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또한 KTV의 ‘영상 기록, 시간 속으로-옛노래의 재발견’ 프로그램 구성을 겸해
그동안 발표했던 이난영, 그리고 목포 관련 글을 찾아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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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네트웍 l 지방문화의 산실 [5] 목포, 목포는 지금...
41년 만에 목포 품 안긴 이난영, 삼학도 ‘이난영 공원’ 조성
‘목포의 눈물’의 주인공, 가수 이난영(1916~1965)이 40여 년 만에 고향인 목포,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지난 2006년 4월 11일, 삼학도에 780여 평 규모의 ‘이난영 공원’을 조성함과 더불어
20년생 '이난영 나무(백일홍)' 밑 수목장(樹木葬)으로 치러진 것.
아울러 그 옆에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로컬 네트웍, 그 다섯 번 째. ‘목포의 눈물’의 산실이기도 한 목포를 찾아본다.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향, 목포를 대표하는 노래 ‘목포의 눈물’, 그리고 가수 이난영.
‘목포 개항 100주년 기념우표’가 그러하듯 이 노래는 목포의 상징,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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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개항 100주년 기념우표’. ‘목포의 눈물’악보.
지난 1997년 10월 1일, 개항 100주년을 맞는
목포는 동북아시아 중심항구로 거듭나기 위해
서해안고속도로, 신 외항, 국제공항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의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세계 중심항구로 제2의 개항을 준비하는
목포개항 100주년.
개항 당시의 모습과 '목포의 눈물' 악보를 담은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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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는 지난 2006년 3월 22일부터 4월 23일까지 이난영 추모기간을 가졌고
아울러 이 기간 동안 이난영 묘소 목포 이전을 축하하기 위한 각종 기념행사가 펼쳐졌다.
유가족의 이난영 생가 터 방문, 학술 심포지엄, 이난영 유성기 음악 복원 발매,
그리고 목포자연사박물관의 특별전시를 통해
고인의 유품 및 음악자료 등을 볼 수 있는 이난영 특별전시회와 함께 축하공연 등도 개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망국의 한과 향수를 ‘목포의 눈물’로 달래주던 국민가수
고(故) 이난영을 기리는 극단 갯돌의 창작뮤지컬 ‘난영’ 공연도 지난해 열려 시민들을 숙연케 했다.
창작극 ‘난영’은 소설 ‘목포의 눈물’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으며,
극간 갯돌이 ‘목포 근대사를 찾아가는 공연예술기행’의 하나로 준비했던 것.
이난영 묘 이전은 지난 2004년 12월, 목포 문화연대가 처음으로 제기하여,
2005년 1월 초 문화연대를 중심으로 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인터넷 카페(cafe.daum.net/nanyoungmokpo)를 개설하는 등
범시민적인 추모사업을 추진했고,
2005년 10월, 고인의 자녀들로부터 묘지이장 동의를 받아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 것.
이난영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 '이난영 음악자료 및 특별전'은
유가족에게서 위탁받은 옷, 악기, 사진 등을 전시하는 '이난영 유품전'을 비롯하여
당시 동료 연예인들로부터 생생한 증언과 자료 등이 동원되었다.
'일제시대 대중음악 문화사' 와 '일제시대 목포역사 문화전'에서는
목포문화원과 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의 협찬을 받아
당시 목포시민들의 생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목포문화방송 동영상 자료를 통해 시대상을 조명했다.
▲ 목포 양동의 이난영 생가 터에 조성된 어머니 흉상을 살펴보는 유가족 딸 김숙자와 막내 김태성.
▲ 지난 3월 목포시민문화체육센터에서 개최된 이난영 추모공연에 출연한 슈&킴브라더스.
▲ 이난영이 미국에서 공연할 때 입었던 옷. 김숙자씨가 소장하고 있던 유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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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수 이난영의 생애' 코너는 가수 이난영의 생전에 다양한 당시의 활동기사와 기록을 통해
이난영 가족의 흐름과 생애를 축약해서 보여주었고
'이난영 관련 멀티 영상전'은 1958년 고복수 은퇴공연, LA에서 김시스터와의 공연 영상,
KBS 라디오 특집프로그램 중 육성녹음, 김병종(서울미대교수)의 화첩기행 등을 통해서
한 예술가가 동시대 속에서 대중문화를 어떻게 선도해가고 시민들과 호흡하는가를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했다.
1916년 목포시 양동에서 태어난 가수 이난영은
1933년 9월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 꿈’(태평레코드)으로 가요계에 데뷔했으며
1935년에 발표한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을 비롯, ‘목포는 항구다’ 등 많은 노래로
일제 강점기,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과 설움을 달래주었다.
1965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친 고인은 그동안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묻혀 있었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일제의 갖은 탄압 속에 위협받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 사업의 하나로
Okeh레코드와 손잡고, 향토노래가사를 공모했고
여기서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文一石)의 작품 '목포의 노래'가 손목인 선생이 곡을 붙여 ‘목포의 눈물’로 탄생되었다.
다른 어떤 고장 못지않게 걸출한 예술인들을 많이 배출했고
지금도 풋풋하고 넉넉한 인심이 살아 있는 목포,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민족의 한을 넘어 우리의 자긍심으로 남아 있다.(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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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 이야기]
작곡가 손목인 선생이 회고하는 ‘목포의 눈물’ 일화 한 토막
'목포의 주인공'이 왔는데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
'이난영은 남편 김해송이 납북돼 행방불명이 됐을 때 한동안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그가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김해송은 의정부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한 사실이 같이 끌려가던 사람이
그의 타다 남은 옷자락을 들고 와 비로소 밝혀졌다. 그제야 이난영은 고개를 떨구며 흐느꼈다.
당시 납북된 연예인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신카나리아 같은 경우는 납북돼 끌려가다 비행기 폭격을 당하는 순간
죽은 시늉을 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중략)
노래로는 성공했지만 가정적으로는 숱한 마음고생을 하며 살아갔던 이난영은 65년 봄,
그녀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난 날만은 보상을 받은 듯하다.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당시 상황은 집회가 금지돼 있어
연예협회가 수장으로 치르길 원하는 연예인들의 생각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허가를 해주지 않는 것을 보다 못한 나는,
"온 국민의 가슴을 따듯하게 해준 우리의 가수 이난영이 마지막 가는 모습을 누구나 보고 싶어 하는데
왜 집회를 허가해주지 않느냐"며 사방을 쫓아다녔다.
결국 이난영의 장례식은 특별 케이스로 허가됐다.
이난영의 집이 있던 서울 회현동에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까지
많은 연예인들이 상복을 입고 뒤를 따랐다.
그날은 주변 교통이 모두 통제됐고 시내에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나온 시민들로 가득 찼다.
무리들은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며 걸었고 모여든 시민들도 하나둘 따라하더니
온통 ‘목포의 눈물’을 흐느끼듯 불러댔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부두에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목포의 눈물'이 이토록 구슬프게 들렸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고향 목포, 본명은 이옥순(李玉順-후에 이옥례(李玉禮)로 개명),
작곡가인 오빠 이봉룡씨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천재소녀가수'로 불렸던 그녀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그렇게 갔다.
‘목포의 눈물’은 60년대 초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감독은 하한수였고 전옥이 주연을 맡았다.
주제음악은 역시 내가 맡았었는데 당시 에피소드 한 토막.
주제음악 제작을 위해 감독, 카메라맨 등 제작진들과 함께 목포로 내려갔었는데
목포역 출구에 철조망이 쳐져있고 경찰에서 일일이 신분증을 검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분증을 보여주고 다 역 출구를 통과하고 있었으나
그때서야 나는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포의 눈물’의 다른 제작스태프들은 다 빠져나간 역 안에서 나 혼자만 쭈삣거리며 남아있자
신분증 검사를 하던 경찰이 수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다가왔다.
"당신은 왜 나가지 않고 있어"
-아예 반말조로 내게 말을 붙여왔다.
"어디 신분증 좀 봅시다."
"죄송하지만 없습니다."
"당신이 대한민국 사람이야? 이름이 뭐야?"
-그는 온갖 인상을 다 써가며 아예 허리춤까지 잡아챌 기세로 다가왔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손목인이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얼굴표정이 변한 그는,
"아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손목인 선생님이시라구요? 틀림없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나는 그에게 ‘목포의 눈물’ 영화 촬영을 위해 목포에 내려왔다고 이야기했고
그는 ‘목포의 주인공’이 왔는데 몰라 뵈서 죄송하다며 몇 번이고 사죄했다.
내가 음악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손목인 著 ‘못다 부른 타향살이(92년 도서출판 한국문화 刊)’ 중에서.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Copyrights ⓒ韓國歌謠作家協會報 2006년 6월.
첫댓글 박성서님 존경합니다....
지난 우리것을 하나식 조명 해주는 박성서님 같은 분 하고 바람새 가족이란것이
아주 자부심히 생김니다...ㅎ
에구, 감사...^^
우와~~대단한 자료이네요. 선생님아니면 우째 이런 사실을 알까요. 감사합니다.
저도 청비아원님 같은 시절(?)에는 이러한 노래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요....만. ^^
요즘 목포는 민어가 제철이라는데 '영산식당'이란 곳에 가서서 민어회를 드시길...ㅎㅎ 명영환님이 안내를 잘 해주실듯...
'영산식당', 꼭 들러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명영환님부터 수배를...^^
목포 민어회 하면 가장 유명한 곳이 중앙동 우체국 인근의 영란횟집(Tel 061-243-7311)인데 이 것도 참고하시고요.
영산식당은 검색이 안되고..영란횟집은 바로 검색이 되네요. 목포가면 꼭 들리든 꽃게무침으로 유명한 초원식당 바로 뒤에 있었네요.
ㅎㅎ 죄송함다. 오타에요 영란횟집이 맞습니다. 거기에 갔다가 광주에서 오신 분과 신발을 바꿔신어서 아주 쑈를 했습니다. 결국 택배로 신발을 바꾸긴 했지만...ㅋㅋ
"그래, 결정했어! ('인생극장' 버전으로), 1차는 초원식당, 2차는 영란횟집..." ^^
사실 목포를 한번도 않가봤는데..서울서 갈려면 혹시 부산거쳐가야는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혹시, 서울을 한 번도 안와봤다는 얘기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ㅎㅎ
부산에 박선생님 오랫만에 뵙네요서울거쳐서요..
가까운날에 목포 한번 다녀오시지요
부산에서 서울 갈려면 목포 거쳐 가야죠!ㅎㅎㅎㅎ
1987, 8년 회사 업무차 목포 출장이 잦았는데 목포시민 한 사람이 그러더군요. 해방 전에 목포 인구가 20만이었는데 지금도 20만이라고. 그 정도로 경제발전의 혜택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얘기였죠. 아닌게 아니라 그 때만 해도 목포시내엔 일제 시대 때 지은 건물과 창고가 참 많았지요. 그런 걸 바라보며 저는 늘 화재 걱정을 하곤 했는데. 목포 유산에서 본 목포의 눈물 노래비, 목포에 딱 하나밖에 없던 신안비치호텔, 2호 광장, 이제는 섬이 아닌 학도, 목포역 인근의 민어횟집 등. 박성서님의 글을 읽자니 그 시절 목포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귀한 자료 올려주신 박성서님 감사합니다.
옛스러워서 더욱 좋은 곳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만.
지금도 구 시가지 쪽은 그때와 별반 발전한게 없읍니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기고 아주 조금 나아진 목포의 모습이랄까요..
몇년을 목포에서 살았으면서도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는데
올려주신 귀한자료 보면서 조금씩 알아간다는 자부심에 맘이 뿌듯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따금씩 오가며 배회했다던 그 '영원한 옵빠', 남진씨가 살던 집, 약도도 알켜줘유...
네에~~ㅎㅎ 목포세무서와 유명한 식당 곰집갈비 그 주변 남교동에 남진님의 집이 있는데
절 델꼬가면 금방 갈켜드릴수 있는데요..ㅎㅎ 지성조아님이 얘기한
독천식당도 있고요~ㅎㅎ
여기 와서 저한테 물어 봐야될것 같은데요?
지당님도 아시는군요. 그렇다면 '겟 올라잇 !'^^
박쌤 덕분에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목포는 몇 번 가보았지만 유달산자락의 노적봉을 거쳐 항시 목포의 눈물 노래가 흘러나오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떠오릅니다.
맛집으로는 목포역 인근 kt지사 뒷쪽에 있는 독천식당의 낙지요리가 유명하다해서 가보니 정말 최고였습니다.
목포로의 노래기행,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맛집기행도 겸하게 될 거라는 자못 신나는 예감...^^
그런데,
부산 문화방송에서 했던....
박성서의 뮤직 파일은 언제 올려 줍꽈 ? 얼렁 올려 주이소..
기억해주셔서 감개무량입니다.
돌이켜보면 부산mbc 방송이 햇수로 10년, 날짜로는 대략 8년 몇개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방송 내용을 책으로 묶는다면 몇 권 쯤은 족히 됨직한데... 시간나는대로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절대 게을러지면 안될낀데...
부산 문화 방송 이영구 아나운서는 목소리가 정말로,참말로,진짜로 구수 합니다.
박성서의 음악파일을 지금 다시 들으면,,, 구수하고 재미가 솔찬히 억수로 있을껍니다..
언능 올려 주세요..뮤직 파일(음악파일) 노래와 함께 듣는 재미가 허벌나게 있습니다..
이영구 아나운서, 멋진 분이죠.
저는 아쉽게도 제가 방송했던 파일을 다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앞부분 5년 치 정도는 있는데 이후 PD가 계속 바뀌면서 방송파일 챙기는 걸 소홀히해서리...
대신 '부산, 부산문화'라는 TV 프로그램은 장윤석 교수께서 꼬박꼬박 녹화해주셔서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거라도 어떻게 해볼까... 싶네요.
이 코너의 타이틀은 '부산의 노래 현장을 찾아서'였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