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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실버인생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호
통영 상륙작전 기념관 개관 행사에 다녀와서
-김성은과 윤이상이 공존할 수 있는가?-
이선호 : 해병대 대령(예), 전 국방대 교수
1.귀신잡는 해병대의 발원
지난 8월 16일 경남 통영에서 한국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 제6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다. 통영시 해병대전우회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통영 상륙작전참전 노병들을 비롯하여 해병대1사단장(이영주), 통영시장(김동진), 해병대 전우회 중앙회 총재(김인식), 전 해병대 사령관(공정식), 전 해군 참모총장(김영관, 이승호), 통영.고성 국회의원(이군현), 통영시 의회의장(천재성)외에 인근 거주 예비역 해병 1000여 명, 현역 장병 250여 명이 참석해 그날의 감격을 되새겼다.
참전용사에 대한 명예 선양과 해병대 전승의 역사를 길이 계승하는 한편 국민 안보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실시된 이번 행사는 상륙작전 현장과 당시 전투의 하일라이트였던 원문고개의 전적비에서 헌화·분향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어서 통영 화물선 부두에서 기념행사를 한 후 식후행사로 통영시 일원에서 상륙침투장비인 침투용 고무보트(IBS)와 함께 현역 장병들의 시가행진이 이어졌다.
특히 이번 통영상륙작전 기념행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승전을 기념하는 축제와 함께 진행돼 그 의미를 가일층 높였다. 통영상륙작전은 지난해 별세한 고(故) 김성은 전 국방장관(당시 해병중령)의 부대가 6·25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17일 통영일대에 상륙, 낙동강 방어선을 뚫고서 마산과 진해 그리고 거재도 경유 임시수도 부산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의 기도를 좌절시킨 한국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이다.
적이 점령하고 있던 통영을 성공적으로 탈환한 이 작전의 승리는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어진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전선의 연합군 총공세이전 발판을 마련한 쾌거였다. 뉴욕헤럴드트리뷴 마거릿 히킨즈 기자(여성)에 의해 ‘귀신 잡는 해병’(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 !)이라는 격찬의 승전 메시지가 전 세계에 타전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의 상승 해병대 신화가 창출되었던 바, 상징성이 큰 상륙작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작전에 앞선 진동리 작전에서 대승한 김성은 부대에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광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통영시는 이 역사적인 통영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2008년 8월 기념관 입지를 선정하고, 2010년 7월에 기념관 건립공사에 착수, 2011년 4월에 건물완공 및 내부치장을 끝내고, 동년 5월에 고 김성은 장군의 유품과 해병대 관련 자료 1천여점을 기증받아 진열하게 됨으로서 2011년 8월 17일 61주년 작전기념일을 기하여 기념관을 개관하게 된 것이다.
2. 서울에서 통영까지 버스로 이동하면서
해병대의 행사에는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비가 오는 경우가 많았음을 기억한다. 비가와도 절대로 행사를 연기하지 않는 것이 또한 해병대의 관례이고 전통이었다. 유별나게 비가 많이 온 금년 여름이라 이 날이 예외 일수는 없었다. 서울(용산 용사의 집 앞)에서 대형 관광버스 3대에 8시반 쯤 분승한 해병전우회 소속 회원 150여명의 노병들은 모두 빨강 모자를 쓴 역전의 용사답게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란 좌우명 그대로 건장한 모습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실버 인생의 본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는 해병대 창군 멤버인 이서근, 김성대, 강복구, 강동구 등 80대 후반-90대 초반의 대 선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 김성은 장군의 아들(김영환 예비역 해병장교)이 고맙게도 목적지까지의 왕복 교통수단과 주식 및 석식을 제공해 준 것이다. 신설된 통영까지의 직행 고속도로 덕분에 5시간 정도의 우중 질주 끝에 무사히 통영에 닿으니 비가 그쳤다. 버스 속에서 해병대의 변화와 발전 그리고 당면과제에 대하여 각계각층에 몸담고 있는 해병대 출신 유명인사들의 자발적인 발언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다.
특히 해병대의 최근 강화도 초소 총기 난사 사건과 관련한 언론과 당국의 질타에 대하여, 해병대의 속성이 공세적 군사조직이며, 사생결단의 전장에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기량의 함양을 위해서는 평소의 남다른 강한 훈련과 인내가 요구된다는 전제하에, 지나친 안전관리 위주의 나약한 군대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병대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당면한 해병대의 현실을 환경에 적응하여 조화롭게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금번 사태는 해병대만의 책임이나 잘못으로 탓 할 수 없다. 전원 지원병으로 높은 경쟁을 거쳐 선발 입대하는 해병들은 외아들로 자라난 고난과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세대 젊은이들의 일원인 바, 이들의 개성개조와 더불어 애국심과 조직에 대한 충성심 함양을 2년이란 단기간 내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의무복무연한내의 병영생활속에서 인간개조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며, 조직의 임무수행을 위한 상하간 갈등과 분쟁 요인은 항상 잠복해 있기 마련이다. 계급이 인격 시 되는 사닥다리의 수직적 계층구조속에서 약간의 군대조직문화상의 마찰과 불협화음이 있기 마련이며, 민주적 리더십이 만능일 수 없는 특수상황이 상존한다.
금번 사태가 마치 해병대 만의 문제인 것처럼 “귀신잡는 해병대가 사람 잡는다”식의 왜곡 굴절 편중된 보도는 가당치 않다고 본다. 우리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가 공동책임을 공유하는 차원에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처방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예비역 선배들의 모군을 위한 자조적 노력과 공헌이 더욱 절실하다는 데에 차속의 공감대가 이루어 졌다. 필자는 참고로 최근 통영의 윤이상 음악관이 통영시민의 갈등요인이 되고 있는 현실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지금 차속에서 경청하고 있는 백전노장들도, 과거 현역 시절에 그리고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와중에서 그 당시의 경험했던 엄청난 부조리와 불만족을 다 극복하고서 고통스러웠던 그 당시의 과거사를 이제는 낭만과 추억으로 회상하면서 모군의 영광을 자기의 자존심으로 승화시키는 성숙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노구를 이끌고 우중에 왜 멀리 통영까지 기쁜 마음으로 전우들과 동행하는가? 타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상경하애의 영원한 전우란 선후배간 친밀 분위기는 해병대 특유의 기풍이고 전통이다.
원문고개에 있는 해병대 통영 상륙작전 기념탑에서 약간 윗쪽에 세워진 기념관은 아담한 지상 2층(건축면적 316 평방미터)의 건물로서 전시관, 체헙시설, 야외전시장 등을 갖추고 있다. 아직 주변 산언덕의 조경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았지만, 기념관이 위치한 이곳 원문고개는 통영시내와 멀리 거제도까지 조망할 수 있는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형지물임을 알 수 있다.
이 기념관이 건립되기 까지는 우여 곡절도 많았다. 통영 출신의 음악가( 김일성 추종자, 작고) 윤이상의 기념관이 좌파정권하에서 세워짐으로서, 그를 높이 평가 한 나머지 통영시민을 적치하에서 해방 시킨 김성은 장군의 전공이 희석되고 오히려 해병대가 통영시민을 학살했다는 유언비어까지 유포되면서 기념관 건립이 벽에 부딧쳐 늦어진 것이다. 상륙작전 기념관은 국비로 웅장하게 건립한 윤이상 기념관에 비하여 시비로 건립한 너무도 왜소한 외형의 건물임을 알수 있다. 그러나 이 기념관을 해병대전우회 통영시 지회가 통영시로부터 수탁관리하게 됨으로서 더욱 알찬 기념관으로 거듭나 잘 유지발전하게 될 줄 안다.
3. 통영 상륙작전의 진가 재음미
1950년 8월 17일의 통영상륙작전에 앞서 김성은 부대는 동뇬 8월 3일 경남 창원군 진동면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북괴군 제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적 제6사단의 예봉을 꺾어 침공을 저지하였다. 이 공로로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여광을 얻었다. 동년 8월 7일부터 미 육군 제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특수임무부대가 진주고개로 지향된 대규모 반격 작전(1950.8.7 ∼ 8.12)을 전개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진동리 마산 간의 보급로를 타개하고 야반산‚ 수리봉‚ 서북산 일대의 적을 완전히 격퇴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북괴군 제7사단이 거제도를 점령하고 전략 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하여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 8. 17일 18:00. 7척의 해군 함정의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2일 만에 전술 요충지 통영을 탈환한 뒤, 원문고개에서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 작전에서 해병대는 작전의 승패를 가름하는 매일봉 고지를 적보다 5분 먼저 점령하여 인해 전술로 공격하는 적을 격멸하고‚ 통영 시내의 잔적을 소탕하면서 적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조기에 탈취 확보하여‚ 여러 차례의 공방전에서 적 1개대대를 섬멸함으로써 낙동강 교두보선의 서측방 위협을 제거하였고‚ 유엔군 철수작전 중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작전을 수행하여 ‘귀신잡는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진동리 지구의 적은 매일 증강되는 유엔군의 철통같은 방어작전으로 인해 그들의 의도대로, 마산, 진해, 부산 등을 손아귀에 넣을 수 없음을 알고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는 통영으로 돌려 견내량해협을 건너 거제도를 점령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거제도는 부산과 지척간이다. 8월 15일미명을 기하여 북괴군 7사단 소속의 증강된 1개대대 약 650명이 고성으로부터 통영으로 향하였고 이날 17:00시 경에는 그 선두가 통영읍 북방 3킬로미터 지점인 통영반도로 통하는 가장 좁은 지대인 원문고개에 침투하였다. 이때 경찰관 약 100명이 원문고개를 방어하고 있었으나 적의 공격을 감당치 못하고 야음을 이용 통영을 포기하고 한산도로 철수하여 버렸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950년 8월 16일 해군참모총장은 김성은 부대로 하여금 즉시 거제도 서해안에 상륙하여 통영으로부터 거제도에 참투하려는 적을 격멸하라는 명령에 따라 2척의 LST에 병력을 분승시켜 밤 10시경 군항을 출항했던 김부대장은 이튿날 새벽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동쪽 기슭에 이르러 자신이 세워놓은 북안에 따라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즉 먼저 2개조의 정찰대를 운용하여 통영시가지 쪽과 거제도 서해안 쪽의 적정을 살펴본 그는 해군본부에 타전하여 작전명령의 변경을 요청했다. 그 이유는 불과 기백명의 적은 병력으로 거제도의 긴 서해안을 수비하는 소극적이고 불안한 대책보단 차라리 당시 통영 해상을 초계중에 있던 PC-703호를 비롯한 수척의 우리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통영읍 동북단의 장평리(長坪里)에 기습적인 상륙전을 감행하여 그 이튿날 새벽 통영시가지를 감제(瞰制)하는 시가지 동쪽의 망일봉을 선제점령하고, 일부 병력을 통영읍의 진입 길목인 원문고개로 진출시켜 적의 퇴로와 적 후속부대의 진입을 차단하는 가운데 총공격을 감행한다면 통영의 적을 독 안에 든 쥐 때려잡듯 소탕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끈질긴 작명변경 요청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상륙작전의 승인 받게 된 김성은 부대장은 703호 함장과의 협의를 거쳐 PC-703호와 소해정 504, 901, 302, 307호 등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적으로 하여금 시가지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그 일대에 포화를 집중시키고 거제도 맞은 편 해안인 장평리에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계획대로 그 이튿날 새벽 1개 중대를 원문고개로 진출시키는 한편, 망일봉을 점령하여 한발 뒤늦게 그 봉우리로 올라오는 100여 명의 적을 요격하여 승기를 잡게 되었다. 그날 오후 해군통제부로부터 탄약과 1개 중대의 지원병력을 받은 다음 그 다음날(8.19) 미명을 기해 총공격을 감행한 끝에 그날 오전 10시경 드디어 적 수중에 들어가 있던 통영 시가지를 완전 탈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6. 25전쟁 이후 적의 수중에 들어간 국토를 처음으로 되찾았던 쾌거였다. 또한 한국 해병대가 최초 단독으로 해군 함정의 지원 하에 수행한 작전으로서 유엔군이 방어에 급급할 때 국군의 유일한 공격전이었 던 바, 작전의 성공은 높이 평가되었다. 김성은 부대는 그 후 명성이 전세계에 알려짐으로서 해병대 제1연대로 개편되어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의 주력인 미해병제1사단에 배속되어 9월 15일 적전 상륙작전을 결행하고 수도탈환의 선봉에 서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4. 윤이상의 공로가 김성은을 앞서는가?
음악가 윤이상을 영웅시하는 통영에서 윤이상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윤이상이 1985년에 북으로 유인 해다가 요덕수용소에 집어넣은 희생자 신숙자(1942년 12월 생)가 바로 통영의 딸인 사실이 아주 최근에 극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은 한 장의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의 배경이 요덕 수용소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어느 한 의협심 있는 목사가 신숙자가 통영초등학교 45회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하는 주간조선 기사를 읽고 중요한 줄거리만 추린 것이다.
오길남 박사(67)는 30대에 독일에서 공부하던 중 간호사로 일했던 신숙자를 만나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그리고 1985년 윤이상의 꼬임에 빠져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북한으로 갔고, 오길남만이 1년 후 탈출하여 한국에 왔다. 오길남 박사는 국정원의 한 연구기관에 적을 두고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술을 마시지 않고는 처자식 생각에 잠을 못자는 처지로서 알콜 중독으로 폐인이 되어 가고 있다. 아내와 두 딸을 구해달라면 탄원서를 쓰며 지금까지 애를 태워 왔지만 메아리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 그의 부인 신숙자가 통영의 딸이며,요덕수용소에 있다는 내용이 공개돼 통영사람들에 일대 충격을 주고 있다. 윤이상이 통영의 영웅이라며 ‘윤이상음악당’까지 세우고 한국 조각가가 만든 윤이상 동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북한으로부터 동상을 들여다 세울 정도로 윤이상에 몰입해 있던 통영사람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일 것이다.
통영시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도서관 1층에서는 지난 5월 25일~6월 19일까지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가 열렸다. 그 전시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남녀노소 없이 충격과 비통에 빠졌다. “이 전시회를 보고 나서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전시회를 주관하는 곳은 통영기독교연합회와 통영현대교회(담임목사 방수열)다.
이 전시회는 세이지코리아와 한동대 북한인권학회가 지난해 10월 한동대에서 시작했다. 지난 2월에는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전시되었고, 김윤옥 여사가 관람하기도 했다. 이 전시회에는 흑백 가족사진 한 장이 인쇄되어 있고 그 밑에는 이런 글이 있다.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 그런데 통영의 딸이 그곳에 있습니다. 사진은 1991년 작곡가 윤이상이 다시 월북하라고 회유하기 위해, 육성이 담긴 테이프와 함께 건네준 가족사진이다.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이 사진의 배경이 수용소 내부라는 것이 확인됐다. 신숙자. 1942년 12월 10일 통영 서호동 출생. 통영초등학교 45회 졸업. 통영여중 9회 졸업.”
전시장에는 남편 오길남씨가 쓴 저서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도서출판 세이지)도 전시되어 있다. 오길남씨는 1993년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라는 책을 냈다. 전시회 주최 측이 만든 전시 팸플릿에는 사연이 간략하게 소개돼 있다.
“오길남 박사는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아내 신숙자씨는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1985년 겨울 오길남 박사는 북한에서 좋은 교수직과 아픈 아내에게 최상의 진료를 보장하겠다는 북한 요원의 말을 믿고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월북한다. 그러나 북한에 도착하자 오씨의 가족은 외부와 차단 된 채 세뇌교육을 받았다. 1년 후, 그는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는 남한 부부를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로 가던 중 탈출했다. 그리고 혜원·규원 자매와 아내 신숙자씨는 1987년 말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 갇히는데 이때 혜원 11세, 규원 9세였다.”
“오길남 박사가 북한을 떠나기 전, 아내 신숙자씨는 탈출에 성공하면 석 달 안에 빼내 달라.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우리 모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으라며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받을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러운 범죄 공모자의 딸들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지 말고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 달라. 나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다. 그 범죄 공모에 절대 가담하지 말라! 도망쳐라!’고 말했다.”
통영시와 윤이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술과 행적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이한 입장 때문에 ‘윤이상 기념관’이 지어지고도 이름을 ‘도천기념관’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조진규 두룡초등학교 교장은 “전시회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통영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 행적에 대해 확실하게 밝혔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헷갈려 합니다. 유족들은 그 당시 있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혔으면 합니다. 음악은 음악이니까요. 진실이 밝혀져야만 그 다음에 화합이 이뤄질 수 있다고 봅니다.” 고 통영의 딸을 파멸시킨 자가 통영의 대표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윤이상은 1989년 황석영과 함께 김일성에게 초청되어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했다. 황석영은 시나리오를 쓰고 윤이상은 음악을 깔았다. 이 사실은 필자가 2010년 1월에 처음 발견해 냈다.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사건’ 에서 ‘구라파 거점 북한문화공작원’으로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았다.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동백림(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과 북한을 왕래하며 벌어진 간첩사건이었다. 2년 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그는 95년11월 사망 시까지 27년간 북한을 계속 오가며 친북반한 조직들에서 중요직함을 가지고 활동했으며 90년11월20일에는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명 난 범민련의 공동의장이 됐다.
윤이상은 1992년 ‘오길남간첩사건’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오길남 박사(현재 서울 거주)는 독일유학 중 정치망명한 뒤 85년 입북하여 한민전대남흑색방송요원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 북한을 탈출해 199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윤이상은 길남의 입북을 적극 권장하고 도와주었고, 오길남이 북한을 탈출하여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갖은 협박을 하며 재입북을 권유했다. 윤이상이 독일에서 설립한 한국학술연구원(KOFO)은 북한의 자금을 받아 설립, 운영된 조직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다.
1992년 안기부는 ‘입북자수간첩 오길남 사건내용’이라는 수사결과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윤이상은 1980.11 북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로부터 ”고려연방제 창립준비위원회 결성을 위해 해외대표로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았을 만큼 북한의 지령에 의해 움직였다. 1984.12 평양에 북한의 해외문화 공작전위조직인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88.7 동경에서 정부의 대북교류 및 개방화 추세에 편승, 휴전선에서 ”남북 합동음악제“개최를 제의, 북한 측으로부터 즉각적 찬동을 얻는 등 북한의 문화공작에 따라 남북음악제를 추진했고, 17회에 걸쳐 음악제 구실 등으로 입북하여 김일성을 접촉하는 한편, 김일성 75회 생일선물로 작곡하여 바친 반미, 반파쇼, 통일투쟁을 내용으로 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등 자작곡을 10회에 걸친 연주회를 통해 발표하는 등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북한의 문화공작원이다”
“너(오길남)는 칠보산연락소의 비밀을 빼내간 미제 고용간첩이다. 너 때문에 동독에 있는 공작 총책임자가 평양으로 소환됐다.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면 가족을 몰살 시키겠다. 모든 것을 용서할 테니 다시 북한에 들어가서 살아라. 네 문제는 김일성 수령도 해결할 수 없다는 등의 협박을 하며 오길남의 재입북을 권유했다.”
2000년 북한이 펴 낸 김일성 교시집 ‘재서독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 등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들이 있다. “윤이상 선생은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성과를 통하여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올렸습니다....선생은 범민족통일음악회를 통하여 북에서 남조선당국자들의 기만선전을 깨는데도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선생이 조국통일을 위해 앞으로 자기의 힘과 재능을 다 바치겠다고 하는데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나는 선생이 이 사업에서 큰 성과를 거두리라고 믿습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 주체 1989-2000년 1월20일)
“선생이 민족의 단결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북남동포호의 소집문제를 제기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나는 북남동포회의를 하자는 선생의 제의가 매우 좋은 발기라고 생각하면서 전적으로 지지합니다...나는 선생과 같이 민족분렬을 끝장내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이 있기 때문에 조국통일 위업은 반드시 앞당겨지리라고 확신합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 2000년 1월20일)
“선생이 주체사상은 현시대에 맞는 사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혁명과 건설에서 백전백승하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은 주체사상을 지침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아무 때든지 선생이 다시 와서 만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 2000년 1월20일)
북한에서는 20여년 전부터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평양에는 ‘윤이상 음악당’이 건립돼 있다.1992년 북한은 윤이상을 모델로 ‘민족과 운명’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해외로 망명했다가 친북으로 변신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선전물이다. 이 영화는 북한의 백과사전 등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칭송되고 있다 한다. 위 서신은 북한의 ‘문학예술출판사’(주체92(2003)년 출간)가 펴 낸 ‘영원한 추억’이란 책자에 있고, 같은 책자에는 윤이상과 부인이 쓴 편지도 들어 있다 한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서거 1돐을 맞이하여 그 영령 앞에 심심한 애도와 흠모를 절감하오며 길이길이 명복을 비옵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 도이췰란드 베를린의 병원에서 윤이상 삼가 올립니다. 1995년 7월 8일”
5. 맺는 말
대한민국은 자유민주헌정체제하의 선진국 문턱에 와 있는 나라이다. 대한민국의 해병대 노병들은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자유를 위해 대공전선에서 악전고투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 봉사 희생한 국가유공자들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참전전우들의 대부분은 이름뿐인 국가유공자로서 국가로부터 응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가난과 질병으로 신음하면서 고령의 고독한 처지에서 당국을 원망하고 있다. 특히 다수의 고엽제 피해자들은 전상자 취급을 못받고서 소액의 수당에 만족해야 하는 소외된 집단이다. 그리고 미국과 베트남 정부로부터 받은 무공훈장도 국내법(상훈법)의 미비로 깡통훈장으로 전락하고 있는데도 당국이 무관심하고 있다.
그러나 5.18민주유공자는 엄청난 일시금과 연금까지 받는 국가유공자로 변신하여 특별 우대 속에 만족하고 있으니, 이 나라의 포푸리즘적 보훈행정이야 말로 역시도행(逆施倒行)이라 비판받을 만하다. 같은 맥락에서 대역죄를 범한 윤이상에게 국가가 훈포장을 수여하고 사면복권시켜 거대한 음악당까지국비로 건립하여 그 사이비 공적(?)을 기리도록 하면서, 통영상륙작전기념관 건립 지원을 외면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고 어불성설이다.
해병대는 공산주의자와 목숨걸고 싸웠으며, 지금도 공산주의자는 주적으로 우리들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김일성/김정일 기쁨조 역할을 위하여 동족을 희생시키면서 일신의 영달을 꾀한 윤이상을 통영시민이 우상같이 섬긴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윤이상과 김성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 통영시 해병대 전우회원들은 통영상륙작전기념관을 관리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알고서 국가안보의 역군답게 충무공의 후예답게 올곧은 자세를 견지하기 바라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