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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승훈(李昇薰) (1864 ~ 1930) |
호 |
남강(南岡) |
본관 |
본관은 여주(驪州). |
출생지 |
평안북도 정주읍 |
주요활동 |
44세 때 평양 모란봉에서 안창호의 강연에 감명 받아 술과 담배를 끊고 재단을 만들어 오산학교 설립, 신민회 가입, 1910년 기독교에 입교, 평양신학교에서 신학 공부해 목사가 됨. 1911년 5월 신민회 사건으로 제주도로 귀양감. 1911년 9월 105인 사건 관련자로 서울로 압송되어 4년 2개월간 복역. 1919년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년 동안 감옥살이. 1924년 동아일보 사장 등 역임. |
어록 |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 |
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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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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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경기도 오산 |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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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버지 이석주(李碩柱), 어머니 홍주김씨(洪州金氏), 부인 이경선(李敬善) |
주변인물 |
안창호, 유동열(柳東說)ㆍ윤치호(尹致昊)ㆍ양기탁(梁起鐸)ㆍ안태국(安泰國)ㆍ임치정(林蚩正) |
참고, 출처 |
네이버 (독립운동가 공식카페), 네이버블로그(재봉틀의 국어방) |
<자료원문>
2001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남강(南岡) 이 승 훈(李昇薰) 선생 (1864 ~ 1930)
.1907 오산학교 건립, 신민회 가입 .1911 105인사건으로 옥고 .1919 민족대표33인중 기독교측 대표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평생 소원으로 아래에 적은 두 가지 조건뿐이 형제의 마음속에 깊이 기억되기를 간구(懇求)합니다.
첫째, 마음과 몸을 다하여 일함으로써 각 사회 인중(人衆)의 신앙을 받는 지경에 이르는 질실(質實)한 진인(眞人)이 생겨나기를.
둘째, 가면이 아니요 진실로 일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에 대하여는 혈기방강(血氣方强)의 청년들까지라도 그를 정당히 경애하며 숭앙하며 사회중심의 추세를 지게 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오늘 우리의 조선에 이 두 가지의 새로운 사실이 작출(作出)되지 아니하면 새로운 질서의 밑에서 새로운 건설을 행하는 그날은 심히 먼 명일(明日)로 연퇴(延退)되리라 합니다. 나의 이 말은 한 말로 말씀하면 일체의 허식을 파기하고 오직 사실을 주(主)하자 함이외다.
- 선생이 '개벽' 1922년 1월호 밝힌 「신년(新年)의 신의견(新意見)」 중에서 -
선생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읍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주(碩柱)이며, 어머니는 홍주(洪州) 김씨이고, 이들 사이의 둘째 아들이 바로 선생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아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호는 남강이다.
가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6살에 고향 정주읍내를 떠나 인근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에서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기 전까지 3, 4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것이 어린 시절 배운 학문의 전부였다.
열 살이 되던 1874년 학업을 중단한 선생은 당시 유기(鍮器)상인으로 유명한 임일권 (林逸權)이 운영하던 상점의 사환으로 들어갔다. 4년 뒤에는 이 상점의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으며, 근면성과 성실함이 인근까지 널리 알려져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점원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에 들어섰다.
보부상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전전하면서 자본을 모아 납청정에 유기상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철산의 갑부 오희순(吳熙淳)의 돈을 얻어 1887년 납청정에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기업가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1차 산업 위주의 사회에서 2차 산업의 토대를 만들어 간 것이다. 선생은 공장 경영방식도 근대적으로 개선하였다. 노동환경을 일신하였고, 노동조건 개선에도 힘썼으며, 노동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대우하였다. 때문에 작업 의욕이 왕성하여 생산성이 높고 품질도 우수하여 사업은 날로 번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도 한 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1894년 청일전쟁이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납청정에 자리 잡은 선생의 상점과 공장은 이때 잿더미가 되었다.
덕천으로 가족과 함께 피난 갔다 돌아온 선생은 다시 일어섰다. 재차 오희순의 자본을 얻어 상점과 공장을 재건한 것이다. 나아가 평양에 상사(商社)를 개설하고 진남포와 납청정에 지점을 두고 본격적으로 무역과 운송업을 펼쳤다. 서울과 인천 등지로 왕래하면서 사업을 확장하는 데 성공하여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 때는 선생에 의해 물가가 좌우될 정도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같이 상업 자본을 축적하여 본격적인 산업 자본가로의 성장을 눈앞에 둔 선생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우연인지 아니면 민족 자본을 말살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인지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선생의 엽전 운송선과 일본 영사관 배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1902년 1만냥의 엽전을 싣고 인천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가던 선생의 운송선이 일본 영사관 소속의 배와 충돌하여 침몰한 사건이었다. 이에 선생은 일본 영사를 상대로 2만냥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소송은 당시의 국제 정세에 얽혀 1년이 지난 뒤에야 원가만 받는 것으로 해결되고 말았다.
사업은 ‘타이밍’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1년간의 소송으로 장사의 적기를 놓쳤고, 또 소송에 매달리는 바람에 사업도 제대로 못하여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나아가 손해를 만회하고자 우피(牛皮) 무역에 투자하였으나 그것도 실패하였던 것이다. 즉 선생은 러일전쟁의 장기화를 예상하고 다량의 우피를 사두었다. 그러나 전쟁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는 바람에 우피 가격이 폭락하였고, 그에 따라 큰 손해를 보았던 것이다. 이같은 일련의 일로 선생은 상업계에서 은퇴한 뒤, 향리인 정주 용동(龍洞)으로 낙향하여 여주 이씨 촌락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은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외세와 민족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상업 자본가로서 이익을 추구할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민족 현실을 일제와의 소송과정에서 뼈저리게 절감한 것으로 생각된다. 생활상의 문제에서 반일 민족의식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연계선상에서 선생은 43세가 되던 1907년 7월 인생의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평양에 나갔다가 “나라가 없이는 집도 몸도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는 없소”라고 하는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을 듣고, 그를 찾아가 만난 것이 그 계기였다.
이후 선생은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게 가졌고, 인생 행로는 오직 민족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당장 금주, 금연과 단발을 결행하고,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여 평안북도 총감이 되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조직된 비밀결사로 한말 국권회복운동단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신민회는 ①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할 것 ② 동지를 발견하고 단합시켜 독립운동 역량을 축적할 것 ③ 교육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 교육을 진흥할 것 ④ 각종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富力)을 증진할 것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민회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고 사립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민족 기업을 설립하여 식산 진흥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 가운데 선생은 식산 흥업의 책임자로 평양 마산동에 자기(磁器)회사를 설립하였고, 서적의 출판과 공급을 목적으로 태극서관이라고 하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민족교육운동에도 앞장섰다. 도산을 만난 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온 선생은 서당을 고쳐 신식교육 기관인 강명의숙 (講明義塾)이라는 초등교육 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이어 같은 해 12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이 된 오산학교를 개교하여 교장이 되었다.
훗날 선생은 “내가 오산학교를 세울 때 그것을 결심한 것은 불과 사흘 동안이었는데, 이 사흘 밤을 한 잠도 자지 못하고 그 일만을 골똘히 생각했다”고 회고하였다. 이로 보아 선생이 오산학교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애썼는지 짐작이 간다. 애쓴 보람은 있었다. 그것은 선생의 열성과 함께 여준(呂準), 조만식(曺晩植) 등의 노력으로 오산학교가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민족교육운동의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한말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의 구국계몽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선생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전에도 선생은 기독교 설교를 들은 일이 있었지만, 그에 입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나니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서러웠다. 답답한 심정으로 평양으로 나갔다가 산정현(山亭峴)교회에서 한석진(韓錫晋) 목사의 설교가 있다고 하여 들으러 갔다. 한석진 목사는 「십자가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속에 스며들어 왔다. 그래서 그 날밤부터 기독교를 믿기로 작정했고, 돌아와서 오산학교 교육도 기독교 정신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일제에게 나라를 강점 당한 직후부터 선생은 5년여 동안 철저히 탄압을 받았다. 1910년 말 안중근(安重根)의 4촌 동생 안명근(安明根)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로 ‘안악(安岳)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 2월 선생은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무단통치에 의한 민족운동자 탄압의 출발점이었다. 1911년 9월 일제는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민족운동자들을 대거 체포한 ‘신민회사건’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 105명을 기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흔히 ‘105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선생을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에야 가출옥하였다.
이같은 감옥생활은 선생의 민족의식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선생이 “감옥이란 이상한 곳인 걸. 강철같이 굳어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같이 물러서 나오는 사람도 있거든”이라고 한 소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아무튼 출옥 후 오산학교로 돌아온 선생은 학교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5년 52세의 만학도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수학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는 1901년 마펫트[馬布三悅] 목사가 창설하여 1907년 첫 졸업생을 낸 기독교 장로교계통의 신학교였다. 이 학교는 기독교계 3.1운동 추진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선생을 비롯하여 민족대표로 활약한 길선주,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목사, 그리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였던 송병조, 김인전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한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선생은 여기서 수학하면서 민족독립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운동 동지들과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3.1운동 추진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이다.
1918년에 들어와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서는 이미 ‘노농정부’가 수립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 대통령 윌슨은 전후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당시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시대가 가고, 인도와 정의의 시대가 도래하는 ‘세계 개조’의 흐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나아가 이같은 정세의 변화를 이용하여 한국 독립을 성취하고자 국내외 민족운동자들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상해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를 파견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 선전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 로녹대학(Roanoke College)을 졸업하여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1919년 2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고, 선우혁(鮮于爀)을 비롯한 밀사를 국내외에 파견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그것은 국내와 만주, 노령 등 국외에서 일시에 민족봉기를 일으켜 한국 민족 전체가 진정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하며 민족독립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세계 만방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의 한국문제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한국 대표의 독립 외교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민족독립을 달성하려는 구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같은 계획에 따라 신한청년당에서는 선우혁을 비롯한 김순애ㆍ김철ㆍ서병호ㆍ백남규 등을 국내에 밀파하여 독립운동 봉기를 종용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민족대표의 활동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아울러 여운형을 만주와 노령 연해주, 조소앙ㆍ장덕수를 일본 동경으로 파견하여 국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 봉기를 이끌어내도록 하였다.
이때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독립운동 논의가 있어 왔다. 천도교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16년부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손병희 교주에게 요청하는 신도가 있었고, 1917년에도 그러한 요구가 재차 표출된 적이 있었다. 특히 1917년 겨울에는 김시학(金時學)의 발의로 우선 천도교, 기독교, 유림 등 3종단이 연합하고, 사회계와 구(舊)관료계의 저명 인사들을 포섭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알려지고,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지자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다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들은 송진우, 현상윤 등 중앙학교측의 인사들과 합세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을 추진하던 재일 유학생들의 밀사로 송계백이 도착한 것이었다.
송계백이 가져온 2.8독립 선언서 초안을 보고, 또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듣고 크게 감동한 현상윤은 이를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와 친구인 최남선에게 보였다. 그리고 다시 송계백과 함께 최린을 찾아가 보여 주고, 그를 통해 손병희에게도 전달한 것이다.
손병희는 이를 보고, “젊은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고 하니 우리 선배들로서도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추진 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법과 진행을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에게 일임하면서,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담당하게 하고, 최린은 외부와의 관계를 맡도록 하였다.
한편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 추진은 선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2월 6일 선생은 상해 신한청년당의 밀사 선우혁으로부터 국제정세의 변화와 그에 따른 국내 독립운동의 추진을 권유받았다. 이에 독립운동 추진 논의를 위해 상경한 선생은 최남선, 송진우, 최린 등을 만났고, 이들로부터 천도교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3.1운동 계획을 듣게 되었다. 이때 선생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 세력의 독립운동 계획은 쉽게 접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계를 대표한 선생과 천도교계를 대표한 최린은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 아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3.1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곧 바로 서북지방으로 내려가 기독교 지도자들을 순방하며 3.1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갔다. 우선 평양에서는 장로교계의 원로 지도자 길선주 목사와 감리교 지도자 신홍식 목사의 참여를 확약 받았다. 그런 다음 평북노회가 열리던 선천으로 내려가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교회 지도자 들을 만났다. 여기서 선생은 천도교와의 합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3.1운동 참여와 민족대표 선정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회 지도자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그 자리에서 이명룡,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등 4인을 민족대표로 선정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쉽게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동안 이 지역에서 목회 활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상호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선생을 비롯하여 최린, 한용운(韓龍雲)을 매개로 기독교, 천도교, 불교계와의 접촉이 이루어져 종교계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YMCA를 매개로 학생층이 참여함으로써 민족대연합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3.1운동 계획은 일원화되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2월 28일 가회동(嘉會洞) 손병희 집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민족대표들이 회합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최종 검토한 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식을 갖도록 결정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앞에 놓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한용운이 대표로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 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하는 요지의 식사(式辭)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참석자 모두는 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운동의 불을 지폈던 것이다.
이 직후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출동한 일경에게 피체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의 인신(人身)을 구속할 수 있었을지언정 불타는 독립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특히 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당당하게 답변하였다.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하고, 또 먼저도 말하였지만 금번 독립운동은 우리 동지들만으로 한 것이지 외국 사람이나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 사람이라든지 또는 학생 등과는 하등 관계가 없으며, 일본 정부에 대하여 청원한 일에 있어서도 외국 사람의 조력을 요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 말 가운데는 선생의 불요불굴의 독립정신은 물론 자주적 독립운동 노선까지도 모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선생은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늦은 1922년 7월 22일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이후 선생은 정주로 돌아와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쏟았다. 그러면서 물산 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나아가 동아일보가 1924년 1월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의 게재와 4월 박춘금 사건으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를 맡아 ‘민족지’의 경영 정상화에도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30년 5월 8일 선생은 전처럼 오산학교를 다 돌아보고 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면회(自勉會)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다.
자면회는 용동 사람들로 조직된 자치기관으로 선생은 거기에 자신의 땅을 내놓아 공동 경작케 하며 생활 개선과 향상에 힘쓰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갑자기 병이 나서 몇 시간 고통하다가 이튿날인 5월 9일 오전 4시,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영면 직전 선생은 평소에 늘 하던 대로, “내 뼈는 학교에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를 원한다”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이었다. 살아서는 독립운동가로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고, 죽은 뒤에는 자신의 유골까지도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두 번째자료
이승훈(李昇薰.1864.4.25.고종 1∼1930.5.9)
독립운동가ㆍ교육자. 평안북도 정주 출생. 44세 때 평양 모란봉에서 안창호의 강연에 감명 받아 술과 담배를 끊고 재단을 만들어 오산학교 설립, 신민회 가입, 1910년 기독교에 입교, 평양신학교에서 신학 공부해 목사가 됨.
1911년 5월 신민회 사건으로 제주도로 귀양감.
1911년 9월 105인 사건 관련자로 서울로 압송되어 4년 2개월간 복역.
1919년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년 동안 감옥살이. 1924년 동아일보 사장 등 역임. ---------------------------------------------------------------------
독립운동가ㆍ교육자. 본관은 여주(驪州). 아명은 승일(昇日), 본명 인환(寅煥). 호는 남강(南岡). 평안북도 정주 출생.
일찍이 부모를 여의니, 10세 때 정주에서 임일권(林逸權)의 집에 심부름꾼이 되고 16세 때 놋그릇 가게의 점원이 되어 상업에 눈을 떴다.
30세 전후에 자립하여 크게 상점을 벌이더니 32세 때 오산면(五山面 용동(龍洞)에 이사하고 교육에 뜻을 두어 서당을 차렸다.
1906년(광무 10) 평양에 나갔다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화되어 마을에 돌아가자 재산을 기울여 먼저 서당 자리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새우고 신학문과 애국사상을 가르치기에 힘을 다했다.
그 뒤 도산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들어가 관하 산업기구로서 마산자기회사(馬山磁器會社)를 설립하여 활약하였다.
1911년 5월 신민회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해 9월 일제가 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을 조작, 신민회 간부를 중심으로 한민족 지도자급 105인을 체포할 때 서울로 송치되어 4년 동안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고, 55세 되던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 되어 활약, 다시 투옥되어 3년형을 살았다.
출옥 후 한때 동아일보사 사장을 지내고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의 고취를 위하여 계속 분투하다가 1930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증되었다. (이홍직: <국사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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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ㆍ교육가. 본관은 여주(驪州). 아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호는 남강(南岡). 평안북도 정주 출신.
아버지는 석주(碩柱), 어머니는 홍주김씨(洪州金氏). 빈한한 서민집안에서 태어나 2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6세 때에는 고향인 정주를 떠나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해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3, 4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1874년 학업을 중단하고 그 곳의 이름난 유기상(鍮器商)인 임권일상점(林權逸商店)의 사환으로 들어가 3년 뒤에는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다.
근면성과 성실성이 인근에까지 알려져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선(敬善)과 결혼하게 되고, 이 때부터 점원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을 밟았다.
보부상으로 평안도 및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전전하면서 자본을 모아 납청정에 유기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887년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기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해, 첫째 노동환경을 일신했고, 둘째 근로조건개선에 힘썼으며, 셋째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그들을 대접하였다. 이와 같이, 근로자들의 작업의욕을 북돋아 생산능률이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져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해 한반도가 전장화되자 납청정의 그의 상점과 공장은 전화(戰禍)를 입어 잿더미가 되었다.
덕천으로 가족과 함께 피난갔다 돌아와 철산의 오희순(吳熙淳)의 자본을 얻어 상점과 공장을 재건하였다.
1901년 평양에 진출,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손을 대 진남포에 지점을 설치하고, 서울ㆍ인천을 왕래하며 사업에 성공해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다시 사업에 실패하자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교육진흥론> 강연을 들은 후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굳은 결심 아래 금연·금주와 단발을 결행하고,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와 서당을 개편해 신식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였다.
이어서 이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개교해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그의 열성과 성의을 바탕으로 이종성(李鍾聲)ㆍ이광수(李光洙)ㆍ조만식(曺晩植) 등의 노력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해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 교육사업에 헌신하면서 민족운동에 가담하던 중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 해 가을에 105인사건이 일어나 유동열(柳東說)ㆍ윤치호(尹致昊)ㆍ양기탁(梁起鐸)ㆍ안태국(安泰國)ㆍ임치정(林蚩正) 등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잡혔을 때,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윤치호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년 가출옥하였다.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와 교회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출옥 즉시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ㆍ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이 해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24년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이 때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매우 넓었다. 동아일보사장에서 물러난 뒤 1926년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이사장에 취임,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사망하였다.
그의 생전에 졸업생들의 발기로 오산학교 교정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금지로 실행되지 못하고 사회장으로 오산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독립운동가ㆍ교육자 이승훈|작성자 재봉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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