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詩전문지「유심」신인추천 작품]
등 대
성 승 철
다방에서 돈 땡겨 쓴 달이 또 잡혀갔다
후두암에 넘어진 어미가 다시 넘어졌다
딸은 중학교를 다니면서 길을 잃어버렸다
멀리 있다고 늘 멀리 있다고
법(法)의 옆구리를 향해 발길질을 해대던 아비의 소금발은
이번에도 경찰서 입구부터 무릎을 꿇어야 했다
저마다 생의 굴곡에 비가 내린다
빗속에서 아비가 칠흑 같은 가막만의 물길을 찾던 손으로
딸의 길을 찾고 있다
아비가 닿을 수 없는 바다에 머무는 딸,
그의 아비를 데리고 간 바다보다 더 거친 바다가
지상에도 잇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출구를 찾지 못하는 아비의 한숨이
수많은 출구를 찾으며 눈물을 흘린다
열 살부터 고락을 같이 한 바다도 다 받아줄 수 없는 눈물…
죽은 한숨 묻을 곳 없는 아비 가슴은 오늘도
잠 못드는 등대로 남아야 한다
한때는 나도 아버지의 손가락을 빠져나간 바다였다
무덤 속에서도 굳건한 섬처럼 서 있는 푸른 등대다 아버지는
이 지상의 바다에 발목이 잡혀버린 푸른 등대
인자는 동네방네 더 깎일 얼굴도 없네
성난 꽁치 부리를 닮은 아비 눈에서
죽일 수 없는 죽일 년이,
죽일 수 없는 세상이
하루에도 수백 번씩 드나들고 있다
※ 가막만 : 여수시 주변을 품고 있는 바다.
앞발에 대하여
겹겹한 고요 찢으며 질주하던 심야열차에서 내려
관사로 가는 골목길 입구 표범 같은 고양이 한 마리
길 가운데를 막고 섰다
흔들림 없는 눈빛 뒤로
예기를 감춘 앞발이 그를 세우고 있다
숱한 적들을 무너뜨린 저 발
오늘은 도 어떻게 새벽을 후려쳤는지
발밑에 뭔가 꿈틀거리고 있다
지금 저 앞발을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어린 우리 다섯도 그것을 기다렸던 적이 있다
아버지는 밤마다 앞발로 가막만을 후려쳤고
바다는 가진 것들을 조금씩 토해냈다
낙지 도다리 넙치 멸치 부시리 전어
그들의 푸른 음악을 먹으며 우리는 바다처럼 자랐다
후려치다 부러져 몰래 눈물 삼키던 아버지의 앞발을 기억하는 가막만,
새섬 치섬 소리섬 까막섬 매물섬 대섬
바람 부는 날이면 섬 꼭대기부터 오래된 녹음기처럼 잉잉거린다
아버지의 앞발 같은 물결이 내 몸을 흐른다
바르샤에게
— 너는 무기가 되고 싶었다
소들과 싸우는 나라,
부러진 소뿔 같은 북쪽 어디쯤에서
지워진 카탈루냐의 슬픔이 축구로 태어났지 너는
축구보다 무기가 되고 싶었지
해골이 되어버린 조국이 너를 부를 때마다
적의 심장을 관통하는 축구가 되고 싶었어
한방에 날려버리는 미사일이 되고 싶었어
그때 그 게르니카의 비명을 베고 자는 너
스페인군(軍) 칼을 맞고 엠블럼으로 들어온 왕(王)은
레알만 만나면 검은 피를 흘리고
수백만을 가스실로 보낸 콧수염과 게르니카를 가지고 비행기 놀이를 하며
스페인을 소처럼 부리던 프랑코가
레알의 지하벙커에서 널 노리고 있어
티벳과 위구르 같은 팀들을 간식처럼 해치우는 그는
축구 안에서도 축구를 할 수 없는 운명이야
축구 밖에서도 축구를 할 수 없는 숙명이야
제국(帝國) 맨체스터유나이티드를 무너뜨리고 유럽을 정복하였을 때도
너는 축구보다 무기를 꿈꾸었지
너만 보면,
왜 작은 것들의 슬픔이 생각나는지 몰라
끝내 무기가 되지 못하고
깃발만 들고 헤매이다 거리의 만세(萬歲)가 되어버린
흰옷 입은 민족이 생각나는지 몰라
네 길을 알면서도
아직도 네 길을 갈 수 없는 너
너, 바르샤여!
※ 바르샤 : 스페인 축구클럽 FC 바로셀로나의 애칭. 2009년 유럽챔피언스대회 우승팀으로 스페인에 복속된 옛 카탈루냐 왕국민(王國民)들이 세운 축구 클럽이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을 일으켜 집권한 프랑코는 공화파에 서서 저항한 카탈루냐에 대하여 자치권과 고유 언어를 빼앗는 등 박해를 가하였는데, 클럽인 바르샤도 예외일 수 없었다. 레알마드리드와의 라이벌전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다.
※ 게르니카 : 스페인 북부에 잇는 도시. 내전 당시 프랑코가 공화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히틀러와 함께 비행기로 공습하여 도시의 3/4이 파고되고 민간인 1,540명이 희생되었다.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등 서구 지식인들이 공화파 편으로 참전하엿다. 피카소가 그때의 참상을 그린 '게르니카'가 유명하다.
※ 엠블럼 : 바르샤의 엠블럼 우측 상단의 노랑 바탕에 적색 세로줄은 카탈루냐 왕국의 마지막 왕이 스페인군 칼에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상징한다.
※ 레알 : 스페인 축구 클럽 레알마드리드의 애칭. 프랑코는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지방 클럽들의 기를 꺾고자 정치적으로 레알마드리드를 후원하엿다. 극우적 성향을 가진 팬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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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누군가 살면서 할 짓 못할 짓 다 해보았지만 그래도 가장 해볼 만한 게 사랑이더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쓰라리고 아파도 상처가 아물면 다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희망도 그렇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지 못하게 한 것도 희망의 위험성 때문이었고 이미 날아가 버린 희망을 회수하기란 불가능하므로 사람은 희망의 포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승철의 詩는 우선 시원시원하다. 거기에는 현실세계에 대한 순응보다는 어떠한 불우나 조난에도 그것을 겪어내고자 하는 힘이 잇다. 희망과 긍정의 힘이다. 그 힘은 우회나 멈칫거림도 없이 전면적이고 또 직선적이기까지 하다. 굴곡과 커브가 심한 체험적 삶이 환기시켜 주는 건강성, 이러한 것들이 <등대>나 <앞발에 대하여>가 보여주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요즘 신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조잔함, 지나치게 미세하거나 지나친 감정노출에 비해 다소 거칠고 급하기는 하나 그 대범이나 역동성이 詩를 살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사는 일도 그러하지만 詩도 말에 끌려 다녀서는 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어차피 말은 詩를 조립하기 위한 부품들이고 당연히 그것에 봉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대부분 일상어로 이루어진 성승철의 시편들은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말에 끌려 다니는 불편 없이 이해되는 것도 장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숨김과 드러냄 등의 시적 변용이나 세련된 수사적 기교 없이도 다 詩가 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詩의 소재에 제한이 잇는 것은 아니지만 낯설다는 점에서 스페인 축구 클럽의 역사를 다룬 <바르샤에게>는 이색적이었다. 그것이 개인의 취미 수준에 머무르는 호사 정도여서는 별 의미가 없겠으나 축구 도한 세계가 공유하는 거대한 가치라는 것과 문학의 영토 확장이란 면에서 흥미로웠다. 정진과 대성을 빈다.
추천위원 : 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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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소감>
얼굴 보여주지 않는 연인 그리듯
만해 선생님이 창간하신《유심》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어 영광이다. 그분의 위대한 정신과 문학을 배우며 가도록 인연의 다리를 놓아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지난 8월, 백담사의 만해 선생님 좌상 앞에서 부족한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에 대한 응답을 주신 것 같다.
그동안 구원의 여신처럼 틈나는 대로 詩를 읽고 또 詩를 생각하였다.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연인의 실체를 마음으로 더듬으며 언젠가는 온몸으로 맞을 것을 기대하면서 재능이 부족한 자신을 채찍질하였는데 좋은 결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詩가 아니며, 찬미하고 풍자하며, 그리고 악을 물리치고 선을 권하지 않는 것은 詩가 아니다."고 한 정약용 선생님의 말씀을 詩를 놓는 그날까지 품고 가겠다.
詩 쓰는 사람에게 등단이 영광이 아닌 무거운 책임이라는 것을 잘 안다. 길 안내를 해주신 선생님들, 시산 동인들과 글 식구들, 조언을 아끼지 않는 젊은 사부와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심사위원 선생님과《유심》에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 성승철
• 전남 여수 출생.
• 단국대학교 법학과, 순천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
• 순천문예대학 詩, 수필 과정(2년) 수료.
• 문학동인「시와산문」회장, 순천문인협회 이사.
첫댓글 고진인물이 없다고 했는데 .인민이가 !바로 나의 기를확꺽네...!시 내용이 가슴에 닿는군..픽션같애...!