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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일로 서(華山一路 序)
일찍이 우리 불타(佛陀)께서 능엄경(楞嚴經에 이르시길
저 삼매(三昧)를 증득(證得)하여
멸진(滅盡)에 이르지 못한 종사(宗師)가 비롯 만천(萬千) 가지
법문(法門)을 비 오듯 지견(知見)을 내어 설(說)하여도
이는 마설(魔說)이니
죽어서 정령(情靈)의 무리에 든다. 하셨으며
남양(南陽) 혜충 국사(慧忠國師)에게 한 거사(居士)가
사익경(思益經)에 주석(註釋)을 쓰겠다고 하니,
바리때에 물을 떠서 쌀알 일곱 알을 넣고 다시 수저를
그 위에 놓고서 “저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하며 묻자,
거사(居士)가 이에 답(答)을 하지 못하자. 말씀하시길
“저의 뜻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어찌 불타(佛陀)의 말씀에
사족(蛇足)을 그린다고 하십니까?” 하셨으니,
이는 번뇌(煩惱)가 멸진(滅盡)한 선정(禪定)이 없는
지혜(知慧)는 건혜지(乾慧智) 요,
사사(事事)에 반야(般若)를 발휘(發揮) 하지 못하는 것은
무기 정(無記定)이라 하나니
참으로 불법(佛法)은 희유(稀有)하여
상량(商量) 하기 어렵고 어려울 뿐이다.
일찍이 육조(六祖) 혜능(慧能) 스님께서
단경(壇經)에 논(論)하시길
정혜쌍수(定慧雙修)하여 일행 삼매(一行三昧)에 이르러야
비로소 깨달음이라 하셨으니,
아.. 불조(佛祖)의 헤아릴 수 없는 큰 깨달음을
어리석은 중생(衆生)의 근기(根器)로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는 뱀을 보지 못한 화공(畵工)이 사족(蛇足)을 그리는 격이요
토기뿔을 보고서 거북털이라 우기는 격이다.
그리하여 깊이 사량(思量)하여 보니
오늘날 불법(佛法)은 약해지고 근기(根器)는 하열(下劣) 하여
믿음은 주작(做作)하고 발심(發心)은 간절하지 않으니
어찌하여야. 무량(無量) 아승지겁(阿僧祗劫)의
육도 생사(六度生死)를 초탈(超脫)하여
무량(無量) 중생(衆生)을 제도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하니!
이 글 또한 마설(魔說)이요 사족(蛇足)을 그리는 것이라,
한탄(恨歎) 스럽고 부끄러워 땅을 밟지 못하고
하늘을 볼 수 없지만
본시(本始) 철면피(鐵面皮)라
선문(禪門)에 들어와 행각(行脚)을 하는 가운데
틈틈이 사량(思量)하여
공부를 지어가며 스스로 자경(自警)을 삼고자 하여
만(萬) 가지 허물을 덮고 한 가지 지해견(知解見)을 세우나
어찌 종문(宗門)에 부합하여 선문(禪門)에 덕(德)이 되리오...
비록 그러하나 요즘 선(禪)을 배우는 이들이나
가르치는 선장(禪丈)들의 사견(邪見)을 지적하여
스스로 수행(修行)함에 경책(警策)을 삼아
정도(正道)를 이룰 수는 없을지언정
어찌 잘못된 견해(見解)에 현혹되어
일생(一生)을 허비하지 않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요즘 세계(世界)는 한 마을과 같아
우리가 모르던 정보(情報)를 내 집 일처럼 알 수 있어서
어떤 이들은 남방 불교(南方佛敎)에 입문(入門)하여
위파사나(毘婆舍那) 혹은 사마타(奢摩他) 등을 배워 익히고서
북방 불교(北方佛敎) 대중에게 설(說) 하기를
이것이 불타(佛陀)의 변질(變質) 되지 않는 진실한 수행법이다,
이들이 주장을 하지만 도리어
그 들은 위파사나 하나의 수행법에만 집착하고 있으며
또 사마타 수행자들은 오직 사마타 수행법만을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현혹(眩惑)이 되어서
불조(佛祖)의 가르침인 간화 선문(看話禪門)을 비방하나니
참으로 한탄(恨歎) 스러울 뿐이다,
그러하므로!
해심밀경(解深密經)에 세존(世尊)께서 설하시길
“유의 법(有爲法)과 승의(勝義)의 양상은
하나와 별개의 성품(性品)과 양상을 초월(超越) 하도다
만약 하나와 별개(別個)라고 분별(分別)하면
그는 진리(眞理) 그대로 행(行)하는 것이 아니네 “ 하시면서
지관 이도 동이문(止觀二道同異門)이라,
사마타 위빠사나가 다르지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님이라
하시면서 "지관 쌍수(止觀雙修)를 함께 닦아야 한다" 하셨으니.
오로지 사마타만을 닦으면 식(識)이 중단됨이 없는
상속심(相續心)으로 오인(誤認) 하기 쉽고,
위빠사나만 닦으면 심 외실유(心外實有)의
망집(妄執)에 빠질 우려가 있으니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행(行) 할 때
선정(禪定)의 마음에 나타난 영상(映像)이
오직 식(識) 임을 통달(通達)하여
진여성(眞如性)을 사유할 수 있으니
지관(止觀)을 함께 행하여
사마타의 선정(禪定) 위에 나타난 영상(映像)이
위빠사나의 인식(認識) 대상이어야 한다고 하셨다,
아는가?
천태(天台) 스님은 이를 지관 타좌(止觀打座)라 불렸으며
육조(六祖) 스님은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하셨으며
황벽선사(黃蘗禪師)는 이를 간화(看話)라고 하였고
조동(曹洞) 두 선사는 이를 묵조(黙照)라 칭(稱)했으며
연수(延壽) 스님은 이를 염불(念佛)이라 불려고,
대혜(大慧)는 이를 경절 활 구문(徑截活句門)이라 불렀으니
이는 법이 나누어져 여려 이름이 생겨 남이 아니요,
오직 중생(衆生)의 근기를 따라 이 문(門)에 이르게 하고자
여려 방편(方便)을 세운 것이라, 하나
그 뜻이며 가리킨 의지는 오직 한길이니
어찌 종사(宗師)의 방편(方便)에 차별(差別)을 두어
바르고 그른 것을 시시비비(是是非非)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중국 화산(華山)에 이르는 길은 사방(四方) 팔방(八方)이지만
정상(頂上)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한길(華山一路)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아,,, 그러나!
요즘 간화(看話) 선문(禪門)에서는
어떤 이들은 조사 공안(祖師公案)을 간택하여
수행(修行)하게 하지만 이는 화두(話頭)와 공안(公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함이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옛 스님들께서는
모두 화두(話頭)를 투철(透徹)하여 깨달음을 얻었지.
공안(公案)을 깨달아 법상(法床)에 오른 이가 없었으니,,.
오늘날 바른 선법(禪法)을 세운 종사(宗師)가 보기 드물기에
다만 조사 공안(祖師公案)을 간택(揀擇)하여
공부(工夫)를 지어가게 함이니.
어찌 그들의 허물이라 하겠는가?
내가 박복(薄福)하여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친견하지 못하고
근기(根基)가 둔함이니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스스로 작은 견해(見解)로 자경문(自警文)을 지어서
틈틈이 공부를 살피고 살피고자 함이니라,
또, 이 간화 선문(看話禪門)에서
잘못된 견해(見解)를 갖고 있는 자들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修行)의 요체(要諦)로 삼으니
화산 일로(華山一路) 몇 줄로 경책(警策)을 삼아서
이 길을 나아 가는데 스스로 요의(要義)로 삼의리라.....
화산 일로(華山一路) 송(頌)
산정 위로 흰 구름 피어오르니
칼날 같은 외길(一路)이 눈앞에 드려나네
험하고 거 치른 길목에서 몇이나 목숨을 잃어던가?
구름 비켜서니 붉은 소나무 푸른 바위에 서 있네.
화산일로(華山一路)..1
참선(參禪)은 오직 조사관(祖師關)이요
조사관(祖師關) 제일의(第一義)는
경절문 활구선(徑截門 活句禪) 한길이니
저 문(門) 가운데 나아가
언하(言下)에 돈제망념(頓除妄念)하여
사량(思量)과 분별(分別) 지해(知解)를 모두 놓아 버리어
의로(意路)와 이로(理路) 언로(言路)와. 견문(見聞)의 지각(知覺)
오온(五蘊)의 심기(心氣)가 일시에 끊어져
맛이 없는 맛을 의심하고 반조(返照)하여
모기가 철우(鐵牛)에게 주둥이를 박지 못할 곳.
나아가야 갈길 없는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몰립(沒入)하여
여실히 간화참구(看話參究)를 하면
힘이 안 드는 곳에서 힘을 얻어서
육창(六窓)의 문(門)이 자연히 열리어
홀로 드높고 드높으면
평탄하고 평탄하게 되어서
경계(境界)에 투사(投捨)되어 부딪쳐도
흩어지지 아니하는
순일(純一)한 오묘함에 이르러
지각심(知覺心)을 내지 말고
의정화두(疑情話頭)의 심천(深淺)을
깊이 살피고 살펴서
그 경계(境界)를 철저히 점검하여야 하나니
고봉(高峰) 스님 의 선요(禪要)는 고금(古今의 표준(標準)이라
동정(動靜). 몽중(夢中). 숙면일여(熟眠一如)를 지나
오매일여(寤寐一如)에 이르러야 한다.
고인의 말씀에
“닦아서 증득(證得)한 바 없지 않으오나
이제는 오염(汚念)되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혹 앞서 한 경계(境界)속에
불현 득 문득 깨쳐다고 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돈각(頓覺)이 아니요
원돈신해(圓頓信解)의 해오(解悟)이다.
옛 귀종선사(歸宗禪師)께서 이르시길
“조그마한 티라도 눈에 있으면
허공(虛空)에 꽃이 어지러 히 떨어지니라“ 하셨으니..
필히 명안종사(明眼宗師)에게 나아가서
참예하고 일을 물어야 한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는
돈오(頓悟)와 증오(證俉) 두 가지 문門)이 있으니
단박에 안신입명(安心立命)에 이르는최상승 (最上乘) 길이요
점차(漸次) 증득(證得)하여 구경(究竟)에 이르는 대승(大乘)의 길이라
돈증(頓證)의 경계(境界)는 사람 근기(根機)에 있을 뿐,
불조(佛祖)의 의발(衣鉢)에는
돈점(頓漸)의 희론(喜論)은 본래(本來) 없으니
세속(世俗)의 이견(異見)에 침노되어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망각함을 반조(返照)하여
경계(境界)의 길을 따라
본참화두(本參話頭)의 의정(疑情)을 깊이 살피고 살펴야 한다.
송(誦)
조주(趙州)의 칼날에. 혀끝을 잃고..
임제 일 활(臨際一喝)에 귀를....
덕산 봉(德山棒)에. 뼈를 잃어버리니....
어느 곳에서 나의 그림자를 볼 수 있겠는가...?
가을 기러기 창공(蒼空)으로 날아올라 흔적이 사라지니
청산(靑山)이 눈앞에 (.滿目靑山.) 가득 하구나.... 아악!
화산일로(華山一路)..2
간화 선문(看話禪門)에 입문(入門)하는 길에는
세 가지 요긴한 관문(關門)이 있으니
먼저 순수한 진심(眞心)이 돈발(頓發)한 대발심(大發心)이다.
순수한 진심(眞心)이 돈발(頓發)한 발심(發心)이 이루어지면
육진(六塵) 경계(境界)가 자연히 끊어져
초도(初道)에 입문(入門)하는 길이니
순수하고 순수하며
진실(眞實)하고 진실한 무상 대발심(無常大發心)은
모든 불조(佛祖)의 스승이니
뜻을 고결(高潔)하게 세워
육진(六塵)의 삶 속에 투사되는 역경계(逆境界)를 맞이해도
인의적이고 가식적(假飾的)인 주작심(做作心)을 버리고
기교(技巧) 없는 진실(眞實)한 삶을 수용하여야 한다.
옛 황벽(黃蘗) 스님께서 이르시길
추위가 사무쳐서 뼛속까지 얼지 않으면
매화(梅花) 꽃을 볼 수 없다고 하셨으니
육진(六塵)이 무상(無常)하면 발심(發心)이 간절하고
사무치면 대분심(大墳心)이 돈발(頓發) 하니
돈발(頓發)한 분심(墳心)이 충만(充滿) 해지면
구법(求法)하는 마음이 목전(目前)에
현전(現前) 하여지니
이때에 종사(宗師)와 선법(禪法)을 바르게 만나
계합(契合)하여야 한다.
옛 스님 선문 고사(禪門古史)에
간절(懇切)한 마음 간절(懇切)한 절자(切字) 하나만 있으면
겨자씨로 수미산(須彌山)을 삼킨다 하시고
화롯불이 머리 위에 올려있는 거와 같아서
모든 오음(五陰)의 습기(習氣)가
침범(侵犯) 할 수 없다고 하셨으니
참으로 분심(憤心)이 충만(充滿)하지 하지 않으면
공부(工夫)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또한 대혜(大慧) 스님이 서장(書狀)에 이르시길
크게 의심(疑心)하면 크게 깨달으면
의심(疑心)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고 하시고
조사관(祖師關)을 참구(參句)하는 간화선(看話禪)은
발심(發心) 분심(憤心) 의심(疑心)이 세발 달린 솥(鼎)과 같아
하나만 없어도 바르게 세울 수 없다 하셨으니
발심(發心) 분심(憤心) 의심(疑心)이 일심(一心)이 되면
즉시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여
목전(目前)에 화두(話頭)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 하여지니
하늘을 보아도 하늘이 없고
땅을 보아도 땅이 없고
새소리 물소리가 오직 화두(話頭) 일념(一念) 하나
공적영지(空寂靈知)하고 영적 공지(靈寂空知) 하여
타성 일편(打成一片)이 일념(一念) 무심(無心)에 이르면
이를 경절문(徑截門) 활 구선(活句禪)이라 칭(稱) 하나니
일찍이 간화선(看話禪)을 선창(先唱)하였던
대혜(大慧) 스님과 보조(普照) 스님께서 이르시길
간화선(看話禪) 제일(第一) 의지(意志)는
오직 경절문(徑截門) 활 구선(活句禪) 한길이라고
누누이 주장하심을
깊이 새기고 살펴야 한다,
혹, 초심(初心) 학자가 공부(工夫)가 순일(純一) 하지 않음은
분심(憤心) 가운데 의심(疑心)이 없거나
의심(疑心) 가운데 분심(憤心)이 없음이니
모두 진실(眞實)하고 순수한 발심(發心)이 없기 때문이다.
송(誦)
발심(發心) 분심(墳心) 의심(疑心) 세발 달린 솥(鼎)이여.
묘각(卯角)을 솥(鼎)에 녹이니 도리어 진흙 구(龜)가 나오네
경절문(徑截門) 활 구선 제일구(第一句)를 알고자 하는가?
썩은 송장(送葬)이 수염(鬚髥)이 자라나니 길이가 3자 2 치로다....!
화산일로(華山一路)..3
요즘 제방 선원(禪院)의 선문에서는
조사 공안(祖師公安)인 시 심마(是甚磨) 간시궐(乾屎橛)
조주 무자(趙州無字) 등을 간택하여 의심을 지어가며 참구(參究)케 하면서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이요.
이것이 간화선(看話禪)이며
이것이 활 구선(活句禪)이라.
지견(知見)을 열어 설파(說破)하지만
이는 사구 의리(死句意理)를 간화선(看話禪)으로 착각하는 것이니
묘각(卯角)을 가지고서 귀모(龜毛)라 하는 것과 같고
대 그림자를 보고서 대나무라 여기는 것이므로
선문(禪門) 종사(宗師)가 경절문(徑截門) 활 구선(活句禪)을
바르게 수행하여 이를 이해(理解) 하지 못함이니...
애석(哀惜)하고 애석하며 통탄(痛歎) 할 뿐이다,
일찍이 간화선(看話禪)을 선창 했던
대혜(大慧) 스님의 동시대 인물이며
조동종(曹洞宗) 묵조선(黙照禪)을 설파했던
굉지 정각(宏智正覺) 선사(禪師)는
대혜(大慧) 스님이 묵조 사선(黙照死禪)을 비판하는데 맞서서
간화(看話)의 사구(死句) 의리선(意理禪)을
통렬히 비판함을
어찌 묵가(黙過) 할 수가 있겠는가,,?.
이는 옛 부터 조사관(祖師關)을 참구(參究)하는 간화선은
공부에 두 가지 근기(根基)의 문(門)이 있음을,,
요즘 선(禪)을 가르치는 종장(宗匠) 들이나
배우는 학자(學者)가 이를 묵가하며 분별(判別) 하지 못함이니
애석하고 통탄할 따름이다,
어찌 된 일 인가?
“하나는 경절문(徑截門) 활 구선(活句禪) 길이요
“하나는 사구 문(死句門) 의리선(義理禪) 길이다,
경절문(徑截門) 활구(活句)와 사구(死句) 의리 문(意理門) 길은
참구의 시작(始作)은 같으나 그 끝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니
두 선문(禪門)의 의지와 낙처를 깊이 반조(返照)하여
면밀(綿密)하고 바르게 살펴야 한다,
먼저 경절문 활 구선(活句禪) 길은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언하(言下)에 계합(契合)한 즉시에
망념(妄念)이 전후 단절(前後斷除)하여 사량 분별(思量分別)인
의로(意路)와 이로(理路). 견문(見聞)의 이해(理解)와 지각(知解)
오온(五蘊) 작용의 심기(心機)를 일시(一時)에 놓아버리어
은산철벽(銀山鐵壁)하고ㅡ
타성 일편(打成一便)하여ㅡ
행주좌와에 의단(疑團)이 목전(目前)에 현전(現前)하여
육 근(六根)이 원통(圓通) 해지면
몸의 32 뼈골과 12 경락(經絡)에
심묘(深妙)한 기운(氣運)이 통(通)하게 되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오랜 수행(修行) 속에서도
피곤함을 잊게 되나니,,,
이를 경절문(徑截門) 활 구선(活句禪)이라 부르나니,
이때에 이르려 참구 하는 화두가
목전(目前)에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여. 여여(如如) 하지 않으면
이를 일러 외도사선(外道邪禪)禪)이라 부르니라.
대혜(大慧) 스님이 원오(圓悟) 스님을 친견(親見) 하고서
경절문(徑截門) 활 구선(活句禪)을 깨달은 후
간화선(看話禪)을 선창(先唱) 하였던 것을
지면(紙面)을 빌려 논(論)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한 사구 문(死句門) 의리선(義理禪)은
조사 공안(祖師公案)을 간택한 후,,,
발심(發心)과 분심(忿心)이 진실하지 않아
사량 분별(思量分別)인 의식(意識)으로 화두 낙처를 헤아리고
의로(意路)와 이로(理路)로 분별(判別)하며
언문(言文)의 이해(理解)와 견문(見聞)의 지각(知覺)으로
주작심(做作心)을 내어
공안(公案)을 의심(疑心)하여 참구(參究)함이니
오랫동안 선원(禪院)에서 좌정(坐定)하고 좌복 위에 머무르면
혹(惑) 때로는 성성(惺惺)하기도.
혹(惑) 적적(寂寂) 하기도 하다가
멀지 않아 미꾸라지 화두에 념화두(念話頭)가 되거나
침공 체적(沈空滯寂)이 되나니
이를 일러 사구 문(死句門) 의리선(義理禪)이라 부르는 것이다.
옛 선문 종장(禪門宗匠)이셨던
원오극근(圓悟克勤) 스님께서 심요(心要)에 수시(垂示)하기를
선문 학자가 종사(宗師)의 가리킨 언하(言下)에
경절 활구로 단박에 계합(契合)하여
화두가 즉시에 목전(目前)에 순일(純一)한 수좌(首座)는
만인(萬人) 중에 일인(一人)이요,
사구 문(死句門) 의리선(義理禪)에 입문하여
오랫동안 간절히 참구(參究)하다가
몰록 활구(活句)로 돈 입(頓入)하여
돈망 생사(頓忘生死)한 이도
만인(萬人) 중에 일인(一人)이라 칭(稱) 하시면서
무릇 활구(活句)에서 깨달은 자는
한쪽 눈을 갖추지만
사구(死句) 의리(義理)에서 깨달은 자는
자기 자신도 구제할 수가 없다고 하셨던
일 전어(一轉語)를 깊이 살피고 살펴서
간화 선문(看話禪門)의
김언(金言)의 지침(指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송(誦)
밤기운은 차디차고 월광(月光)은 빛을 더하는데
속절없이 님 찾아 떠도는 나그네야
그대들은 아직 보지 못 하였는가?
옛 그림자가 본래 그 사람인 것을..,,?
화산일로(華山一路)..4
무릇 간화 선문(看話禪門)에 입문(入門) 한 이는
먼저 본 참 화두(本參話頭)를 바르게 살펴야 하나니
어찌한 까닭인가?
화두(話頭)에는 뜻만을 참구(參究)함과
활구(活句)를 참구(參究)하는 두 뜻이 있기 때문이다.
고덕(古德)이 이르시길 말법시대(末法時代)에는
조사(祖師)의 도(道)를 깨달아
반야(般若)를 발휘(發揮)하는 이는 드물다 하셨으니
이 뜻에 의거(依據)해보면
요즘 간화(看話)를 일러주는 선장(禪丈)이나
선(禪)을 배우는 학인(學人)들 또한
이 뜻을 쉽게 묵가(黙過)해 버리니
한탄(恨歎)스럽고 참으로 통탄(痛嘆)스러울 뿐이다.
일찍이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지으신
옛 보조(普照) 스님께서 이르시길
선종(禪宗)의 교(敎)밖에 따로 전한 바.
종문(宗門)에 바로 들어가는 간화 경절문(看話徑截門)은
모든 틀과 헤아림을 벗어났음으로
다만 교학자(敎學者)만 믿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
또한 선(禪)을 행(行)하는 바로 이 종문(宗門)에서도
낮은 근기와 얕은 지해(知慧)를 가진 이들은
아득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시면서
요즘 참선(參禪)하여 의심을 깨뜨리는 이는
거의 뜻만을 참구(參究)하고
경절문(徑截門) 활구(活句)를 참구(參究) 하지 못함이니
이는 원돈 교문(圓頓敎門)의 바른 앎을
밝혀낸 자와 한 가지인 것이다. 하시고
다시 이르시길,
무릇 증득(證得)한 지혜가 현전(現前) 한 이는
오늘날 보기 드물고 듣기 드물다, 하시며
사구 화두(死句話頭)인 참의 문(參意門)을 의지(依支) 해서라도
바른 지견(知見)을 밝혀 낸 것을
귀하게 여길 따름이라 하시면서
선문 종사(禪門宗師)가 보여주는 걸림 없는 법문(法門)이
비록 원교(圓敎)와 같으나 언구(言句)가 간략하므로
깨처드는 문(門)에는 매우 가까운 것이다.
그렇듯이 선문((禪門)의 실다운 언구(言句)를
만약 교문(敎門)에 비하면 비록 간략하나
바로 끊어 드는 경절문(徑截門)에 비하면
불법(佛法)의 알음 알이가 있음으로
갖가지 선병(禪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하셨다.
그러므로. 배움에 드는 이는
반드시 경절문(徑截門) 활구(活句)를 참구(參究)하고
의리문(義理門) 사구(死句)를 참구(參究)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말없는 곳에서 말없는 곳에 이르는 간화선(看話禪)은
그 요결(要訣)은 경절문(徑截門) 한길이니
어찌 의리 문(義理門)을 가리켜
그 요결(要訣)로 삼게 할 수가 있겠는가?
또한. 청허(淸虛) 스님께서 선거 귀감(禪家龜鑑)에 평해
가라사대 화두(話頭)에는 참구(參句)와 참의(參意)의
두 가지 문(門)이 있으니
참구 문(參句門)은 경절(徑截) 활 구문(活句門)이라.
의로(意路) 이로(理路) 심로(心路)가 끊어져서
더둠고 만질 수가 없기 때문이요,
참의 문(參意門)이라 하는 것은
원돈 문(圓頓門) 사구(死句)이니
유이로(有理路) 유 언로(有言路) 유의로(有意路)가 있음이니
이것저것 꿰어 맞추기 때문이다. 하셨으니..
사량(思量)하고 사량(思量)하여
바르게 이해(理解) 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선문 학자가 수행(修行)하는
간화선(看話禪)이라 부르는 언구(言句)의 시원(始原)는
황벽(黃蘗) 스님이 전심 법요(傳心法要)에 이르시길
“다만 십이 시중(十二時中)에
조주(趙州) 무자(無字)를 간(看)하라“ 하셨으니
어떻게 조주(趙州) 무자(無字)를 간(看)해야
바르게 간(看)하는 것일까.?
이 뜻에 참의 문(參意門)과 참구 문(參句門)이 있으니...
깊이 살피고 살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간화선(看話禪) 일로(一路)인가.?
원오극근(圓悟克勤) 선사(禪師) 게송(偈頌)에
“만(萬) 길의 봉(峰) 우리에 외발로 서니
사방 팔면(四方八面)이 암흑(暗黑)으로 뒤덮여
일체(一切)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끊어져
아무것도 구별할 수가 없다“ 하셨으며
또한 해심밀경(解深密經) 불타(佛陀) 게송(偈頌)에
“내면 적의로 증득(證得)하고 형상(形相)이 없이
행하는 바이며 말할 수도 없고
표현(表現)할 수도 없으며
모든 논쟁(論爭)이 사라진 승의제)勝義諦)는
일체(一切) 사량 분별(思慮分別)의 모습을
초월하는 도다“ 하셨으니
요즘 선(禪)을 배우려는 우리 후학(後學)들은
이 송(頌)을 신중하고 신중하게 살펴서
우리 선문의 금강 정인(金剛正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송(頌)
신통 영험한 부처를 찾아 길을 잃고 넘어지며
이리저리 분주히 몇 산을 넘나 들었던가,
허기지고 목마름에 곡기(穀氣)를 채우니
영롱한 기운이 용천(湧泉)에 가득하구나! 喝
화산일로(華山一路)..5
선병(禪病)의 근원(根源)이며 만병(萬病)의 원인은
참구(參究) 화두(話頭)를 의심(疑心) 하지 않아 생기는 것이니
다급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그 가운데에
오묘(奧妙)함이 있다.
너무 다그치면 육 단심(肉團心)이 동(動)하고
망각(妄覺)하면 무명(無明)과 혼침(昏沈)에 떨어지게 되나니
다만 하나의 의심(疑心)으로 깨어진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성성(惺惺) 영영(靈靈)하고 적적(寂寂) 요요(寥寥)하게
면밀(綿密)히 살펴야 한다.
옛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멸(滅)하는 것이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문(生死門)이라 하니
만일 차별(差別)의 생각과 계교(計巧)의 헤아림이
침투하여 망념(煩妄)의 혼잡됨이
경계(境界)의 길을 따라서 문득 동심(動心) 하면,
본심(本心)의 의정(疑情)을 망각(妄覺)한다 하였으니
부서짐이 없고 혼잡(混雜) 됨이 없도록
곧바로 나아가 살펴야 한다.
일찍이 마조(馬祖) 스님 수행 시(修行時)에
남악회양(南岳懷讓) 스님께서 마조에게 이르시길
소 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을 시(時)에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한 말씀에
참구(參究)의 요긴함을 깨닫게 되었고
또 석공 화상(石鞏和尙)이
심우(心牛)에게 여물을 먹이되 채소밭으로 들어가려 하면
고삐를 사정없이 당긴다 하셨으니,
이 공부는 동중(動中)과 요중(搖中)에
핵심(核心)과 요결(要訣)이 있으니
어찌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선원(禪院) 처소(處所)를 가리며
좌복 위에서 오랜 세월(歲月)을 손상하리오...
송(頌)
“쉬고 쉬고 쉬어서.
모든 견해(見解)로 부터 쉬어버리니
육창(六窓)은 깨어지고 일월(日月) 또한 떨어지니
오색(五色)구름 아련하여 옛길이 끊어졌네“...喝,
화산일로(華山一路)..6
무릇 조계 선문(曹溪禪門)에 입문(入門)하여
선(禪)을 수행(修行) 하고자 하는 이는
먼저 조계 선문(曹溪禪門)의 선풍(禪風)을
바르게 알아야 하나니
어찌한 까닥인가?
본래 조계 선법(曹溪禪法)의 선풍(禪風)은
불립문자(不入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종지(宗旨)로 삼아서
본분 납자(本分衲子)가
선문(禪門)에 바로 입문하여
단박에 깨달아 안심입명(安心立命)에 이르는
최상 승법(最上乘法)이
조계 선법(曹溪禪法)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옛 부터 조사선(祖師禪)의 경계는
종사(宗師)가 지시한 말 끝에 단박에 깨달아서
견문각지(見聞覺知)에 이르는 선법(禪法)을 가리켜다,
그러나
요즘 조사선(祖師禪)에 이르는
본분 납자(本分衲子)의 근기(根機)가
점차 하열(下劣)하여
바로(徑截) 질러 본문(本門)에 계합하는 이가 보기 드물므로
옛 종사(宗師)들이
조사관 법(祖師關法)을
세 가지 선풍(禪風)으로 방편으로 삼아서
삼색(三色) 비단(緋緞) 길을 펼친 것이었다,
먼저 황벽 임제(黃檗,臨濟) 스님은
간화선(看話禪)이란 비단길을 선창(先唱)하셨으며
동산 조산(曹山,洞山) 스님은
묵조선(黙照禪)을 주창(主唱) 하셨다,
법안 연수(法眼,延壽) 스님은
염불선(念佛禪)이란 비단길을 펼쳐서
조사 관문(祖師關門)에 바로 들어오게 하시었다,
그러므로
선문(禪門)에 입문하여 공부를 지어가는 학자(學子)는
종사(宗師)들이 펼친 세 가지 비단(緋緞) 길인
그 낙처(落處)를 바르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사들이 펼치신 세 가지 비단길은 어떤 것인가?
먼저 황벽 임제(黃檗,臨濟) 스님께서
선창(先唱)한 간화선(看話禪) 길이니,
본래 간화(看話)라 하는 말은
말머리(頭)를 본다(看)는 뜻이 있으니
말머리(頭)라 하는 것은
종사(宗師)가 가리키는 말 끝에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인
이로(理路)와 언로(言路) 의로(意路) 견문(見聞)의
이해(理解)와 오음(五陰)의 심기(心氣)인 번망(煩忙)이
일시에 단박 끊어진 자리 말머리(頭)를 본다(看)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니
이를 일러서 간화선 길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종사(宗師)가 가리키는 말 끝에
이로(理路)와 언로(言路) 의로(意路)가 있고
견문(見聞)의 이해(理解)와
사량 분별(思量分別)인 번망(煩忙)이 있으면
이는 말머리(話頭)가 아니고
사구 의리(死句義理)인 말꼬리(末尾)가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하는 뜻은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인
이로(理路)와 언로(言路) 의로(意路) 견문(見聞)의
이해(理解)와 오음(五陰)의 심기(心氣)인 번망(煩忙)이
일시에 단박 끊어진 알 수 없는 자리를 본(看) 다는 뜻이 되니,
이를 경절문(徑截門) 활 구선(活句禪)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조산 동산(曹山,洞山) 스님이 주창(主唱)한
묵조선(黙照禪) 길이라 하는 것은
말 없는 곳에서 말 없는 곳으로 바로 간다는 뜻이니
종사(宗師)가 가리키는 말 끝에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인
이로(理路)와 언로(言路) 의로(意路) 견문(見聞)의
이해(理解)와 오음(五陰)의 심기(心氣)인 번망(煩忙)이
일시에 단박 끊어진 알 수 없는 자리를 묵(默)이라 칭하며
사량 분별(思量分別)이 즉시 끊어져서
번망(煩忙)이 일어나지 않는 자리를
항상 비춘다(照)는 뜻이니
이는 이로(理路)와 언로(言路) 의로(意路)
견문(見聞)의 이해(理解)와 오음(五陰)의 심기(心氣)인
번망(煩忙)이 일시에 단박 끊어진(默) 자리를
비춘(照) 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간화선(看話禪) 길에서는
종사(宗師)가 가리키는 말 끝에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인
이로(理路)와 언로(言路) 의로(意路) 견문(見聞)의
이해(理解)와 오음(五陰)의 심기(心氣)인 번망(煩忙)이
단박 끊어진 자리를 본다(看) 하였고
묵조선(黙照禪) 길에서는
이를 비춘(照)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 까닥 에
묵조(黙照)와 간화(看話)는 말은 다르나
두 문(門)의 종사(宗師)가 가리키는
참구(參究)의 요지(要旨)는 한길(一路)이라 칭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화(看話)와 묵조(黙照)가 가리키는
참구의 요지(要旨)는
오직 경절문(徑截門) 한길이라,
조동(曹洞)의 가풍(家風)도
경절문(徑截門) 활 구선(活句禪)이 요지(要旨)인 것이다,
다시 법안 연수(法眼延壽) 스님이 선창한
염불선(念佛禪)은
그 가르침의 의지(意志)가
간화(看話) 묵조(黙照)와 다름이 없는 것이니
요즘 선문(禪門)에 입문하여
공부를 지어가는 이들이 하나 같이 이르기를
염불선(念佛禪) 수행을 가리켜서
간화(看話)와 묵조(黙照)는
상근기(上根機) 수행법이요,
염불(念佛)은 근기(根機)가 부족한 하근기(下根機)가
닦는 수행하는 법이다, 하는데
이는 염불선(念佛禪)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이들의 망발(妄發) 일 뿐이다,
옛 선사인 청허 휴정(淸虛休靜) 스님이
선가귀감(禪家龜鑑)에 이르시길
염불(念佛)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誦佛)이요,
마음으로 하면 염불(念佛)이니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지 않으면
도(道)를 닦는데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셨으니
염불(念佛)을 행하는 공부인은
이 염불 선법(念佛禪法)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염불선(念佛禪)이란 무엇인가?
염불(念佛)에서 불(佛)이라고 하는 것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언구(言句)를 염(念)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의문(疑問)에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인
이로(理路)와 언로(言路) 의로(意路) 견문(見聞)의
이해(理解)와 오음(五陰)의 심기(心氣)인 번망(煩忙)이
일시에 끊어진 자리를 일러서 불(佛)이라
칭(稱)하는 것이며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인
이로(理路)와 언로(言路) 의로(意路) 견문(見聞)의
이해(理解)와 오음(五陰)의 심기(心氣)인 번망(煩忙)이
끊어진 자리를 일심(一心)으로
항상(恒常) 념(念) 한다는 말이니
이것을 일러서
경절문(徑截門) 염불선(念佛禪)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절(徑截) 염불 문(念佛門)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念)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를 참구(參究)하는 본분 납자(本分衲子)가
일념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念)하여
염불 삼매를 얻으면
일시에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인
이로(理路)와 언로(言路) 의로(意路) 견문(見聞)의
이해(理解)와 오음(五陰)의 심기(心氣)인 번망(煩忙)이
일시에 끊어진 경계(境界)에 이르며
단박에 타성일편(打成一片) 하여
이근원통(耳根圓通)이 되어지니
이때에 이르러서
새소리 물소리가 모두 염불(念佛)이요.
하늘을 보아도 하늘이 염불이요. 땅을 보아도 땅이 염불이니
일체 경계(一切境界)가 모두 염불삼매(念佛三昧)이니
이때를 가리켜 정토 삼매(淨土三昧)에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닥 에 조계종(曹溪宗) 종주이신
육조 혜능(六祖.慧能) 스님께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정혜쌍수(定慧雙修)하여 일행 삼매(一行三昧)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다시 육조 혜능(六祖.慧能) 스님께서 말씀하신
정혜쌍수(定慧雙修)라 말씀하신 일구(一句)는
간화선(看話禪)에서는
알음 알이가 끊어진 자리,
말(頭) 머리를 본다(看) 하거나,
묵조선(黙照禪)에서
사량(思量) 분별(分別)이 끊어진(默) 자리를
비춘(照) 다 하거나,
염불선(念佛禪)에서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인 번망(煩忙)이
일시에 끊어진(佛) 자리를
항상 염(念)한다고 하는 것이나
이는 모두 한 맛을 가지고
세 가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머리(頭)를 본다(看) 하거나
말이 끊어진(默) 자리를 비추(照) 다 하거나
분별(分別) 망념(妄念)이 끊어(佛) 진 자리를
항상 염(念)한다 하거나 하는 것은
모두 정(定)과 혜(慧)를 쌍수(雙修)로 닦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하므로
황벽 임제(黃檗,臨濟) 스님께서
간화선을 가리켜
말머리(頭)를 본(看)다고 하신 것이며,
동산 조산(洞山,曹山) 스님이
끊어진(默) 자리를 비(照) 춘다 하신 것이며,
법안 영명(法眼,延壽) 스님이
번망(煩忙)이 끊어진(佛) 자리를
염(念)한다고 하신 세 가지 비단(緋緞)길은
모두 그 낙처(落處)가
오직 경절문(徑截門) 활구(活句)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선문에 입문한 이를 위하여
종사(宗師)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따라
경절문(徑截門) 활구(活句)에 단박에 이르게 되면
간(看)이니 조(照)니 념(念)이니 하는 것은
말은 다르나 종사(宗師)가 가리키는
그 뜻의 요결(要訣)은 결국 한 맛이라 할 것이다,
이는 마치 중국 화산(中國,華山)에 이르는 길이
여려 갈레 길이 있지만
화산(華山) 정상(頂上)에 이르는 길은
오직 외길(華山一路)이라는 말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를 지어가는 이들은
종사(宗師)가 펼친 삼색(三色) 비단길을 따라서
화산(華山) 정상(頂上)에 올라
돈망 생사(生死頓忘)하여 유유자적(悠悠自適) 해야
할 것이다,
게송(偈頌)
열길 물속은 볼 수 있어도 한길 마음은 볼 수 없다고
옛사람들이 그렇게 일 러던가?
처마 끝 낙수 소리에 옛 고삐 끊어지니
썩은 송장이 수염이 석자나 자랐구나.,,(喝)
화산일로(華山一路)..7
목계 삼관(木鷄 三關)
1, 한 어부가 강물에 그물을 던지자 그물에 고기가 한 마리 걸렸다, 이 물고기가 어떻게 해야 그물에서 빠져나가겠는가..?
2, 이 그물에서 빠져나온 고기가 강물이 말라 바닥이 드려 날 땐 어떻게 해야 목숨을 건질 수가 있겠는가..?
3, 삼계(三界)는 화택(火宅)이라 목숨을 건지 이 고기가 화룻 불 위에서는 어떻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을 할 수가 있겠는가..?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주역
혜각존자 신미대사 선양회 사업단장, 목계 만암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