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균 군수의 강력한 의지로 추진위 구성, 86년 해체
1977년 정채균 군수의 지원아래 500만원의 사업예산이 세워졌도 청자재현 사업이 본격화됐다. 이때 청자재현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했고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이때 청자재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는 나와 조기정 선생을 중심으로 당시 지역에서 유지급 인물들이 포함됐다.
조기정 선생은 이때 광주에서 도자기를 만들며 청자에 대해 연구를 해왔던 인물이었고 나는 우리 집 마당에서 청자가마터가 발견되고 뒤뜰에서 청기와가 발견되면서 청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군대 제대후 청자재현 사업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1973년 무렵부터 청자재현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청자재현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전국의 주요 신문에도 인터뷰를 통해 보도가 될 정도였다. 나는 마을주민들에게도 이같은 뜻을 전달했고 함께 동참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우선 청자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확보해야 했다. 오래전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을 주변에서 좋은 흙을 찾았고 주민들이 함께 흙과 불을 땔 나무를 모았다. 도자기와 청자 유약을 만드는 것은 전문서적을 통해 배워야만 했다.
나는 청자와 도자기 기술을 익히기 위해 마을을 찾아오는 많은 학계 연구진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도자기로 이때 이미 명성이 높았던 경기도 이천과 광주 등을 수차례 찾아다니며 도공들에게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이때 나와 주민들은 상감청자 기법을 익힐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실력을 쌓았다.
나와 마을주민들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익히게 됐고 구워서 도자기로 만들 수 있을 정도 작품이 꽤모았졌다. 문제는 이를 구워낼 수 있는 가마가 없었던 것.
이때 때마참 청자재현의 바람이 불었고 정채균 군수의 예산 지원아래 청자재현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때 참여한 인물들은 길전식 공화당 사무총장과 황호동 의원, 고건 도지사, 최순우 국립박물관장, 정양모 학예연구관 등과 조기정 선생과 내가 포함됐다. 그 외에 군청 공직자와 교수 등 다양한 인물들이 포함됐다.
청자재현추진위원회가 꾸려지면서 1978년 나와 조기정 선생과 많은 사람들의 노력 끝에 청자재현 사업이 성공을 거뒀다. 성공은 그동안 많은 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돼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돼 오늘날 강진청자산업의 기틀이 됐다.
이렇게 고려청자 재현에 성공이후 1986년 공식적으로 강진군고려청자사업소가 발족됐고 청자재현추진위원회는 그 목적을 상실해 해산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때 추진위에 포함돼 있었던 사람들은 추진위 해체에 당연히 반대의견을 내놓았고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였다.
강진군은 중앙정부의 직제개편 승인을 받아 사업소를 설치했고 추진위는 이제 역할이 끝났기 때문에 해체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에 끝가지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행정소송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끝에 ‘발전적 해체’라는 의미를 담아 결국 추진위는 해체됐고 위원들은 모두 자문위원으로 배치돼 사업소와 강진청자 발전을 위해 자문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이후부터는 현재대로 군에서 운영하는 고려청자박물관과 개인들이 운영하는 개인요 업체들로 나눠져 운영되고 있다.
<정리=오기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