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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이 가사를 벗어 던진 사연 1
도가 통하지 않는 세상,
구원을 거부하는중생을 포기하지 않고
미륵은 깊은 고뇌로 새로운길을 찾고 있었다.
중생이 거부하는 도란 이미 도가아닌 것을
미륵불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세상의 도를 얻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도를 찾아 고뇌하는 모습.
무릇 도를 찾는 이의자세란 이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제 점심 때 만난 젊은 농부의 불퉁스런 말이떠올랐다.
그는 화담이 수십 년간 닦은 도를 말하자
단 한마디로 깔아뭉개버렸다.
모든 기는 한 뿌리이며평등한 것이라는 화담의 말이,
하루하루 차별을느끼고 살아가는 그 젊은이에겐
한낱 한가한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선비님도 굶어보시오."
이 말로써 그 사내는 화담을 비웃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화담은 이미 그런 속세의 고뇌쯤은
예전에떨쳐버린 사람이었다.
지함이 산방에 있을 때 다른 학인에게서 들은 말이있었다.
어느 날 강문우라는 학인이 쌀을 짊어지고 산방에갔다.
그 날도 화담은 하루 종일 낯빛 하나 흐트리지않고 강설을 했다.
강의가 끝나 쌀을 내어놓으니
화담이 빙그레 웃으면서
"너 본 지가 언제더냐' 하고물었다.
화담은 벌써 나흘 째 끼니를 잊고 있었던것이다.
율곡을 가르친 허엽도 그런 화담을 본 적이 있다고했다.
갑자기 장마비가 내려 학인들은 산방에 갈 수가없었다.
계곡의 물이 불어서 감히 건널 엄두가 나지않아
아무도 계곡 건너에 있는 산방을 찾지 못했던것이다.
장마는 엿새나 계속되었다.
비가 그쳐 허엽이산방에 가니
화담은 엿새 동안 끼니를 잊고 혼자서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런 화담이었다.
그런 화담이 오늘 미륵을 만나고있는 것이다.
지함은 조용히 법당을 나왔다.
자그마한 법당 뜰엔
가꾸지 않아도 제 스스로 자라는 들꽃들이
흐드러지게피어 있었다.
문득 민이가 내밀던 꽃다발 향기가 코끝을스쳐갔다.
민이는 늘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들꽃을 부러워했었다.
집안에 갇힌 여인네의 암담한 처지에 대한
반항이었을까.
들꽃의 자유를 그리던 민이.
누군지는모르나 산을 울리며 돌을 쪼는저 스님도
민이처럼자유를 그리워하는 사람일 것이다.
스님은 무엇에갇혀 있어 자유를 꿈꾸는 것일까.
지함의 혼잣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정소리가 뚝그쳤다.
벌써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저녁과더불어 산사에 휴식이 찾아온 것이다.
잠시 후 자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정 소리를 내던중이 산을 내려왔다.
그는 무거운 연장이 든 걸망을짊어지고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나타났다.
노승의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돌을 깎기엔 너무 연로해 보이는 중이었다.
노승을 마주 한 지함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합장을 올렸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겸허의 마음이
우러나오게 하는 위엄이 서린 얼굴이었다.
아니그보다는 법당에 외로이 놓인 미륵불과 마찬가지로
짙은 고뇌에 잠긴 표정이 너무도 절절해서
고개를숙이지 않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지나던 길손이온데 하룻밤 묵기를 청하고자합니다."
노스님 역시 조용히 두 손을 마주 모았다.
그리고 걸망을 내려 다시 쓸 연장들을
갓난애다루듯 조심스레 꺼내
꼼꼼하게 챙겨놓았다.
그때였다.
"아니, 이게 뉘시오?"
법당에서 나오던 화담이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노승이 천천히 화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화담의놀란 목소리가 무색하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받았다.
"화담 선생이시군요. 우리 인연은 정말 질긴가보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안으로드시지요."
두 사람이 안으로 들고 나서
지함은 멍한 표정으로서 있는
박지화의 옷깃을 붙잡았다.
"뉘신데 선생님이 저렇게 놀라십니까?"
"지족 선사일세."
"예? 이태 전에 송도에서 사라졌다는
그 지족 선사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참 세상은 넓고도 좁구만그래."
지함은 늦게 화담 산방에 입문했던 터라
지족선사를 만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지족과 황진이에얽힌 그 유명한 얘기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황진이 때문에 삼십 년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송도에서자취를 감추었다는 지족이
이곳 운주사까지 와서
천불천탑을 조성하고 있을 줄이야.
"선비님들도 안으로 드시지요."
저녁 종소리처럼 투명하고 적막한 지족의 음성에이끌려
두 사람은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땅은 넓어도 죄인이 도망칠 곳은 없다더니만.
세속말이 다 일리가 있는 모양입니다그려.
지족을 버리고
이름없는 석공으로 새 도를 쌓기 시작했는데…
이렇게지족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다시 만나게 하는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손님치고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겠군요."
"허허허."
지함의 짓궂은 말에 지족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로는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했지만
실제로는전혀 그런 것 같질 않았다.
"아니오. 오히려 고마운 손님들이올시다.
다른사람은 나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
손님들을 통해
내가 과연 지족을 버리는데 성공했는지
확인할 수있으니까요.
그러니 여러분은 부처의 현신인셈이지요."
지족은 이미 과거의 지족이 아니었다.
천불천탑을쌓는 거대한 원을 세운 석공으로서
그들 앞에 앉아있었다.
"그나저나 시장하실 텐데 좀 기다리십시오."
운주사에는 밥 지어주는 보살도 불목하니도 없었다.
하루종일 돌을 쪼다 온 지족은 자그마한 부엌으로나갔다.
지함과 박지화가 따라나서려 했지만 지족은굳이 마다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뜻밖에 지족을 만난화담은
눈을 내리감은 채 어둠과 같은 침묵에 잠겨있었다.
지족 선사는 송도에서 이름 높은 선사였다.
그 높은이름 때문에 지족은 황진이의 첫번째 표적이 되었다.
황진이는 제 스스로를 송도 삼절 가운데 하나라
일컬을 정도로 오만하고 도도했다.
원래 송도 관기의딸로
누군지 이름도 알 수 없는 양반의 씨를 받아태어났고,
장성해서는 제 어미를 따라 관기가 되었다.
조선 사회에서 기생이란 백정이나 장인과 다를 바없이
천한 신분이었다.
종과 다름없는 그가 스스로를송도 삼절이라 해도
누구 하나 그 말을 과하다고탓하지 않았다.
그만큼 황진이는 뛰어난 여자였다.
사내들의 뼈를 녹이는 방중술만으로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수려한 미모도 그렇거니와
천상의 선녀를연상케 하는 춤솜씨를 갖추었고,
내노라 하는선비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학식이 깊었으며
시심(詩心)은 고개를 절로 숙일 만큼 탁월했다.
만약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비록 종의 신분이더라도
무엇인가 세상을 위해 큰일을 이루어냈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자도 아니었고 양반도아니었다.
여자로 태어났으며
더우기 몸을 팔아야하는 기생 신분이었다.
비록 기생이었지만 황진이는
한낱 사내의 노리개에머물기를 거부했다.
소문난 명기 황진이를 첩으로앉혀보려고
명문 사대부들이 금은보화를 싸들고 줄을이어섰지만,
황진이는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스스로기생으로 남았다.
사람이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욕심이
더크다는 말이 맞긴 맞는 듯했다.
좀처럼 얻기 어려운황진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전국 각지의 사내들이송도로 모여들었다.
황진이의 집앞은 늘 그런사내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황진이가 송도장사치를 모두 먹여살린다는 말이
항간에 파다하게퍼질 정도였다.
황진이는 기생이면서도 기생이 아니었다.
황진이는남자의 부름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여자인 황진이 마음대로 남자를 청하고 놀이를 즐겼다.
그런 황진이가 야심한 밤에 지족을 찾아갔던것이다.
비 내리는 밤이었다.
도롱이도 받쳐 입지 않고 우산도 쓰지 않은 한여인네가
빗속을 더듬어 계곡을 오르고 있었다.
여인네의 얇은 비단 저고리는 비에 흠뻑 젖어
고운몸을 감춤없이 내비쳤다.
한발자국 떼어놓을 때마다
여인의 부드러운 살집이 물결치듯 탄력있게 출렁였다.
밤늦은 술시(戌時),
송악사 스님들은 이미 깊은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고색창연하게 비를 맞고 있는
송악사도 함께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황진이는 몸에 착 달라붙은 저고리의 물기도 짜내지않고
방장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선정에 들어 있던 지족 선사가
발을 제치고 나타났다.
모두 잠든 그 시간에 지족은 홀로철야정진중이었다.
황진이는 지족의 얼굴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소년처럼 피부가 투명한 노승의 얼굴을 보고
그가 지족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지족은 청아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단 한 치의틈도 없이 매섭고 날카로웠다.
"야심한 시간에 웬 아낙이오?"
기생의 신분으로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큰스님이었다.
"저어,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만…"
황진이는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속살이 다 드러난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젖은옷 사이로 살색 투명한 육체가
관능적으로 흔들리고있었다.
"들어오시오."
송악산에 여자가 밤 늦게 들어올 일이 없었다.
길을잃을 일이 없는 것이다.
황진이가 한눈에 지족을알아본 것처럼
지족 역시 황진이를 금세 알아보았다.
몸으로 달려오는 이 여인네가
그 유명한 황진이임을몰라볼 리 없었다.
황진이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지족은 그에게 낡은가사 한 벌을 내주었다.
"입으시게."
가사를 받아든 황진이는 지족 앞에서 젖은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하얀 여체가 희미한 등불 아래서춤을 추듯 움직였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의 탄탄한엉덩이를 닮은 몸이었다.
황진이는 스스럼없이 옷을 벗어던졌다.
지족은 난생처음 여자의 몸을 바라보았다.
황진이는 춤을 추듯 요염하게 몸을 틀며 천천히가사를 걸쳤다.
얇은 가사도 무르익은 여자의 몸을 다가리지는 못했다.
"스님, 춥사옵니다."
황진이는 바들바들 떨며 무릎걸음으로 지족에게다가왔다.
황진이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작고 도톰한 입술에서는 묘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추위에 견디지 못하는 신음소리 같기도 했고
절정에다다른 여인의 교성 같기도 했다.
지족은 담담하게 황진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만일까.
지족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워 이불 한장을 내려
황진이에게 주었다.
그리고 벽을 향해가부좌를 틀었다.
"시자야!
요사채 빈 방에 불을 지피고 이부자리를 마련하거라."
지족이 흔들리는 음성으로 시자를 불렀다.
"불을 지피고 나면 방이 따뜻해질 것이고,
그러면몸도 따뜻해질 것인즉. 건너가 편히 쉬게."
여전히 벽을 향해 앉은 지족의 말이었다.
"저를 겁내시는 겁니까?
도가 높은 스님께서겁내시는 것도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악도 다 스승이라 하셨거늘
스님은 무엇을 겁내고소녀를 내쫓으시려는 겁니까?"
당돌한 대꾸에 지족이 놀랐다.
문득 몸을 돌려황진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부딪쳤다.
가사 앞섶이 벌어지면서 황진이의 가슴이 그대로내비쳤다.
그런데도 황진이는 여밀 생각을 하지않았다.
오히려 지족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빤히응시했다.
지족의 부름에 잠이 깬 시자가 문 앞에서어른거렸다.
"됐다. 들어가 자거라."
법랍 사십 세,
속세의 나이로는 쉰인 지족,
열 살때 입산한 이후로
여자를 가까이 해본 적이 없는지족이었다.
경전을 읽고 염송을 하면서
색(色)은이미 오래 전에 떠나보낸 것이었다.
젊은 한때에는 밤마다 끓어오르는 육체의 욕망에
잠못 이룬 밤도 많았다.
그래서 탐진치(貪瞋癡) 세 가지독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글을 읽고 염불을 했던지족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비내리는 산사에 찾아든 이 여인.
여인은 소문대로 천하절색이었다.
하늘이 내린 만유중에
가히 최고라고 할 만한 게 여자 아닌가.
지족도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족은 선정을 접고 촛불을 껐다.
그리고 황진이가누운 이부자리 윗목에 누웠다.
지족은 눈을 뜨고 태초와 같은 어둠을 보았다.
다끊어냈다고 믿었던 욕망이
몸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기시작했다.
지족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욕망은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대체 여자란 무엇인가?
이 질긴 욕망은 어디에서오는 것인가?
참담한 절망 속에서 지족은
욕망의 불길을 잠재우기위해 생각을 가다듬었다.
일찌기 고려 스님 진각국사가
공안 1700가지를 모아 선가(禪家)에 전했지만
여자 문제는 그 속에 전혀 없었다.
뜨거운 여자의 몸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욕망의 사슬에 휘감긴 지족은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불덩이 같은 손길이 지족의 몸에 와 닿았다.
순간모든 생각이 일시에 사라지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전율로 지족은 온몸이 떨려왔다.
지족은 왜 몸이 꿈틀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속에서는 온갖 부처의 명호가 날아다니고
온갖 화두가들락거렸지만 몸은 따로 있었다.
황진이는 남자의 전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있었다.
황진이는 더욱 부드러운 손길로
지족의떨리는 몸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황진이의 가슴 속은 허망하기만 했다.
대체 그것이 무엇이길래 이 이름 높은 지족까지
무너지고 마는가.
차라리 예서 그만두고
지족이자신의 도를 지키게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황진이의 골수에 깊이 박힌 절망이
자신을벼랑으로 내몰고 있었다.
"스님, 소녀는 처녀도 아니옵고 지어미도 아니옵니다.
뭇남자들이 왔다가 지나가는 그저 기생일뿐이옵니다.
스님께서 저를 가까이 하신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니
죄 짓는다는 생각은 조금도마시옵소서."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