조사(祖師)들이
삼천대천세계(三天大千世界)가 그대로 법신체라고 되풀이한 말을 그대로 사용치 않고 ‘여러분이 만법(萬法)을 창조하는 주인공(主人公)’이라고 담담히
말씀하신다. 창조적인 것이 아닌 표절은 스님에게 있어 금물이다. 대부분 오늘의 선사(禪師)들의 법어는 조사어록(祖師語錄)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으면 적당히 표절하여 게송을 만들지만 스님 만큼은 자신이 체득한 삶을 시적(詩的) 형태를 빌려 표현한다.
그래서 스님의 육성은
살아 움직인다. 오도적(悟道的) 원천(源泉)이 깊고 고요하다. 능활능살(能活能殺)이 자재(自在)할 뿐 아니라, 이러한 돈오적(頓悟的)
선기(禪機)를 함부로 사용치 않고 근기에 따라 활인검(活人劒)을 사용하신다. 자비의 영토가 광활하여 스님 곁으로 다가서면 봄날에나 체험할 수
있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애정의 바람이 가슴을 열고 스며들며 구하는 것이 있으면 거절하지 않고, 떠나는 사람을 잡지도 않는다.
다만
마음을 다스리는 계(戒)를 잃어버리면 모든 허물이 일어남을 깨우쳐 주시고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 백가활허(百家活許), 즉
우리들의 살림살이가 아니냐고 깨닫게 해 주신다. 삶의 고통스런 원인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생각을 잘못 일으켜 그것이 욕심이 되고
상대에게 화근을 입힌다고 강조하시면서
一念瞋心起 百萬障門開
한 생각 한 마음에 성냄을 일으키면 일만 가지의 장해(障害)의
마음이 열림을 왜 사람들은 모를까하고 안타까워 하시며 번뇌가 존엄한 생명을 해치게 하는 원인임을 고구정념으로 가르치신다.
스님은
불교 선종(禪宗)의 거인(巨人)이면서도 스스로 자존(自尊)하지 않고 경허(鏡虛) 만공(萬空), 보월(寶月) 금오(金烏)의 법맥을
전수(傳受)했으면서도 그것에 자만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 앞에 자기를 낮춘다.
어느 날 스님에게 향상일로(向上一路)의 도리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스님은 하향(下向)해서 내려오면 그것을 체험할 것이다 하고 향상(向上)과 향하(向下)의 본질적 차이를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불법 자체에 중생이 특별히 존재할 수 없다. 이는 중생이 본래 허물로부터 해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의 법문을 듣는
사람은 맑은 영혼을 회복한다.
스님은 일찍이 1943년 경기도 망월사(望月寺)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하여 개오(開悟)의 삶을
시작하여 생사의 원초적 속박에서 벗어나 법계의 자유인(自由人)이 되셨고 제불제조(諸佛諸祖)의 밀의(密意)를 타파하여 부처와 조사(祖師)에게도
얽매이지 않았다. 이러한 스님의 오도적(悟道的) 삶은 한국 선종(禪宗)의 지평을 넓히는데 기여했으며 선사(禪師)의 개안(開眼)은 법맥의 불빛으로
불멸할 것이다.
그러나 스님도 구제의 원력이 깊어 때로는 사판(事判)의 행정에 몰두하기도 했다. 1969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고
원장 자리에 있다가 ‘이 자리에 더 있으면 자신이 더럽혀진다’고 하시면서 많은 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운수(雲水)처럼 산으로 돌아가
은현(隱顯)을 자재(自在)하였다. 그리고 신흥사·동화사·법주사 불국사 주지 등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납자(衲者)에게 개안(開眼)을 주셨고,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元老會議 議長)을 맡고 법보신문을 경영하시면서도 한 군데 얽매이지 않고 오직 내심자증(內心自證)의 돈오적(頓悟的) 탐구에만
몰두하고 계신다. 사바의 큰 나그네, 그리고 선종(禪宗)의 운수거인(雲水巨人)의 발자취는 불교의 역사를 만드는데 큰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이러한 찬사에도 불구하고, 불국사 선원에서 화두(話頭)를 들고 이 세상의 적막을 지키고 계신다. 어느 누가 큰스님의 적막을
알랴.
인간은 누구나 절대 고독을 통해서 자기의 본체를 드러낼 수 있다. 욕망의 비대한 살점이 자기 내면에 가득하면 자기 실체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구도자는 육체가 지니고 있는 본능적 고통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육체라고 부를 만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맑은 영혼과
자성으로 존재해야 한다.
관중(關中)의 주인공을 깨닫지 못해 사람들은 날마다 하루에 수십 번씩 육도를 윤회하고
있지.
월산 큰스님은 자기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위와 같은 내용의 말을 독백처럼 흘린다.
여기서 관중(關中)의
주인공이란 일체 만물을 낳는 마음을 뜻한다. 자성의 창조적 원천을 관중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자성을 깨닫고 그것을 인격화해
버리면 인간의 슬픔과 고뇌는 만들어질 수 없다. 자성을 깨닫지 못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떠돌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성스러울 때는 한없이
너그럽고 모든 허물을 수용하고 용서하지만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히면 살의를 갖게 되고 상대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내게 된다. 그것 뿐이 아니다.
본능적 욕구를 참지 못하고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적 책임을 저버리면 인간은 축생과 다름없는 행위를 하게 된다. 스님은 그래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육도 윤회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온밀전진(穩蜜全眞)한 마음으로 살아야지. 그러면 너희들은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스러워
질 것이야.
진실은 감춘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진실은 사용한다고 해서 소멸되거나 축나지 않는다. 그것은 샘물처럼 가슴 속에서
솟아 오른다.
온밀전진(穩蜜全眞)을 체험해야만 섭류전물(涉流轉物)할 수 있지.
진실 그 자체가 되었을 때
섭류전물(涉流轉物)할 수 있다는 큰스님의 개안(開眼)은 우리에게 새로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섭류전물이란 보는 것 듣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꽃을 보면 스스로 꽃이 되어 황홀하게 피어나고 산을 대하면 스스로 산이 되어 높이 치솟은 채 부동의 모습을 자재하는 경지를 뜻한다.
그래서 큰스님의 품안은 만신자비(滿身慈悲)의 영토처럼 광활하다.
선(禪)이란 해탈과 자재의 길을 여는 요체(要諦)야. 그리고 죽이고
살리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보검을 얻게 하지. 바로 이것이 선문(禪門)의 가풍이지. 만약 살인도 활인검(殺人刀 活人劒)을 가진 사람이면
사람을 죽여도 상처하나 내지 않고 살려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지. 그래서 절대 진리란 언어로 표현되거나 전해지지 않아. 그런데 요즈음
수행자들을 보면 함부로 이것이 부처다, 진여다 하고 큰 소리만 친단 말야. 마치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빠진 원숭이처럼 말야. 언어로 전달될
수 없는 그 자리를 깨닫는데 왜 그리도 번잡한 공안(公案)들이 많은지. 공안에 속지 말아야지.
생사에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용무생사(用無生死)의 도리를 알 수 없다. 그래서 큰스님은 절대 진리를 깨달아 버리면 살활(殺活)을 자재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수많은 공안들이
사람을 속인다고 공안 그 자체에 집착하지 말도록 요구하고 있다. 무처토(無處討)의 비결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여기서 무처토(無處討)란
찾아야 할 대상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님의 생활은 운수처럼 자유스럽다. 가고 싶으면 시자를 데리고 시장에 가서 촌로처럼 물건을 사기도 하고
때로는 노유(老幼)를 초월하여 투망금린(透網金鱗)의 자유를 누리신다. 참으로 대수타니(帶水拖泥)의 헌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중생의
개안을 위해 스스로 진흙 투성이가 될 수 있는 비원(悲願)을 스님은 항상 간직하고 뭇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러나 스님은 때로 우리에게 자신의
고통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토로할 때도 있었다.
出身猶可易
脫體道應難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워지기는
쉬우나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기가 어려워.
따지고 보면 우리가 날마다 밟고 다니는 티끌이 하나하나 삼매를 이루고 있다.
독탈처(獨脫處)의 진진삼매(塵塵三昧)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스님의 말씀은 이해가 간다.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 내면적 아픔이야말로 깨침에 대한 정열적 탐구를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나는 스님의 이러한 독탈처(獨脫處)의 고독 앞에 내
자신에 대한 추궁과 회의를 거듭하였다. 밤이면 내 몸 속에서 조금씩 빠져 나가는 피빛이 깊은 계곡으로 가는 것을 느껴야 했고, 살아갈수록 육신의
일부에서 살점이 빠져나가 흙을 이루고 있는 것을 통렬히 깨닫기도 했다.
중생의 몸 속에 제불(諸佛)의 모체(母體)가 있다는 말보다 오히려
내 몸 속에서 밤이면 생명의 신령스러움이 빠져나가 나를 불면케 하는 번뇌의 뜨거운 갈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天地萬物이 總在這裏하니
這個是甚?
천지 만물이 다 이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眼皮蓋盡三千界
鼻孔能藏有百億身
눈꺼풀이
삼천 대천 세계를 덮고
콧구멍 안에 백억이나 되는 몸을 가진 개체가 있다.
古人이 云하되
釋迦彌勒이
猶是他奴다.
示云大衆은 일러보라.
他奴는 누구인가.
천지 만물이 이 속에 있다. 바로 그것이 관중(關中)의
주인공이다. 어찌 눈꺼풀이 삼천 대천 세계만을 덮겠는가. 그리고 콧구멍 속에 백억화신(百億化身)만이 있겠는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법신체라면
오히려 석가와 미륵은 타노(他奴)가 되고 말 것이다.
스님은 법문을 마치고 불국사 선원으로 돌아와
“주지도 버리고 원로회의
의장직도 버리고 싶은데 내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진실한 수행자는 부처도 보살도 나한(羅漢)도 나아가서 삼계(三界)의 어떠한 영화도 취하지
않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그런데 나보고 종정(宗正)에 뜻이 있다고? 하하(呵呵)”하고 웃어 버렸다.
구하고 버리는 것이 자신을
더럽히는 일임을 스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귀장악(全歸掌握)하면서 천고무비(千古無比)의 실존적 고독을 갖고 계신 스님은
천안돈개(千眼頓開)로 세상을 살피면서 홀로 점두(点頭)만 하고 있다.
누가 그 앞에서 석가와 미륵이 타노(他奴)라고
말하겠는가.
삶과 죽음에 절망하다
죽음과 열반을 생각하면서 경주로 가는 차에
올랐다.
분명히 인간은 죽음 하나를 달고 다니는 존재이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열반은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해탈이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중국 도은봉 선사(倒隱峰 禪師)는 역대 조사 중에서 자기 입적(入寂)을 입체적으로 연출한
분이다.
그는 역대 조사들이 실험한 좌탈입망(坐脫立亡)의 경지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물구나무를 서서 죽음을 연출하여 우리에게 충격과
경이를 주었다.
이럴 때 나에게 문득 죽음이 닥친다면 무엇으로 대처할 것인가. 차는 불국사에 도착하였다. 절 뜰 앞에 들어서니 현란한
단청빛과 태양을 포식한 장미 한 송이가 붉은 등을 켜고 있었고, 수억의 공간을 지난 비늘 같은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경주와
불국사, 수천 수만의 전설과 불상(佛像)을 소유한 불교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 도시가 이 경주이다. 그리고 불국사는 불교가 지향하고 있는
피안(彼岸)인 이상향을 조형 예술로 완성시켜 놓은 사원이다. 바로 이 곳에 월산(月山) 스님이 계신다.
갑자기 가슴에서 충전이 일어나듯
동요된 흥분을 가지고 스님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웬일이야. 결제 중에 정진은 하지 않고……”
날카로운 비수 하나가 가슴에 와
꽂히는 것 같았다.
수행인에게 정진은 자기 면목을 체험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스님의 말 한 마디에 마음은 자꾸 절망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더욱이 입을 잘못 열었다가는 할(喝)과 봉(棒) 세례를 면치 못할 것 같아 나는 잠깐 침묵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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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산(月山) 대선사 하
“스님, 중생에게 가장 진실한 고통이 있다면 생사의
고통입니다. 생사에서 해탈하려면 어떻게 해야지요?”“누가 생사를 묶어 놓았나? 수행인은 생사의 미궁 속으로 한번쯤 용기있게 뛰어들어야 해.
그리고 생사에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생사를 초월할 수 있겠어?”스님은 언젠가 소멸되어 버릴 죽음을 밖으로 밀어내어 버리고 이승의 삶의
고통과 관계 없는 불빛 같은 삶을 안으로 쌓아두고 사시는 것 같았다.
사실 본성(本性)에는 생사도 존재하지 않고 열반도 존재하지
않는다.
스님은 이러한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의미를 체득하고 계셨다.
“오늘 이 시대는 참으로 여러 측면에서 살아가는데 많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뇌하고 있는 민중을 위해 스님께서 한 말씀해 주십시오.”“오늘날 현대인은 인내가 없는 것 같아.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것을 얻지 못해. 고통을 절실히 경영하는 사람만이 오늘을 살아갈 수 있어.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개체는 소우주야.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은 대우주이고, 자기 자신이 소우주라면 소우주 속에 있는 자기 고통은 극기해야지. 고통을 극기하고 나면 소우주 자체가 바로 생사를 벗는
해탈장인 줄 알게 될 것이야. 만약 고통을 피해 다닌다면 참으로 해탈의 길은 멀어져. 견성(見性)하려면 중국 현사(玄沙) 스님의
삼종병(三種病)을 깨달아야 돼. 장님에겐 쇠뭉치를 쥐고 털채를 세운들 보일 리가 없고 귀머거리에겐 입이 아프게 지껄여봤자 들릴 리 없으며
벙어리에겐 아무리 말을 하라고 한들 말할 리 없으니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교화시켜야 되겠는가. 현대인 모두가 이 삼종병에 걸려 있어. 그러나 한
마음이 깨끗하면 일체 세계가 깨끗하듯이 마음의 뜨락이 비어 있고 맑아 있어야 중생의 아픔을 들을 수 있지.”오랜 수명 끝에 얻어진 내적
개안(開眼)은 사물의 본체를 훤히 들여다보면서 영원한 생명체를 깨우쳐 주었다.
스님은 들고 있던 주장자를 한 번 들어 보이고나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는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진실한 무지였다. 그리고 약간 용기를 내어 그 동안
간직했던 의심덩어리를 하나하나 풀어 놓아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독자들은 이 대목에 사량계교(思量計較)를 앞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다.
어떤 것이 너 자신의 보배인가?
“스님, 진실한 불법(佛法)을 어디서 구해야
되겠습니까?”“자기의 보배 창고는 던져버리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다.”진실한 불법은 마음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자체가 중생을 이루고 부처를 이루는 보배 창고란 것을 깨우치는 말이었다.
“어떤 것이 나의 본래 보배
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풍족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 어찌
밖으로 구하려 하는가.”“어떤 것이 참다운 부처입니까?”
“맑은 물에 얼굴을 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랴.”“스님께서는 어떤 법으로 사람들을 제도합니까?”
“나는 어떠한 법으로도 사람을 제도한 일이 없다.”
“어떠한 법으로 열반을
증득할 수 있습니까?”
“생사의 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것이 생사의 업(業)입니까?”
“큰 열반을 구하는 것이 생사의
업이며, 더러운 것을 버리고 깨끗함을 취하는 것이 생사의 업이며, 믿음과 깨우침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생사의 업이다.”“어찌해야만
생사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본래 속박된 일이 없으니 해탈을 구할 필요가 없다. 바로 사용하고 바로 행함이 생사 해탈이다.”“이
우주가 생기기 이전 중생은 어디서 왔습니까?”
“돌기둥이 아기를 배는 것과 같다.”
“천지(天地)가 분화(分化)한 뒤에는
어떠합니까?”
“조각 구름이 맑은 하늘을 가리는 것 같다.”
“어떤 것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우물 속에다
사과 나무를 심는다.”
“어떤 것이 진실한 보살도입니까?”
“거기에다 똥을 누지 말고 가거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부처란 서천(西天)의 늙은 비구이니라.”
“어떤 것이 선(禪)입니까?”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다가 꼬리를 잊고
쓰러지느니라.”“어떤 것이 생사의 불길 속에 몸을 숨기는 일입니까?”“어디 가리울 곳이 있느냐?”
“조사(祖師)의 뜻과 경전의 뜻이
같습니까? 다릅니까?”“문수는 사자를 타고 보현은 코끼리를 탔는데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어떤 것이 정토(淨土)입니까?”
“누가 그대를
더렵혔는가.”
“어떤 것이 스님의 참다운 면목입니까?”
“산과 강이 달린다.”
“어떤 것이 나의 실상입니까?”
“산을 돌고
물을 구경하여라.”
“생사가 지금 닥쳐오면 어떻게 물리치겠습니까?”
“살려다오. 살려다오.”
“어떤 것들이 제불제조(諸佛諸祖)의
경계입니까?”
“비가 오면 구름이 어둡고 낮이 개이면 일월이 밝다.”“어떤 것이 묘각명심(妙覺明心)입니까?”
“올 겨울의 벼는 가을비
올 때부터 이루어졌느니라.”“어떤 것이 평상심(平常心)으로 도에 합하는 것입니까?”“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니 세월이 지나가고, 산을 보고 물을
보니 세월이 상쾌하다.”“그러면 중생이 믿을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대는 늙은 쥐가 소금을 씹는 것을 보았느냐?”
“중은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지난 밤 삼경에 달이 산봉우리에 떴다.”
“사람의 몸을 받기 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바다 위에 들소가
노래하고 세 번 손뼉을 치니 한 줄기 붉은 줄이 손바닥 사이에서 나누어진다.”“어떤 것이 만법(萬法)의 근원입니까?”
“공중에도 거둘 수
없고, 땅에서도 꾸릴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었다. 마음 속에 산적했던 의심 뭉치가 밖으로 빠져나가고
없었다.
선사는 조금도 궁지에 몰리지 않고 오히려 어떤 통쾌감을 수반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 때마다 나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였다. 그것은 또한 나의 무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님이 대답한 주제 속에는 중국 황벽의 사상이 깊게 깔려 있음을 볼 수 있고, 반면
일체 조사의 사상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새로운 창조의 새벽을 열고 있었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시(詩)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관념과
상징, 그리고 이미지가 동반되듯이 스님의 법문 속에도 이러한 면이 짙게 부각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중생을 파괴하여
새로운 진아를 구성하려는 긴장과 경이가 가득하였다.
스님에게는 진아가 때로 당신으로 파악되기도 하고 주인공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여기서 당신 혹은 진아는 자유자재로 우주 내외를 넘나드는 존재를 말한다.
사실 누구나 진아를 발견하면 이기적 관심을 지닌
소아(小我)로 부터 해방된다. 그래서 만일 구도자가 사물의 근본인 마음 심체(心體)를 깨닫지 못하면 진실한 마음에서 이탈하여 다른 마음을 만들고
자기 자신 밖에서 부처를 찾으며 수도에 있어서도 현상과 수행에 얽매이기가 쉽다.
사실 불성(佛性)을 지닌 마음은 공허하고
편재(遍在)하며 고요하고 순수하다. 그것은 또 영광스럽고 신비한 평화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수행인은 필히 이러한 경지를 각성하여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옛 조사들은 영적인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다시 이야기하여 이 영적인 깨달음은 본성이 허공과
같아 무시 무종하며, 생사의 지배도 받지 아니하고,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며, 더럽혀지지도 순수하지도 않으며, 시끄럽지도 조용하지도 않으며,
늙지도 젊지도 않으며, 공간을 점유하지도 않으며, 내외도 없으며, 수량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색상도 없고 음성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일심의 마음은 상대적 관념을 넘어서 있다. 이는 언어로써 전달될 수 없고 직관(直觀), 깨달음에 의해서만 파악된다.
그래서 선은
부정을 통해 대긍정의 자유를 얻는다. 가령 예를 들어보면 구도에 있어서는 불(佛), 법(法), 승(僧) 어디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러하면
예불을 하여 무엇을 구하는가 하고 질문을 하면 그 대답 자체가 부정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불에도, 법에도, 승에도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답변한다. 여기서 이러한 부정은 얽매임을 떨쳐버리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처래 하처거(何處來
何處去)
인간은 죽음을 거부할 만한 힘이 없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종말이고 영원한 허무이다. 종말에 이 허무를
잉태하기 위해 인간은 산다.
하처래 하처거(何處來 何處去)……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인간은 생 이전의 곳도 모르고 또 죽음 이후의
곳도 모른다.
불타(佛陀)는 이러한 삶을 한 조각 뜬 구름이요, 죽음, 이것은 한 조각 구름의 쓰러짐이라고 말하였다.
사실
우리는 때로 죽음의 현장을 목격할 때가 있다. 수없이 비명횡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도 언젠가 그 함정에 묻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종교인은 사후 미래를 말하고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직접 화장막에 가서 한 번 보라. 한 시간이면
육체가 재가 되어 나오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재를 산과 강에 뿌리고 나면 한 인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죽음을 생각하면 늙은 노승들의 임종이 어느 때 들어 닥칠 것인가 하고 긴장할 때가 있다.
늙어 있는 것은 낡은 수레이고 짐을
부려버린 빈 수레라고 간혹 생각한다.
슬픔과 괴로움을 털어버린 빈 수레. 이 수레도 끝내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고 만다.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되듯이……
나는 스님 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중생이 살아가기
어려울수록 중생을 위해 고통을 나누어야 하는 자비가 있어야 해.”
三界自己用 入口東海水
삼계를 자유자재 하게 쓰고
한
입으로 동해 물을 마셔야 한다.
시방 세계일척안(十方 世界一隻眼)의 우주 정신과 생사 일여의 진여의식(眞如意識)이 스님의 내면에
가득차 있었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삶의 의미와 출가의 본분을 조용히 보임(保任)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실 수행인이란
내심자증(內心自證)을 통해 출신활로(出身活路)를 얻는 일이다. 구도자가 이러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세계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어 있는
존재와 다를 바가 없다.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을 때 7월의 고요가 절 뜰 앞에 적멸하고 있었다.
나는 곧장 분황사로
달려갔다. 그 곳에 모셔진 원효의 영정 앞에 서서 당신이야말로 고통을 진실히 실험하고 이제 고통의 세월 밖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바의 고통을 만나기 위해 때로는 기방에 가 있었고 술을 마시면서 부처의 자비를 삶의 음영 속에다 밀어 넣기도 하였습니다. 참으로 당신은
고통에서 출발하여 고통이 없는 인간학을 이룬 분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적막한 이 땅에 당신은 오시지 않습니까 하고 신들린 사람처럼 독백을 하다가
서울로 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갑자기 피로가 온 몸을 엄습하였다.
참으로 나라는 존재는 고통받는 부처인가?
머리는 희어도
마음은 희지 않는다고
옛 사람이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 닭소리를 한 번 들으매
사나이 먼 길을 다
마쳤도다
문득 나의 밑창을 깨달으니
모든 것이 다만 이렇도다
만천의 금과 보배의 무더기도
원래 빈
종이어라
밖에는 나무로 만든 사람이 노래를 하며
돌로 만든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고 있다.
- 서산 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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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관응 대선사(觀應 大禪師) 상
진면목의
접근
관응 스님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다만 필자가 1960년대에 스님의 슬하에서 수학을 할 때 느끼고 본 몇
가지 경험을 빼고는 행장(行狀)을 비롯해 내면의 세계를 알고 점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여기에 실린 글들은 필자의 상상력과
1960년대에 스님 슬하에서 수학할 때 느낀 인상과 그 후 몇 차례의 만남을 통해 얻은 사건들을 재구성했음을 밝혀둔다.
내가 십대
당시 그러니까 1961년에 처음 용주사로 찾아갔을 때 스님은 주지 겸 강사로 학인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열악한 경제 환경 속에서 스님은 사람을
길러야 한국 불교 장래가 밝아진다고 강조하시면서 경전을 강의하고 있었다. 내가 그 배움의 대열에 끼어들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구도적 열정과
젊음의 패기와 그다지 나쁜 인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용주사로 머물게 하였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 때 배움에 대한 열정에 목말라
있었고 십대가 체험해야 할 본능적 욕구에 방황하고 있었다. 밤이면 본능적 괴로움에 못 이겨 교교한 달빛에 미쳐 버렸고, 소녀 같은 감상에 모란이
황홀하게 피고 질 때도 눈물을 혼자 흘릴 만큼 불교적 허무에 탐닉되어 있었다. 그래서 막연한 기다림과 그리움이 가슴 속에 끓고 있을 때면 이것이
번뇌로다, 하고 초월적 의지를 갖지 못할 때 관응 스님과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스님의 첫 인상은 신라 예술이 빚어낸
반가사유상에서나 느낄 수 있는 명상과 내밀한 미소가 스님에게 있었다. 해박한 경전 지식은 물론이고 체계적 분석과 논리적 전개는 나의 학문적
허기를 채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때부터 지적 갈증을 해소하는 즐거움을 체득할 수 있었고, 구도자로서도 새로운 눈을
열었다. 인간의 번뇌가 자신을 속박하고 괴롭게 한다는 사실을 경전을 통해 배웠지만, 본능적 욕구에서 오는 고통을 극복하는데 있어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나의 영혼은 밤이면 홀로 떠돌고 있었고 그리움을 찾아 배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나와 같은 세대의 아름다운 여자를 볼
때마다 가슴이 통계(慟季)됨을 숨길 수 없었다. 번뇌가 불타고 있는 가슴을 식힐 방법을 찾지 못하고 밤이면 불면으로 날을 세우고 예불 시간이면
경건한 마음을 잃어버린 채 졸고 있을 때가 많았다.
불교를 배운다는 것이 자기를 비우는 일이요, 자기를 잊어버림은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내 속에 가득한 번뇌를 비우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고 나의 가난한 영혼은 그리움을 찾아 떠돌고 있었다. 이
때마다 나는 영혼을 끄집어 내어 돌맹이로 짓이기고 싶은 잔인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허덕이며 밤을 세울 때가 많았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일이 금지되어 있는 불교의 계와 율이 한없이 원망스러웠고 아울러 원초적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부피를 더해 갔다.
그러나 번뇌로 떠도는 일은 신앙심으로 그렇게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뒤늦게 깨달은 일이지만 도반들이 자기와 알고 지낸 여자에게
참으로 때묻지 않은 마음과 고통을 담은 편지를 마치 도둑질하듯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쓰고 있음을 훔쳐볼 때도 있었다. 나는 그 때마다
‘여자와 재물 보기를 독사와 같이 하라’는 경전 구절을 외우면서 스님은 인간으로서 번뇌를 누릴 자격도 없다는 말인가 하고 독백을 해야 했다.
그래서 밤이면 마음 속에 일어난 번뇌의 살점을 뜯고 피투성이가 된 나의 본능을 체험해야 했다. 그러나 관응 스님은 우리의 번뇌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체험해야 할 고통의 터널을 통과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자유스럽고 초탈한 모습이었다. 그는 가끔 경전 해석을 하면서 상당히
자기 도취에 경도되었고, 시사적인 발언으로 우리의 시선을 한군데로 집중시켰다. 그 때 월남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트리쾅’이란 월남 승려를
비판하였다.
‘트리쾅’은 그 당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월남 승려였고, ‘고단디엠’의 정권에 항거하고 있는 월남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디엠의 정권은 부패했고 불교를 극도로 탄압하였다. 그 탄압을 극복하기 위해 월남 승려들은 분신 자살이란 극한적
방법으로 저항하였다. 그 당시 승려의 분신 자살은 월남을 국제 사회에서 독재 국가로 인식시키는데 절대적 효과를 발휘했고 월남 국민으로부터는
승려의 분신 자살이 순교로 승화되었다. 스님은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승려의 분신 자살은 교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생명을
존엄시하는 불교가 스스로 자기 생명에 자해 행위를 하고 목숨을 불로 태운다는 것은 부처님 사상에 위배될 뿐 아니라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피는 것은 삼독(三毒)의 분노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부터 우리의 잘못된 불사문화(佛事文化)를
꼬집었다.
“우리 스님네들은 사람 키우는데 인색하다. 지금은 절 짓고 불상 조성하고 절 고치는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승려를
부처로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그뿐 아니라 사람 키우는 일에 원력을 갖지 않는 승려에게도 비판을 가했고, 불교를 올바르게 배우지 못한 승려들이
설쳐댄다고 불쾌할 정도로 매도하였다. 그뿐 아니라 선종의 일부 선지식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자신은 참선을 하지 않았지만 견성했다는 사람들의
법문을 듣고 있노라면 자기 목소리는 없고 남의 말만 훔쳐서 한다고 견성(見性) 그 자체를 부인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깨치지 못했지만,
경전이란 자로 견성했다는 사람의 사상을 측정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고 선가의 무지를 질타하였다. 그 것뿐만 아니었다. 내가 그 때 느꼈던
것은 염불한 사람에게도 부정적 시각을 스님은 갖고 있었다. 관세음보살이 귀머거리인가?‘관세음보살 비농한(觀世音菩薩非聾漢)’이라고 달관의 경지를
보였다.
그는 그 후 용주사 주지를 그만두고 천축산 무문관(無門關)에 들어가 그만이 회의하던 화두를 들고 6년 동안 정진과 고독
속에서 치열한 구도정신으로 자기를 해체하고 구성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는 1910년 9월 17일 예천에서 출생하여 1929년 경북
상주 남장사(南長寺)에서 탄홍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이래 1934년 유점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용곡대학(龍谷大學) 불교과를
졸업하였다.
현재는 직지사 조실로 계시지만 두문 불출하고 있다. 그는 현재 살아있는 원로 가운데 불교 교리는 물론이고
유식학(唯識學)의 뛰어난 대가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의 설교적 재능은 부처님 제자 ‘부루나 존자’에 비교될 만큼 명성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스님은 이제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뒤돌아보며 인간의 진실만은 늙고 병들지 않고 소멸되지 않음을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깨우쳐 주고
있다.
그가 직지사에서 다시 강원을 하기 전 <선문염송(禪門拈頌)> 강의를 할 때 나는 다시 수강생으로 그 법회에
참석했고 용주사에서 제자로서 강의를 듣던 때와 달리 스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넉넉한 해탈을 확보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스님은 우주를
한 생명체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한 법이란 곧 생명의 본질이라고 강조하면서 이 법을 깨달아 인격화한 분이 부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스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용주사 강원 생활을 상기하였다. 그 때 나는 승복 한 벌을 갈아 입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하였고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해 문학 서적을 비롯한 철학, 교양 서적을 읽던 옛 자화상을 그려보았다.
인간이란 자기 실험을 통해 성장된다. 무한한
사랑이 무한한 고통 속에서 오듯 한량없는 기쁨 역시 무한한 고통을 지날 때 탄생된다. 이제 스님은 직지사 위에 토굴 하나를 지어 모든 것을
버리고 있다. 육신의 허물을 벗고 맑고 영롱한 자성으로 이 세상을 관조하고 계신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근원적 고독에 사로잡혀 운수(雲水)처럼
떠돌고 있다.
용무생사(用無生死)를 위하여
오늘 아침에도 나는 대중과 같이 공양을 하지
못했습니다. 늙고부터 나를 편안히 모신다는 구실을 앞세워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외를 시키고, 밥도 내 방에서 혼자 먹도록 하고 있습니다.
밥상을 받고 보니 문득 내 자신이 먼 고도로 유배되어 약사발을 받고 있는 기분이고, 마치 짐승처럼 갖다준 밥을 혼자 먹는 기분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의 함정에 속박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에 대한 속박은
될는지 모르나 우리들 모두가 갖고 있는 자성까지 속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질서 속에
속박되어야 하고, 또 법률에 속박되어야 하고, 때로는 상황과 이념에 속박되어야 합니다. 너무나 우리 주위에는 금지 구역이
많습니다.
부처님도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육체는 자성을 속박하고 원초적 무명은 삶과 죽음의 쇠사슬을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화택(火宅)인가 싶습니다. 사실 현실은 인간의 욕망과 괴로움이 가득한 불타는 집과 같습니다.
이제 이 근본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그리고 불교는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는 종교입니다.
그러면 이 속박을
이루고 있는 근본은 무엇인가. 인간 내부에 가득 찬 무명, 즉 어둠입니다. 이 무명으로 인해 생사가 생기고 고통이 생기고 우리를 침해하고 있는
속박이 생깁니다. 내부에 깊숙이 깔려 있는 어둠, 이것을 우리 모두 자각해야 하고 수행하는 스님들도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정의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비본질 속 자아에서 이탈하는 부정 말입니다. 먼저 중생을 부정하고 나아가서 부처까지 부정해 버리는 논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중생이란 고집 때문에 괴로워하고 절망합니다. 중생이란 인간 개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뭇 생명체를 지칭한 말입니다.
각 개체의 생명, 그리고 사물마다 생명이 있다고 고집하고 있는 것이 중생입니다. 또 이 여러 개의 생명체는 각기 나름대로 욕망을 보호하고
보존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러 개의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생명체입니다. 마치
인간은 죽어서 자연의 일부가 되듯이 말입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생명체를 상일주재(常一主宰)한 진여법신(眞如法身)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일주재한 생명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비본질적 자아에서 이탈했을 때 성취됩니다. 이 시대에는 이러한 부정의 논리가 없는
동시에 수용하지도 않을려고 하고 있습니다. 선(禪)이란 바로 부정을 통해 대긍정의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생명의 실체를 깨달으려고
합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날부터 죽음의 고(苦)를 짊어지고 죽는 날까지 괴로움을 당하면서 무한한 생명을 추구하는 본능적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숙명적으로 유한한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 때문에 영구 불변한 삶의 실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 앞에 존재하는
현상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시간과 공간을 통해 소멸과 생성의 윤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이 성(成), 주(住), 괴(壞),
공(空)의 법칙에 의해 유전하듯이 인간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법칙에 의해 삶과 죽음의 명암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태적 존재의
생멸상(生滅相)에 불과합니다. 비록 존재의 형태가 소멸과 생성의 역사를 이루어 갈지라도 그 본체의 실상은 영구 불변합니다. 이 영구 불변한
우주의 실체를 진여(眞如) 혹은 법성이라고 옛 조사들은 파악하였고, 인간의 실존적 본질을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자(自) 혹은
심성진여(心性眞如)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주와 동일체로 개진(開陳)하여 재구성한 자아를 법신(法身)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법신은 육신과 같이 시시각각으로 소멸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생명체인 동시에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
우리들의 본래 면목입니다. 그리고 우주에 편만(遍滿)하는 진리를 인격화하고 그것을 체현(體現)하는 존재를 법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법신은
수행의 결과에 의해 실현되는 존재가 아니라 법우(法雨)로서 존재하는 이불(理佛)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법신은 불타(佛陀)만 구족(具足)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구족해 있습니다. 다만 고통받는 삶을 통해 자기 내부에서 본성인 법신을 파악하여 그것을 체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무모한 생명체인 법신을 망각하고 무명과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신론(起信論)>이나 유식(唯識)을 보면 우주와 인간의 실체를 크게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로서 구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래 체(體)는 보이지 않는 초험적(超驗的)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것은 모든 사물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진여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마음을 통하여 실현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인간은 그 인간적 조건을 초극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아뢰야식(識), 즉 여래장식(如來藏識)입니다.
숨막힐 정도로 쏟아지는 스님의 설법은
막힘이 없었다. 모든 사물에 달관하여 있어 자유 자재로 나에게 감명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많은 고승(高僧)을
만나보았지만 관응 스님만큼 어떤 도그마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도 처음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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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관응대선사(觀應大禪師) 하
무소유(無所有)를
위하여
문> 스님, 오늘의 불교는 베품이 없고 이욕정신(離慾精神)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답>여러분이 나에 대한 미천을 잘 알고 있지요. 나는 파계와 무득(無得)의 고통을 다 체험해 봤어요.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미화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진면목을 찾으려면 먼저 욕망의 집착에서 이탈해야 합니다. 또 베푼다는 것은 고통
받는 민중과 하나가 되는 첫째의 과제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위대한 영혼과 자기를 희생시켜 중생과 한 몸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생명
있는 것은 모두 여래(如來:부처)의 씨앗이기 때문에 일체 생명을 외경하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얼굴을 돌리고 마는 못난 이웃일지라도 바로
부처가 될 사람임을 깨달아야 하고 또 가난한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생명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위에 살고 있는 민중이 다름 아닌 부처입니다. 또 그 민중의 존엄성과 자유가 고통과 죄악으로 가려지게끔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일종의 자기 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종교인은 쉬지 않고 민중과 접촉을 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진실의 빛을 민중의 가슴에 불어 넣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이나 구제는 다 같이 사랑과 자비를 모체로 하고 있습니다. 또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 이것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니까 중생이 평화로워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자인 니이그렌도 말한 일이 있습니다.
신은 왜
인간을 사랑하는가? 신의 본성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성스러워질 수 있는 길은 사랑과 자비를 완성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종교인이 얼마나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진실한 사랑과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가 반성을 해야겠습니다. 내 자신이 체험한 일이지만
불교가 말하는 계율은 인간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질서입니다. 살생하지 말라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생명을 죽이다가 보면 자비의 씨앗은 파괴되고 맙니다. 즉 이웃을 사랑할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탐하는
것은 마음에 있는 맑고 청정한 빛을 없애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결혼을 해놓고 서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사랑의 씨앗을 파괴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또 너무 과욕을 하지 마십시오. 마음 속에 욕망이 비어져야만 참으로 진실한 재산이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사업을 하다
실패하거든 거기는 불순한 과욕과 탐심이 개입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의 인과인 동시에 역사의 인과입니다.
그는
마치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가처럼 때묻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내보이고 있었다. 욕망을 털어버린 자신과 순진 무구한 마음을 솔직
담백하게 털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는 피나는 절망과 고통을 체험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사물 자체의
움직이는 모습까지 역력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경지는 비본질적 자아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이룩되지 않는다. 또 하나 놀라게 하는 것은
선(禪)과 예술에 대한 지식이었다. 누구나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끝없는 사상(事象)과 접촉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또 풍부한 내적 체험 없이는 개오(開悟)를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중생은 부처를 이룰 수 있는가
문>
부처님으로부터 많은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깨달음을 이룩하였습니다. 특히 스님께서 관심이 가는 선사가 있다면...
답>나는
중국 마조 선사(馬祖 禪師)와 임제 선사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마조 선사에게는 나를 감동시켜준 일화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정의 아들이었고 보잘 것 없는 청소부였습니다. 그런데 마조 선사가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고향에 돌아갔습니다. 그 때 고향 사람들은 선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인 노파가 그를 알아보고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대단한 양반의 방문 때문에 이렇게
소동이 일어난 줄 알았는데 다름이 아니라 쓰레기 청소부 마씨의 아들 녀석이 왔구먼.”하고 웃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깨우침에 있어
귀천이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마조는 다음과 같이 자기 감회를
피력했습니다.
勸君莫還鄕
還鄕道不成
溪邊老凄子
喚我舊時名
권하건대 그대여, 고향일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나니
개울가의 옛 할머니
아직도 옛 이름을 부르네
이후 마조 선사는 고향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마조에게 매우 중요하게 드러난 사실은 자아 발견입니다. 어느 날 대운사(大雲寺)에서 왔다는 대주(大珠)와의 대화에서 이
점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대는 여기까지 무엇 하러 왔소?”
“저는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네. 나에게서 무슨 불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왜 그대는 자기 집의 보배를 돌보지 않고 멀리 떠나
방황하는가?”“저의 보배라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게 질문하는 바로 그 사람이 보배이지. 그 보배 안에 일체
모자람 없이 다 갖추어져 있네. 구태여 밖에서 찾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이 말을 듣고 대주 선사는 추리와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관에
의하여 자심돈오(自心頓悟)를 하였습니다.
임제 선사도 매력이 있는 분이야. 그가 선종에 대하여 매력을 갖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학계(學戒)하고 완전한 승려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체로 20세를 전후하여 황벽 선사를 찾아 보았어요. 그 당시 묵주도명 선사는 황벽 밑에 있는
스님이었는데 임제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황벽 선사를 찾아 불법을 물어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임제 선사는 묵주 스님이 시킨대로 황벽 선사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불교의 근본 종지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황벽은 아무 말도 않고 몽둥이로 후려갈겼습니다. 그것도
30대씩 세 번이나 쳤다니 임제 스님은 90대의 방망이를 맞았습니다. 임제는 화가 치밀어 황벽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문 밖을 나올려고 할 때
대우 선사(大愚 禪師)를 만나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길로 대우 스님을 찾았습니다. 대우는 임제에게
“그 동안 무엇을
배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임제는 솔직히
“세번이나 몽둥이로 맞은 일밖에 없다.”
고 하였습니다.
“황벽은
자네를 그토록 모든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셨는데 맞는 것이 그토록 섭섭한가?”하고 반문을 했을 때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황벽 스님의 불법도 별 것이 아니구먼.”
바로 이 선언 속에서 선종이 말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옛날 인상파 화가로 잘 알려진 고호에게도 선미(禪味)가 있는 것 같아요. 어느 날 그가
열심히 사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캔버스에 그려진 나무는 눈 앞에 있지를 않았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시야에는
나무가 없지 않습니까?”
그 때 고호는 등 뒤에 서 있는 나무를 가르켰습니다. 또 파스칼도 실물은 평범해서 아무도 칭찬하지 않지만
그 실물을 마치 실물처럼 묘사할 때 칭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범한 중생으로서는 칭찬받을 수 없지요. 부처가 될 수 있으니까
칭찬을 줄 수 있지요. 그래서 선사는 자연을 관찰할 때 눈 앞에 있는 자연을 잃어버리고 자연을 재창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의 생명을 보는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게 내면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과 육중히 닫혀진 압력에 견딤으로써 경건해 질 수 있고, 내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이나 구도는 정신의 분신(焚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아픔이며, 피를 삭히는 목숨의
형극(刑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해 둘 것은 선이 비록 불립문자를 주장하나 약간 존재를 인식하였을 때 이미
그 곳에는 언어가 개입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갖고 있는 의식은 언어를 통하지 않으면 존재와 만날 수 없지만 선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남악회양 선사가 일물(一物)이라고 했다가 다시 일물도, 즉 부중(不中)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가 낳은 예술의 귀재 장 콕토는 ‘이제 우리는 물구나무라도 서서 사람들을 웃길 수밖에 없다’고 한 일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낡은
언어, 낡은 인습에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은봉 선사 같은 분은 물구나무를 서서 입적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선이란 자기 가슴 속에 있는 낡은 욕망과 인습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관응 스님과의 대화는
<선문염송(禪門拈頌)> 강의를 중심으로 해서 내 나름으로 각색했음을 밝혀두고, 다만 스님이 이 땅에 오래오래 머물러 여러 사람의
가슴에 불타고 있는 모든 번뇌를 태워버리는 법등으로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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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고송 대선사(古松 大禪師) 상
내 몸에서 사리(舍利)를 찾지
말아라
며칠 동안 노승의 기침은 계속되었다. 새벽 일찍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 기침 소리는 자정이 넘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불치의 해수병이었다. 바짝 마른 몸에서 이루어진 기침 소리는 세찬 바람 소리의 생리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내 몸에
금속의 파편처럼 꽂히는 것 같았다.
명월당(明月堂)에 혼자 방 한 칸을 얻어 시자 한 사람 없이 그는 90평생을 혼자 살고 있었다.
그가 병석에 들어 눕자 누구 한 사람 병문안 간 사람이 없었고 약 한 봉지 사들고 찾아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흉칙하게 튀어나온 뼈 몇 개로
풍진 세상을 버티고 있었다.
나는 잠결 속에서 노승의 기침 소리를 듣고 그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였고, 간혹 꿈결에서는 물이 고인 논에서
개구리 울음이 들리는 것으로 착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개구리 울음 소리가 아닌 노승의 기침 소리였다.
그는 기침
소리를 통해 몸 속에 있는 수액을 뽑아 올리는 것 같았고, 모세 혈관마다 꽉 차 있는 핏방울을 소모시키는 것 같았다.
기침을 심하게 하고
난 그 뒷날 노승은 상당히 수척해 있었고 지층 깊이 침수해 들어가는 물체 같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몸이 메말라 갈수록 인광에서 일어나는
불빛마냥 빛나고 있었다. 마치 몸을 태워 불을 밝히는 반딧불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노승 앞을 지나가던 젊은 수행승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군.”
저주스럽다는 듯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것은 노승의 임종을 눈여겨 보고 있는 사람이 한
말과 같았다.
노승은 간밤에 기침을 어느 때보다 심하게 하였다. 나는 불면으로 노승의 기침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물기가 섞이지 않은 마른
바람이 그의 입을 통해서, 날카로운 물체가 쏟아져 나오듯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날 아침 누군가 ‘죽었어요’ 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나는 지난 밤 모진 기침 소리를 다시 연상하였다. 죽음을 예고하는 기침 소리, 마치 혈관 속에서 악을 쓰며 비명을 질러댄 것 같은 기침
소리가 그치자 그는 눈을 감은 것이다.
대중들은 귀찮은 듯 서둘러 장례식을 준비하였다. 거추장스런 물건을 빨리 치워버려야 되겠다는 생각들이
앞서고 있었다.
노승은 그의 존재 가치를 어느 누구 한 사람에게도 인정받지 않았다. 그는 쓰다 남은 폐품 같은 존재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노승의 영전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린 사람이 없었고 구성진 염불 소리를 내는 스님도 없었다. 그는 다만 자기만이 아는 고독을 안고 쓸쓸히
흙으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입적한 이름 없는 노승을 화장해 버리고 절로 돌아오면서 생각하였다.
물건을 태워버리듯, 바람과
불길의 섭리를 따라 그는 갔다고 간단히 단정하면서 못내 아쉬운 것이 있었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소유하였던 물건이 낡아 쓸모없이
되면 버린다. 애정이 가지 않은 물건도 버린다. 다만 집착이 있는 물건만을 오랫동안 소유하려고 한다.
어느 세상에 낡지 않고 소멸되지 않는
물건이 있을까.
노승은 우리에게 쓸모없는 물건이었고 애착이 가지 않는 물체에 불과하였다. 그는 형체 없는 바람같이 우리와 함께 잠깐 머물러
있다가 행방 없는 바람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그의 영전에는 찬란한 조상(弔喪)도 없었고 통곡도 없었다. 그리고 그리 흔한 사치스런 슬픔도
볼 수 없었다.
노승은 완전 범죄를 저지른 사람 같았다. 그는 삶을 통해 자기 흔적을 하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한 무더기 장작이
타서 재로 소멸되듯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흙과 바람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살고 간 생은 윤기가 없었고 정신적 삶이 될 만한 기록도
없었다.
그는 지능적으로 자기가 살고 간 공간에 삶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허무와 야합하여 종적을 감추어버린
존재였다.
나는 밤이 되어 곰곰히 생각하였다. 생전에 무관심하였던 그의 존재가 왜 갑자기 무서운 관심의 대상으로 등장되고 있을까.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승이 거처하던 방으로 건너갔다.
이유는 그가 그토록 자신의 생을 아무 허물없이 또
자취없이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의 삶이 나의 기억에 무엇 때문에 투영되지 않고 소외되어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자꾸만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승의 방은 청결하였다. 향내음이 방 안에 가득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가 와서 향을 피워 놓은 것도
아니었다.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감이 가슴에서 요동을 쳤다.
나는 불을 밝히고 방 안 구석구석을 현장 검증하듯 살펴보았지만 남은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느낄 수 있는 것은 코 끝에 와 닿는 향기뿐이었다.
병과 싸우다 임종한 사람의 방 같지 않게 아무 악취가 나지 않았고
이상한 향기만 가득하였다.
노승의 방은 완벽할 만큼 삶의 지문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남긴 고독한 적막뿐이었다. 이렇게
자기 일생을 완전 범죄를 한 사람처럼 지워버릴 수 있을까. 오히려 내쪽이 허탈하였다. 그것은 내가 그의 행방의 흔적을 찾고 있는 데에서 이루어진
허탈감이었다.
이토록 생을 완벽하게 살 수 있을까. 허탈한 마음으로 방 안을 나서려고 할 때 불빛에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벽에 걸린 동경(銅鏡)이었다. 시퍼렇게 멍든 자국처럼 낡아버린 동경은 사람 얼굴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제하고는 녹이 슬어
있었다.
나는 동경을 들고 내 방으로 돌아와서 그 동경을 통해 내 모습을 보았다. 불빛에 반사되어 투영된 물체는 나의 얼굴이 아니고 흉칙한
골격만 남아 있는 노승의 모습이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노승의 살아 있을 때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히
착각은 아니었고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나는 그만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동경은 노승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정체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 그의 일생을 조금씩 추적해 보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추리할 수 있는 것은 노승이 동경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날마다
점검하고 번뇌와 본능의 함정에 침윤되어 있는 모난 자기를 예리한 칼로 도려내고 진실한 자아의 정체와 원형을 재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각가가 처음에 돌이란 물체에 자신이 조각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부여하고 난 다음 서서히 형체를 예리한 칼로 각인(刻印)해 내듯이
노승도 의사처럼 자기를 자기 손으로 낱낱이 해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거울은 불교에서 마음으로 자주 비유되고 인간의 본성으로
비유되어 왔었다. 본성의 거울에 무지하고 본능의 그림자가 검게 가리고 있을 때 자아의 정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노승은 자기의 본성을 거울에
끼여 있는 먼지를 갈고 닦듯이 열심히 닦고 지웠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동경을 들고 내 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는 노승의 얼굴이
나타나지 않고 본능과 번민에 일그러진 추하고 나약하고 흉칙스런 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치 낡은 고가(古家)의 썩어가는 서까래 같은
뼈대만이 살갗을 뚫고 튀어나와 있을 뿐, 원형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그것은 쓰다 남은 물건보다 흉하고 더러웠다. 처음으로 내 자신을 향해
저주스런 생각을 일으켰다. 그리고 낮에 노승을 휴지를 태우듯이 아무 의미없이 화장막에 태워버리고 온 것이 죄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심한 수치감이
내부에서 끓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동경을 든 채 칠흑 같은 검은 물감이 내려져 있는 밤길을 헤치며
화장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 나의 행동을 엿보지 않고 있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화장막에 이르렀을 때 탐스럽게 타던
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작은 불씨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사라져 가는 불씨들이 아니었다. 다 타버리고 남은 몇 개의 뼈대에서 별빛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전지불로 뼈대에서 반짝이고 있는 불빛을 확인하였다.
예리한 칼로 살점을 도려내고 뼈대만
남아 있는 곳에 콩알 같은 구슬들이 수없이 박혀 있음을 보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색이 영롱한 구슬들. 쓸모 없이 버린 물건에서
진주가 발견된 것 같았다. 그것은 오도적(悟道的) 삶을 경영한 수행승들에게나 볼 수 있었던 영롱한 사리(舍利)였다.
나는 큰 물체에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쓰레기를 버리듯 쓸모 없이 대하였던 사치하고 오만스런 내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이 때 처음으로 오만과
자존심이 자신을 추악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타다 남은 뼈대에 붙어 있는 불빛을 바라보면서 서서히 움직였다.
마치 혼령을 모두 빼앗겨버린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간밤의 추악한 꿈을 상기하였다.
한 마리 뱀이 다른 뱀의 몸을 감고 물
속에서 유영하듯 나는 여체의 깊은 함정으로 빠지고 있었다.
수없이 맞물린 것은 금속의 고리들이 일제히 흔들리듯이 온 몸의 세포가
날을 세우며 잘 여문 수밀도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같이 여체의 깊은 곳으로 자꾸만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축축히 젖은 옷을 만지며 잠시 동안
불괘감에 젖어 있었다.
나는 지난 밤의 꿈을 빨리 지워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욕망의 샘에서 솟아나는 상념들은 떨어지지 않는 접착제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사리를 수집하여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종이에 싸여진 사리를 들고 발길을 옮기려고 할 때
새 한마리가 푸덕이며 날고 있었다.
사리는 노승이 남긴 청결한 삶의 결정이었다. 일상의 욕망을 깨끗이 지워버린 이슬보다 맑은 삶의
결정체였다.
전통적 질서 속에서 일생을 살면서 한 번도 조직이 갖고 있는 본능이나 생리에 야합하지 않고 오직 고통 속에 박혀있는 진실한
삶을 노승은 남기고 간 것이다.
화장막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무서운 고독이 전신을 갈가리 찢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덤에서 일어서는 한
줌의 뼈처럼 몸을 일으켜 걸었다. 이것을 가지고 무덤 하나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화장막에서 상당히 떨어진 거리를 빠져나왔을 때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나의 허망한 욕심이었다.
노승의 뜻과는 위배되는 일이었음은 주머니 속에 동경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나는 종이에 싼
사리를 허공을 향해 던져버렸다. 하늘에서 유성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사라지는 것같이 사리는 공중에서 흩어져 버렸다.
방 안으로 돌아와 다시
동경을 들여다 보았다.
노승의 얼굴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일상의 먼지가 더덕더덕 묻어 있는 나의 모습만 징그럽게 나를
엿보고 있었다. 심한 분노와 혐오감이 가슴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별빛 같은 삶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아무 관심도 주지않고 가는
것 자체가 나를 몹시 실망시켰다.
3일 전 일어났던 사건들을 정리하고 나는 월정사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뇌리에서는 기침을
하던 노승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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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고송대선사 하
더욱 절망할 것이
없을까
사실 우리 주위에는 위와 같이 죽어가는 노승들이 많다.
종단의 화려한 벼슬을 멀리한 채 물 소리 바람
소리와 몸을 섞으며 일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화려한 자리에
오르는 고승들을 볼 때마다 혐오감을 일으킨다.
어느 것이 진실한가. 권리에 야합하고 조직의 본능에 충실한 것이 진실한 것은 아니다.
비록 음지에서 살면서도 성실히 자기 삶을 경영하는 사람이 역사의 행간에 남는다.
지금 내가 만나려고 가는 스님. 고송(古松) 스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도 종단의 권좌에 오르지 않고 오직 견성 체험의 정진만 할 뿐이다. 어쩌면 이 시대 불교적 진실을
지키는 보루일는지 모른다.
땅거미가 짙어서야 우리 일행은 월정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원한 공기가 뼈 속의 좁은 길을 파고 들어
내부의 번뇌를 몰아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고송 스님과 3일 전에 입적해 버린 기침 소리의 노승을
떠올렸다.
입적한 노승은 나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열심히 보여준 선사였고, 수행의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을 암시해 준 가난하고 고독한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만나러 가는 고송 스님은 친밀감이 있는 스님이었다. 나와 같이 시를 쓰고 있는 도반 석성우 스님의 은사였고, 또
도명 스님의 은사란 데에서 한층 나에게는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도명 스님은 자기의 은사인 고송 스님을 가리켜 ‘너무
인간적인 사람이야’하고 표현했었다. 그때 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은 일이 있었다. 그 때 그는 몇 사람 되지 않는 인간 중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뜻이 어디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였다. 그가 말한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아라는 좁은 한계를 벗어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인간적이라는 관형사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감정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위대한’이라는 뜻으로 해석한 듯하였다.
자신의 좁은
신분적, 문화적, 풍속적 한계를 벗어난, 인간 전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인간을 그는 인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에머슨이 말한 ‘본래적
자아’를 깨달은 불교의 ‘근본적 자아를 깨친’ 사람으로 확대 해석하였다.
나도 도명 스님 생각에 동감하였다. 그리고 십 년 전
파계사에서 고송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그는 우리를 향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육체는 초월을 불가능하게 하는 방해물이야. 항상 육체는
욕망과 결부되어 있어.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몹시 고통스러울 때가 있지.”펄펄 뛰는 피를 소장하고 있는 육체가 자성을 파악하는데 몹시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깊이 체험하고 있는 듯하였다. 사실 불교에서 해석하는 육체는 흙과 바람, 얼마되지 않는 물기와 불빛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것은
소멸해 버리는 물질로서 자연의 일부라고 수행인 모두는 생각한다. 그래서 옛 조상들은 육체를 가아(假我), 시주의 빚을 지고 있는 고기덩어리라고
생각한 나머지 임종이 가까우면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입적을 하고 그 육체를 산짐승들에게 희사하였다고 한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의 욕망에 이끌려 자기를 낭비할 때가 많다. 고송, 그는 이러한 인간적 체험을
밑바탕으로하여 상좌인 도명에게 항상 젊었을 때 고뇌하라, 절망하라고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그의 수행 교수
방법은 다른 선사에 비해 상당히 독특한 면이 있다.
무조건 욕망을 제어하라는 말보다는 고뇌하고 절망하라는 쪽이 훨씬 인간적이고 친밀감이
간다. 그래서 그는 절제되지 않은 감상과 설교를 사구(死句)라고 단정해 버리고, 법문도 자기나름으로 생에 대한 고통의 체험을 가지고 있어야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점은 상당히 주목이 가는 발언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는 감동을 주지 못한 관념적인
법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또 그에게 있어서 감동이란 삶과 싸우고 그것에 대해 철저히 고뇌한 자의 육성이 주는 전율을 뜻하는 것
같았다.
빗줄기 속을 한참 동안 걸었을 때 상원사가 성큼 다가섰다.
태고적부터 있었을 웅장하고 장엄하게 펼쳐진 오대산 진성이
살았음인지 그 기세가 당당하다.
저녁 늦게 도착한 죄로 스님을 뵙지 못하고 아침 일찍 스님 방문을 노크하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문안부터 먼저 드렸다. 칠십 노구이면서 이마에는 주름살 하나 없었다. 오대산 산세처럼 그 기세가 당당하게
보였다.
“이 산골짝에 비가 오니 어릴 때 생각이 납니다.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15, 6년 전에 평생 살 목적으로
왔다가 망월사에 있는 30년 결사에 참석하느라고 나갔다가 못 왔지요. 그 때 기억으로 한암(漢岩) 스님을 떠올릴 수 있군요. 그 때는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하지 못했고, 걸어서 왔다가 걸어서 가는 보행 자체가 수도(修道)요, 고행을 통한 구도자의 자기 확인이었지요. 요사이 젊은 사람들에게
걸어서 다니라고 하면 한 사람도 중노릇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때와 비교해서 승려 생활도 많이 발전했는데, 반면 중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아요.”삶이란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의 체형(體刑)이다. 더욱이 수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속인보다 많은 고통을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특히 옛 수행승들은 지금보다 교통 수단이 좋지 않아 일상의 움직임이 그대로 고행이었다. 그러나 당시 스님들에게는 무소유 사상이 철저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그만큼 큰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중 냄새, 우리들이 입고 있는 옷을 몽땅 벗어버리면 속인과 무엇이
다르랴. 적나라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철저한 무소유의 생활에서 배어버린 그 가난한 산 냄새가 스님에게는 중 냄새라고 하는 것
같았다.
“스님께서 지금까지 수행해 오시면서 후학들에게 권할 말씀이있다면……”“인욕이지. 불숙불쑥 솟아오르는 감정과 욕망을 버릴 줄 알고
참고 견디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솥은 발이 셋이 있어야 넘어지지 않듯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으로 대신심(大信心), 대의심(大疑心),
대분지,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하고 머리에 불 붙는듯 급박한 신심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수행열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 생활이
너무 윤택하여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1922년 임술년에 대구 파계사(把溪寺)에 입산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직 한 길만
걸어오고 계신다.
고송 스님은 지금도 파계사에 조실로 계신다. 생사를 초월해 있으면서도 그것을 말하지 않고,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고
싶어도 그것이 상흔으로 남을까 싶어 인간의 슬픔과 괴로움을 마음 속에 감추어 버리고 계신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의 경지를
체달한 스님의 분상에는 말해야 할 것도 침묵해 버리고 삼계(三界)를 홀로 소유했다가 다시 버리는 자족(自足)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중생이 참으로 생사에서 해탈할 수 있을까요?”
하고 질문을 하자,“그것을 체험하고 증득하지 않고 말할 수 없지. 오히려 그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불조(佛祖)를 속이는 일이지.”하고 방 안을 한 바퀴 돌면서
“이렇게 자유스런 것을 놔두고 어디서 해탈을 찾고
있어.”참으로 깊은 뜻을 남겨 놓고 방 문을 닫아 버렸다고. 백천간두에서 섰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이 가슴 속에서 일고
있었다.
사실 스님이 수행한 연대를 살펴보면 1930년에서 1940년 사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때는 한국 불교에 참으로 기라성
같은 선승들이 많이 있었다.
만공을 비롯하여 만해 한용운, 방한암, 백용성이 있었고, 효봉과 동산 등이 펄펄 날뛰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자성 불교를 새롭게 개척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고송에게도 자성 주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만물은 우리 안에서
완전하다. 우리의 눈길을 안으로 향하여 우리 자신이 본성에 성실한 것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다.”하고 피력한 그의 사상 속에는 불성은
곧 깨달음이다 하는 개오(開悟)가 숨어 있었다.
이러한 스님의 사상을 뒤집어 보면 내 마음에 부처가 스스로 존재하나니 이
자불(自佛)이야말로 참 부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선적 직관(禪的 直觀)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손 안에서는 일체가
유심화(唯心化)되고 관념화되는 것이 있었다.
“밝음과 어둠은 범부의 눈에는 두 가지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 있는 이는 그
성품이 둘이 아님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지닙니다. 둘이 아닌 성품이 곧 참다운 성품입니다. 참다운 성품 자체는 적게 가진 것도 아니며,
성년이라고 해서 많이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번뇌 속에서도 어지럽지 아니하고 깊은 선정삼매(禪定三昧) 중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속적인 것도 영속적인 것도 아닙니다. 또 그것은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중앙에 있지도, 안에 있지도, 밖에 있지도 않고,
나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그 본질과 현상은 여여(如如)하여 절대적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의 말이 너무 논리적이어서 저항감이 갔으나 뜻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을 부처의 근본이라고 파악하고 있는 태도 자체가 그렇다. 그 마음 자체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불변한다. 그러나 그 마음에 집착하다보면 그것은 부처도 마음도 아니다[非心非佛]. 스스로 체험하여 안에서 자명종처럼 울림이 있어야
한다.
나는 잠깐 화제를 바꾸어서, 젊었을 때 여자하고 하룻 밤을 잤던 일이 있느냐고 슬며시 물었다.
“여자같이 좋은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한국 불교 사원에 여자가 없으면 굶어 죽을 것인데 말이오. 젊은 사람들이 여자한테 연애하는 식으로 공부한다면 끝장을 볼 것입니다.
여자한테 빠지지 말고 여자를 뛰어넘는 체험은 필요해요.”이야기가 너무 완벽하여 묻는 뜻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여자한테 빠지지 말고
여자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은 의미 심장하였다.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 지금 죽는다면 후회가 없느냐고 했더니, 스님은 죽을 때도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해놓고, 하하하 한바탕 소리내어 웃었다. 그 웃음 소리가 비 사이를 가로 질러 앞산에 꽂히는 것
같았다.
상원사에서 나올 때도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틀 후에 서울에서 만나자고 도명 스님과 약속을 해놓고 신문사로
돌아왔다.
3일이 되어도 그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산천을 구경하면서 걸어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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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하 대선사(月下 大禪師) 상
하심(下心)의 자애(慈愛)
보살의 위상(位相)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그래서 중생과 몸을 섞으며 만물과 더불어 한 몸이 된다. 또 보살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오히려 고통스런 지옥은 보살이 수행할 곳이다. 구제와
구원은 보살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보살의 마음이 넉넉할 때 인간의 마음은 너그러워지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공경할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신라
시대 당시 대안 대사(大安 大師)가 원효의 장삼자락을 끌고 술집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 원효는 발길을 멈추고 법의를 걸치고 술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 때 대안(大安)은“스님, 바로 이 곳이 지옥 중생들이 사는 곳입니다.”하고 말을 하자 원효는 술집으로
들어섰다. 지옥 중생을 외면한 보살은 보살이 아니다.
월하 선사는 어느 시골 촌로와 같이 보이지만 그가 마음 속에 간직한 뜨거운
보살의 마음은 항상 상대를 감동케 하였다.
어느 날 국제시장을 갔을 때였다. 사람들이 밀집되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지나갔다. 그런데 승복을 입은 늙은이가 시자를 데리고 ‘가판대’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그가 사고 있는 물건은 그에게 필요 없는
생활 도구였다. 일반 가정에서나 쓸 수 있는 물건을 사 가지고 그는 환속해 버린 상좌집을 찾았다. 그리고 물건을 건네주었다.
“그래
그래, 이렇게 사는 것도 재미있지. 화두는 잃지 말아야지. 따지고 보면 수행처가 따로 있나. 삼천 대천 세계가 해탈장이지.”그는 주머니에서 돈
몇 푼을 꺼내어 상좌 손에 쥐어 주며“또 올 거야. 우리가 만난 소중한 인연을 끓을 수 없지.”말을 남기고 통도사 ‘염화실’로
돌아왔다.
단아한 체구와 시골 노인 같은 인상, 항상 근엄하면서 쓸모 없는 권위를 버리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친화력을 지닌 분이 월하
스님이다.
그의 고향은 행장과 이력을 보면 약간 수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어투는 충청도 발음이 강한데도 그의
이력에는 경남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현재 통도사가 주소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1933년 7월 20일 강원도 유점사에서 차성환 화상을 계사로 첫
사미계를 받고부터 운수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8년 후 현재 통도사로 돌아와 구하(九何) 스님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그의
수제자(首弟子)가 된다.
그의 수행 방법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절차를 밟지 않고 먼저 선(禪)을 통해 돈오(頓悟)의
자내증(自內證)을 얻는다. 왜냐하면 비구계를 받고 월하 선사는 1940년 오대산 방한암(方漢岩) 스님 슬하에서 무려 40안거(安居)를 성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4년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한다. 그리고 1955년에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과 그 이듬해 총무부장을 역임하고
통도사 주지가 된다. 사판(事判)으로는 빠른 속도의 출세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월하 선사에 있어 이사(理事)의 속성을 파악하는 개안(開眼)의
계기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종단의 요직을 두루 거친다.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을 비롯해 총무원장, 동국대학 재단 이사장 조계종 종정 직무
대행까지 중 벼슬로 최고의 정상까지 오른다. 그러나 1972년 이후부터는 모든 벼슬자리를 헌신짝처럼 던져 버리고 통도사 보광전 ‘염화실’ 조실로
계셨다. 그러다 1994년 종단이 개혁의 깃발을 올린 상황에서 갈피를 못 잡고 어려움을 겪게 되자 종정의 자리에 올라 몸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등 종단의 큰 어른으로서 부종수교의 모범을 보이셨다.
이사(理事)를 달관하고 수처작주(隨處作主)의 광활한 덕목을 확보하신
월하스님. 그는 스스로 체내 깊숙이 박혀있는 어둠을 몰아냈고 어리석음과 분노를 밖으로 소멸해
버렸다.
口裡無嗔吐妙香
面相無嗔供養俱
心裡無嗔是珍寶
無染無垢是眞常
입 속에 성내고 어리석음이 없으면
향내가 나고
얼굴에 번뇌가 없으면 그 자체가 중생을 위한 공양이다.
마음 속에 삼독이 소멸되면 그대로 참된 부처요,
어느 곳에
있어도 물들고 때묻지 않는 그 곳이 극락일세.
그의 얼굴에는 번뇌의 어둠이 숨어 있지 않다. 할아버지 같은 지극한 자비가 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스님은 저녁이면 장작을 들고 자기 방에 불을 지피고 스스로 방안 청소를 한다. 시자가 이 모습을
보고 안절부절하면, 모든 일을 더불어 하면 그만큼 힘이 줄어든다고 기뻐하였다.
그는 통도사가 지나친 불사로 인해 빚더미에 쌓이자
제자를 불러 통장 하나를 꺼내어 주면서“이 돈으로 부채를 갚아라. 이 돈은 내가 그 동안 법문 다니면서 한푼 두 푼 모아 놓은 돈이다. 따지고
보면 모두 시주금 이지. 나도 불사에 보탬이 되고 싶다.”제자는 당황하면서 통장을 거절했다.
“아니야, 이 돈으로 토굴 하나 지을까
했는데 이 육체가 법당이지. 법당도 이제 낡고 병들어 가므로 이것을 보수할 수 없어. 육신을 버리고 법신으로 살면 더욱 자유스럽지.”제자가 받아
든 통장 속에는 억대가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그 돈으로 통도사 부채는 없어졌다. 스스로 인과(因果)를 안 그는 그 인과의 상환(償還)을 미리
해 버린 것이다.
사람이 살고 있을 때 슬픔이 오고 고통이 있게 된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은 살아있는 자의 몫이다. 늙고 병들었을
때 육신은 강산에 버릴 부스럼 딱지에 불과하다. 육신의 소멸 뒤에 자기는 재이다 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삶이란 거칠게
투쟁적으로 길들이면 그만큼 거칠어진다. 적게 가질수록 자기 존재가 풍요해진다는 것을 월하 스님은 깨닫고
있었다.
本明解月潛水中
無生滅處見有無
無心去來西童用
無一影處顯示行
본래 신령스런 달빛이 물 속에
잠겨있다.
생사 없는 곳에 유무를 보아라.
마음을 비우고 오고 감을 자유롭게 하면 천국의 마음을 쓸 것이다.
그림자 없는
곳에서도 밝은 달은 항상 떠있다.
월하 스님의 개오(開悟)가 담긴 오도송이다. 그가 밝힌 신령스런 달은 자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자성 자체에 생멸이 없지만 항상 유무(有無)는 되풀이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어느 누가 거래(去來)를 자유스럽게 하겠는가. 오고 감이
운수(雲水)가 되었을 때 그 마음은 비어있는 상태이다. 비록 자성의 모양은 없지만 생활을 통해 그것은 작용으로 현시 된다.
그는
지금 영축산을 기대어 세상을 관조하고 있다. 시대적 변화와 역사의 격동을 체험하면서 때로는 손수 운전하여 환속한 상좌집에 다녀오기도 하고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권력과 야합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다.
종단이 어지러울 때 이후락 전국 신도 회장이
신도회를 통해 종단에 개입하려고 할 때 비록 승가가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스님의 일은 스님이 해야지 신도들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고 면박을 해버리는 용기도 갖고 있다. 그래서 그의 소신은 원로 가운데서도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 자기만의 고독한 행보를 하고
있다. 그의 행보는 역사의 발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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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하 대선사(月下 大禪師) 하
진아(眞我)는 만법과 더불어
걸림 없는 주인공
문> 새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리고 안거 중에 찾아뵙게 되어 정진하시는데 지장이 안 되는지
죄송스럽습니다. 1987년은 종단도 이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해야 하고 국가적으로는 많은 변화와 시련과 진통이 예상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지도자의
위치에 계신 분들의 예지와 경륜이 필요합니다. 방장 스님께서는 밝은 시대를 열어 가는데 종도와 국민이 어떠한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한
말씀해 주십시오.
답>밖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겨울인데도 오늘은 봄날 같습니다. 영축산 정상에 머물러 있는 봄의 섭리가
하산하고 있는가 봅니다. 겨울은 사계절 중에서 안거(安居)를 하는 계절이지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자연도 진통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한평생을 탄생시키기 위해 치러야 하는 산고(産苦) 같은 것이지요.
종단도 그 동안 숱한 고난과 진통을 체험했으니 그 경험을 토대로
중흥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안정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있으나 무엇보다 우리 종도가 해야할 일은
지도자를 모셨으면 일을 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 주어야 하고 종도 자신들이 종단을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스스로 협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동안 종단은 제도가 나빠서 혼란이 야기된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와 종도가 일치 단결을 하지 않아서 분규가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의화동열(意和同悅), 이화동균(利和同均)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서로가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기 삶을
관리해야지요.
문>올해로서 불교 정화를 한 지 30년이 넘는 해를 맞았는데 아직도 구조적으로는 많은 문제점이 있으나 그 중에서
3대 사업 부분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특히 그 동안 사람을 키우는데 심혈을 쏟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답>오늘의
사원은 우리 민족의 정신사를 창조해 온 곳입니다. 그리고 혁범성성(革凡成聖)을 이루게 하는 선불장(選佛場)이 아닙니까. 특히 불교 교육은 일반
교육과 달리 이 시대 중생을 교화해야 할 인천(人天)의 사표가 되게끔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나무를 심어 수확을 얻으려면 십 년 이상은 걸려야
하는데 하물며 이 시대의 사표가 될 만한 인재를 육성하려면 교육의 혁명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기르는 데는 보다 많은 투자도 있어야 하고 종단
자체가 수행하는 분위기로 탈바꿈돼야 하며 사찰을 책임 맡고 있는 분들의 원력이 뒤따를 때 한국 불교의 장래는 밝아질 수가
있습니다.
문>현금 종단은 제도적으로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현실을 보면 분화되어 있습니다.
불교가 현실 깊숙이 참여하여 중생의 고통을 증언하고 대비(大悲)를 실천하려면 수행과 교화를 제도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답>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은 정화 이전에 잠깐 구분되어 있던 제도입니다만 이 제도를 현실 속에 제도화해 버리면
많은 무리가 야기될 것입니다. 첫째 수행인은 공사정신(公事精神)을 갖고 자기가 체험한 오도적 삶을 중생에게 회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사를
모두 체달하여 원융의 미덕을 쌓아야 합니다. 정각(正覺) 자체에 세간과 출세간이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히 수행인은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삶을 철저히 깨달을 때 만법과 더불어 걸림이 없는 주인공으로 새로이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문>현대를 기계 문명의 첨단
시대라고 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물질로 평가하려는 가치의 전도가 사회 속에 만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이 황폐해
있습니다.
답>인간이 문명의 노예로 전락되었을 때 물질을 소유하려는 욕망과 향락을 일삼는 윤리적 타락이 야기되지요.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상도지본(喪道之本)은 막급화재(莫及貨財)라고 했듯이 물질에 탐닉하다 보면 누구나 본래 자기를 잃기
마련입니다. 자기 회복을 위해서는 먼저 인간적 자각이 있어야 하고 자기를 허공같이 비워야 합니다.
진아란 비어있는 자기를
의미합니다. 바로 진아로 오늘의 삶을 산다면 여러 삶과 어울려도 갈등과 이해가 없이 고통 속에서도 진여로 빛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이 맑아지려면 우리 자아(自我)를 헌신적 자아로 길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자아는 대승적 가치와 공동선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대를 억누르고 있는 그대의 주변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스러워지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망상과 야욕을
버려야 한다고 했지요. 요즈음 현대인이 화두를 드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피면서 산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처는 줄어들
것입니다.
문>견성은 수행인이 체득해야 할 목적입니다. 스님께서 수행하신 지혜와 경험을 통한 입장에서 견성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한 말씀하십시오.
답>견성이란 글자 그대로 성품을 본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자성이 또 하나 있는 결과가 됩니다.
왜냐하면 보려고 하는 주체는 누구이고 보여지는 객체는 누구입니까? 그래서 육조 스님은 그대 안에 자기불(自己佛)이 있나니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고 하였고 자성이 참으로 광활해서 만성을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자성은 본래 진(眞)도 아니고 망(妄)도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자성이 만법(萬法)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견성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관념적 견성은 올바른 깨침이 아닙니다. 부처님도 이
자성을 보고 발견한 분입니다. 자성이란 본래 그대로 있을 뿐 누가 창조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진리의 구현체라 하였으며 옛
조사들은 본자연 비조작(本自然 非造作)이라 했지요. 그리고 영안전등 선사(令安傳燈 禪師)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처의 자비와 도움에 의존하지
않으며 삼계(三界)의 어디에도 살지 않으며 또 오온(五蘊)에 속하지 않으며 조사도 감히 나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며 이름까지도 붙이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가 가르쳐 줄 수 있느냐고 물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날마다 중생의 면전을 출입하고 있음을 잘
살펴야지요.
문>요즘은 각계 지도자들과 정치인들 사이에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어
있습니다.
답>이제야 마음을 비워야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모양이지요.
불교의 무소유(無所有)란 따지고
보면 우주를 모두 소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법계(法界)의 질서는 평등합니다. 여기에 친소(親疏)가 개입되니까 평등이 깨지고 소외 계층이
생깁니다.
먼저 마음을 비우기 전에 마음 속에 있는 애증부터 버려야 합니다. 진실로 애증을 버리면 고락의 성쇠가 없는 법을 체득할
것입니다. 역사적 인과는 어느 시대이고 있습니다. 지도자일수록 마음 속에 사람을 사랑하는 덕성을 길러야 하고 밖으로 다루지 않는 미덕을
넓혀가야만 국민이 화합할 수 있습니다.
정치란 잘은 모르지만 복잡한 이해 관계를 조절하면서 비록 더디지만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기술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타협이 있어야 하고 타협이란 양극화된 것을 풀어서 서로의 의식과 감정이 만나 단결하는 정신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는 이런 양극화된 현상을 화합시키는 중간 계층의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비판하는데 있어 사람을 자극시키고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부드러움이 강(强)함을 제압하듯이 애어(愛語)로 사람을 깨우치게 해야합니다.
이것이 비판하는 쪽에 있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이고 미덕입니다. 또 하나 투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쟁취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점수(漸修)의 걸음걸이로 이 사회의 어둠을
제거해야만 잃는 것이 적습니다. 중생의 마음(民心)이란 지도자 쪽에서 볼 때 자기를 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다스리는 쪽에 있는 사람일수록 하루
한 번씩 이 거울을 통해 자기 마음을 반조해 봐야지요.
문>스님의 가풍(家風)은 무엇입니까?
답>안으로
구하는 것이 없고 밖으로도 구하는 것이 없는 것 자체가 나의 가풍이라 할까. 그리고 신심과 공익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신(信)이란 공덕의
모체(母體)도 되고 도(道)의 근원도 됩니다. 또 공익이 사회 속에 보장될 때 신뢰란 것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솔선
수범해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한다고 강조하면서 공익을 강조합니다.
오늘의 구도자도 중생을 교화하는데 있어 동사섭 정신(同事攝 精神)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중생에게 무엇인가 구하지 않고 요익(饒益)하게 하는 원력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부처님도 도둑놈을 제도하려면 같이
도둑질을 하면서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깨우쳐 주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수행자는 중생의 고통을 담는 그릇이 너무 적을 뿐만 아니라 없는 것
같습니다. 삶에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중생의 고통스런 삶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문>방장 스님께서 자동차 운전을
배웠다고 해서 상당히 화제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답>우리 자신이 자신의 주인공을 몰고 다니는 운전사 아닙니까. 그래서 운전을
한 번 배워 보았습니다. 운전을 해본 사람은 다 경험을 해보았겠지만 자동차의 속도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차는 급하게 몰수록 사고가
나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도 평등의 질서를 잃고 급하게 서둘다보면 사고를 일으키게 됩니다. 부처님이 사람의 마음을 원숭이에게
비유한 일이 있습니다. 그만큼 하루에도 수천 수만의 번뇌를 일으킨다는 의미이지요. 바로 산란심(散亂心)을 관리하는 주인공이 자기 마음입니다.
그리고 절에서 쫓겨나면 운전이나 하고 살아야지요, 하하하……
문>스님께서 생활하면서 혹시 입적이란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답>생사거래(生死去來)는 중생이 할 일이지, 자성 자체에 생사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되도록 이면 우주의 섭리에 거역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같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는
생명의 기운이 충만해 있음을 깨닫고 있을 뿐입니다.
질문하고 다른 이야기나 마지막으로 해야겠는데 어느 시대이고 변화란 것은 있어요. 그런데
이 변화를 혼란으로 단정하면서 그것을 위험시하는 사상 또한 우리의 국익과 체질에 맞게 수용하는 지혜를 지도자가 가졌으면 합니다. 참선을 하는
데도 인정이 개입되면 안 되듯이 애증이 깊으면 도를 이룰 수 없습니다.
문>스님, 육근육진(六根六塵)을 여의고 법이
있습니까?
답>육식(六識)이 모두 그대의 집안 식구들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